솔로몬의 노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5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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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의 세 번째 작품이며 앞으로 상복이 터질 그녀에게 처음으로 큰 상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안겨준 장편소설. 토니 모리슨은 1993년에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라서 이이의 일생에 대해서 말을 보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내가 읽어본 모리슨 가운데 특히 <재즈>와 <러브> 같은 비교적 후기 작품의 경우에, 그저 흑인이나 젠더, 아니면 합해서 흑인 젠더 문제를 다룬 것이겠거니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혼쭐이 난 적이 있어서 <솔로몬의 노래>도 혹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약간 조심스럽기는 했다. 읽어보니 초기작이라 그런지 읽는 대로 진도가 잘 나갔다. 후속 작인 <빌러비드Beloved>와 비슷한 정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이야기는 1931년 2월 18일 수요일 오후 세 시에 시작한다. 주로 흑인들을 위한 보험회사인 노스캐롤라이나 상호생명보험사 직원 로버트 스미스 씨가 시의회가 있는 메인스 애비뉴의 북쪽 끝에 자리한 머시종합병원의 돔 지붕 꼭대기에 모습을 나타내 대중의 눈을 끈다. 사람들 속에는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 이이의 언니 커린디언스(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 할 때의 ‘고린도’의 영어식 발음)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려 이들이 하는 유일한 작업/노동인 붉은 벨벳으로 만든 인조 장미꽃잎이 사방에 날렸고, 파일러트Pilate(사도신경에 “본시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할 때 ‘빌라도’의 영어 발음) 라는 이름의 다부진 체격을 한 여인은 흑인 특유의 깊은 공명이 담긴 콘트랄토 목소리로 “오 슈거맨 날아가 버렸네 / 슈거맨 사라져버렸네 / 슈거맨 하늘을 가로질러 / 슈거맨 고향으로 돌아갔네.”라고 노래했으며, ‘기타’라는 꼬마가 스미스 씨를 가리키며 저 남자가 누구냐고 묻자 두 주에 한 번씩 보험금을 걷어가는 바보천치 중에서도 바보천치라고 답변을 했는데, 드디어 로버트 스미스 씨는 커다랗고 푸른 날개처럼 생긴 옷을 입은 채 돔 지붕에서 하늘을 향해 크게 날아올랐으나, 그건 스미스 씨의 몇 초 안 되는 상상 속에서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스미스 씨의 영혼은 모르겠고, 육신은 칼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의 시멘트 바닥으로 거꾸로 처박혀, 철퍼덕, 그러나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채 생명이 있는 인체라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자세로 엎어져 있었던 거였다.
  바로 이 순간,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 커린디언스의 엄마이며 십 수 년 만에 산기가 있던 루스 데드 여사, 이 거리 최초의 니그로 의사 포스터 박사의 딸이 갑자기 진통을 시작해 머시종합병원에 입원을 했고, 흑인 여자로는 최초로 병원의 계단이 아니라 병동에서의 출산이 허용되었으니, 다음날 이 기념비적인 출산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자 우리의 주인공인 메이컨 포스터 데드 3세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외할아버지 포스터 박사, 니그로 출신 최초의 의사를 기념하고자 처음엔 흑인들이, 나중에 대충 많은 시민들이 박사의 병원이 있는 거리를 ‘닥터 스트리트’로 불렀고, 이를 고깝게 여긴 시의회는 ‘메인스 애비뉴’라는 호칭을 의사봉 3회를 두드림으로써 확정하는데, 다시 이를 고깝게 여긴 유색인들이 ‘닥터 스트리트’라고 하지 말라고 했으니 ‘낫 닥터 스트리트’로 불렀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정작 박사를 알고 보면 같은 흑인이라도 피부색이 얼마나 덜 까만색인지를 환자의 등급을 정하는데 가장 유효한 척도로 삼았으며, 자신의 과도한 노동을 달래기 위해 프로로폴이 아닌 에테르에 거의 중독된, 일반적 기준으로 그냥 속물이었던 거다. 주인공의 외가 이야기는 이 정도면 넘친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의 엄마 루스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가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고, 기저귀를 벗고도 아이와 함께 작은 방에 들어가, 벌써 유치가 다 난 커다란 아이에게 이젠 더 이상 영양소도 없고 들척지근하고 밍밍하기만 한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저택의 하숙인 겸 일꾼이며 수위이기도 한 수다꾼 프레디 씨가 창문 너머로 보고는 온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는데,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니 뭐라 하지는 못했음은 물론이고 루스는 몇 달간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창피해 했으며, 우리의 주인공 아이에게는 뭔가 깨끗하지 못한 이름, 더럽고, 내밀하고, 뜨겁고, 어쩐지 혐오감이 드는 “밀크맨”이란 별명으로 책이 끝날 때까지 불리게 된다. 며칠 전에 애너 번스가 쓴 <밀크맨>을 읽어서인지 이 호칭이 나올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좀 헛갈리는 기분을 느낀 건 뭐 개인적인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밀크맨과 바로 위의 누나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의 나이차이가 열두 살. 어찌하여 이런 터울이 났느냐 하면, 아버지 메이컨 데드 2세가 장인인 포스터 박사가 죽은 다음부터, 그때 아내 루스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음에도 그 후로 한 번도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따로 특별하게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다. 물론 이 커플이 왜 섹스리스가 됐는지는 안 알려드린다.
  메이컨에게도 슬픈 과거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 메이컨 1세와 인디언 출신 어머니 싱이 버지니아 주의 깡촌 샬리마(어쩐지 발음이 ‘솔로몬’하고 비슷하지?)에서 해방노예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미주리 주에 정착해 힘든 노동을 한 끝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 싱은 메이컨이 어려서 아이를 낳다가 산고를 이기지 못해 아기를 배속에 넣은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태중의 아이가 자기 혼자 힘으로 산도를 헤치고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저 위에서 깊은 공명의 콘트랄토 음성으로 노래하던 파일러트다. 태어나면서부터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하느님은 파일러트에게 포유류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배꼽을 선물하지 않아 이것 때문에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리바’라는 사생아 딸과, 딸이 낳은 또 다른 사생아 딸 ‘헤이가’를 키우며, 약초, 밀주제조 및 판매를 생업으로 삼는다.
  이 남매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파일러트가 한 열두 살 정도 됐을까 할 때, 약 15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며 이 가운데 50에이커는 훌륭한 경작지, 80에이커는 사슴과 야생 칠면조가 많이 사는 아름드리가 숲, 기타 양돈장 등의 빼어난 농장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시의 가장 부유한 백인 가문의 대농장 한 가운데 탁 박혀 있고, 거기까지는 좀 봐주겠다 하더라도 흑인, 검둥이가 소유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땅이라 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백인들에 맞서 무려 닷새를 울타리에 앉아 망을 보며 밤을 새우던 아버지가 하필이면 아이들이 보고 있던 어느 날 새벽에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뒤통수를 맞아 울타리 5피트 위로 날아가더니, 영혼은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렸을지언정 육신은 그냥 땅바닥에 고꾸라져버렸다. 백인들이 이제 실소유권이 넘어간 남매를 죽일지도 몰라 그길로 숲을 향해 달려가 일단 몸을 숨기고, 아들 메이컨이 밤을 이용해 아버지의 시신을 시냇가로 끌고 가 묻어준 후, 여기저기를 전전한 끝에 서로 헤어진다. 이런 과거가 있어서 그랬는지 메이컨은 도시에서 여러 집을 소유하고 이를 가난한 흑인에게 세를 주어 악착같이 돈을 벌어 나름대로 성공한, 백인처럼 사는 흑인이 된다.
