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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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팟 캐스트를   통해 커트 보네거트를 듣는 순간이 지나면, 이 책을 읽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급히 빌려 읽는데 이 얇은 책에 어쩌면 접힌 페이지가 많은지, 접히지 않은 것이 더 적은 판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냉소적이면서 유머러스한 글이 얼마 전 읽었던 소설가 미셸 우엘벡을 떠올리게도 하고 좀더 사회에 직접적인 언급을 하니 나꼼수가 떠오르기도 했다. 문체를 보면 국내작가 김중혁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가 던지는 모든 말들은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농담이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농담이며, 가장 슬픈 농담이기도 하다. 반전 작가라고 불리는 커트 보네거트이지만 그 이상으로 지구를 사랑하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의 삶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그가 가진 그의 생 만년에 펼쳐지는 이 지독한 농담들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범미국적이고,  범지구적이다.

 

그가 책에서 말했듯 우리는 모두 화석연료중독자들이며, 지구는 지구를 해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에이즈나 신종 독감 등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정말 인간이란 너무나 무서운 존재라 그게 쉽지 않아 여전히 지구는 썩어가고 있다. 진실로 미안하고 마음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참 스스로에게 그리고 지구에게 할 말이 없다. 또 한 사람의 화석연료중독자인 나는  만년에라도 커트 보네거트처럼  인간 사회에 대한 지독한 농담을 하는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구를 바꿀 힘이 없으니 그런 농담이라도 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얼마나 고급스러운 만년인가. 직접 그들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가 그리워하듯 나 역시 괜히 마크트웨인과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리워진다.

 

책에서 다룬 에피소드 들 중 인상적인 주제는 대가족과 제멜바이스와 아날로그와 미국에 대한 내용이다. (아 줄줄이 더 말하고 싶지만 일단 이것들만.) 내가 김영하라면 분명 이 부분을 읽었을 것 같은데 그는 어떤 내용을 이야기했었는지 지금은 전혀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은 채 김영하의 목소리만 머릿속에서 춤춘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이상 대가족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신부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신랑 역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고 멍청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중략)-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딱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다.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다. (본문 55-56쪽)

 

수다란 얼마나 중요하 해결 방안이 되는지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오래 산 노인으로서의 지혜가 보인다. 남편의 딱 하나 친구가 나라니, 참 몹쓸 친구이다. 나의 유일한 이야기 상대가 남편이라니,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어? 서로를 병들게 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들이었어 우리가? 새삼스럽다.  수많은 가족과 매일매일 수다를 떠는 것에 대하여서는 아직은 젊은 나로서는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또한 그것이 이혼률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도 공감이 된다.

 

이런 뭔가 따뜻하고 따끔한 이야기보다 주를 이루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거대 권력에 대한 일침이다.

 

모든 권력은 억측가들의 손에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병균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도 똑바로 주시해야 할 억측가들에 관한 사실 하나가 드러낫다. 우리도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그들의 억측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이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달라.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당신의 생명을 구하라.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달라.

(본문 93쪽)

 

지금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되는 말이 아닌가. 명심하자, 현명하여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그의 마지막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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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내를 믿지 말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지현 옮김 / 김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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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저 러츠의 글을 처음 읽는다. 대놓고 전편을 참고하라는 말 조차도 전혀 이상하지도 거부감이 생기지도 않는다. 굉장히 정신없이 얼키고 설킨 가운데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또한, 어쩌면 결론은 독자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겠지만 그 결과가 식상하거나 허무하지 않고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비록 행동 양식이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 더 가까이는 우리 가족의 다른 모습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이지 않을까.

 

먼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우리의 주인공 이자벨,

 

사실 집안에 이런 사람은 꼭 있다. 뭘 해도 안되고, 뭘 해도 미덥지 않고,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가족에게 짐은 되기 싫어하는 사람. 그런데 정말 그녀는 뭘 해도 안되고 미덥지 않은 자존심만 센 사람인가? 책 속의 이자벨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괴상한 백수 같아 보이지만 자기만의 철학과 세계가 있는 사람이며, 그것은 남에게 해롭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랑스러운 가족의 가장 핵심이 바로 이자벨이 아닐까 싶다.

