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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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우리 나라 역사 중에서도 근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에 가깝다. 교육이 잘못된 탓이다. 그런 처지이니 중국의 근대화에 대해서 아는 바는 그것보다더 더 적은 것이 적어도 내 개인에겐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는 척 해봤자 아는 바가 없기에 이럴 땐 모른다고 말하고 시작하는 편이 낫다. 더불어 옌롄커라는 소설가도 처음 알게되었다는 것을 함께 밝힌다.

  이 책을 처음 보고는 그 두께에 압도당했고 그 다음엔<물처럼 단단하게>라는 제목에 반했다. 시적이다. 압도당한 두께는 매우 자주 등장하는 19금 장면 묘사와 사건 전환으로 인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제목은 소설을 읽을수록 뭔가 느껴졌다. 그 뭔가가 뭔지 알아내는 것 그것이 이 리뷰를 쓰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소설의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없다는 전제 하에서도 소설의 주인공인 가오아이쥔과 샤훙메이의 안쓰러울 정도로 몰두하는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문화혁명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려는 당시 중국의 시대상을 응집하여 보여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들의 행동은 매우 급진적이고 과장되며 전투적이다. 아마 당시의 시대상도 이런 특징으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

  사랑조차도 사랑이라 말하지 않고 혁명의 감정이라고 부르는 이 한쌍의 연인이 벗어나려고 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구시대의 낡은 것들이었다기 보다는 금지된 사랑에 대한 비난이었을텐데 자신들의 사랑을 혁명적 감정이라 정당화함으로써 단번에 벗어나려 했던 것이 소설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아마 이런 조마조마함을 작가는 노린 것일 테지만.

 

흔히들 하늘이 아무리 커도 사랑을 안을 수 없고 땅이 아무리 넓어도 정을 담을 수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혁명의 감정뿐입니다. 혁명가의 감정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산이 아무리 높고 바다가 아무리 깊어도 한눈에 반해버린 혁명가의 감정보다 넓고 깊지는 못하지요.  (34쪽)

 

혁명이 토대라면 사랑은 토대 위에 세워진 집이고, 혁명이 근본이라면 사랑은 근본 위에 핀 꽃이니까요. (107쪽)

 

   바로 이 감정이 이 두 사람이 시대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뭔 사랑이 이리 이유도 크단 말인가. 뭔 사랑이 '오직'이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있단 말인가. 혁명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으리라고 믿고, 또 혁명을 함께 하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된다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우리라. 개인이 제도라는 이름하에 개인의 재산을 파괴하고 목숨을 없애는 것이 어느 시대엔들 용서받을 수 있으랴만은 실제로 어느 나라에서건 그래왔던 역사는 존재했다. 그들 모두는 가오아이쥔이 그러했듯이 자신들의 혁명을 이름삼아 욕망을 배설한 것뿐이다. 그러나 가오아이쥔에게 내가 어떤 동정심이랄까 안타까움이랄까 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가 너무나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맹목적인 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로봇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때때로 그들은 바로 그 맹목성 때문에 내게 이해받기도 했고, 가끔은 아프면서 아름다워보이기도 했다. 자신도 사랑이 먼저인지 혁명이 먼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시대이다.

