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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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내가 공항에 있다면 서점에 들어가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살 것이다. 구동치가 그랬던 것처럼 대기실에서는 읽지 않은 채 기내에서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기실에서 읽지 않은 이유는 구동치처럼 환불하고 싶어질까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읽는 흐름이 끊기는 것이 싫어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과장을 하자면 그러다 비행기를 못탈지도 모르니까^^

 

김중혁의 단편들을 좋아했다. 아니 어쩌면 김중혁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장편들에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내가 기대하던 목소리와 달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장편 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읽으면서 구동치를 만날 때마다 김중혁 작가를 떠올렸고, 그런 구동치의 모습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작가의 많은 부분이 들어간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작가가 가진 남성상에 대한 환상까지도 다 포함된 피조물이 바로 탐정 구동치이다.

 

탐정 구동치가 주인공이고 사건 의뢰를 통해 진행되는 스토리가 있으니 이 소설을 '탐정소설'이라고 부르면 될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얼마 전 읽었던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단지 탐정 소설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물론 구동치와 필립 말로는 많이 다르다. 필립 말로는 그야말로 냉철하고 건조하지만 구동치는 냉철한 척 하지만 맘이 여린 남자이다. 정소윤의 눈물에 대응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두 작품이 그저 탐정 소설이라고 국한되어 불리기엔 문장이 참 좋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빨간 책방'에서 호평받은 바 있듯이 대사도 인상적이지만 불쑥불쑥 설명하는 글에서 작가의 잽이 훅 들어왔다가 훅 나간다.

 

구동치가 테니스를 배우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나를 고쳐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물어뜯거나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61-62쪽)

 

새로운 걸 쓰려면 계속 지워야 해요. 그렇게 지우고 지우다 마지막에 남는 것들, 그런 것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81쪽)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구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328쪽)

 

외한내온(外寒內溫)의 탐정 구동치의 모습이 왠지 다른 사건과 함께 짜잔 하고 나타날 것만 같은데 작가는 그럴 계획이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그것은 작가가 선택할 몫이니 왈가왈부할 것이 못된다. 다만 이리 탐정이 우리 영화에서 자주 그려진 형사의 모습을 하고 있어 한 작품에서 사라져도 딱히 아쉬울 것이 없다면 탐정 구동치는 그와도 다르고 홈즈나 말로와도 다르니 그를 한국형 탐정의 대명사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이 한편으로 만족해야 한다니 그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빨간 책방'을 듣자하니 작가가 남녀 관계를 묘사 혹은 서술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았다. 나 역시도 그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고 정소윤과의 그 어정쩡한 관계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한유미와 송미영의 존재는 의아하지만 사실 소설을 읽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던 지라 그냥 '작가가 그렇다면 뭐' 그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강혁의 존재가 너무 늦게 생뚱맞게 나와서 마치 미니시리즈 연장 결정에 급히 투입한 인물 같아 그 점이 아쉽다. 언젠가 작가님이 이 소설을 전면 개정해서 다시 써 주시면 더 멋진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좋은 것은 신기하게 뭔가 완벽하지는 않은데 다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매력 있다, 구동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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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
하세가와 히로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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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은 책 중에 셰익스피어에 관한 일본 저자의 책이 있었다. 평소엔 일본 저자의 책이라고는 시오노나나미의 역사물과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추리소설만 읽은 나로서는 일본 인문학 책이 낯설었지만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책의 주제에 굉장히 집중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또한 얼마 전 매우 인상적으로 읽은 [잘라리 이 기도하는 손을]의 저자 이타루 사사키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 있는 터였다. 그러하기에 이번에 읽은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의 저자 하세가와 히로시에 대한 기대감과 궁금증은 그를 전혀 알지 못함에도 읽기 전부터 많이 높아져 있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끄덕끄덕! 덕분에 일본 인문학서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과 기대가 높아졌다.

 

 하세가와 히로시는 학계와 절연하고 집에서 책 읽고 시민들과 함께 공부하는 헤겔 전문가라고 한다. '절연'이라는 말에서 그의 곤조가 느껴지지 않는가? 고약한 성질일 것 같다만 독자로서 보자면 이런 성질의 작가들의 글이 매력적인 경우가 많고 역시나 이 책에서도 저자의 매력은 글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흔히 책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칭찬과 감탄 일색인 경우가 많다. 이 책처럼 추천하고픈 책을 저자가 골라놓고 그 책에 대해 쓰는 기획 형식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하세가와 히로시는 달랐다. 자신이 직접 고른 책에 대하여 좋은 점은 과감히 감탄하고 그렇지 못한 점은 사정없이 내친다.

