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먹나 The Collection 4
알렉산드라 미지엘린스카 외 글.그림, 이지원 옮김 / 보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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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의 The collection 작품들은 볼 때마다 느끼지만 그림책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 <누가 누구를 먹나>를 보고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낯선 이름의 작가와 뜻모를 알파벳들을 호기심을 갖고 책장을 펼치니 우리에겐 생소한 폴란드의 그림책이었다. 제목 역시 폴란드어일 터였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설레임은 나에게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아들은 '폴란드'와 '바르샤바'라는 말만 듣고 이 책을 보는 자세를 달리 하였으니 말이다.

 

제목과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먹이사슬이다. 꽃을 진딧물이 먹고, 무당벌레가 진딧물을 먹고, 할미새가 무당벌레를 먹고, 여우가 할미새를 먹는 등의 과정들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런 반복되는 먹이 사슬의 과정 중에서 적어도 내 눈에 가장 빛나 는 장면은 죽음에 대한 장면이었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아이는 아이답고 깔깔대며 웃었고, 나는 어른답게 죽음의 필연성에 대하여 생각에 잠겼다. 그 차이가 묘하게 좋았다.

 

생명의 죽음은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풀과 꽃과 미생물과 생물을 탄생하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그 당연한 순환의 과정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색깔하나 없이 검은 펜으로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도 좋았고, 그 단순한 그림들에게 어우러진 빨갛지만 명료하게 사실만을 드러낸 글도 좋았다. 그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생각의 공간도 정말 좋았다.

 

아이들에게 회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기엔 명화보다도 그림책, 특히 이 책과 같이 그림의 아름다움이 뛰어나고 생각의 공간이 넓은 그림책이 가장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 하게 되었다. 아이답게 깔깔 거리던 내 아이의 웃음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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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바닷가의 하루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수상작
김수연 지음 / 보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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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 중에 유리 슐레빌츠와 테지마 케이자부로오가 떠올랐다. 유리 슐레빌츠의 느낌이 더 먼저 들었고 테지마 케이자부로오가 후에 떠올랐다. 굳이 노래를 떠올리면  '섬집 아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기도 엄마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유리슐레비츠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그림에 글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림을 아주 유심히 바라볼 수 밖에 없는데 이 책 역시 글은 첫 장면과 끝 장면에만 나올 뿐 그림으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을 유심히 볼 수 밖에 없다. 할머니와 강아지라는 다소 정적인 인물들의 느낌이 어느 바닷가의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면, 갈매기떼라던가 큰 물고기는 역동성과 변화를 느끼게 해 준다. 그로 인해 꿈의 세계로까지 연결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주된 분위기는 평온함인데 그 평온함이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느끼기엔 참 좋았다.

 

테지마케이자부로오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그의 판화 그림 때문이다. 얼마나 역동적인지 판화의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작품도 판화 그림으로 되어 있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다만, 이 작품의 경우 평온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배경은 통일되고 여백의 미가 있되 인물에게만 역동성을 준 점 때문이다. 테지마케이자부로오의 판화 그림들이 웅장함과 비장함이 느껴진다면 김수연의 판화 그림들은 평온함과 아기자기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판화 그림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되어 좋았다.

 

노래 '섬집 아기'가 떠오른 것은 이 그림책에 나오는 인물이라고는 할머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눈이 먼 어부 할머니. 그러하기에 할머니와 강아지의 풍경이 평온하기는 하되,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그런 느낌이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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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와의 약속
아이잭 신 지음 / 멘토프레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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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아닌 책을 찾고 싶었다. 인문학자의 깊은 철학적 사유가 담긴, 미학자의 깊은 연구가 담긴 책이 아닌 가볍게 그리고 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고 싶었다. 도서관에 비슷한 류의 책들을 뒤적여보던 중 이 책을 읽게 되었고, 마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보물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채 다 읽기도 전에 발견한 시인 김경주의 발문도 내겐 눈이 동그라지는 보물이었다.  

 

이 책은 르누아르의 이야기와 아이잭 신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된다. 두 이야기가 모두 서사가 탄탄하여 읽기에 좋다. 특히 르누아르의 이야기는 시간적 흐름에 따르고,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시간을 오가며 진행하여 긴장감을 주는 점이 좋았다.

 

사실 인상파라고 하면 모네와 마네를 중심으로 떠올리게 된다. 특히 올랭피아의 마네로 인해 어떤 획을 그었다는 인식이 내 머릿 속에 있어서인지 작가가 왜 하필 르누아르에 촛점을 맞추었는지 사실 낯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보니 르누아르가 당시로서 특출나거나혁명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당시 인상파의 시작과 전성기 등을 증언하는 역할로는 제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근 80이 되도록 장수한 점과 인상파의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들이 그가 인상파 시기를 잘 표현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 역할에 가장 충실한화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물론, 김경주 시인의 발문을 보니 삶의 선명함에 비해 그림이 비밀스럽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앞서 거론한 화가들에 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르누아르의 삶과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삶, 그리고 일반적인 화가의 삶에 대해 폭넓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책의 선택은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유효하다. 고흐가 아닌 다양한 화가들의 삶과 화풍이 이 책처럼 많이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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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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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화가, 김동유