     돌이켜 보건대 가오아이쥔과 샤훙메이는 혁명가로서의 삶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둘다 그저 혁명 기능이 장착된 그리 중요하지 않은 혁명로봇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애정 기능이 훨씬 중요하게 장착된 로봇이었지만 말이다.  관서기처럼 조금만 더 혁명적 삶에서 수직상승했더라면 그 자신도 자신의 욕망을 알고도 묵인하는 다소 비열한 혁명가라도 될 수 있었을텐데(물론 우리는 그들을 진정 혁명가라고 부르진 않는다.) 아쉽게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들이 혁명을 위해 사랑했노라 생각했을 혁명 로봇으로 살았다(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혁명가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전되었다. 지금도 어느 혁명의 시대에 작은 마을에서 혁명 로봇이 탄생하여 맹목적인 전투력과 맹목적인 사랑으로 스스로를 태우고 있는지 눈여겨보게 된다. 도대체 우리는 이런 로봇같은 혁명가들을 반겨야 하는지 경계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시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대량 생산형 혁명가는 아무래도 경계하는 편이 낫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리뷰의 제목을 '물처럼 단단하게, 얼음처럼 뜨겁게'라고 해 보았다. 겉보기에 물은 덩어리처럼 보이나 그것은 결코 단단해질 수 없는 물질이다. 마찬가지로 얼음에서 김이 난다고 하여 그것이 뜨거울 수는 없다. 이는 가오아이쥔과 샤훙메이의 모든 사상과 행동이 혁명을 위한 것처럼 포장하였으나 결코 그것은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는 것일 수 없는 것을 비난한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사상과 행동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허무한 노릇이라는 허탈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차라리 사랑을 위해 혁명도 내던졌더라면 그들은 좀더 편한 삶을 살았을텐데 그놈의 혁명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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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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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족에 대한 책을 연이어 두 권이나 읽다니, 심지어 그 책들을 무척 몰입해서 읽다니. <해피 패밀리>의 경우 오늘 새벽 12시를 넘어 읽기 시작해서 3시경 '강희숙(1951~)'을 읽다가 잠이 들어 아침에 마저 다 읽어버렸다.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떤 거리 두기를 두고 읽으려고 했단 말이다. 어제 통독으로  <감염된 언어> 를 읽고 나서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에 나를 적응 시켜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책은 '아, 소설이구나!'를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책을 읽기 전 표지가 무척 맘에 들었다. 아무도 있지 않은 하얀 거실, 그 곳에 유난히 노오란 꽃과 꽃병. 왠지 노란색은 질투를 뜻하는 꽃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제목 아래 노란점 세 개. 그것이 말줄임표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가족에겐 어떤 말하지 못할 사연은 다 있는 법이니까.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후에 가장 먼저 떠오른 느낌은 '마음이 아프다.'라는 것이었다. 아마 소설 초반부터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그 일'에 대하여 어느 순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것은 아니기를 바랐다. 남사스럽다거나 그런 마음이 아니라, 그건 너무 아프지 않는가. 살아가는 민형에게 그건 목에 키를 걸고 살아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가 술을 많이 마셔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도, 부모에게 냉담한 것도 너무 아프지 않은가 말이다.

 

말줄임표를 떠올렸다. 해피한 패밀리가 정말 있는 건가? 민형의 장모는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는 말줄임표 안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다. 지현과 정석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외의 식구(?)들은 정말 행복한 걸까.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그들으르 '해피 패밀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말줄임표 안에서 행복한 가족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처음엔 진취성과 거리가 먼 민형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삶의 태도를 읽다보면 나를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 그처럼 자학적인 사람은 못된다.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으로 보기엔 민주를 닮은 것도 같지만 그러기에 난 또 소심하다. 하지만 민형의 부모의 모습을 합하면 왠지 나의 아버지일 것도 같고, 현주와 영미를 합하면 왠지 나의 어머니일 것도 같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 소설 속의 가족들은 말줄임표 안에 들어가는 모든 가족들의 본 모습을 조금씩 나눠가진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치밀함이 보인다. 처음엔 이런 형식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만 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으로는 '탁월하다.'였다. 어떻게 더 이상?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흥미롭다. 그리고 읽을 때의 몰입과는 다른 느낌으로 읽고 난 후의 느낌이 살아난다. 사실 책을 읽고 곧장 리뷰를 써도 주인공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은 나로서는 인물들의 이름과 사연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놀랍다. 당분간 되새김질 하지 싶다. 그들은 각각 내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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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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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마녀는 <오즈의 마법사> 나오는 동쪽마녀와 서쪽마녀 그리고 영화 <프랙티컬매직>에 나온 귀여운 마녀들 수준이다. 그런 마녀들 사이에도 좋은 마녀와 나쁜 마녀가 있는데, 왜 '마녀 사냥'이라는 말은 마녀를 부정적 대상으로만 여기게끔 의미 붙여진 것일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우리의 선택은 어떤 프레임에 따르는 것일 뿐 이성은 큰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 프레임은 언어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마녀 사냥'이 어떤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기 보다는 그렇게 몰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언어에 더 큰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그럴 듯 하다. 인간의 귀가 얼마나 얇은지는 인간으로 한 30년 이상 살아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말이니 굳이 왜 그럴 듯 한지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저자는 '마녀 사냥'의 활성을 인쇄술, 근대 과학의 발달 시기와 연관짓는다. 종교 맹신의 시대나 완벽 과학의 시대에는 '마녀'가 끼여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힘이 모호하고, 과학 또한 아직 기반이 잡히지 않을 때 그 둘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마녀의 존재가 필요해진다는 말이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착한 마녀도 이 때에는 나쁜 마녀로 몰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한 논리일 수 있다. 우리가 지금도 인터넷 신상 털기 같은 행위로 있지도 않는 마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도 무척 혼란스럽고 틈이 많은 시대인가 보다.

