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 철학자 이진경의 세상 읽기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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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이진경

2012/10/29

 

 

 

 

뻔뻔함이란 자신을 향한 어떤 시선도 개의치 않는 시선이고, 오로지 자신이 겨냥하는 것만을 보는 시선이며, 자신이 욕망하는 바에 따라 타자를 이용하고 공격하려는 시선만으르 가진다. 따라서 그것은 진심이나 열정어린 행동에서도 촉발받는 경로를 갖지 못하며, 그렇기에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 자신을 바꾸어갈 계기를 갖지 못한다.p.153

 뻔뻔함이란, 이렇단다. 그렇다면 현 정부는 스스로 바꾸어갈 계기를 갖지 못하니 어쩌면 포기해야하는 것이구나 싶다.  저자도 그 점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는지 해결책을 딱히 여럿 제시해주지는 않았다. 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자와 함께 민중의 힘을 부르짖는 수 밖에. 현 정권이 무서워하는 것이 딱하나 있다면 집단 행동, 너~~~무 무서워 하는 통에 도무지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방법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대뽀적 대응을 하여 더 큰 불신을 얻는 악순환을 하는 바로 그 방법 말이다. 참말로 위선이 그리울 지경이니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책의 부제는 '철학자 이진경의 세상 읽기'이지만 그 중 초반 3개의 장에서는 현재 우리 나라 정치의 꼬락서니를 보여주고 있다. 아주 뻔뻔하게 사유화되고 있는 정치 권력과 찌질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무능함이 돋보이는 권력자들. 오늘 아침 파업채널M을 듣고 있자니 김재철 사장 역시 이것에 아주 딱 맞는 행동을 하니 어찌 미니미라 하지 않으리오? 최필립씨와의 딜을 한 이진숙을 '성급한 희망'을 했다며 팽!하는 찌질함은 참 역시 뭐라 할 말이 없다.

 

  저자가 어버이연합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내용의 말미에 '곱게 늙고 싶다.'는 바람을 적었는데 아직 늙었다고 하기엔 너무 야심이 많은 분들이 어찌 사고방식은 폭삭 늙으셨는지 도대체 건설적 의견, 창의적 의견, 이런 의견, 저런 의견 모조리 듣지 않고 차단하는 인풋이 고장난 전자제품이 되셨는지, 5년 동안 나라를 해 드시면서 "다 해놓고 보면 다들 좋아할 거"라는 자기한테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고장난 라디오는 고장난 라디오인가보다. 아웃풋도 매번 똑같으니. 아, 나도 곱게 늙고 싶다.

    

 

국민 국가의 역사는, --- 인위적인 집합적 기억이다. 그 기억은 국민적 통합을 저해하는 모든 기억을 최대한 지우고, 사람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기껍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라면 억지로라도 만들어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그 기억은 소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삶의 기억을, 그들의 고통의 기억을 지운다. .p.59-60

 

 우리는 주입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다. 특히 역사에 대하여 그래왔던 것 같다. 국민은 소극적이고 권력을 잡은 자들은 적극적이다. 그런데 이젠 그게 좀 어렵겠다. 우리에겐 김여진이나 나꼼수와 같은 이들이 있고, 수많은 SNS 사용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을 기억하게끔 자꾸만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니까.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우는 일들의 이면에는 핍박당한 사실이 있고, 그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처참히 묵살당해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쇼하지 말자. 제발 정치하자. 사실을 가지고,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는 정치를 하잔 말이다.

    

트위터에 연예인은 정치를 하고 정치인은 연예활동을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수도 없다는 사실 그대들은 알고 있는지. 자신들이 하는 것을 정치활동으로 보는 국민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 그대들의 쇼는 시청률도 굉장히 낮은 저급한 쇼라는 것을 아는지. 안다면 진작 그만두었을텐데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쇼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그래가지고 정치 하시겠어요? 라고 묻고 싶어진다. 책의 한 챕터의 제목처럼 정치가 재난이다.