 

[팡세]는 파스칼이 자기가 살던 시대와 제 자신의 삶의 방식이 빚어내는 부조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날카롭고 깊이 있게 분석한 지성의 책이다. 파스칼의 신앙심을 공유하지 않는 자에게도 그 씩씩하고 굳센 지성의 말은 강한 호소력이 있다. 언제 읽든, 어디를 읽든,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팡세]이다. (160-161쪽)

 

내게 [논어]는 경의를 강요하는 성가신 책이다.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주제넘은 책이라 생각한다. 모처럼 명구나 금언을 만나도 설교투가 흠집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78쪽)

 

하세가와 히로시의 책 소개를 읽다보면 그가 굉장히 냉철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좋게 읽은 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도 그는 감정적으로나 낭만적으로 그 책을 추켜세우지 않는다. 아주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를 내세운다.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소개하는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이 책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구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구체적으로 이 책이 왜 좋은지 정리를 해 준다. 확인사살 같은 것이다. 그 확인사살을 통해 독자는 그야 말로 '지금 당장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2부 첫머리의 세 장을 일컫는다.) 세 장이 없었다면 [죽음의 집의 기록]은 다소 깊이가 떨어지는 작품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는 휴머니즘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세 장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집의 기록]은 정녕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인 것이다. (144쪽)

 

 

이 말을 읽기 전까지 유보되었던 내 입장은 이 몇 줄의 글을 읽고 '읽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바뀐다. 공교롭게도 다섯 개의 주제에 각 세 권의 책이 소개된 중에 읽고 싶다고 별을 표시한 책이 각 주제별로 한 권의 책씩이었다. 총 다섯 권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다섯 권의 책만 읽게 되어도 얼마나 유의미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굳이 한 권씩 정하고 별을 표시한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하세가와 히로시의 보이지 않는 권함이 내게 침투한 모양이다. 당연히 그 목록 안에 [논어]가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전까지 [논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가 [논어]의 설교투를 마뜩찮아 했듯이 책을 읽다보면 군데군데 다른 책에도 비판의 내용이 있고 때로는 그 비판이 해당 책을 읽고 싶지 않게도하고, 때로는 그 비판 때문에 해당 책을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작가에게 이렇게 휘둘려도 되나 싶을만큼 그의 글이 단호하다. 어쩌면 이것이 권위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으론 루소의 [사회 계약론]을 제외하곤 그리 책을 권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다섯 권의 책을 찾아보게 된다.

 

[리어 왕], [향연], [죽음의 집의 기록], [팡세], [색채에 관하여]를 당장 온라인 서점과 도서관을 이용하여 찾아보았고 우연히 들른 북카페에서 [향연]과 [리어 왕]을 마주했을 때(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라는 말도 그제야 귀에 걸렸을 때) 읽고 싶어지는 욕구가 더 강해졌다. 책은 누군가의 매력적인 글만으로도 불쑥 내게 다가오고, 그 다가옴과 동시에 다발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우연이 그책을 읽게 만든다.  뒤 책날개를 보니 다음 출간 예정작도 일본 저자의 책이고 제목보다도 부제가 나를 더 유혹한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소크라테스에서 샌델까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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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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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사회]를 읽고 나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회의가 들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결국 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인지를 묻게 되었다. 비록 그 이후에 눈에 보이는 나의 행동의 차이는 별반 없었을지라도 그 책의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달랐다. 아주 작은 요소일지라도, 그것이 눈에 잘 띄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시간의 향기]를 사두었지만 읽지 못했는데 [투명 사회]가 나와 먼저 읽었다. [시간의 향기]가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피로 사회]의 다음 책으로 [투명 사회]는 순서가 적절해 보였다. 후자를 읽으면서 전자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자기 착취로 드러나는 피로 사회와 자기 조명으로 설명되는 투명 사회는 맞닿아 있었다.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이되 그 행위가 결국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감시하고 채찍질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이 공감이 되었다. 이미 투명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니 어찌 공감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투명성을 외친다. 정치의 투명성, 지출의 투명성, 감정의 투명성까지. 우리가 이토록 투명성을 부르짖는 이유는 우리의 사회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저자는 꼬집는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가 투명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말인데 무척 일리가 있다. 강연회에서 직접 강연까지 듣고 보니 더더욱 공감이 되었는데, [피로 사회]이후 [투명 사회]를 거쳐 이후에 출간될(독일에서는 이미 출간된) 저서들에서도 생각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현대 사회에 대하여 집요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하는 신뢰감이 생겼다. 

그의 생각에 공감하더라도 혹자는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것이 어떤 효용을 따지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떤 물음을 묻는 것,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개개인이 혹은 사회 전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부분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고 공감을 했다. 일일이 밝히기 어려울 만큼 이 책에 대한 공감과 동의가 넘친다. 아마 저자의 다음 책들까지 모두 다 읽게 될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들려주는 책은 굳이 찾아 읽지 않아도 넘치므로, 나는 굳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책들을 찾아 읽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행동 패턴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핸드폰을 두드리는 일을 여전히 할 것이다. [피로 사회]를 읽고도 자기 착취를 멈추지 않았듯이 [투명 사회]를 읽었다고 하여 자기 조명을 끊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난 전과 후는 다르다는 것을 나만은 안다. 아주 사소한 저항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접촉을 하는 기회를 조금씩 늘려가야겠다.