  이런 환경과 부모 하에서 성장한 밀크맨. 공부를 더 시켜 의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엄마의 뜻과 달리 아빠 메이컨은 대학을 가느니 어려서부터 자기 밑에서 돈 버는 일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임대주택의 임대료 수금부터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게 이르는데, 나면서부터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우리의 밀크맨은 아버지처럼 배타적 이익추구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폭넓은 인간관계, 특히 저 앞에서 소개한 ‘기타’라는 인물과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성장한다.
  밀크맨의 나이 열두 살 때 자기보다 다섯 살이 많아 고등학교에 다니는 기타를 만난다. 기타의 손에 이끌려 밀주를 만들어 동네에 싼 값으로 알코올을 공급하는 집에 들어선 밀크맨. 여기서 당연히 고모 파일러트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첫 방문에서 만난 고모의 손녀, 밀크맨보다 역시 다섯 살을 더 먹은 헤이가를 본 순간 자신이 여태까지 본 여자들 가운데 가장 예쁜 여자라고 단정을 하고, 여태까지의 삶 속에서 온전히 행복감을 느낀 적은 이 때가 처음인 것을 알게 된다. 근데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건가? 파일러트가 고모니까 고모의 딸 리바와는 사촌. 그러면 다섯 살 위의 헤이가는 오촌조카. 그러나 이건 우리나라, 소위 동방예의지국의 족보일 뿐, 미국에선 혼인도 가능한 사촌보다 더 먼 친척일 뿐. 그렇지? 맞다. 결국 둘의 교통사고는 피할 수 없다. 첫 만남이 이렇게 인상적인데 어찌 젊은 피를 참을 수 있을까. 근데 그건 하여튼 나중 일이다.
  내가 할 이야기는 다 했다. 여기에 흑백 갈등, 주로 백인에 의한 처벌받지 않는 흑인에 대한 범죄가 나오고, 흑인에 의한 상호 호혜의 원칙에 의하여 폭력을 행사했지만 법원에 의하여 처벌받지 않는 백인의 범죄에 동가同價를 이룰 ‘아무나 백인’을 향한 폭력 결사 ‘7일’, 밀크맨의 아버지와 고모가 도피생활을 할 때의 범죄와 당시 발견했던 황금을 둘러싸고 시작했다가 결국 밀크맨의 부계 족보에 대한 길고 긴 탐색과정과 작품의 시작에서 보험사 직원 로버트 스미스 씨가 시연했던 하늘로 솟구침, 혹은 고향으로 향하는 비상의 은유 또는 상징 같은 것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에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이 토니 모리슨의 필력을 보여주고, 여기에 상상 가능한 것을 독자 제각각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을 펼칠 기회까지 마련해주니 어찌 일독을 권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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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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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먼 옛날, 멀고도 먼 까마득한 시절엔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었단다. 하늘이 땅 위에 닿아 있으면 그것은 언제나 천국이라는 이야기. 사람들은 언재든지 하늘에서 산책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시절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 인간보다 먼저 거인들이 땅으로부터 삐질삐질 머리통을 내밀더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인들은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인들은 악하고 질투심이 많아서 땅을 통째로 자기들이 갖기를 원했던 거다. 오직 자기들만. 그래서 돌을 가져다가 높이 쌓았다. 돌로 온 하늘을 받쳐 땅으로부터 완전히 떨어뜨릴 때까지. 그래서 하늘은 더 이상 땅 위에 놓여 있지 않게 됐으며, 하늘은 슬퍼했음에도 어쩔 수 없었고, 그때 거인들이 쌓은 돌로 ‘쿠프론’ 산을 만들었단다. 그렇게 하늘은 다시는 아래로 내려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혹시 모른다. 누군가 마음이 깨끗하고 어린 눈으로 보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살짝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곤 했는지도. 헤르만 브로흐의 이야기는 저 먼 시절에 거인들이 쌓아올린 돌의 산, 쿠프론 절벽의 비탈에 자리한 두 마을을 배경으로 풀려나간다.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
  스물여덟 살의 소아과 전문의 바르바나. 뛰어난 실력과 환자는 물론이고 동료 의사와 간호사까지 한 눈에 사로잡는 장악력, 그리고 헌신적인 직업의식까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는 전문인. 마흔두 살의 외과의사가 날이 갈수록 바르바나에게 우정을 느끼다가 당연한 수순으로 애정으로 발전하고 넘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해 청혼을 했지만 부드럽게 거절당한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심한 뇌진탕이 생긴 아이를 혼신을 다해 치료했으나 바르바나가 우려한 증상을 그대로를 겪으며 결국 숨지자 그녀는 결국 외과의를 자신의 침상에 불러들이고 한 번의 일탈은 임신으로 이어진다. 임신사실을 알게 된 외과의는 바르바나에게 다시 한 번 청혼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두 가지 직업과 아이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하니, 두 번째 직업이란 공산당 행동대원.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두 번째 직업은 병원 내 세포조직을 만드는 일이란다. 두 번째 직업과 상관없이 바르바나는 외과의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며 외과의로 하여금 희망을 끈을 이어가게 했으나 바르바나는 어느 날 한 호텔방에서 바로 그 실험실에서 빼낸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해버리고 만다. 외과의는 점점 도시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껴 급기야 의사면허를 가진 어떤 사람도 찾지 않는 산골 오지의 의사를 지원해 쿠프론 절벽 윗동네로 부임해 십 수 년이 흐른 어느 여름, 작년 3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하고 제목을 <현혹>이라 한다.
  요란한 역사를 가진 모라비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요제프 브로흐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와서 행운과 노력과 사주팔자 덕에 섬유업계의 거상으로 성장한 다음, 친척누이이자 가죽업계 거상의 딸인 요한나 브로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는다. 둘 가운데 첫째가 이 책을 쓴 헤르만.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글쓰기가 탁월해 수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 공학과 경영학을 배웠단다. 그러나 자신이 부친의 소원대로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마흔이 넘어서면서 회사를 홀랑 팔아먹고 본격적인 집필활동에 들어서서, 소비성향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해, 나중엔 쪼들리는 생활을 겪었다고 한다. 헤르만은 몰랐지. 세상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빵이란 엄혹한 사실을.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때를 맞춰 브로흐 가족에게 들이닥친 건 나치의 폭력. 