 

사실 심리상담을 받는 과정에서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거부하는 단단한 마음의 벽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오랜 시간 짝사랑한 헨리에게 고백하기 보다는 마음을 접는 편을 택하고, 오빠에게 대놓고 방좀 달라고 조르기 보다는 불면을 부르는 불안을 품은 채 오빠의 집에 숨어사는 편을 택한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쌓아둔 벽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코너에게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어찌나 사랑스럽고 다행이던지. 내 마음의 벽도 무너뜨려볼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음

  우리의 사고뭉치 똑똑한 무대포 레이,

 

난 이런 캐릭터는 별로다. 레이 때문에 가장 곤란을 겪는 건 이자벨이니까. 레이는 매우 똑똑하고 본인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무기로 무대포로 모든 일을 밀어붙인다. 덕분에 주변 사람은 난처해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이자벨의 몫이다. 헨리 곁에서 떼어놓는 것도, 매기와의 불화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엄마 대신 레이를 붙잡아 오는 것도 이자벨의 몫이다. 그런 것을 보면 이 집안에서 이자벨 없이는 레이를 통제할 수 없는 건 아닌가? 그래도 레이는 이자벨보다 돈도 많고 머리도 좋고 인정도 많이 받는다. 얄밉다.

 

그리고

   너무 늦게 철들어 버린 데이비드

 

지금이라도 철이 든 데이비드는 반갑다. 이혼과 오지탐험을 통해 bmw를 처분하고 직장을 그만 두는 획기적인 사건을 저지른 그이지만 그의 행동을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에 나오는 가족들의 분위기이다. 물론 아쉽기는 하겠지만. 그는 어쩌면 쳇바퀴돌듯 직장에 다니고 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마음 한 켠 품고 있는 사표봉투같다.

그가 이자벨의 입주를 묵인한 것, 그리고 매기라는 불편한 상대를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자백한 점에서 그의 편안해진 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인생, 까탈스럽게 살 필요가 없는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마지막

   그저 평범한 우리의 엄마, 아빠

 

뭘해도 미덥지 않은 이자벨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사실 사립수사관으로서의 자질은 자식 셋 중 가장 자신들을 닮았으니 어쩌면 가장 애착이 가는 자식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자벨이 방황하는 것만 같아 겉으로는 타박을 하지만 "점심 같이 먹자."라는 말로 애정을 표현하는 아빠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아버지상이라 익숙하기도 하고 여전히 아쉽기도 하다. 더 다정하게 다가갈 수도 있잖아요? 엄마도 마찬가지다. 사실 불편한 일은 다 이자벨을 시키면서, 다시 말해 이자벨 없이는 불편한 일이 많으면서도 이자벨은 불신으로 데이비드는 맹신으로, 그리고 레이는 기대감으로 대하는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라 역시 익숙하지만 속상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 이야기를 의뢰한 어니와 그의 아네 린다 그리고 샤론, 바텐더의 밀로와 후계자 코너, 헨리와 매기, 모티와 루시 그리고 게이브, 페트라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이 가족과 얼키고 설키며 그들 또한 이야기에 큰 흥을 불러 일으킨다. 마치, 16부작 미니시리즈를 하루 동안 몰아서 다 본 느낌, 각각의 인물들에 끊임없이 말을 거는 느낌, 신나고 재미있다.

 

책 뒤표지에 나온 것처럼 아슬아슬한 첩보작전은 사실 느껴지지 않지만, 희한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그들의 표현방식은 두 말 할 것 없이 사랑스럽다. 이 가족, 정말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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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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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지만 깊이가 없는 내게

철학에 관심 있지만 아는 바가 없는 내게

이 책은 어느 정도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여성 언어라는 개념, 에 대하여 문정희의 '유방'을 놓고 이리가레이에의 생각을 읽을 때

 

남성의 사유는 낮이면 낮이고 밤이면 밤으로 이분법적이고 논리적으로 작동하지만, 여성의 감수성은 모든 시간이 어느 정도의 밝음과 어느 정도의 어둠이 공존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이처럼 모순이란 바로 차이 혹은 타자와 공존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상에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삶의 중요한 대목은 대부분 논리적이기보다는 애매한 겁니다. 모순이 항상 곤존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의 포용 혹은 여성성의 문화', 79쪽)

 

 

타자라는 개념, 에 대하여 김행숙의 '타인의 의미'를 놓고 바흐친의 생각을 읽을 때

 

주체는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내 자신이 타자의 타자라는 사실, 이로부터 바흐치는 우리 자신이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저 덮을 수밖에 없는 타자', 118쪽)

 

 

반항이라는 개념, 에 대하여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놓고 카뮈를 이야기할 때

 

인간은 반항 속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는 카뮈의 통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와 '아니오'의 경계선, 그러니까 반항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느낀 것, 욕망하는 것, 혹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때만큼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많이 의식하는 순간도 없을 겁니다. 이제 우리는 자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한 겁니다.

('자유와 한계의 변증법', 305쪽)

 

나는  그 개념을 사랑하게 된다. 품고 싶어지게 된다. 더불어 시인도, 철학자도 모두 사랑하게 된다.

 

글에서 말하듯 '사랑'이란 상대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나는 이 개념들에 대하여 알고 싶고, 시에 대하여 알고 싶고, 철학자에 대하여도 알고 싶다.

