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 1
이루리 지음 / 북극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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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닝햄, 레오리오니, 이보나흐미엘레프스카, 이수지, 이혜리, 피터레이놀즈,유리슐레비츠, 모리스샌닥, 데이비드스몰, 또 누가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작가들 말이다. 이런 기호 때문에 대체로 책꽂이에 한 작품씩 있는 작가들에 비해 이 작가들의 책은 적게는 3권 많게는 8권씩 갖고 있다. 구매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책 취향이 많은 부분 엄마의 취향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아이와 함께 책 고르는 시간이 많아지고, 아이 역시 나름의 선택 기준이 생기기에 그 영향력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그림책으로 아주 오랜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그 힘의 기울기가 조금씩 변하게 된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책을 잘 고를 때까지 엄마는 곁에서 함께 있어주면 된다.

 

이 책이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이라고 해서 이 책을 요즘 많이 출간되는 '아빠 육아서' 중 하나로 봐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루리 작가는 엄마가 아닌 아빠이지만 이 책의 정체성은 '함께 그림책 여행'이지 '아빠'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든 아빠든 '함께' 그림책 여행을 떠난다는 것, 참 낭만적인 일이다. 앞서 말했듯 처음엔 여행의 키를 엄마나 아빠가 가져야겠지만 차츰 그 키를 아이에게 넘겨주기 위함이 이 여행의 목적이다. 물론 함께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것은 여행의 본래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이 즐거운 여행 안내서로서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은 무척 마음에 든다. 책에 관한 책들이 대체로 쓴 사람의 성향에 의존해야하기에 그 성향이 맞지 않으면 읽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님과 왠지 성향이 맞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격이 좀 높게 형성되어 있는 것만 제외하면 흠잡을 곳이 별로 없다.

 

요즘 아들은 공룡의 세계에 빠져 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다른 남자애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공룡 사랑에 빠졌다는데 내 아이는 그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사랑은커녕 질색팔색을 해서 '그 과'가 아니가보다 하던 터였는데 일곱 살이 되어 갑자기 '내 사랑 공룡'이 되어버렸다. 빠지면 질릴 때까지 하는 성격인지라 지금 좀 어려운 책들을 읽는 걸 보니 곧 나올 때가 되었다면 그간 공룡책을 사들인 것만 60권을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공룡책들이 대체로 지식책인 경우가 많아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그림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책을 사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고른 책들이 데이비드 스몰의 [공룡이 공짜]나 장성훈의 [네 등에 집 지어도 되니?]라는 그림책들이다. 그 외에도 여러 그림책들을 골라주긴 했는데 좋아한 것도 있고 별 관심이 없는 것도 있다. 관심이 있던 책들은 위의 책들처럼 내가 공들여서 골라준 책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제목만 보고 고른 책들이다. 아이와 그림책 여행을 할 때, 엄마의 안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다. 그런 안목을 길러주는 데에 이루리 작가의 그림책 여행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높은 가격을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을 그림책의 일부를 수록한 그림들이 그러하다. 각 작품마다 두페이지씩을 할애하여 시원하고 품질좋게 작품을 삽입했다. 59편의 그림책을 다루었으니 59작품 이상이 실린 그림책 도록으로 보아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책 도록으로 보아도 무방할 그 페이지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림책에서 그림은 글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므로 시원하게 펼쳐진 그림책의 일부를 만나는 것은 그림책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큰 기준이 된다.

 

 

59편의 그림책 이야기를 하면서 글이 아닌 그림으로서 보여주어야 옳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아마 작가 자신이 그림책 작가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이 여행이 즐거웠던 것은 그림책들을 분류한 기준이다. '제1장 우리 가족 이야기, 제2장 내 친구 이야기, 제3장 우리 아이가 자라는 이야기, 제4장 이야기와 상상력, 제5장 우리 아이가 사는 세상 이야기, 제6장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로 분류되어 엄마나 아빠가 그림책을 고를 때 고민의 과정을 좀 덜어준다. 이런 기준 자체의 장점도 있지만목차나 부록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 목차를 통해 알아보고 싶은 책을 선택하고 페이지를 펼쳐 여행을 먼저 한 뒤 부록을 통해 책을 구하여 아이와 새로운 여행을 떠나게 하는 구성이 기본에 충실한 느낌이 들어 신뢰감이 높아졌다. 가볍지 않은 것이다. 사실 시중에 나오 수많은 책에 관한 책들 중 가볍기가 이 리뷰처럼 그저 한 장의 종이만큼 가벼운 느낌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무거운 척 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 책은 무거운 체 하지 않되 가볍지 않아 좋다.