브로흐 자신도 1938년에 3주 가량 불법 수감되어 고초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1938년이면 그의 나이 52세. 마흔이 넘어 늦게 시작한 작가생활일지라도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몽유병자들>을 간행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라 토마스 만, 알베르 아인슈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이 도와줘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족 중 어머니 요한나 브로흐는 1942년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나치 입장에서도 브로흐가 더욱 눈꼴시었던 이유는 더러운 유대인 주제에 감히 ‘반파시즘적인 민족연합’을 결성해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어차피 이리 당하나 저리 당하나 시간이 문제였을 뿐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브로흐가 전체주의, 파시즘에 관해 작품 하나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 그리하여 1935년에 집필을 시작해 36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이후 개작을 하다가 1951년 3본 집필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뉴욕에서 운명한다. 향년 65세. 당시 나이로 그 정도면 짧게 살지는 않았지만 <현혹>은 그래서 결국 ‘미완’이며 ‘유작’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내가 본문이 겨우 557쪽에 불과한 <현혹>을 무려 나흘에 걸쳐, 입시공부 하듯 노트에 빽빽하게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 사건의 개요 같은 걸 요점정리 해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브로흐의 소설은, 비록 이것이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외피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상징과 의미의 중복, 철학적 논제 같은 것 때문에 잠시라도 맥을 놓으면 곧바로 혼돈의 골짜기로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유독 눈에 힘을 주고 읽어야 했다. 물론 다 읽고나면 <몽유병자들>에 비교해서 훨씬 수월한 난이도 덕에 비교적 편하게 읽힌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시라. 정작 읽기 전에 먼저 또 브로흐를 겪어야 한다는 걱정이 오죽했었는지.
  상부 쿠프론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부의 후예로 이들 사이에는 오래 전에 난쟁이들이 금을 채굴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난쟁이들을 노예로 만들어 황금을 약탈하려 하자 난쟁이 왕이 사람들에게 학살당하면서 난쟁이가 아니라면 이 갱을 확장하거나 갱의 높이를 더 높이지 못하리라고 저주하면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짜로 난쟁이갱坑이란 폐광이 존재하기도 하고 주민들도 이 갱을 더 깊이 파기만 하면 틀림없이 황금을 캘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중요한 등장인물인 산山마티아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훌륭한 인격체이며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예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기손, 이들과 매우 친분이 있는 토마스 주크 등은 진짜로 금을 캐내기 위해서는 먼저 산이 허락을 해야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하부 쿠프론에는 원래부터 이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던 농부들의 집단으로 어떤 의미에선 이방인인 상부 쿠프론 사람들을, 비록 두 집단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와 종교행사 등을 차별 없이 나누지만 은근히 멸시하는 경향이 있어 후에 산신부山新婦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름가르트의 아버지 로렌츠 밀란트 씨가 젊은 시절에 상부 쿠프론 출신의 아가씨 에르네스티네 기손 양을 아내로 맞이하자 부친이 극도로 불쾌하게 여겨 죽을 때까지 며느리를 외면했으며, 아들에게 재산을 유증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작은 고을에 3월의 어느 날, 석탄을 운반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피곤한 몰골에 형편없는 신발을 신은 ‘마리우스 라티’라는 젊은 남자가 도착하면서 이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소설의 막이 올라간다. 마리우스는 얻어 타고 오는 차 속에서 운전기사와 두 명의 조수에게 끊임없이 ‘정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들의 분노를 사면서 등장한다. 마리우스는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는데, 밀란트 씨는 마땅하지 않았음에도 우연인지 아니면 지역의 운명인지 그를 받아들였고,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맏딸 이름가르트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금광의 꿈과 자기가 주장하는 정결을 기치로 점점 하부 쿠프론의 농부와 지역공동체의 젊은이들에게 독자들만 실체를 알 수 있는 '헛된' 꿈을 심어주기 시작하고 고을이 생긴 이래 공통적인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장년층과 지도층까지 모두 이것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설정을 하게 된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키가 작지만 상당한 팔 근육의 사나이 벤첼. 벤첼은 급기야 상부, 하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군대편성 비슷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신이 거의 난쟁이 수준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전설로만 내려오는 난쟁이갱을 파내려가려 하다가 상부 쿠프론에 사는 소수의 현명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아, 한 명의 등장인물만 더 소개하자.
  라디오 대리점이자 농기구 대리점에다가 보험외판까지 하는 도시출신의 못생기고 가난하고 허약한 ‘베취’ 씨. 마리우스가 지역에 들어와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어 책 속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률에 맞춰 밀란트 씨의 작은 딸 체칠리에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라디오를 꺼버린 일이다. 음악과 춤은 도시용이어서 땅과 연결하는 정결의 의지와 반대되기 때문에. 이후 마리우스와 그의 하수인으로 볼 수 있는 키 작은 벤첼과 벤첼의 부하들은 수시로 베취 씨를 괴롭히다가 급기야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린치를 가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지역 주민에게 금, 즉 부와 정결과 약한 사람들의 추방을 약속하는 마리우스와 키 작은 벤첼. 초고를 쓰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의 오스트리아, 독일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독자는 안다. 마리우스는 지역 주민들에게 거대한 최면의식으로 기독교적 축제를 이용하여 피에 의한 정화를 주장했음에도 책이 끝날 때쯤에는 공동체위원으로 발탁된다. 현혹이란 무엇인가. 이런 거대한 공동최면 상태에 휩쓸리는 일. 주인공인 의사 화자 ‘나’조차 숱한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 집단 최면에 취하게 되는 힘. 그게 바로 전체주의의 실체이며, 실체의 핵심인 최면상태에 빠지게 하는 현혹이다. 현혹은 언제나,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음을 인류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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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 있는 책인데...
도서관이나 좀 묵혀서 중고로
만나는 것으로.