글에서는 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사랑도 없다고 했다.

다 알았다는 그 순간, 아마 아주 오랜 기간 그 순간은 올 수 없기에 세 가지를 불타게는 아니더라도 뜨뜨미지근하게는 꾸준히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에 왜 '괴로움'이라는 말이 들어가는지는 모르겠다. 읽으면서 괴로움 따위는 없었다. 개념 자체가 괴로워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내가 괴롭지는 않았다. '괴로움'이라는 말을 '철학적으로 괴로운 시'에 붙이면 모를까 부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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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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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그는 그가 소설의 초반에 스스로에 대하여 설명한 대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한 사람일까? 무한 감정의 에너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소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냉정'한 사람이기는 한 것 같다. 더더욱 자신을 작품 속에서 처참히 죽이다니 냉정하다. 정확하기 위해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니 스스로에 대한 설명이 적확하지는 않더라도 꽤나 정확하기는 하다.

 

소설 초반  '지도와 영토'라는 제목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인공위성사진이 희미한 파란 얼룩이 흩뿌려진 어느 정도 균일한 초록색의 죽 한 사발에 불과해 보였다면, 지도는 지역구분선, 생동감 있는 길들, 지도의 시점, 숲, 호수, 언덕들의 그물망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두 확대사진 위에는 검은색 대문자로 전시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92쪽) 

 

위의 글처럼 영토보다 흥미로운 지도,를 생각하며  실제보다 흥미로운 가상 혹은 현실보다 흥미로운 환상, 예술 등등을 떠올렸다. '이 작가 정말 시적인걸, 유머도 있는 것 같고, 냉소적이면서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해.' 라는 감탄을 읽는 내내 했던 것 같다.

 

우엘벡은 작품 중반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느리고 한적하고 향수어린 장소에서의 행복감, 그것은 흥미로운 지도를 두고 영토를 택한 행동처럼 보였다. 지도란 어딘가를 빨리 찾기 위한 그림이고 실제 영토로만 더듬다보면 느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혹은 그 행위 자체가 주는 사색적인 태도는 우리에게 행복감을 주곤한다. 지도는 분명 영토보다 흥미롭지만, 영토는 분명 지도보다 아름다우니까 말이다. 그리고 분명 영토가 없다면 지도는 없다.

 

마르탱과 우엘벡은 예술가이다. 그러면서도 예술을 피하려고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미술상 프란츠가 말한 것처럼 마르탱과 우엘벡이 예술가라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작품에 대한, 사회에 대한 태도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을 하는 순간 순응하던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마르탱과 우엘벡이야 말로 예술가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어 자신의 존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확인을 시키는 과정을 행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후의 같은 양상의 행위는 용납불가능하다. 이것이 그들이 예술가로 사는 법이다. 다만, 작품 속에서는 우엘벡보다는 마르탱을 그 점에서 우위에 두어 작가는 스스로를 압박한다.  흥미로운 지도를 벗어던지고 영토로 회귀하는 태도에 대한 압박.

 

마치 두 편의 소설을 읽는 듯 이야기의 중후반은 우엘벡의 죽음을 기점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우엘벡은 자신의 의도대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자들이 꽤나 사회를 정확하게 바라보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이끄는 인물을 중심으로 역학관계를 다룬 마르탱의 그림들, 그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폐적 가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섬뜩한 욕망, 경쟁사회에서 성취감을 얻고자하는 욕구, 반면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후 나약해진 인간이 선택하고 선택받은 마지막 길까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편한 모습들을 아주 덤덤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 우엘벡은 이 작품을 쓰면서 역시 예술가적 태도인 '예측 불허의 불가해한 메시지에 순응하는' 중이었던 것일까. 무척 덤덤하다.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여기자에게 제드 마르탱이 한 말이 떠오른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서는 의미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470쪽)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여진 말이라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르탱의 말이 더 다가오는데, 여기까지 책을 읽으며 내가 찾으려고 했던 지도와 영토에 대한 의미 찾기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그래, 이 책은 소설이었지. 그러고 보니 책의 중반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이미 작가는 이때부터 의미를 찾지 말라고 경고를 했던 모양인데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나보다.

 

구체적인 실제 풍경과, 촌락이며 초원이며 평야가 눈에 띄지 않게 나란히 놓인 이 지도에서 그는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균형과 평온한 조화. (292쪽)

 

똑같은 느낌. 다르다고 숱하게 인식했건만, 이 때부터 지도와 영토에는 똑같이 균형과 평온한 조화의 느낌이 있다고 말했었구나.  현실과 환상에 느껴지는 똑같은 균형과 평온한 조화라니 역시 우엘벡이다.  똑같은 균열과 미화에 대한 냉소적 표현이라 믿어의심치 않겠다. 마르탱의 그림이나 현실 사회의 모습이 죄다 추잡하고 난감하다. 그러니 예술가로 살아서는 무엇하겠는가 싶은 마음까지 느껴져 자신을 그저 죽였는가 보다. 아, 똑같은 그 느낌이 서글퍼진다.

