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소설 전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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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이상은 <오감도>보다는 <날개>가 익숙하다. '이상 문학상'에 대하여서도 소설가에게 주는 것만 익숙하여 시인 이상보다는 소설가 이상이 더 친근하다. 무식한가? 그렇다. 나는 그런 무지의 극치 상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선입견만 머리와 마음에 가득 집어 넣은 채  그나마 가장 익숙하게 다가오는 <날개>를 펼쳐 들었다.

  <날개>를 읽으면서 가장 자주 느낀 점은 '어라? 이상은 재밌는데?'였다. 끊임없이 궁시렁거리는 듯도 하고 자기 비하도 끊어지지 않아 어둡기도 하였지만 그의 독특한 문체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머라는 요소가 있었다. 그 유머는 대체로 자기 학대적이고 냉소적이었지만 바로 그 점이 이상의 소설을 특별하고 흥미롭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요소였다.

  <날개>를 읽은 후에 또 낯익은 제목이라는 이유로 <김유정>을 읽고 나니 이상의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책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와 제대로 읽어보리라는 마음으로 <지도의 암실>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작품인 <십이월 십이 일>을 제외하고는 발표 시기에 따라 차례대로 구성된 터라 애초에 겁을 먹지 않은 사람이라면 <십이월 십이 일>을 먼저 읽은 후, 차례대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이월 십이 일>을 읽으며, 이상이 이 때만 하더라도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한 의지만 확고할 때에는 죽음이 불발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죽음이 이루어진다. 아마 그에겐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작품을 여러 편 내리 읽다보면 마치 내가 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왠지 내 주변에 이상이나 보산이나 S같은 이가 매일 있을 것만 같다. 아마 그가 그의 작품 속에 그 자신을 많이 이입시킨 탓으로 추측되는데, 그에게 소설이란 제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 쓰는 글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다중이처럼 소설 속에서 이 사람도 되었다가 저 사람도 되었다가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이가 되는 것이 자신이라며 스스로를 해치고 비웃는 것이 여러 작품들을 통해 반복된다. 그런 그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듯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T씨처럼 대면대면하게 지낼 수도 없고, 아내처럼 그를 농락할 수도, 윤 처럼 그를 비웃어줄 수도 없다. 아, 난 그가 그저 안됐다. 그를 보듬을 수 없는 것이 아프다.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의 너무나 예민했던 나이에 너무나 섬세했던 사람으로서 살아야했음이 절절하게 힘겹게 느껴졌다.

  <단발>에는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1인 2역을 시킨 것에 틀림없었다.' 문장이 나오는데, 그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고독에서 나온다. 그는 관계를 굳게 맺지 못하는 고독한 영혼이었다. <지도의 암실>에서 '그의 의미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은 것처럼 그는 고독의 상태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그 어느 곳에서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끊임없이 여인을 가지려하고, 그러면서도 확신하지 못하여 잡지 못한다. 또한 끊임없이 자살을 꿈꾸지만 결국 그는 그것마저도 실행하지 못하고 아마 누가 자신을 대신 죽여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인의 다감함과 생의 종결 중 아마 그가 더 원한 것은 여인의 다감함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생을 마치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던 모양이다. <종생기>를 유서로 삶을 마치니 그 딴에는 큰 결심을 한 모양이다.

   사랑이 필요했던 한 섬세한 사내에게는 사랑이 머물 곳이 없었다. 냉소적이긴 하나 그의 유머가 꽤나 매력적인 것을 보면 이상이라는 사람의 매력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모난 성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의미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지금의 그의 의미는 그의 삶과 작품으로 그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크게 나오지만 그를 살리는 데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그의 삶이 그렇게 종결된 데에 마냥 안타깝지만은 않은 것은 나 뿐일까? 그가 생을 달리 어떻게 살아냈을지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하지만 마음이 나약하고 예민한 때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앞서 말했 듯이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완전히 현대어로 번역된 것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지금의 이해는 그의 작품을 이해한다기 보다는 그를 이해하는 것에 더 가까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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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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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집의 경우에는 목차에 가득한 수많은 책의 제목을 읽고 나면 왠지 그 책 조차도 다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러한 목차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반면 그 책을 읽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작년 한 해 그러한 책들을 적지 않게 읽은 터라 이 책이 그런 목차를 갖고 있었더라면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 책 읽기를 마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목차가 매우 단순했고, 그것은 독자인 내가 이 책을 서평집으로 보기 이전에 책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각 장의 제목들도 명쾌하고, 감각적으로 배치된 모양새가 참 예쁘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중 가장 큰 것은 상쾌하다는 점이었다. 서평집을 읽다보면 어떤 작가들은 자신들이 책을 많이 읽고 썼다는 자만에 빠져 젠 체하는 경향이 있곤 하는데 이다혜 작가의 책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100권이 넘는 서평들을 읽으면서도 뒤끝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게다가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의 팁까지 주니 얼마나 고맙던지. 뭔가 욕심 내지 않고 진심으로 쓴 작가의 추천들은 신뢰감이 생겨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많이 늘어났다.