Falstaff 2020-01-23 09:59   좋아요 0 | URL
브로흐 책 중에서 그래도 제일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선택이야 어떻게 하시든 한 번은 읽어봄 직한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얄라알라 2020-01-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557쪽^^:;;;
겸손하신 Falstaff님.

동의도 하지 않고 라디오를 꺼버린.
이 부분은 실제 묘사를 더 자세히 읽고 싶어지네요.

Falstaff 2020-01-23 12:36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게, 페이지 수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거였는데요. ^^;;;

마리아스가 밀란트 씨의 피고용인이잖아요. 일꾼 주제에 주인댁 둘째 따님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걸 그냥 팍 꺼버리는 장면입니다. 이제 어린 애는 자야 할 시간이며, 그다음 이유로 라디오는 도시용이라 우짜구 저짜구 하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아무도 마리아스의 허튼 짓에 뭐라하지 않는 것이지요. 뭔가 주위를 지배하는 힘, 아우라가 있는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랍니다.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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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의 한 밤,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최고급 호텔 메트로폴리탄의 스위트룸에 기거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뉴욕의 일간지 “브루클린 프레스”의 문화부 칼 페이트 부장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실과 내용을 뉴욕 프레스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브루클린 프레스는 1971년에 사명을 뉴욕 프레스로 바꾸고 사옥도 6번가 619번지로 이전했다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다.
 영어로 이루어진 이 날의 인터뷰 내용이 그해 나보코프가 출간한 <창백한 불꽃>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머리말,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무려 280쪽에 달하는 주석, 그리고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보코프와 페이트 부장 간의 대화의 상당한 부분이 영어를 포함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의 운율을 다루고 있어, 그 부분은 해석해 낼 도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언어 또는 문자나 단어를 가지고 노는 희문작업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을 설명하는 도중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숱하게 유사한 언어유희를 펼쳐 영어에 그리 밝지 못한 나를 단어의 늪에 빠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를 짧게 정리해 옮기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하는 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그냥 어떤 의미인지만 파악하셔야 하지, 대 문호와 뉴욕 프레스의 문화부장 간에 나눈 고차원적 문학이야기를 내가 올바로 전한다고는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나보코프는 매체와의 인터뷰를 호환 마마보다 더 싫어했다고 하는데 정말 우연히 그리고 다행스럽게 이런 기사를 구해 읽게 됐다.
 나보코프는 19세기의 끝인 189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이자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후 아버지 블라디미르 디미트리비치는 당연히 백군에 참여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당하는 바람에 크림으로 이주했고 와중에 나보코프는 1919년부터 동생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를 하면서 아버지가 현지에서 러시아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나보코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극우 집단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조국인 소비에트에서 또 다른 암살자를 보내 자신의 심장에도 총알을 박아 넣을지 아닐지, 일종의 습관성 피해망상 비슷한, 결코 병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종류의 두려움에 휩싸인 채 63세가 된 지금(1962년)까지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비교적 안전한 유럽에 살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완전하게 (테러로부터)안전한 미국시절까지 저 의식 깊숙한 곳에서 “가끔 솟아나와 찔러대는 공포”에는 대책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자신이 올해(1962년)에 출간한 <창백한 불꽃>의 기본적 발화점은 러시아 귀족집안 출신이면서 소비에트에 적대행위를 한 부친을 둔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의 집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나보코프와 칼 페이트 문화부장 사이의 대담에 무수한 언어유희가 난무해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검색해 원어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터뷰 가운데에서 유독 희문戱文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이 쓴 4부로 구성된 시 <창백한 불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보코프 본인은 이런 구성을 호프만슈탈의 희곡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염두에 두었으며, 원래는 호프만슈탈처럼 “극중극劇中劇”의 형태를 구상했으나 아예 처음부터 독자를 희롱(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내 영어수준으로 고른 최선의 단어임을 이해해주시라.)하는 것으로, 책을 쓰는 도중에 스토리 라인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영문학자 킨보트라고 명명하고 존 셰이드가 쓴 표제 시 <창백한 불꽃>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손에 넣어 책을 출간할 권리를 얻은 다음, 무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기준으로) 280쪽에 달하는 주석을 달고, 주석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했는데, 자신도 그렇게 플롯을 바꾼 다음에 읽어보니 훨씬 더 흐뭇하더라고 고백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나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 숙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마는 젬블라 왕국의 망명 폐왕廢王 ‘카를 크사베리 프세슬라프’ 이야기를 어떻게 작중 미국의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와 그의 가정사家庭事에 엮어 넣을 것인가 이었다면서, 그 해결을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요약하는 인터뷰 내용을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면에 이미 읽어보신 분은 단박에 이 독특하고 해괴망측한 소설 <창백한 불꽃>의 탄생설화를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하여간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두 시간에 걸쳐 검색을 해 찾아보고 그걸 하루 종일 해석을 해 독후감을 대신하기는 내가 가나다라 익힌 이후에 처음이다. 그만큼 <창백한 불꽃>은 좋은 의미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작품이고, 놀라자빠질 구성으로 만들었으며, 마지막 두어 페이지의 반전으로 최후의 어퍼컷을 먹인다는 것쯤은 미리 아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근데 최후의 카운터 블로우는 출간 당시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벌써 근 60년이 흘러 독서력이 좀 있는 독자들은 책의 70% 정도가 되면 마지막 반전을 눈치 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당신이 진짜로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 가지로 놀라고, 힘겹고, 심지어 짜증나다가 점점 책 속에 푹 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걸?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 위 본문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브루클린 프레스란 언론사는 있어본 적도 없고,
  뉴욕 프레스는 1988년 창간해서 2011년 폐간한 주간지이며,
  뉴욕 6번가 619번지 바로 길 건너 620번지에는 뉴욕 타임즈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나보코프가 묵었다는 호텔은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살던 "메트로폴"리탄 호텔 스위트룸 이었으며,
  신문사 문화부장 칼 페이트 역시 미치너의 <소설>에서 나오는 평론가의 이름 '칼'과 볼라뇨의 <2666>에 출연한 뉴욕 할렘가 신문 <검은 새벽>의 문화부 기자의 성姓의 합성이며,

  호프만슈탈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희곡이 아니라 오페라 대본이며,
  당연히 기사 내용 전부 다, 싹, 구랍니다.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 정말 화딱지 날 정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져서 저도 한 순간 심술이 도져 마음 먹고 구라 한 번 풀어봤답니다.
  진지하게 읽으셨다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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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1-1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킨보트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1-15 11:4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이래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닷!!! ^^

CREBBP 2020-01-2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나서 비슷한 컨셉의 리뷰의 작성을 시도했었는데, falstaff님은 해내셨네요. 그냥 여기저기 작품분석 논문들만 찾아 가며 흥미롭게 읽다가 관둔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0-01-20 11:59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반갑습니다. 한 번 써보시지요. 궁금하네요.
 