 

 하긴 책을 읽다보면, 그들이 의도한 행위들은 사실 저급한 쇼인데 그들이 하는 짓들은 참 웃기긴 웃기다. 이진경의 말처럼 아마도 이명박정부는 개그정권인가보다. 가령 이런 거다. 집권 3주년을 맞아 비서진들에게 한 말이 "우리의 업적을 너무 알리지 말라."였단다. 하하하! 정말 많이 웃었다. 각종 외국 수장들 모아놓고 같이 사진 찍으면서 설정한 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알리지 말래, 그것도 업적을! 정말 재밌다. 2010년 광복절 축사의 열쇳말이 또 '공정한 사회'라니! 아무래도 다른 나라 말을 쓰나보다 우린. 혹시 집무실에서 MB어를 창제하시는 중이신가? 

 

 사실, 이명박정부가 슬로건을 내걸지 않았을 때 고개만 갸웃거린게 화근이다.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긍정적으로 넘어가 준 것이 큰 실수다. 이 정부는 슬로건을 만들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 방향에서 추론하자면 첫째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무능한 정부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철학의 부재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온 바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명확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슬로건에 개인의 이름을 걸지 않았는가? 철저한 사유화. 내 나라, 내 땅, 내 돈!이라는 철학. 5년 안에 다 해 드셔야 하는 시일이 촉박한 마당에 슬로건 따로 만들 시간이 어디있겠는가. 먹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미친 속도로 마지막까지 뻔뻔함을 바짝 땡겨야 하리라.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무능하고 뻔뻔한 정부! 아, 나 이런 나라에 살고 있는 거였어? 내가 애처롭다.

  

책의 중후반부터는 정치 외의 (그렇다고 무관하지는 않은) 세상 살이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의학, 과학, 채식주의, 선물, 예술 등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이슈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방향을 진단해보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스스로 말하듯이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사실 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로서는 그를 지지한다 안한다를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가 가진 최소한의 소득을 누구에게나 보장해야한다는 복지의 입장에는 의견을 같이 하는 편이다. 물론 채식주의에 대한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기를 꼭 먹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범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양식되는 물고기는 먹어도 되는지에 대하나 의문과 인간이라는 동물이 초식동물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생각은 따로 빼어두고 그가 한 말 중에 가슴에 깊이 박히는 말이 있어 되새겨본다.

 

예술가는 주어진 재료로 작품을 만들지만, 우리는 바로 우리의 삶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삶을 예쁘게 치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진지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감각, 자신의 신체,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바꾸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감각, 신체, 생각으로 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p350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삶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태도를 지녀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릴 때 스스로의 가치가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아니 실제로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거짓과 모르쇠로 일관하는 요즘 권력자들을 보면 조물주가 조만간 가마에서 나온 그 잘못된 작품을 깨 부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 본다. 물론, 개인으로서의 나도 조물주의 입장에서 깨 부수어야 할 잘못된 작품일 수도 있겠지만. 미안, 나로 인해 아픈 당신.

 

책은 전반적으로 철학가가 지었다는 선입견에서 자유로웠다. 쉽게 읽히고 공감이 갔다. 세상 읽기라는 부제에 맞게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지루하지도 않았다. 사용된 어휘가 어렵지 않았고 저자의 유머도 깨알 같았지만 간혹 문장의 구조가 번역본을 읽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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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항재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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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이 책은 매력적이다. 아니 그 이전에 표지부터 매력적이고, 그림을 그린 노에미가 헌사를 한 것도 특별해 보였다. 그만큼 이 책은 고골의 책이기도 하지만 노에미의 책이기도 한 것이다. 단순한 삽화가 그 이상을 의미했다.