 

아마도 윌리엄 스타이그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를 좋아하는 듯한 작가의 취향도 엿볼 수 있고(물론 이 취향이 나와 같지는 않지만 글쓰는 사람이 자신의 책에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읽은 수많은 그림책들 중 두루두루 신경쓰며 골랐을 그 수고로움도 목차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작가와 공감을 한 것은 이러한 작가의 취향이나 수고로움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림책을 대하는 마음이 고운 한 작가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책은 그런 사람이 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좀 먼 이야기로까지 생각이 뻗쳤다. 이루리 작가와 북극곰 출판사의 콜라보레이션이 괜찮다. 좋은 안내서가 될 것 같다. 그래도 가격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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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 구효서 장편소설
구효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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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봤을 땐 윤동주를 떠올리지 못했다, 전혀. 아마 여러 온라인 페이지를 드나들며 주워들은 것 같다, [동주]가 윤동주라는 사실을. 물 속에 둥둥 떠 있는, 출구가 열렸지만 그곳으로 나가려는 어떠한 의지도 찾아볼 수 없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저 남자가 윤동주라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좁게는 둘, 넓게는 넷이다. 좁게 말하자면 느즈막이 모국어를 배워 그 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아이누족인 이타츠 푸리 카와 한국인(조선인) 김경식의 글이고, 넓게 말하자면 어린 이타츠 푸리 카인 요코의 목소리와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작가 구효서의 목소리가 있다. 나머지 셋은 작가의 목소리 그 안에 있다는 점에서 사실 구효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각 장의 제목들이다. 저토록 많은 말들을 적었다며 '작가의 말'은 생략 혹은 간략할 만도 하지만 작가는 그마저도 잔뜩 힘을 주어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어가 가지는 힘, 언어로 인한 정체성의 완성에 대한 소설이다.

 

마을의 수호신당에서 양부모가 주워다기른 아이 요코, 양어머니와 요코에게 잔인한 양아버지와 그에게 비굴하고 무력한 양어머니를 원망하며 살아온 요코는 잔망스럽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될만큼 사악한 구석이 있었고 가엾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될만큼 처참한 아이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주가 죽기 전까지의 일이다. 어쩌면 동주의 죽음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는 그녀이지만 그의 죽음이 일본에 대한 저항이 아닌 시인의 언어를 말살하는 데에 대한 저항이었음을 아는 순간부터 언어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시를 능지처참하는데 어찌 시인이 참멸을 면하겠느냐. 감히 시인의 손으로 제 시를 훼손케 하다니, 극악하고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육살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러다 문득 물었다.

요코가 본래의 이름이더냐?

하도 갑작스러워 나는 딸꾹질하듯 대답했다.

네.

 

요코는 요코가 기억하는 한 자신의 첫 이름이었지만 그것이 본래의 이름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요코는 알았을 터였다.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의 의미는 글자 몇 자의 의미를 훨씬 넘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아마 그때부터이지 않았을까, 요코가 자신의 '본래'를 찾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그녀는 이타츠 푸리 카가 되었다.

 

이타츠 푸리 카의 글을 읽고 친구 시게하루의 배신을 겪은 겐타로는 어떻게 김경식이 되었을까? 말하지 않아도 그 속을 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었다. 같은 일을 하던 시게하루가 어느 날 사라지고 그가 누구보다도 더 걱정이 되었던 겐타로는 그를 찾아 헤맨다. 그 모험의 길이 그를 이타츠 푸리 카에게로 닿게 하였다. 그 사이 돌아온 시게하루에게 왠지 모를 낯섬이 느껴지지만 그 까닭은 이타츠 푸리 카의 번역된 글을 읽고 나서이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재일교포 3세 겐타로, 그는 이타츠 푸리 카의 윤동주에 대한 글을 읽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한다. 같은 땅에서 살고 같은 언어로 말한다고 하여 결코 시게하루와는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그 역사적인 사연이 너무 국가주의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꼭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씁쓸함이 있었다. 결국 겐타로 역시 자신의 '본래'를 찾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한글로 이렇게 글을 남긴다.