달팽이가 사랑할 때 1
딩모 지음, 남혜선 옮김 / 현암사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1권 114쪽까지 읽었다. 등장인물이 화려하다. 두 명의 여성 신입경찰이 경찰학교를 각각 우등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시 경찰서에 부임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한 명은 미모와 늘씬한 체격에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보유한 매력 넘치는 여성이고, 다른 한 명이 이 책의 주인공인 ‘쉬쉬’인데 경찰학교 수석졸업자이며, 범죄심리학에 도가 튼 것으로 묘사되고, 딱 한 가지 운동능력이 젬병이라 이게 지금 뛰는 건지, 기는 건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달팽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가 이런 연체동물 성 별명을 지어주었느냐 하면 쉬쉬의 사수이자 스승이자 부팀장이자 최근 10년 간 중국의 모든 서남부 경찰서에서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살아있는 전설 지바이. 지바이는 집이 베이징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며, 재벌 2세임에도 불구하고 독립해 혼자 사는 데 만족하고 (홍콩이라는 설명이 책 뒤표지에 나오긴 하지만) 중국 서남부의 가상 도시 린 시市 경찰서에 강력계 같이 보이는 팀의 부팀장으로 근무한다. 잠깐, 아무리 천재 수사관이라도 그렇지, 여자 별명으로 ‘달팽이’가 뭐니. 지나가면서 자기가 남긴 자취를 미끈한 액체로 남기는 연체동물 말이야. 작가가 여자라서 그렇지 남자면 벌써 공개재판 받았다. 쉬쉬는 오빠하고 아빠, 이렇게 남자 둘하고만 살았는데 스물일곱 살 먹은 오빠 쉬쥔은 벌써 자수성가해서 넘쳐넘쳐 흐르는 돈의 유입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성공한, 회계법인의 설립자로 쉬쉬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책엔 20대 거부들이 왜 이리도 많이 나오는지! 건물 옥상에서 돌 던지면 기막히게 잘 생긴 남녀 20대 부자가 맞는다.) 물론 우리의 꼬맹이 느림보, 그러나 대단한 수재를 가지고 있는 쉬쉬는 결코 오빠의 배경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지만. 쉬쉬가 경찰학교 수석, 몸매 빵빵한 야오멍은 우등. 아쉽게도 야오멍이 아무리 노력하고 절차탁마하고 서른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수석. 이런 인간들 정말 있다. 나도 몇 명 봤다.
 또 등장하는 인물이 시내 공원에서 사촌 남동생 예쯔샤오와 담소하다 날이 하도 좋아 잔디밭에 누우려는 찰나, 누군가가 녹색 페인트칠을 한 커터 칼날에 손 동맥이 잘라져 곤경에 처했다가 때마침 달팽이처럼 조깅을 하던 쉬쉬의 눈에 띄어 생명을 구하는 예쯔시. 예쯔샤오는 재벌집 넷째 아들로(근데 당시 중국에서 한 부부가 네 명의 자녀를 낳을 수 있었다, 이거지?), 소위 재벌 2세다. 예쯔시는 또 어마어마한 거부로 등장한다. 거기다가 둘 다 신체 건강하고 그것도 모자라 피트니스에서 근육 키우는데 몰두하고, 재벌 2세만 가는 클럽의 단골에다 미국 유학파다. 커터 칼날을 몇 개 모아 별 모양으로 서로 이은 다음 녹색 페인트칠을 해 풀밭에다 묻어 놓으면 그 칼날에 베어 손목 저 속에 있는 동맥이 결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베는 칼은 대개 칼이 무겁고 휘어져 있다.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쓰는 청룡언월도가 대표적이다. 82근이 나가고 큼지막하게 휘어져 베는 길이가 매우 길다. 관우는 이 도를 이용하여 안량과 문추의 목을 뎅거덩, 잘라버린다. 근데 시멘트에 고정시킨 것도 아니고 그냥 잔디밭에 묻힌, 그것도 페인트 칠을 한 커터 칼에 손목 저 깊은 곳에 있는 동맥이 잘려? 손목과 손을 이어주는 힘줄도 함께 잘렸겠네?
 책을 쓴 ‘딩모丁墨’라는 사람이 누군가 검색해봤다. 이렇게 생겼더라.

 

(작가의 사진은 삭제합니다.)

 

 쉬쉬가 고참 자오한에게 약식 심리검사를 한 내용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14쪽엔 “최근에 왼쪽 어깨를 다치셨고요.” 근데 불과 네 페이지를 건너 18쪽에 이르면 또 이리 나온다. “자오한은 글씨를 오른손으로 쓰는데, 몇 번인가 물건을 들 때 잠깐씩 멈췄다가 왼손을 많이 쓰는 걸 보고 오른쪽 어깨 부상을 알았다.”
 이 책을, 헌책도 아니고 정가에서 10% 깎아주는 새 책을 왜 샀는가, 하면, ‘현암’에서 찍은 소설책이라는 것 하나 때문이었다. 난 열여덟 살때부터 현암사를 많이 좋아했다. 이 회사에서 나온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원래 소설책은 별로 찍지 않는 회사였다. 그래, 고르고 골라서 책을 선정해 번역을 해 출간을 했겠지, 라고 믿어 샀다가, 똥 밟았다. 이 책을 찍은 때가 2014년. 이미 4년 이상 팔아먹었으니까 이젠 솔직하게 이 책이 우라질 거, 개판이라고 말해도 되겠지. 아, 미치겠는 것은, ① 책이 두 권짜리인데 출판사 믿고 두 권을 몽땅 샀다는 거, ② 오늘은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출근해서 마음에 안 들더라도 계속 읽지 않으면 할 일이 멍하게 앉아 있으면서 ‘자리를 빛내주는 것’ 말고는 없다는 거.
 다만 한 마디만 하자.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은 초대박 히트 영화 <아바타>를 보고 졸았단다. 이 얘기 했다가 인터넷에서 수없이 두드려 맞았다. 무엇이 인기 대중작가 김수현을 졸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나도 <아바타>를 극장에 가서 봤다. 정말 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김수현이 대단한 건, 그렇게 시끄러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들으면서 졸 았다는 사실. 난 하품은 쩍, 쩍 하면서도 잠은 오지 않던데. 어쨌건 완전 서부영화. 서부영화는 서부영화인데 아메리카 인디언의 시각으로 본 서부영화. 굳이 비교할 작품으로는 <늑대와 함께 춤을> 정도. 즉, 아무리 유명하고 재미있는 영화라도 보는 사람 마음대로라는 뜻. 이 책 <달팽이가 사랑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 서평의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한 명, 다섯 개 두 명. 100점 만점으로 평균 93.3점이다. 그러니 위에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똥 밟았다.’라고 하는 건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라는 것.
 이 책 말고는 오늘 할 일이 없으니, 일단 계속 읽어나가겠다.


 

 1권 286쪽까지 읽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책의 두 주인공, 쉬쉬와 그녀의 부팀장 지바이의 나이는 각 24세와 28세. 근데 지바이가 최근 10년간 범인 검거율이 제일 높아? 경찰학교 졸업하면 나이는 24세, 5년차밖에 안 되는데? 이런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배회했다. 근데 268쪽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지바이는 형사팀에 들어온 뒤에 골초가 되었다. 20대 초반에 시체를 한 구 한 구 볼 때마다,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며 밤잠을 설칠 때마다 담배가 얼마나 보물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는지 모른다.”