 

* 이 리뷰는 지난 3월, 한병철 저자와의 만남 직후 쓴 리뷰로 그때의 리뷰를 뒤늦게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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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4-26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누가 저에게 왜 철학책을 읽냐고 하더군요. 실생활에 적용할 수 없지 않느냐는 말인다. 할 말이 없더군요. 철학을 계발서로 이해하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렇게혜윰 2014-04-26 16:06   좋아요 0 | URL
실생활에 적용하는 게 별건가요? 제 생활에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를테면 적용이지 않을까요? 소설을 통해서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끔하는 책들이 많지만 철학책은 좀더 명확하고 깊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것 같아요, 좀 어렵지만요^^:
 
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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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즐겨 읽는 독자는 아닙니다만 20대 초반 많은 분들이 그러셨듯 [상실의 시대]는 어떤 전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몇 번 찾아 읽었지만 그때의 느낌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가의 성향도 바뀌는 건가보다 했어요.

 

 

[중국행 슬로보트]는 [상실의 시대]보다 더 앞선 작품이고 단편이기에 이런저런 시도들이 엿보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매력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것은 [상실의 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작품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작가가 공들여 다시 수정을 보아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는 '다시 하루키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입니다.

 

늘 그렇듯 책을 읽으면 좋아하는 부분에 밑줄을 치고 옮겨 적고 그럽니다. 요즘엔 불안을 해소하려는 듯 허겁지겁 책을 읽고, 그도 모자라 손도 많이 놀립니다. 이 책도 책을 받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밑줄을 치니 생각도 많아지고 그랬습니다. 가령,

 

심지어 그들에게는 이 문제가 절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다음 광고까지 시간을 때우려고 떠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옆에서 훌쩍이는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너는 전혀 잘못한 게 없다고,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와 같은 구절들. 그동안 내가 쏟아낸 것들이 이 문장들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더 긴 부분들은 공책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대한 부분들이 특히 많아 발췌해 봅니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핟.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중국행 슬로보트>

 

"그건 어렵죠. 한번 생겨난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존재합니다. 기억과 마찬가지예요. 가령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잖아요. 그런 것과 같죠."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말끔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써도 문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결국에는 문맥 같지도 않은 것으로 바뀐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

 

기억이라는 건(특히 나의 기억은)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작가의 말>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와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좋았지만 <캥거루 통신>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요.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런 내 희망을 방해하고 있어요. 몹시 불쾌한 사실 아닙니까? 불합리한 압박 같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희망은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죠.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군데도 아니고 단 두 군데 입니다. 

어쨌든 나는 불완전함을 지향했어요.  <캥거루 통신>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전 이 작품들이 작가건 독자건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말을 걸게 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하루키의 문장은 매력이 많아서 이렇게 옮겨 적고도 문득 넘기면 불쑥 눈에 들어오는 짧은 글들도 있어요. 동네 엄마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김에 책갈피를 끼워주기로 했어요.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에 차 있는 때에 조잘조잘 흥을 내며 리뷰를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책은 어느 때이건 누군가를 위로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공감이라도요. 모두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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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4-2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 - 가 들어 있는 다른 작품집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를 읽어서 님이 읽은 것과 겹치는 것 같네요.

기억이라는 건(특히 나의 기억은)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작가의 말>
이건 제가 깊이 깨달은 적이 있어요. 제 기억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예전의 일기장을 보고
알았답니다. 일기장에 쓴 그때의 정황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정황과 아주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일기장이 없었다면 제 기억이 맞는 것으로 알고 살 뻔했지요. 이래서 오해라는 게 생기기도 하죠.

사회 전체 분위기가 슬픔에 잠겨 있어서 저 역시 조심스럽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어요.

그렇게혜윰 2014-04-25 17:17   좋아요 0 | URL
책을 빌려준 터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번 작품이 대폭적인 작가의 수정이 있었던만큼 몇몇 작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물론 어떤 작품은 거의 수정이 없었구요. 그게 기억이 명확하게 안나네요^^::

오늘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진실과 기억 사이의 간극은 허구로 꾸며지게 된다,

구요. 그런데 그 허구가 있기에 삶이 풍성하다는 의미로 쓰여졌어요. 공감이 가더라구요.
 
반복 문학동네 시인선 51
이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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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면서는 많이 울었다.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준규의 시집 [반복]을 읽으며 떠오른 단어는 <일어나다>이다. 반복된 단어 혹은 문장들이 여러 번 반복 될 때마다 나는 그 시들이 일어나 내게 가까이 오는 것 같고, 마치 시 속의 사건들이 일어나 내가 그 안에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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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2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으로 와닿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일어나면서
수많은 생각을 낳았겠지요..

그렇게혜윰 2014-04-22 07:26   좋아요 0 | URL
내 안에서도 수많은 생각이 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