 

윤동주를 사이에 두고 요코와 겐타로가 이타츠 푸리 카와 김경식이 되는 그 과정이 [동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윤동주가 간도(사이의 섬)에서 살았던 경험과 비슷한 종류의 성장기이다. 애시당초 명확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별 고민없이 그저 살면 되겠건만 세상에 그렇게 명확한 일이 얼마나 될 것인가. 다만, 불명확한 그것에 괴로워하거나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자신의 근원을 파헤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 스스로 해설이라고 칭한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외부의 자극이든 내부의 발현이든, 두 개 이상의 세계를 궁구하여 스스로를 그 '사이'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해지는 까닭이다. 보통 용기로는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요코가 동주의 훼손된 시를 찾고 그것을 없애며 아이누어로 자신과 동주에 대한 이야기를 공들여 적어가는 그 마음과 같은 것이다. 실제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 바로 그녀의 그 마음 때문이다.

 

저녁마다 나는 글을 적어나갔다. 동주를 불러다 마주 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형사에게 끌려갈 때까지. 열다섯에 적어놨던 요코의 서툴고 짧은 글을 재료 삼아 동주를 회상했다. 이따금 그는 방안의 어둠을 타고 내려와, 글 쓰는 나를 지켜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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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타츠 푸리 카가 보기에 동주의 죽음은 저항인의 저항적 죽음이 아니라, 시인의 시적 죽음이었다. 그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은 연약한 이의 성정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가차 없는 것들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고요한 자기 응시여다. 굳이 저항이었다고 한대도 그것은 국가나 민족 차원의 것이었다기 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모든 여지없는 것들에 대한 의도적 머뭇거림이었으며 성찰적 저항이었다.

 

작가 구효서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 작가로서 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마는 인정받는 문단의 중견 작가가 최근에야 이런 고민으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역시 자신의 어느 '사이'에서 많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라는 결론을 내려본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정을 받고 모든 것이 그저 가는대로 내버려두어도 될 것만 같은 사람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세운다는 것, 그것은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이유가 된다. 어린 요코와 이타츠 푸리카, 김경식의 글을 각각의 다른 글씨체로 교차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윤동주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엮되 하나의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랩소디 인 베를린]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카리스마가 빵빵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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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집으로 나오기 직전 RHK 출판사에 들렀다가 구입한 책이다. 사실 마이클 코넬리의 명성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선 어떤 책을 고를지 몰랐지만 마침 이 책이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의 첫 책인데다 판매대에 착한 가격으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한번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샀다. 500쪽이 훨씬 넘는 두꺼운 책이었고 그날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상태라 지하철에 서서 가는 입장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사실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이상하게 좀더 얇은 책이 아닌 가장 두꺼운 이 책을 펼치며 집으로 향했다.

 

표지의 사내 어깨에  땅굴쥐를 그린 문신을 봤지만 그저 지나쳤고(아마 미키마우스가 그려졌다고도 아주 잠깐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블랙 에코'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크게 궁금해하지 않으며 해리 보슈를 먼저 만났다. 사건 접수가 되는 날인 '5월 20일 화요일'을 제목으로 하는 첫 장의 앞에 쓰인 두 줄의 글귀도 지금에 와서야 다시 확인하였다. 영어로 된 제목을 즉각적으로 한국어로 환원시키지 못하는 나의 우둔함에 실소가 나왔다.