 아하, 지바이는 경찰학교 졸업생이 아니라 고졸 출신으로 순경시험에 합격해, 또는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하필이면 경찰에 입문했는데, 그게 좀 찜찜해서 집이 있는 베이징이 아니라 서남부 지역의 작은 도시 린 시에 와 있는 거라고 추리할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능력이 있어서 자기 신입 때 사수 역할을 했던 우형사의 상관이 되고, 나이 많은 우형사도 스스럼없이 28세 상사에게 보스라고 부르는, 신공의 보유자였다. 그럼 10년이 맞다. 그게 가능하면 말이지. 또, 재벌급 부모가 가문의 망신을 무릅쓰고 경찰학교를 포함한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면 말이지. (고졸 학력 분들께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랴. 돈 많은 집에서 아이들이 공부 못하면 하다못해 외국으로 유학이라도 보내더라. 중국도 당연히 재벌가의 '고졸' 자제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으며 그런 영애, 영식들의 처리방법 역시 한국과 이하동문이다.)
 중간에 살인 현장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보실래?


 “기나긴 복도를 지나니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 말라붙은 핏자국이 끔찍한 꽃처럼 명치에서부터 활짝 피어났다. ...... 오른쪽 다리 옆에는 하얀 코트가 팽개쳐져 있었다. 가장자리가 선홍색 피로 물들어 화려하면서도 기괴해보였다.”  (1권 178쪽)


