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이 주관하는 낭독회를 다녀온 참이다. 시집을 한 번 읽기는 했지만
잘 알지 못한 채 갔다가 깜짝 놀라서 왔다. 시인은 무척 따뜻했고 낭독을 참 잘했다. 맨 앞자리에서 시인이 읽어주는 시인의 시는 내 마음을 내내 흔들었다. 시인의 목소리를 타고 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게 참 좋았다. 시집을 사지 않은 터라 사인도 받지 못하고 집에 와서 쓰다듬으며 읽어보지도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주섬주섬 기억들을 주워 낭독된 시들을 추려나 본다.
동지(冬至)
그때.
(작은 냄비에 두 개의 라면을 끓여야 했던 일을 열락悅樂이나 가는귀라 불러도 좋았을 때, 동짓날 아침 미안한 마음에 “난 귀신도 아닌데 팥죽이 싫더라” 하거나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라는 말이나 해야 했을 때, 혹은 당신이 “배 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나봐” 하고 말해올 때, 배 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어서 출출하고 춥고 더럽다가 금세 더부룩해질 때, 밥상을 밀어두고 그대로 누워 당신에게 이것저것 물을 것도 많았을 때, 그러다 배가 아프고 손이 저리고 얼굴이 창백해질 때, 어린 당신이 서랍에서 바늘을 꺼낼 때, 등을 두드리고 팔을 쓰다듬고 귓불을 꼬집을 때, 맥을 잘못 짚어올 때, “맥박이 흐린데? 심하게 체한 것 같아” 바늘 끝으로 머리를 긁는 당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을 때, 열 개의 손가락을 다 땄을 때, 그 피가 아까워 아름다울 가佳 자나 비칠 영暎 자를 적어볼 때, 당신을 인천으로 내보내고 누웠던 자리에 그대로 누웠을 때, 손으로 손을 주무를 때, 눈을 꼭 감을 때, 눈을 꼭 감아서 나는 꿈도 보일 때, 새 봄이 온 꿈속 들판에도 당신의 긴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별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마음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꿇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트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먹다가도 꿈결인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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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낭독회는 눈과 귀가 동시에 즐거운 종합예술무대였는데 그것은 이번에 제39회 서울 독립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이름들>을 상영해준 것이다. 신이수 최아름 감독은 이 영화를 박준 시인을 떠올리며 그를 만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박준 시인은 이 영화 속의 시인인 현철의 모습이 자신을 많이 닮아 놀랐다고 하니 감독님들과 시인은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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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시의 만남, 독립 영화 감독과 젊은 시인의 만남 만으로도 충분히 풍성한데 신이수 감독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인기 가수 손지연 씨가 마지막 무대를 빛내 주었다. 노래를 들으며 '볼매(볼수록 매력있는)'임을 확신하게 되는 손지연 씨의 노래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세 곡을 부르고 들어가셨지만 박준 시인의 요청으로 3집 앨범에 수록된 '그리워져라'를 피아노 연주와 함께 들었는데 이걸 못 들었으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노래가 좋았다. 울컥 해서 자칫 눈물 봉인 풀릴 뻔했다. 잘 들었다고 인사를 하는데 "들을 것도 없는 데 뭘~"이라고 말해서 더 좋았다. 볼매 맞다.
참 많이 변했어 모든게 마지막이야 커다란 상실감으로 어디도 간곳없고 머문곳 없어라
커다란 구름앞에 서있네 그리워져라 그리워져라 그리워 하면서 떠나가라
그리워져라 그리워져라 그리워 하면서 떠나가라
참 많이 변했어 모든게 마지막처럼 아쉽게 사라져만가고 낙엽이 떨어져 날아 너에게 닿으면
또 다른 계절이 찾아오네 그리워져라 그리워져라 그리워 하면서 떠나가라
그리워져라 그리워져라 그리워 하면서 떠나가라
그리워져라 그리워져라 그리워 하면서 떠나가라
그리워져라 그리워져라 그리워 하면서 떠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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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이름을 지어다 몇 달은 먹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