 

땅굴은 검은 메아리

그 안에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형사 해리 보슈는 베트남 전쟁 당시 땅굴쥐로 활약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5월 20일 화요일 그가 사고를 접수받은 현장인 굴에서 발견된 시신의 주인공인 메도우스는 그와 함께 전쟁에서 땅굴쥐로 참전한 전우였다. 그리고 그의 새 파트너이자 사랑의 감정이 싹튼 FBI의 앨리노어 위시의 죽은 오빠도 베트남 전에 참전하였고, 그들이 함께 수사 중인 메도우스 사건은 1년 전 웨스트랜드 안전금고 도난사건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사건은 땅굴쥐로 보이는 범인들이 땅속에서 안전금고를 모두 털어간 사건이다. 그야말로 땅굴쥐에 의한, 땅굴쥐를 위한, 땅굴쥐의 사건이다. 범죄를 계획한 것도 땅굴쥐(이 점은 스포일러의 여지가 있으므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겠다.), 범죄를 실행한 것도 땅굴쥐, 범인을 추적하는 것도 땅굴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건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베트남 전쟁과 땅굴쥐의 존재가 점점 커져가는 것이 굉장히 놀랍다. 내가 전혀 모르는 존재가 이토록 막강한 존재감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묘한 감정이었다.

 

사건을 해결하는 뛰어난 살인사건전담 형사인 해리 보슈는 분명 뛰어난 수사관이지만 부패하고 자기 밥그릇 챙기기 바쁜 경찰 조직 내에서는 썩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물론 그러하기에 독자인 우리들과는 썩 잘 어울린다. 아직 해리 보슈를 더 만나봐야 알겠지만 그가 탐정이 아닌 형사로서의 위치를 고수하는 면에 알 수 없는 공감을 느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 덕분에 언제나 내사과 등 경찰조직내부에서 감시와 질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그 피곤한 일상이 안되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본인은 그마저도 선택한 것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하지만 말이다. 아닌가? 하긴 소설 속에서 그들은 해리 보슈의 손바닥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담이 작은 나는 사실 아슬아슬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데 해리 보슈의 사건을 읽다보면 모두가 해리 보슈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홈즈의 사건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긴장감이 있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좀 싱겁다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도청장치가 발견되고 난 후에 내가 의심했던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땐 예상이 적중했다는 기쁨과 동시에 실망감이 들기도 했지만 홈즈의 사건처럼 도무지 독자가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것보다는 참여의 기쁨이 커서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어찌 됐든 처음 만난 해리 보슈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오늘 도서관에 갈 일이 있는데 한 권을 빌려올까 싶다. 궁금하다 이 형사, 아니 이 남자가. 어머! 그래 로맨스에도 적극적인 이 형사는 남자였던 게다, 그게 아무래도 여성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 중의 하나는 아닐까? 마침 요즘 출파사에서 온라인 서점에서 아주 파격적인 가격행사를 하던데 몇 권 더 사야겠다. 그리고 이번에 안 사실인데 집에 있는 [밤과 낮 사이]라는 작품에도도 마이클 코넬리 작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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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 눈을 뜨다 재미마주 옛이야기 선집 5
박세당 글, 이경은 그림 / 재미마주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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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꼭꼭!

 이경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과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였다. 그림책에 관심이 많아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찾던 중 디딤돌 '아임 리딩' 시리즈늬 'The Brass Band'에 그림을 그려 데뷔하게 되었고, 이어서 '봉황, 눈을 뜨다'로 본격적인 그림책 작가로서 한발 더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앞으로 실험적이고 더 재미있는 그림책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첫 작품이라니! 첫 작품을 보고 팬이 생길 만큼 좋은 그림이다.

 

 

박세당

치과의사, 미술 컬렉터, 발명가, 언어학습 전문가로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화제작을 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유연한 사고와 시나리오 작업 등 글쓰기에 눈을 뜨게 되었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전방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중이다.  저서로는 『남자는 죽었다』(에세이, 1994년), 『10일의 기적 하이퍼 캡션영어』(영어학습법, 2008년),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2011년) 등이 있다.
수상경력은, 1998년 ‘현대벤처기술상’(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을 수상하였고, 1999년 ‘밀레니엄 상품’(산업자원부장관)에 당선되었으며 2000년 ‘신지식특허인’(특허청장)에 선정된 바 있고, 2007년 코리아타임스가 수여하는 ‘대한민국 외국어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라는 이력이 정말 '그림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지만 다른 사람이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했다.