 와우. 책은 비록 범죄심리학, 소위 프로파일링 기법에 의해 진행되지만, 작가 딩모가 미국 과학 수사 드라마 좀 본 거 같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끔찍한 광경이다. 핏자국이 말라붙으면 그 색깔은? 예, 혈중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해 내는 짙은 갈색입니다. 그게 아무리 하얀 코트 가장자리에서 말라붙어도 하얀 코트는 결코 선홍색 피로 물들어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이것들만도 아니고 무수하게 자잘한 에러들이 속출한다. 불이 붙은 담배를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거하며, 매사에 빈틈없는 전설적 두뇌의 수사팀 부팀장이 내일 오겠다고 출장을 갔다가 2박 3일 만에 복귀하는 거 등등. 이 책 더 읽으면 이런 것들 분명 눈에 들어올 텐데, 그것들 여기다 다 쓰면 읽으시는 분들이 나더러, 인간성 안 좋다, 라고 할까봐 겁나 더는 못 읽겠다.
 이게 중국에서는 진짜 드라마로 만들어져 TV 광고비 깨나 벌었다고 하는데, 드라마는 모르겠지만, 책으로 읽기는 참 힘겹다. 그동안 그토록 믿어왔던 현암사는 이거 찍어서 돈 좀 벌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다 좋은 건 없는 법. 대신 충성심 강한 독자 한 명 잃어버린 건 확실하다. 오죽하면 아직 퇴근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읽기를 마치겠느냐고. 그리고, 걱정이다, 걱정. 이 책 두 권, 이거 어떡하나. 띠지만 벗긴 새 책인데. 버리긴 아깝고, 에잇,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이나 해야겠다. 올해도 기증하려고 모아놓은 책들이 꽤 있다. 마음이 좀 아프다. 내 책을 버려서? 아니, 절대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다른 사람 읽으라고 기증하는 심보가 괘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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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조르지 아마두 지음, 안정효 옮김 / 서커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3년 전의 깊은 가을. 나는 조르지 아마두가 쓴 소설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을 읽고 단박에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도나 플로르....>를 (비록 걸작의 계관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내 수준에 가장 근접한 나만의 명작으로 임명했으며, 만일 내 눈에 이 절묘한 재미를 제공한 작가의 다른 작품을 발견하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조건 없이 사서 읽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때 이미 아마두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라는 소설책이 출판사 ‘서커스’를 통해 나왔던 것을 알았으나, 서커스라는 회사는 2007년 1월에 첫 작품을 내고, 2010년 4월에 마지막 작품을 찍었다, 쉬운 얘기로 망했다. 그래 잊고 있다가 몇 달 전에, 맞아, 아마두가 있었지, 라는 생각이 번쩍 떠올라 검색을 해봤고, 시중 헌책방에서 (불과) 몇 권의 책을 내놓고 있어서 날름, 집어 들어 감개무량하게 드디어 첫 장을 넘길 때의 기분이라니.
 시리아 이민의 아들임에도 아랍인, 또는 터키인이라 불린 ‘나시브 사아드’라는 이름의 독신남자. 이이는 소도시 ‘일레우스’에서 ‘베수비우스 바’을 운영하고 있는 키 크고 뚱뚱한 남자. 어느 화창한 봄날, 좋은 요리사이자 살림꾼이었던 늙은 필로메나가 이젠 아들하고 함께 살기 위해 아구아 프레타로 떠나겠나고 종종 얘기했지만, 이걸 늙은이의 푸념으로만 여겨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보따리를 싸 여덟 시 기차를 타기 위해 떠난다고 최종 통보를 하자마자 나시브는 놀라 자빠졌다. 그러나 필로메나가 진짜 떠남으로 해서 세상에서 가장 천진하고 아름답고, 몸 이곳저곳(어딘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음)에서 정향 향기가 나고, 계피 색의 피부를 갖고 있는 무구한 사랑의 여신이자 요리사이자 하녀인 가브리엘라와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가 시작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같은 날 늙은 제수이노 멘돈사 대령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 혼자만 자기 이마빡에 뿔이 돋았는지 몰랐던 것을 드디어 알아채고는, 벌건 대낮에 열쇠로 조심스레 소리 나지 않게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오직 두 다리에 검정 스타킹만 신고 있던 약간 퉁퉁한 아내 도나 시나지냐 궤데스 멘돈사와, 우아하고 아름답게 생겼지만 대령의 침상 위에서 대령이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벌거벗은 의사 오스문도 피멘텔 앞에서, 처용가를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는커녕,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꺼내 각자에게 각각 두 발씩의 총알을 박아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하자면 총알이 검정 스타킹만 신고 나머지는 벌거벗은 여자와, 아무것도 입지 않고 그냥 벌거벗은 남자의 몸통에 박혀 있는 상태인지 관통해서 벽이나 침대를 때렸는지는 책에 안 나온다.)