 

아카키에게 외투는 참으로 벼르고 별러서 얻게 된 소유욕이었다. 존재감 없는 9급 문관인 아카키는 요새말로 직장 내  '왕따'라 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인 양 크게 그것에 개의치 않으며 하루하루를 정서만 하며 보낸다. 그래도 그는 자존감이 꽤나 높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비록 동료들에게 소외당하는 인물이기는 하였지만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하여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고(이 부분은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개의치 않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상처받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작지만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자신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

"나는 당신의 형제요"

 

라고  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다시 말해 그가 소외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요즘처럼 차갑고 살벌한 느낌까지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하기에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존중하기도 했고, 그가 새 외투를 입었을 때에도 따스한 관심을 가져주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카키가 직장에서나 집에서 정서하는 것에만 몰입한 것은 그가 그것을 해서 무언가를 얻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은 분명 아니다. 달리 할 것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는 그것 외에는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진 적이 없다. 실상 무언가를 딱히 가진 적도 없었기 때문에 더 갖겠다는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카키에게 변심의 대상이 나타나니 바로 '외투'이다. 정말 간절히 원한 최초의 것. 그 마음을 읽으면서 행여 아카키가 돈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었다. 마음에 꼭 드는 외투를 입은 아카키를 보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허영심은 있다. 나쁜 의미의 허영심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기본 마음으로의 허영심 말이다. 자신의 일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위시리스트! 아카키에게 그것이 외투였듯이 우리는 누구나 원하지만 당장 쉽게 가질 수는 없는 위시리스트가 있다. 그것이 비록 허영으로 보여 남에게는 조롱을 받을 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것을 얻고 난 후에는 기쁨과 동시에 어색함과 불안감을 함께 가져야 할 지도 모르지만, 더욱이 아카키처럼 얻고 난 후 그것을 다시 잃어 크나큰 상실감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 위시리스트 없이 산다는 것은 좀 심심하고 억울하다. 더구나 외투가 아카키의 것인 것은 신기하고 이상하고 고관이 가지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더더욱 억울하다. 우리는 누구나 아카키의 외투를 가질 권리가 있다.

 

아카키가 외투를 오래 가지고 있으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 거냐고? 그럴 자격이 없느냐고? 그럼 그럴 자격은 누가 있는 거냐고? 고골은 모든 아카키를 대신해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카키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면, 바로 당신도 외투를 입을 자격이 없노라고 말하고팠던 것은 아닐까?

 

내게도 위시리스트가 있다. 그것을 이루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내 생활과 밀접한 것에서부터 '네가?'라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것까지. 그것을 스스로도 겸연쩍어 하고 어색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다. 그런 위시리스트 하나 없이 사는 것이 애처롭지 그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건 전혀 어색할 것이 없으니까. 비록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당한 그 누군가라 할 지라도 말이다. 아니, 그러할 수록 더더욱 말이다. 누구나 아카키의 외투를 입을 수 있기를.......그것을 오래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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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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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겠지만 밀란쿤데라의 책은 처음이다. 그런 사람이 아직 여기에 있다. 아마 어렵다는 편견 때문에 쉽게 시도하지 않았을 것으로 합리화 해 본다. 처음 <향수>책 몇 챕터를 읽었을 때 좀 어려웠다. 어원을 풀이하는 거며, 체코의 역사를 알려주는 거며 둘 다 내가 무지한 이야기들이라 집중해서 읽었어야했지만 결국 이해는 포기하고 약간의 기억만 가지고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간을 두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물론 처음엔 이레나와 구스타프의 알랭 드 보통식의 그런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자고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레나와 체코의 사랑이야기라고도 읽으려고 했다. 어쩌면 이 쪽에 더 치중해서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집중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느긋하게 글자들을 따라가다보니 나는 어느 새 체코에 와 있었다.