 

◐ 내용 꼭꼭!

 '봉황'이라는 새는 '용'이나 '유니콘' 못지 않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물이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만날 때의 신비로운 느낌은 그저 신비롭다는 말로는 아쉬운 경건하고 위엄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 봉황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다가갈 때 표지 속의 그림이라면 참 딱이다 싶을 정도로 표지에 드러난 봉황이 마음에 들었다. 닭을 닮아 친근하면서도 활짝 날개를 편 모습과 세 발은 궁금증을 일으킨다. 아래의 춤추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위에서 따뜻하게 내려다보는 것이 마치 우리를 지켜주는 느낌마저 든다.

 

  마고 할미 설화에 대한 그림책을 이미 읽은 터이지만 그 책이 아직은 일곱 살 아들에게는 흥미를 크게 주지 못하는 이유로 좀더 단순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터에 이 책을 만났다. 따라서 이 책에 거는 기대가 좀 남달랐다. 하늘과 땅이 붙어 있던 그때, 봉황이 지켜주던 마고성의 사람들에게 탐욕이 생겨 쫓겨났을 때 죄책감을 느낀 봉황이 늘 사람들을 지켜주고자 노력한다. 자신을 바닷속에 던져 땅을 만들어 사람들을 살게 한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봉황에게 고마움을 느껴야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만 보아도 기쁘기만 하다니 봉황은 마음도 곱다. 하긴 그러니 봉황이지 아니면 뭇새와 뭐가 다를까?

 

땅이 만들어지고 땅의 모습을 생각하는 대로 사람들의 성품도 변했다고 하는 부분이 그림으로 잘 드러나 재미있었다. 토끼의 땀방울, 호랑이의 위 아래에 도사리는 용과 뱀을 그리더니 결국은 그 모두를 다 아우르는 봉황의 모습이 된 우리의 한반도. 그림만 보아도 쏙쏙 들어온다.

 

 

하지만 문제는 그림만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처음부터 제기한 글작가에 대한 불만이 있다. 마치 누가 써도 그 내용은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창의성없는 글밥에 깜짝 놀라 내 얼굴이 저 토끼얼굴마냥 당황스러웠다. 그 점이 이 책의 내용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운 점이다. 그림은 참 맘에 드는데 말이다.

 

◐ 마음 꼭꼭!