 

개인적으로는 미셸 우엘벡의 냉소적인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한 문체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흥미롭게 쓸 수 있겠는가 싶다. 다만, 이 책에서 거슬리는 점이 한 가지 있다면 한자어 부사어라던가 외국어체의 번역이다. '거의'라는 말을 두고 꼭 '거개'라는 말을 굳이 택해야 하였는지, '도무지'를 두고 꼭 '도시'라고 해야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지시를 듣는 (장 피에르 페르노의)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236쪽)' 이라는 문장에서  ( )의 문장이 꼭 필요했는지, '사진이 내용의 거의 전부여서 (280쪽)'라는 말이 어색한 것은 나뿐이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원본에는 그렇게 써있었겠지만 한국어를 좀더 잘 운용하는 번역가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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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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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책의 두께에 압도당했다. 다산 정약용과 형제들, 다산 정약용과 정조 대왕의 이야기 아니면 다산 정약용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 책들은 맞지만 그를 평생 따른 사람 '황상'에 대한 책은 이 책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다. 사실, 황상(黃裳)이 황상(皇上) 이라고도 생각했으니 내가 얼마나 사전 지식이 없었는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책은 철저히 다산의 제자로서의 '황상'에 대하여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물론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약용과 정학연(다산의 큰 아들)의 삶 역시 가벼이 다뤄지는 것은 아니나 '제자 황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황상은 아전의 아들로 과거를 볼 수도 있으며 과거를 볼 능력도 있는 사람이나 어쩌면 '삼근계'를 준 스승 다산보다 더 순수하게 '시'에 빠진 사람이다.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해하며 자신의 입신양명이나 이득보다는 배움 자체에 대한 즐거움에 몰입한 그야말로 달인이라 하겠다.

 

이 몰입은 처음 스승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중략)-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중략)-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중략)-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생략)

 

황상은 열 다섯의 나이에 스승의 '삼근계'와 격려를 받고 '시'에 입문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저리 낮출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그 나이에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겸손하기도 하고 분수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소심하기도 하였던 그에게 스승의 답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그를 더 많이 알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황상의 이야기를 한참 읽다보면, 천민 시인 정초부가 떠오른다. 정초부는 천민이라 황상보다 더 여건이 어려웠지만 당대  양반들의 칭송을 두루 받았다. 정초부에게도 주인 여춘영에게 벗의 대우를 받으며 당시 재능이 있어도 펼치지 못한 수많은 천민들에 비해 좋은 여건을 가진 셈이었지만 그의 시와 별개로 그를 대하는 양반들의 낮은 시선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에 비하면 황상에게는 다산과 그의 집안 사람들과의 끊이지 않는 교류로 인해  늦은 나이이기는 하나 인정을 받고 존대를 받았으니 어쩌면 그에겐 그것 자체만으로도 만족할만한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남린의 소송으로 터를  잃고 궁핍한 삶을 면할 수는 없었지만 만년까지 당대 명사들의 서문을 받고 인정을 받았으니 겉은 궁핍했을지언정 속은 편안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정민 선생님의 한시 번역은 너무 아름답다. 번역된 부분만을 읽었지만 시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스승 다산과 제자 황상 그리고 정학연과 정학유, 혜장과 초의, 추사 형제 등등 많은 사람들의 시가 실려 있어 저마다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을 기울여 읽은 시는  스승이 돌아가시고 난 후 황상이 꿈에서 스승을 뵙고 나서 지은 시 몽곡(夢哭)이다. 

시를 지어도 어쭐 사람이 없는 허전함을 무엇으로 달랠까하는 먹먹함이 느껴진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고, 시를 사랑했다. 어쩌면 황상은 시보다는 스승과의 첫 대화에서부터 수많은 격려와 꾸짖음의 상황들 그 모든 상황들을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시는 현실을 살아가는 그만의 도구이자 그리움과 이상향을 동시에 다다를 수 있는 목적지였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혜장과 다산이 만나는 내용 끝부분에 이런 글귀가 있다. 이 글귀가 이 책에서의 모든 아름다운 만남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지막으로 전해본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글에 정을 담아 편지와 시문이 오가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혜장은 다산의 유배 생활에 잠깐 비쳐든 봄볕 같은 존재였다. (125쪽)

 

혜장은 다산에게 봄볕 같고 다산도 역시 그럴 것이요, 황상에게 다산도, 정학연도, 추사도 모두 그럴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의 생활에 잠깐 비쳐든 봄볕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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