 

  기억이란 얼마나 조악한 것인지. 22번 째 챕터와 35번 째 챕터에 가면 기억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 그것에 의존하는 우리들이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돌아가고자 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욕구는 그녀에게 과거의 존재, 과거의 힘, 그녀의 과거의 힘을 단번에 드러냈다. 그녀 인생의 집에, 뒤를 향해, 자신이 겪어 온 것을 향해 열린 창문들이 나타났다. 그 후로 이러한 창문들이 없다면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83쪽)

 

  향수병이다. 작가는 이러한 향수병이 젊은 날(특히 더 어린 날일수록)에는 운명이나 사랑과 깊이 관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련한 기억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더더욱 남은 인생이 얼마 없을 경우에 느껴지는 감동이란 커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인생 말년에 떠올릴 유년의 기억, 사랑의 기억, 그리고 떠나온 조국에 대한 기억들이 얼마나 고귀하게 다가올지.

 

그런 점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인 조제프나 이레나의 귀향은 자신들에게 그리 큰 감동을 가져주지 못하는 것 같다. 도리어 그들은 그들이 떠난 이십 년의 기간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모른 척 하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하여 화가 난다. 그들에게 고국은 아름다움이자 동시에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 뿐이라는 점에도. 

 

그녀가 외국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여자들은 그녀에게서 이십 년간의 삶을 잘라 내었다. 그리고 이제 질문 공세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꿰매려고 했다. 마치 그녀의 팔뚝을 잘라 내고는 손을 막바로 팔꿈치에 갖다 붙이려는 듯이. 마치 그녀의 장딴지를 잘라 내고 발을 무릎에 붙이려는 듯이. (47쪽)

 

  이러한 외과적 수술로는 그들의 향수병 결핍 증상을 고칠 수 없다. 조제프처럼 나 역시 일종의 '향수병 결핍' 혹은 '기억의 피학증적 왜곡'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크게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보기엔 그리워할 일들이 많을테지만, 물론 나 역시도 때때로 추억에 젖어 웃음짓곤 하지만 지금이 더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유년 시절의 집으로 귀향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조제프처럼 그 때의 기억은 나에 대한 힘을 잃었다.

 

  이레나가 말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유일한 때'와도 관련이 있다. 이레나와 조제프는 망명을 통해 자신들의 자유를 얻고, 의지와 일치된 자아를 갖게 되었다. 체코를 잊은 채로. 나 역시 그렇다. 부모의 그들에서 벗어나고 학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가정에 포함되기 전까지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돌아가고픈 고향이다.

 

  이레나와 조제프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체코에서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나는 내 유년 시절의 장소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이레나가 다시 가족 체제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나역시 종종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때로 돌아가고프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저런 물음들을 조용히 머금으며 책이 끝났다. 작가의 큰 이름과는 달리 이야기가 매우 감각적으로 펼쳐져서 신선했다. 프랑스나 동유럽의 영화 한 편을 보고난 느낌도 들었다. 관찰 대상이 수시로 바뀌며 짧은 이야기들이 연결고리를 맺으며 교차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밀라다와 구스타프와 장모에 대한 이야기가 내겐 남아있지만 그들은 그들을 닮은 사람들에게 맡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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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 - 보이지 않는 대륙에 가까이 다가가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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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늘 그렇게 같은 별자리를 그려두고 땅을 바라보건만 땅은 언제나 제 모습을 바꿔 하늘을 마주한다. 인간에게 날개가 있고 하늘을 소유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하늘도 무차별적으로 그 모습을 훼손당했으리라.

 