 사람의 마음은 언제부터 나빴을까? 많은 철학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수 천년 간 자신들의 생각을 펼쳐왔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반대편 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면 모를 수가 없는 시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간적인 거리는 고생대의 대륙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런지 몰라도 실제 소통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마고성에서 마고할미와 봉황의 보호 아래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이 서로 못잡아먹어 으르렁 거리던 때를 지나 더불어 하나로 살아가야 한다고 봉황은 온몸으로 부르짖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본 최고의 귀요미 봉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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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 르네상스를 만든 상인들
성제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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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 도서관에서 문화강좌로 '르네상스 미술'을 듣던 참이었다.  이탈리아를 벗어나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까지를 듣고 있던 중에 도서관 서가에 꽂힌 이 책을 보았고 당연한 듯 뽑아들었ㄷ.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이라는 제목 곁에 부제인 '르네상스를 만든 상인들'가 보였고 망각 곡선이 아직 적용되기 전인 나의 기억은 어렵지 않게 메디치 가를 떠올렸다. 읽어보자, 고 마음 먹은 것은 거기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내가 배운 르네상스의 미술은 철저히 화가와 미술작품 위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자의 존재는 그 시대의 미술에서 가벼이 다루어질 수 없었다.  그림은 화가가 그렸으되, 그 그림의 시작과 내용은 후원자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그 당시의 일반적인 예술 활동이었다. 물론 그 그림은 돈으로 지불되는 바 작품의 소유권자는 그 후원자들이었으니 지금은 우리가 지금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의 그림이라고 부르지만 숨은 주인들은 바로 그 후원자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후원자들은 당시 상업의 발달로 인해 막강한 부를 가지게 된 상인계층의 사람들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포함되어 있다.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은 우리가 르네상스 시기라고 부르는 1300년대 중반부터 1500년대 중반까지 대략 200년 동안 피렌체를 지배한 가문들을 소개하며 당시 힘의 지형을 드러낸 책이다. 묘하게도 이 책은 '피렌체'라는 도시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서이기도 하고, 당시의 '빛나는' 예술 작품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예술서이기도 하며 그 '순간'에 대한 막연한 향수와 동경을 갖게 하는 산문집이기도 하다. 이 점이 이 책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기점에는 고리대금업자들의 등장이 있었다. 십자군원정으로 인해 피폐해진 수도원들을 재정비하기 위한 교황의 노력도 함께 있었다. 이 두 계층의 사람들이 만나 지금 우리가 감탄하며 볼 수 있는 르네상스의 수도원 미술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수도원을 교황의 의도에 맞게 화려하고품위있는 미술 작품으로 채우는 것은 기존의 귀족계층이 아닌 고리대금업으로 막강한 부를 갖게 된 신흥상인들이었고 그런 상인들에게 교황은 손을 내민다. 상인들은 돈을 지불하는 가문만의 특별한 기도실을 제공받게 되고 각 기도실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당시의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 중심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조반니 디 비치에서 코시모 데 메디치를 거쳐위대한 로렌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다시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에 다시 집권하기까지 르네상스의 절반의 시기를 지배한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 앞에 소개된 스트로치 가문이나 브란가치 가문 그리고 르네상스 후반에 등장한 마키아벨리를 모두 함친 것보다 더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진 막강한 상인 계층. 이 책의 중심에도 바로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이 책보다 더 넓은 의미의 르네상스 미술사 강좌를 들으면서도 이 메디치 가문에 대한 부분이 2-3강을 걸쳐 나왔을 정도이니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은 그것의 부정성을 떠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문학적으로 피렌체를 발전시킨 것,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 등 역사적인 미술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 아름다운 작품들을 현재에까지 물려준 것은 그들이 지배한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준 긍정적인 결과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의 여지도 상당히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그들에게 권한 이유와 같이 그들이 애당초 표방했던 '시민 공동체'의 모습을 잃어가고 '독재 권력'으로 시민들에게 비춰진 점에 대해서는 분명 권력에 대한 야욕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지배자의 자리란 원래 그러한 것일까? 견제할 대상이 없는 지배자의 모습은 충분히 그러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오늘 읽은 정약용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 시를 당시의 로렌초 메디치와 지금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바친다.

 

 

 

述志2(술지2)
-丁若鏞(정약용)
내 품은 뜻은


嗟哉我邦人(차재아방인)  아, 우리나라 사람들 애닯아라
辟如處囊中(벽여처낭중)  주머니 속에 처한 듯하도다
三方繞圓海(삼방요원해)  삼면으로 바다에 에워싸여
北方縐高崧(북방추고숭)  북방애는 산맥이 누르고 있도다
四體常拳曲(사체상권곡)  사지를 항상 펴지 못하니
氣志何由充(기지하유충)  기상과 마음을 어찌 채울 수 있을까
聖賢在萬里(성현재만리)  성현은 만 리 먼 곳에 있으니
誰能豁此蒙(수능활차몽)  누가 능히 이 몽매함 밝혀 줄까
擧頭望人間(거두망인간)  고개 들고 온 세상 바라보아도
見鮮情瞳曨(견선정동롱)  보이는 것 드물고 마음만 답답하도다
汲汲爲慕傚(급급위모효)  남의 것 모방하기 급급하고
未暇揀精工(미가간정공)  결점은 미처 정밀히 따지지 못하네
衆愚捧一癡(중우봉일치)  여러 바보들 한 천치를 치켜세워
裾唅令共崇(거함령공숭)  왁자지껄 함께 받들게 된다네.
未若檀君世(미약단군세)  단군 시재보다 못하나니
質朴有古風(질박유고풍)  그 때는 질박하고 고풍이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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