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열네 살이 되었고 지난 해부터 조짐을 보였던 홀로서기가 본격화되면서 공유하는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관해서는 다소간 공유의 흔적이 남아 있어 책이라는 존재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지난 해에 함께 독서일기 쓰길 얼마나 잘했던가, 올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첫 국어 시간에 선생님의 칭찬을 들은 아들은 대뜸 논술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자고 권해도 강하게 거부만 하던 녀석이 왠일인가 싶었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고,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하니 급하게 그러나 신중하게 논술학원을 등록했다. 원래도 책이라면 꾸준히 즐겨 읽는 아이였는데 너무 판타지 소설 등 재미주의로만 읽는 게 내심 불만(?)이었던지라 학원에서 선정해주는 책들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지난 달엔 과학책을 읽더니 이달엔 심리학(?) 분야를 읽는 모양이다. 아들 녀석 덕분에 나도 류츠신의 [삼체]를 완독할 수 있었고 - 그 얼마나 버거운 여정이었던가- 지금도 아들이 읽는 책의 귀퉁이나마 만나보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도서관에서 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르는 건 무척 설레는 일이다. 물론 나만 설렌다. 홀로서기 중인 아들은 "굳이 엄마랑?"이런 마음일 테지...그래도 꿋꿋하게 시도한다.
[질문의 책], 에바 수소 (지은이),안나 회그룬드 (그림),홍재웅 (옮긴이)
우리학교2021-01-25원제 : Alla frågar sig varför
우선은 얇아서 합격! 그림이 마치 모리스센닥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합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주지 않는 아들은 불합격! 흥! 내가 먼저 읽자!
철학자들의 명언10가지가 답이라면, 그 답을 얻는 질문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런 고민을 나는 해 본 적이 없다. 사실 아이들의 고민에 철학자의 답까지 연결시킬 생각도 없었다. 마치 내 안에 답이 다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의 말을 들어줬겠지?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의 답이 아니라 그 답이 나오는 아이들의 마음 속 질문들이다. 나는 누구이며 내 감정은 무엇에 의해 변하는지,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떨 때 달라지며 그 태도의 의미는 무엇인지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 이 짧은 책을 통해 한 번 멈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 아이에게 꼭 읽히고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질문 상자]라는 책처럼. 다만 [질문의 책]이 좀더 열네 살에게 어울린달까? 그런 차이는 분명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책을 한 번 쓰윽 읽더니 "별로야."라고 말했다. 흙빛으로 변하는 내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너의 마음은 진지한 것을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어려서 이런 깊은 질문이 마음에까지 닿지 않은 걸까? 어쩌면 둘다 일수도 둘다 아닐 수도 있겠지. 그래도 꿋꿋이 너에게 책을 건네는 쓸모없는 부지런을 떨 테다. 그래서 한 권 더 권하려고 내가 먼저 읽어봤다.
[보여진다는 것] 김남시 (지은이),이지희 (그림)너머학교2020-09-11
이 시리즈의 책이 다 좋다. 역시 얇고! 내용은 깊다!
홀로서기와 동시에 가족의 눈이 아닌 친구의 눈이 더 중요하게 된 열네 살 아들. <보여진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 나이 때의 누구나 그런 일이라 심각하게는 여기지 않는다. 나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 않았다. 책의 초반이 참 좋았다. <사물-나>의 세게에서 나는 보는 사람일 뿐이었지만 <사물-나-타인>의 세계가 되면서 나는 보는 사람임과 동시에 보여지는 사람이 되어,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까를 고민하고 타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정하게 된다는 글을 읽으며 아들에게 권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아이들에게는 가볍고 친숙한 예시들(셀카와 같은)이었으나 더 깊은 내용을 원했던 나는 작가가 뒷부분 쓸 때 바빠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나 싶은 생각마저 했다. 결국 아들에게 읽히지는 못했다. [질문의 책] 반응을 받은 직후라 일단 내가 기억해두는 것으로 참았다. 뭐랄까 비상식량이랄까?
책으로나마 맺어진 연결줄은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는 요즘, 아들이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새롭게 생겨난 연결줄이 하나 있는데 바로 <탐정 포와로>이다. 히가시노게이고에 이어 애거서크리스티의 소설을 하나씩 읽는 게 내 독서 패턴 중 하나인데 애거서크리스틴 중에서도 탐정 포와로를 좋아해서 마플 여사보다는 포와로가 등장하는 소설을 주로 읽는 편이다. 읽고 재밌으면 드라마도 찾아본다. 그러던 참에 아들이 함께 보게 된 게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이었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다작을 하는 작가들은 내용의 유사성을 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많은 작품들 중에 몇몇은 '이야~~기가 막히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이 그랬다. 포와로와 헤이스팅스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라는 것, 애거서 크리스티의 데뷔작이라는 작품 배경도 의미있지만 그냥 자체로 재미가 있었다.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그 질문을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가져간다는 점은 추리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인물이 초반에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게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힘든 점이지만 어느 인물하나 불필요한 게 없어 정신을 꼭 붙들어매야 한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에서는 한 사람이 빠졌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아들이 탐정 포와로에 반했다. <명탐정 코난>도 엄마 덕에 입덕했는데 자기 말로는 "코난 이후에 나를 사로잡은 건 포와로 뿐이다."라고 하니 엄청 맘에 들었나보다. 이어서 우리는 '1일 1포와로' 하는 중이다. 시즌13까지 나온 드라마이다 보니 많은 소설이 드라마로 각색되었는데 이때 아들이 드라마를 고르는 기준이 바로 <엄마의 추천>이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들의 기대인가! 실망시킬 수 없어 그제는 <나일강의 죽음> 어제는 <힐로윈 파티>를 함께 보았다. 일단 내가 읽었던 소설 중에 재밌는 작품을 골라야하니 오래 전 읽은 소설까지 다 소환해야 할 지경이다만 열네 살의 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주니 어렵게 잡은 주도권을 꼭 오래 지켜내고 싶다. 뒷방 늙은이 같은 신세여 잠시만 안녕! 아들이 시간이 난다면 소설도 같이 읽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그냥 너에게 '열네 살 적의 추억'을 쌓아주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말을 하고 보니 아들은 어느 나이 때에 얻은 추억들이 있어 지금도 간혹 그 이야기들을 꺼내곤 한다. 그때의 표정은 얼마나 순순한지... '일곱 살 적의 추억'은 엄마랑 2박 3일 강화도 여행을 간 것이고, '여덟 살 적의 추억'은 만삭의 엄마와 다닌 시내 구경 및 산후 조리원에서의 이별 악몽이고, '열한 살의 추억'은 엄마의 생일 선물로 대학로에서 모자를 골라 선물하고 와플대학을 처음 영접한 일이고, '열세 살 적 추억'은 낯선 동네를 오로지 걸어서 알아가던 과정이다. 그 추억들에 다른 사람은 없다. 오직 엄마와 저 뿐이다. 그런데 열네 살엔 그 엄마가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억울해서라도 내가 애거서크리스티를 더 읽어야겠다.
열네 살의 아들아, 너의 홀로서기를 응원하면서도 때때로 한없이 허전한 이 마음을 이해하니? 너 역시도 엄마로부터 분리되고 싶으면서도 엄마가 서운함을 표현하지 않으면 또 서운해 하더라? 그렇게 우리는 이 시간을 잘 보내는 중이라고 믿고 있어. 오늘은, <ABC 살인사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