라가, 작가 르 클레지오가 가까이 가고 싶었던 바누아투의 작은 섬. 많은 나라와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학대당한 약한 섬. 고통에 저항하며 여전히 아름다운 섬. 평화를 가장한 불안의 섬. 그러하기에 작가는 그 섬에 조용히 스며들어 그들의 영혼을 끄집어낸다.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영혼이 있는 그 섬의 주인은 그 섬과 그 섬에 사는 자유롭고 강인한 그들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 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그저 손님의 자세로 그들의 모든 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곳의 삶이 우리가 보기엔 미개하고 열악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모든 폭력과 오만한 태도 보다는 그들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비열한 전염병을 가져간 과거를 절대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프랑수아 플라스의 그림책 <마지막 거인>의 마지막 말은 그 책을 읽은지 한참이 되어도, 내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하더라도 한없이 깊은 미안함이 생겨 떠올릴 때마다 속이 아리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모든 행위는 폭력이다. 그들을 문명의 세계로 이끌어주겠다는 오만도, 그들의 여권을 신장시키겠다는 몰이해도 모두 폭력이다. 로버트 제임스 플레처와 폴 고갱도 그들의 행위가 그 섬에 대해 가하는 최악의 선택 중 하나가 될 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라가를 외부에 알렸다는 자아도취감에 빠져 살았으리라. 우리 역시 여전히 우리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 밤도 하늘의 별은 빛날 것이고 늘 그렇듯 우리에게 같은 아름다움을 펼쳐주고 있을 것이다. 하늘에 대한 소유욕을 낭만적 상상으로만 만족하듯 땅에 대한 소유욕도 낭만적 상상으로만 선물하면 안될까? 

-저 멀리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작은 섬 하나를 너에게 갖다 줄거야.

라는 그런 사탕발림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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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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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일 년에 한 번 쯤은....... 

 

  1년에 한 번 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일, 그 안부는 마침 서로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의 이야기, 그러나 내용의 거의 모두는 보내는 사람이 지어낸 하얀 거짓말. 나는 그래도 좋으니 일 년에 한 번 쯤은 그런 편지를 받고 싶다고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이야기는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내는 1년~3년에 한 통 씩 보낸 편지와 화자인 은미의 이야기가 교차로 배열되어 있다. 고모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그렇게 은밀히 전해왔고,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것을 신성한 비밀처럼 간직해 왔다. 그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는 할머니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인데 그것은 그녀가 '노모(老母)'의 모습이 아닌 그녀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여느 처녀들처럼 새 삶에 적응하고 살아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와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색이었다.

  할머니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본문 52쪽)

 

고모의 편지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할머니는 고모로 인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았고, 다시 잃을 뻔한 그 상실감을 편지로 고스란히 보상받았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고모는 나면서부터 그런 할머니의 상실을 보상해주어야하는 의무감을 직감하고 이제껏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의무를 수행해오고 있다. 우리에겐 누구나 나면서부터 누군가의 상실을 보상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나의 상실을 보상받고 있는지도. 어쩌면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상실을 보상하고 보상받는 그런 채무 관계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찬이가 고모의 상실감을 채워줄 날도 머지 않았다는 기대가 드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은미와 민아의 이야기는 심사평에서 여러 번 다루어지듯 고모의 편지에 비해 밀도가 약하다. 그런데 그 약한 밀도 덕분에 은미와 민아의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독자에게 스며드는 면도 있다. 고모의 촘촘한 편지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촘촘함을 무너뜨리는 것은 은미가 말하는 헐거운 이야기들이다. 그 헐거움이 나의 여백을 하나하나 채운다고나 할까? 은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인간으로서가 아닌 현실 세계의 사람으로서 꿈을 꾸게 한다. 기자가 되고 싶은 은미와 여자가 되고 싶은 민이의 꿈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아주 일상적인 문제이지만 결국 그 끝은 고모의 편지처럼 촘촘한 문제와 다르지 않기에  이  교차서술 속에 나타난 밀도의 차이가 심사위원들의 우려와 달리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안녕을 말하며 고모는 할머니에게 달의 바다를 소개한다. 실상 달의 바다는 비와 습기와 폭풍우의 바다이며 밝은 노랑이 아닌 회색빛 투성이인 곳이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를 떠올리라고 당부한다. 그런 바다라면  할머니는 영원히 자신의 상실감을 채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고모는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사실 인간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를 떠올리며 꿈을 꾸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 1년에 한 번쯤 내가 회색빛 달의 바다를 떠올릴 즈음, 촘촘하게 짜여져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도록 그렇게 나를 꿈꾸게 해 주면 좋겠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또 우주를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본문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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