 

책에서는 마녀와 '마녀 사냥', 그리고 '마녀 프레임'을 이야기하며 현재 우리 나라의 예를 들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예가 마지막에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좀더 본격적으로 제시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마녀 프레임'을 왜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충분히 되었다고 본다.

 

지금은 과학도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였고, 사법 체계도 확실하니 개인이나 사적 집단이 불법적으로 자행하는 '마녀 사냥'은 없어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불법에 가깝게 '마녀'를 색출하곤 하는데 이 때 활용되는 것이 인터넷 미디어이다. 저자의 말처럼 역시 언어 활동에 의한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마녀를 색출하기 위해 말을 퍼뜨린 사람은 아무런 피해가 없는데 마녀로 지목받은 사람은 정신적 피해, 더 나아가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현대판 마녀 사냥'이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마 인터넷 상에서 펼쳐지는 언어 활동에 대한 사법 체계의 혼란 혹은 틈이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양이니 여전히 '마녀 프레임'은 유효하다 하겠다.

 

조만간 '인터넷 마녀 사냥'도 그 어떤 확고한 논리적인 체계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마녀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마녀'를 지목하고 처벌하는 때가 올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이런 프레임 자체를 해소하는 방안을 소개해주면 어떨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저자가 '마녀는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 얼빠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122쪽)고 말해주었지만 얼빠진 사람들은 아무래도 앞으로도 쭉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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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페이지 책 - 찢고 낙서하고 해체하는 발칙한 책 읽기
봄로야 글.그림 / 시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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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신선하다. 뒤표지 김중혁 작가의 추천사처럼 봄로야의 낙서는 '차원이 다른 낙서'이고, 내가 보기에도 그녀의 책읽기는 '차원이 다른 책읽기'이다, 나와 비슷한 책읽기 방법을 소개한 책을 읽다보면 공감은 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시도조차 해 본 적 없는 책읽기의 방법을 보자하니 이 책이 너무 예뻐보이고 설레게 된다. 이 사람은 내가 죽는 날까지 해 볼 수 없는 일을 맘껏 하는 사람이구나 싶은 마음에 대리만족도 느끼고 동경하는 마음도 생긴다.

 

일단, 목차부터가 예쁘다.  물론 이것이 정식 목차는 아니지만, 차라리 정식 목차가 이런 식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개인적으로는 김중혁 작가의 <미스터 모노레일>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 책의 목차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새롭다. 하지만 목차를 넘어 그녀가 책을 읽었던 생생한 경험의 흔적들을 만나자면 새로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아, 이렇게 책을 읽는 사람이!

 

사실 책을 곱게 봐야 한다는 어릴 적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서른이 될 때까지는 책에 밑줄도 긋지 못했다. 그래서 옮겨적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내 책을 내 맘대로 하지도 못하니 이게 내 책인가 싶은 생각에 요즘엔 밑줄도 쫙쫙 긋고 생각도 적고, 때때로 낙서도 한다. 하지만, 봄로야의 책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필요한 부분의 문장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자신의 낙서로 가득 채우거나, 싹싹 검게 칠해 버린다. 더구나 그 페이지를 찢어서 보관하는 모양이다!