 

책은 화가 김동유의 삶,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읽다보면 그의 철학은 일관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일관성의 기본은 그가 시간을 결코 낭비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때때로 아니 종종 시간을 낭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 수가 심하게 적은 그는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써 내려간 글귀들의 많은 부분에 공감했는데 또 그 느낌이 묘한 것이 크게 감정이 섞이지 않게 저자와 독자고 교감한다. 그가 자신의 그림에서 어떤 사연을 읽지 말 것을 당부했듯이 그는 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히 신파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을 싫어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런 무덤덤한 표현이 어쩌면 더 진실된 교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때론 독자가 아닌 가족이나 지인을 겨냥독자로 쓴 듯한 부분들이 보여 귀여웠다. 어쨌든 그가 전문 작가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화가 김동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그림은 눈에 익다. 전시회에서 봤을까, 인터넷에서 보았을까, 알 길이 없지만 분명 눈에 익다. 어쨌든 책을 읽다보니  그의 이름 앞에 붙는다는 최고, 고가, 유일과 같은 수식어가 그냥 붙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겠다. 누구에겐들 가슴 아래 아픈 사연, 슬픈 사연이 없겠는가마는 그 과정 속에서 한 번쯤은 무너지기도 할 텐데 그에게 무너짐이 없었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지? 그게 가능한가? 독하다!라는 짧은 감상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가 지금의 화가 김동유를 만든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촌스럽고 아웃사이더적인 취향에 대하여서도 확고했고, 자신이 하는 일과 창작 방법에 대해서도 확신했고, 가난과 재능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도 확고했다. 그런 확고함의 결과물이 그의 이중그림들을 비롯한 인정받는 다수의 그림이다.

 

이중그림, 그것은 사라지고 희미해진 이들의 과거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159쪽)

 

부제에 쓰인 것처럼 그는 지독했다. 그 지독함을 따라 할 수 없기에 나는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지독함을 가진 예술가들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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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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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나의 첫 인연은 수능을 마치고 난 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었던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책이었는데 그때 나의 나이가 이야기 속의 괴테보다는 그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소녀와 더 가까웠던 지라 괴테의 사랑을 다소 못마땅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래서 괴테의 책을 일부러 멀리 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7년 후, <파우스트>를 읽었다. 읽으며 감탄했다. 괴테가 괜히 괴테가 아니구나! 그래도 읽는 과정에서 쉽지 않았던 탓인지 오랜 시간 또 괴테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이런 두 번의 만남은 내가 괴테를 나이 지긋한 대작가로만 떠올리게 했다는 한계를 만들었다.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읽어 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놀라움이었다. 듣기로만 치면 수 백 번도 더 들었을 이 제목이 그런 선입견 때문에 괴테의 당시가 아니라 괴테의 회고일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린 것이다. 이 작품을 쓸 당시 괴테는 20대 초반이었다. 하! 괴테에게도 20대 초반의 나이가 있었구나!

    베르테르의 죽음을 감지하는 1771년 11월 30일과 12월 4일의 편지를 읽자면,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아픈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 여인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베르테르의 마음을 나 역시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죽음을 결정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할 지라도 어떻게든 막아보고픈 마음도 생기고 말이다.

     죽기로 결심한 그날, 죽음을 감행한 그날은 12월 20일에서 21로 넘어가는 밤 12시이다.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이 바로 내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사내가 세상을 등진 그날 때어난 난 어쩌면 베르테르의 마음을 가진 채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서 유독 이런 깊은 슬픈 감정에 마음이 더 짠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몰입해 본다면, 그는 12월 20일 밤 즈음부터 오직 로테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주어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 때,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직 그녀를 만날 생각만으로 충만하던 때, 그녀가 없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심정, 그녀를 포기하고 동시에 삶을 포기해야하는 현재의 마음까지. 12시이기에  결코 번복할 수 없는 베르테르의 결심이 이해가 되지만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피끓는 그 마음을 당사자 아닌 그 누가 이해하겠는가.

   이 책을 읽고 나니 70대 노인이 되어서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았던 괴테가 달리 보인다. 20대의 베르테르인 채로 괴테는 평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을 얻지 못해 비극을 선택하지만 그 조차도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사회적 여파야 어쨌든 간에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증명한 것 아니겠는가. 차라리 미쳐버린 자를 부러워하는 베르테르를 볼 때면, 그의 선택이 무모하고 이기적이고 어리석을지언정 그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해하는 마음도 든다.

    사실, 문학동네 번역을 읽고 나서 우연히 다른 출판사의 책을 들춰볼 기회가 있었다. 인상적인 구절을 찾아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때의 그 공감이 안 생겼기 때문이다. 낭만적이고 저돌적인 베르테르의 마음을 느끼기에 문학동네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좋지 않은가 권해 본다.  그리고 일부 출판사에서는 제목을 '고뇌'라고 했던데 원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후감으로는 '슬픔'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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