  가령,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 내심 '이건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따라한 거 아닌가?'하는 무식한 생각을 했는데 이내 그 전후 관계를 알려주었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도 정말 재미있게 읽은 터라 그 책에 영향으르 준 <잠자는 미녀>라는 책이 많이 궁금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다른 소설들 (이 책에서 언급된 <손바닥 소설>도 물론 포함하여)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코맥 매카시이 '국경 삼부작'을 다 읽지 못하겠다면 두 번째인 <국경을 넘어>만 읽으라는 팁이나, <뉴요커>의 '소설' 팟캐스트(아마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과 유사한 팟캐스트가 아닐까?)라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고급 정보도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정보를 주면서도 절대 젠 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좋다.

  수많은 책들의 서평이 실린 책이지만 각각의 서평은 사적이면서 매우 짧고 어렵지 않다. 사적이고 어렵지 않다고 해서 혼잣말이라던가 가볍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현대의 독자는 그런 의미에서 불운하다. 작품을 작품으로 만나기 전에, 차고 넘치는 말의 홍수 속에서 그 작품에 대한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포함해 각종 리뷰나 평론들을 요행히 피한다 해도, 책 표지의 홍보문구에, 길거리 광고판에 노출되는 일마저 피할 도리는 없다. (28-29쪽)

 

어떤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무조건 따라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 이렇게 주장이 강한 책을 읽을 때 일수록 읽는 사람의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291-292쪽)

라던가

부모는 수만 가지 방식으로 아이들의 정신적 상처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부모가 보이는 숱한 변덕(일관성 없는 양육환경), 아이에게 신체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해도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가정폭력(때로 살인으로 이어지는), 양육상의 편의나 병적 무관심에 기인한 극한의 환경(벽장이나 개 우리에 갇혀 자라는 경우)이 그런 예다. (108-109쪽)

하는 부분들은 작가가 작가이기 이전에 이 그 자신이 독자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임을 말하여준다. 작가이되 독자인 독특한 위치를 가지는 서평인으로서 가지는 특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특히나 그녀의 문체가 독자에게 무엇을 알려주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아 뒤끝이 상쾌한 것 같다.

  작가와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독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유독 일본 작가의 책들이 많은데 나는 일본 작가의 이름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아주 유명한 작가의 책 밖에 읽은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독서 후 리뷰를 쓰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관심을 가지며 책을 읽었다. 몇 몇 권들은 장의 제목에 좀 안어울리는 것 같아 빼거나 위치를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의문 사항이었고,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책 한 권 나도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내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가 책을 읽으면 리뷰를 쓰는 것이다. 세어보자면 꽤 많은 리뷰들을 썼겠지만 그것의 독자를 '나'로 한정하여 썼기에 그것들을 꾸역꾸역 묶어 집에 보관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존에 '나'로 독자를 한정한 것에서 벗어나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정하여두고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리뷰들이 태반이지만 2013년,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아직 정하지 못했던 때에 이 책을 만나 한 해의 독서 계획을 세워볼 수 있었다. 아, 책 읽기 좋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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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임1 <<책 읽기 좋은 날>>을 통해 읽고 싶어진 책의 목록>

<잠자는 미녀> <좀비들>

<스타일 나라의 앨리스> <명탐정의 규칙> <손바닥 소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 송광사 새벽 예불을 엄마에게 선물해 주고 싶다.

       <아Q정전> <새엄마 찬양> <어젯밤> <달리기>

<전망 좋은 방> <이십 억 광년의 고독>

<옆 무덤의 남자>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붙임2 내가 2012년에 읽은 책을 이 책의 소제목에 따라 한 권씩만 추천한다면?>

 

당신 살아 있나요? - 삶은 가능성. <나는 가능성이다>

긍정이 뒤통수 칠 때 - 나도 이 책을 추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피로사회>

매끄러운 사회 생활을 위하여 - 호어스트의 유머를 배우자! <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안단테>

슬픈 날에는 슬픈 음악을 - 가끔은 깊은 슬픔에 빠지는 것도 좋다. <고통>

누군가 내 삶에 끼어들었으면 - 난 우물 안 개구리일 뿐. <꿈꾸는 자 잡혀간다.>

오늘 밤도 분홍분홍해 - 이런 책을 별로 안읽어서 =^^= <막다른 골목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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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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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결국, 인간이어야만 한다.

 

 

  2012년 최고의 도서로 <피로 사회>를 꼽은 바 있다. 그 책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를 '피로 사회'로 규정하며 여러 이론들을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단단하게 독자에게 입력시켰다. 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사회를 '유동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사실 우둔한 독자인 나는 두 사람이 말하는 근대와 현대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하지는 못했지만 추측건대 지그문트바우만이 지칭하는 근대의 범위가 한병철이 말하는 현대 사회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되었다.