 

 사실, 겁도 없이 따라해 볼까 하는 마음도 먹었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에는 도리질을 치는 거다. '낙서는 어떻게 좀 한다 치더라도 찢는다고?' 그건 아마 평생 불가능하지 않을까? 봄로야는 이렇게 소심한 독자에겐 그저 경이의 대상으로서 대리만족을 듬뿍 줄 뿐이다.

 

그래도 만약 해 본다면? 나름대로 협상안은 그 페이지를 복사해서 한 번 해 본다는 것인데, 좀 번거럽고 억지같아 하진 않았다. 그래도 정말 맘에 드는 페이지는 복사한 다음 낙서도 하고 꾸며도 본 후에 보관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만간 한 번은 해 볼 것 같다.

 

 

작가 봄로야는 여러 가지 예술 장르의 일을 한다고 한다. 그 중엔 물론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 낙서들은 그저 낙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로 보이고, 그것이 보기에 좋기도 하다. 또한 그런 능력 덕분에 이 책 자체가 참 예쁘다. 책을 예쁘다고 산 적은 별로 없는데 최근에는 예쁜 책들이 눈에 뜨인다.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물질로서의 책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의 전환이 되고 있는 요즘이다. 글자만 꽉꽉 들어차고 그 얘기가 그 얘기 뿐인 '책에 관한 책'들만 읽는 것 보다는 이렇게 창조적 가치가 빛나는 책들을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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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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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 내 기억에선 존재하지 않는 인물. 성별도 시대도 업적도 삶도 그 어느 것도 몰랐던 상태.

시오노 나나미 : 내 기억에서 그녀의 서양사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친다. 하지만 그녀의 에세이에서는 왠지 모르게 허풍과 자기 과시가 느껴져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던 상태.

 

이런 상태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시오노 나나미의 이야기를 읽었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이름의 사내의 이야기.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이 제목을 누가 지었을까? 우아한 냉혹, 이 말은 체사레 보르자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야망이 있되 경망스럽지 않았고, 행동하되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의 냉정함을 새삼 알게 해 준다.

 

서로가 속이고 있는 판인데, 상대편이 속고 있지 않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p158

 

교황의 아들로 태어나 그 보살핌 속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사레 보르자는 과감히 선택하였다. 편안과 평화보다는 지배와 군림을 원했던 그의 삶은 그가 원했던 대로 누군가에겐 군주였고 누군가에겐 약탈자였으나 편안하거나 평화롭지 않았다.어쩌면 그의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평화로웠다면 그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졌을 수는 있되, 비극적 아름다움을 갖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 점을 시오노 나나미는 애정을 가지고 연구한 듯 하다.

 

어디선가 시오노 나나미가 체사레 보르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왜곡되게 쓴 것이라고 비판한 글도 있었지만 아무런 지식을 갖지 않은 내가 보기에 시오노 나나미는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여 쓴 것 같았다. 오히려 최근에 나온 책들보다도 더 깔끔한 글의 투가 돋보였다. 이 책이 1937년생인 시오노 나나미가 30살에 쓴 책이니 이미 45년도 넘은 책이라니 그녀의 생명력만큼이나 이 책의 생명력도 놀랍다.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을 45년이 넘게 전 세계에 기억하게 한 그녀의 필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서양사책은 매우 박진감이 넘친다. 복잡한 이름이 정말 많이 나오는 로마사의 이야기 세계에서도 책장을 열면 기필코 다 읽을 수 밖에 없는 그녀의 힘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적지 않은 실망감을 본 터라 그녀의 에세이를 더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남자들에게>는 좋았음) 그녀가 오랜 시간 공들여 쓴 서양사 이야기엔 다시금 빠져들 것 같다. 한길사에서 르네상스 저작집으로 나온 시리즈를 찬찬히 다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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