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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평점 :
방금 아니에르노를 다 읽었다.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독서일기장에 리뷰를 기록해본다. 알라딘 밑줄 긋기가 내 글씨를 얼마만큼 제대로 인식할란가???? 결론은 엄지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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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으로 어떤 기억을 지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것은 나를 수치심, 굴욕감, 죄책감 등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가 S캠프에서 H를 대상으로 느꼈던 온갖 부정적 상태들(여기서 그녀는 피해자다)과 영국에서 R을 대상으로 벌인 부정적 마음들(여기서는 가해자)을 잊고자 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일은 마치 일어나지 않은 양 모른 척 해야만 삶을 나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일을 굳이 끄집어내는 이유는 뭘까? 고해성사라면 일기장에 써도 충분하고 복수라면 고발을 하면 될 텐데 소설로 쓰는이유는 뭘까? 범인의 마음으로는 자학적인 이런 작업에 쉽사리 공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라면? 그녀라면 그로 인한 결과에 자신이 더 큰 타격을 받을 지라도 그냥 묻어둘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열여덟, 아홉, 스물 ··· 그 나이의 자신을 바로 보려고 부단히 애쓰며 레고 조각처럼 하나하나 분해하는과정을 해낸다. 그것이 그녀의 소설이 갖는 유일한 목적인 지도 모르겠다.
여자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여정에 티끌 하나
없을 수 있을까? 주제 넘은 도도함, 무지몽매한 교양,
착각의 늪에서 헤맨 기억, 어줍짢은 거짓말 등등. 아무리사소할 지라도 잊고 싶어지는 일들이 적지 않다. 비록 그경험들이 지금의 멀쩡한 나를 만든 자양분이 되었을 지라도.
소설의 말미에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것의 의미가 부재‘ 한다는 구절이 오래 맴돈다. 중요한 건 경험이 아니라 의미라는. 그러니까 꺾이지 않는 마음이 시합에 진 것보다 중요한 것처럼. 그 의미를 찾기 위해그녀는 그 시절의 여자 아이 곁에 머물며 글을 써내려간다.
나는? 나는 다시 그때의 여자 아이 곁으로 가고픈 마음이생기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으며 아주 가끔씩 아주 짧게 다녀올 뿐 그녀처럼 머무를 수는 없다. 과거와 타협하지 않는 소설가라니, 이번에도 아니에르노가 아니에르노 했구나 그저 감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