 사통 중에 난데없이 날아든 총알을 받아 거의 동시에 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일레우스 사람들은 항구 초입에서 모래톱에 좌초한 별로 크지도 않은 코스테이라 회사의 여객선과, 모래톱 자체를 없애버려 일레우스에서 유럽으로 직접 코코아를 수출하는 길을 뚫자고 주장하고 있는 젊은 총각, 리우 출신 거물 정치인 집안의 셋째 아들이자 백만장자인 문디뉴 팔상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도시 이타부나 사이에 처음으로 개통한 버스 노선과 이 버스 회사의 공동 주인인 두 명의 러시아인이 내일 오후에 열기로 한 성대한 버스 노선 개통 축하식에 대해 침을 튀고 있다가, 네 발의 총성과 함께 모든 논의가 갑자기 뚝, 그쳐버린다. 그리고는 그들의 대화는 한 순간에 검정 스타킹만 신고 있는 약간 살찐 여인의 모습과, 자신들의 아내 또는 애인에게도 검정 스타킹만 입히면 어떤 광경이 연출될까, 혹시 그 소도구가 각자의 엑스터시를 더 향상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느라고 멈춰버렸고,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권총으로 간단히 쏴 죽여버린 대령의 명예스러운 행동이 당연하다고, 앞으로 재판을 받겠지만 배심원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때는 1925년. 장소는 바다를 면한 브라질의 시골 소도시.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땅과 농장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힘깨나 쓰는 것들이 무리를 지어 서슴없이 총질을 해대 토지를 무단히 탈취해 지역의 토호가 되면서 스스로를 ‘대령大領colonel’이라 칭하던 농장주이자 실력자이자 깡패두목들이 통치하던 지역. 이제 늙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그중에 왕초 격을 했던 이는 상원의원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스스로 생각하고, 비슷한 대령들 역시 그렇게 받들어 모시면서, 각자 대령의 자식들을 대처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지역에서 의사, 변호사, 공증인 기타 등등 ‘박사’로 불리게 하고, 시장, 국회의원 등의 높은 자리를 꿰고 있는 상태. 여전히 포르투갈 혹은 스페인 이베리아 방식의 도덕률에 충실해, 남자는 얼마든지 바람을 피워도 여자가 딴 놈팡이를 봤다하면 부정한 쌍이 흘린 피를 통해 자신의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는 지난 시절의 율법이 서슬 퍼런 곳.
 여기에 진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문디뉴 팔상. 이 젊은이가 촌 동네 일레우스에서 펼치는 새 세대로의 전환노력. 그건 앞 세대의 타파를 전제로 해야 하건만, 80대의 왕초 대령인 라미로 바스토스 상원의원을 꺾어야 가능한 것. 바스토스 대령에게는 일레우스 전 지역에 걸쳐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는 동료 대령들이 있으며, 20여 년 전 도덕률에 의하여 바스토스 대령의 뜻이 옳은지 아닌지 전혀 관계없이 의리 하나로 그를 굳게 지지하고 있고, 배신자에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이 기다리고 있는 땅이다.
 이곳에 머리도 못 감아 떡이 지고, 누더기가 찢어져 허벅지가 다 드러난 때(垢: 피부 위에 죽은 피부의 각질이 먼지를 비롯한 각종 오물과 함께 쌓여있는 상태) 투성이 촌년 하나가 내륙에서 도시를 향해 무조건 걸어온 몇 명의 인간들과 함께 예전 노예시장이 섰던 인력시장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것이다. 늙은 요리사 필로메나를 잃은 아랍인 하시드가 새 요리사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을 고르려 했지만 먹고 살 것이 없는 깡촌에서 무작정 도시로 온 것들이 요리는 무슨 요리, 그냥 돌아서려 할 때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한 마디. “정말 아름다운 남자야!”
 이 말에 귀가 솔깃한 하시드는 때가 덕지덕지하고 머리카락도 떡이 진 처녀를 고용하기로 결심해 데려오는데 아이고, 얼마나 쉰내가 나는지 목욕부터 시키고 외출해버린다. 밤이 깊어 귀가한 하시드. 입이 떡 벌어진다.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보퉁이에 들고 온 누더기지만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가브리엘라. 그녀에겐 계피 색 나는 반짝이는 피부와 정향 향기가 은은한 몸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 이것만 해도 미혼남자 하시드는 넋이 나가는데, 아이고, 천부적인 감각으로, 무엇을 기가 막히게 하느냐면, 침대 위의 일도 그렇거니와 그것보다, 진짜 지역요리, 이 책에선 ‘바이야 요리’라고 하는 전통요리를 죽여주게 잘 하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물론 지금 그냥 등장인물을 소개하기만 하고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인지는 전혀 귀띔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서 직접 읽어보시란 의미라는 건 다 아시리라 믿으면서.


 아쉽고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번역해 시중에 나온 조르지 아마두는 이제 다 읽었다는 것. <도나 플로라와 그녀의 두 남편>과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위키피디아를 보니 스물여덟 작품이 있는데 말이다.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 가운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번역해줄 착한 회사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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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06-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태프님 리뷰읽고 위시리스트에 올려둔 책이 중고로 나와서 얼른 샀습니다. 기대되네요~

Falstaff 2019-06-13 13:28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거 은근히 걱정되는 걸요. 혹시 실망하실까봐요.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기대가 크면 언제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더라고요. ^^

2022-08-26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6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6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