  한병철의 이론을 접했을 때처럼 '유동하는(액체)근대 사회'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규정을 들었을 때 역시 그의 이론에 공감했다. 급변하는 사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사회, 아주 작은 변수에도 모양이 달라지는 사회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이다. 이전의 사회를 견고한 (고체) 사회로 규정하여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책은 총 44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인 사례와 인용,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 사회'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가 1925년 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부의 배분, 교육, 탈인간화 등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트위터와 인스턴트 섹스, Z세대까지 폭넓고도 시대에 맞게 '유동하는 근대 사회'의 특징을 짚어준 점이 신뢰감이 생겼다. 우리 나라로 치면 이어령 선생님 생각이 좀 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비판적으로 다룬 편지 내용들 중에서 세대 차이와 트위터, 프라이버시, 유행, 문화 엘리트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을 많이 했다. 이 이야기들을 공감하는 데에 있어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인간성 상실'이었다. 35 번째 편지 중에서 원주민의 말처럼 "그게 바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인데 자꾸만 성과를 내게 하고, 스스로를 상품화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부인할 수 없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었다. 저자는 모두가 소비자이자 상품인 근대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한 비판의 끝에 왠지 모르게 희망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조금의 희망이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가능한 희망만을 말할 뿐 헛된 과장된 희망을 품게 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을 옮겨 적고 생각도 짧게 짧게 적어보았다. 얼핏 보면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태이다.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 사람은 사라지고 상품만 즐비하다. 개인은 사라지고 집단만 보인다. 개성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는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제품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것도 그저 그런 제품인 채로 더 나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더 비싼 제품이 되길 바라는 것인가 하는 자조적인 물음도 나온다. 43 번째 편지에서 저자가 말한 바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며, '인생이란 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은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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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이런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저 멀리 떨어져 보이는 엄마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어 빙빙 돌아서 갔던 경험이.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에서 아이의 죄책감을 나무라는 대신 엄마의 마음을 알려주고 엄마가 함께 노력한다는 과정이 좋았다. 읽어주는 내내 아이들은 흥미로워하면서도 위로받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한 아이가 책꽂이에 꽂혀 있던 <아빠! 학교에 오지 마세요>라는 책을 찾아내어 읽는다. 책이 책으로 이어지는 순간, 기분이 참 뿌듯하다.

 

 

독서 교육으로 유명한 분의 강연회에 갔다가 이 책을 추천받아서 얼른 구입해서 아이들에게 읽어줬다.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단연 사탕가게 할머니를 골려주던 사건이었지만 아직 어린 2학년 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엔 가끔 흥미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을 다 읽지 않은 채 집에 가져갔을 때 이 책을 찾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얘들아, 궁금하니? 궁금하면.....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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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이 책을 읽은 직후부터 이 책은 나를 묶어 놓았다. 지금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생각날 적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본다.

  철학서이고, 낙관적이 아닌 내용인데 난 이 책을 읽으면 위로가 된다. 최소한 스펙쌓기에 치중하지 않는다는 자기 위안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우리의 모습 그 안에 내가 살고 있다는 평범함에 대한 확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가 지금 우리 사회를 '피로 사회'라고 규정지어주는 순간부터 맘이 편하다.

  특히 맘이 바쁠 때 이 책이 많이 떠오른다. 지금 읽고 있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책도 비슷한 느낌으로 좋은데, 개인적으로는 얇으면서 단단한 <피로 사회>가 더 좋았다. 말을 돌리지 않은 돌직구를 한 방 크게 먹었다.

 

 

<문학>

 

<노인과 바다>는 좀 묘한 느낌이었다. 얇은 두께에 비해 천천히 읽혔다. 빨리 읽으려고 하면 충분히 빨리 읽을 수 있었지만, 왠지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 같이 준 영문판을 한 20페이지 읽었다. 애초의 다짐은 좀 무모했지만 의미있었다. 헤밍웨이의 뚝뚝 끊어치는 문체는 아주 조금이겠지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 번역본은 그에 비하면 좀 부드러웠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도 꽤나 공들여 만들어진 작품이었고 보는 내내 원작의 느낌이 살아있어 기분이 좋았다. 

 

 

 

<어린이책>

  

  검은 색 만으로 이렇게 다채로울 수가. 색이 단순하기에 그림을 더 집중하여 보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생태계 순환에 대한 내용이지만 삶과 죽음의 이야기도 함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죽는 것은 잡혀 먹혔기 때문이 아니라, '늙었기'때문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이야기해 주는 점이 아이들에게 죽음을 자연의 일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러스트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펜 하나로 묘사되는 그 넓이와 깊이에 감탄할 것이라 믿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지만 정말 멋진 그림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권 넘게 책을 읽고 80여편이 넘게 리뷰를 썼기에 지금도 다른 책들을 더 추천 목록에 넣어야 하나 고민이 되지만, 과감히 이 세 편만으로 압축하기로 한다. 그 중 제일은 <피로 사회>였다. 내게 2012년 <피로 사회>를 만난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니, 기억은 곧 사라질 것이므로 다만 기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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