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중국 등짝 후려친 ‘세계화’ 보았을까
베이징역 근처 세계공원을 찾았다 50개국 명소의 ‘짝퉁’ 100여개 모아둔 곳
‘먹가이버 칼’처럼 조악하지만 세계를 복제한다는 건 가히 중국적인 생각
‘가짜를 진짜로 여길 때 진짜 또한 가짜’ 홍루몽의 ‘태허환경’ 속에 빠지네
한겨레
» 세계 50개국 100여 곳 문화유적과 자연경관 ‘짝퉁’들을 모아 놓은 중국 베이징 세계공원. 2001년 9.11 자폭공격으로 무너져 지금은 없어진 뉴욕 맨해턴의 세계무역기구 쌍둥이 빌딩이 여기에선 건재하다. 물론 축소판이지만, 그 뒤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보인다.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①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에 이어 황희경 영산대 교수의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이 ‘와다 하루키 회고록’과 함께 격주로 번갈아 연재됩니다. 중국의 현대사상사와 지식인 담론에 각별히 주목하면서 고대중국을 포함한 중국문화 전반에 대해 호기심을 번뜩이고 있는 황 교수의 글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중국의 실체에 깊숙이 접근해갈 것입니다.

베이징 역 근방에서 744번 버스를 타고 찾아 나선 곳은 제왕의 기운이 충만한 고궁이나 천안문 광장도 아니고 소박한 기풍이 넘쳐나는 후퉁(골목)도 아닌 세계공원이었다. 아침부터 여행 안내책자에도 잘 나오지 않는 곳을 굳이 찾아갈 생각을 한 것은 그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의 제목도 ‘세계’였다. 그것은 이른바 ‘지하 영화’(underground film)를 대표하는 지아장커의 작품으로, 세계공원에서 경비원과 댄서로 일하는 두 남녀의 음울한 애정 이야기를 통해 급속한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 중국이 맞닥뜨린 곤경을 우화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아주 인상 깊게 보았는데 듣자하니 이번에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아장커는 지난해 해금되어 처음으로 ‘지상’의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에게 무한경쟁과 휴식을 연상시키는, 그래서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세계와 공원이 만난 세계공원을 찾게 만든 것은 그의 ‘세계’였다. 또한 언제부터인지 세계화니 글로벌 스탠더드니 세계무역기구니 온통 세계가 문제되고 있으니 이 ‘세계’를 알긴 알아야 했다.

초행길인지라 한 시간 넘는 시간이지만 지루한 줄 모르고 차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베이징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와호장룡의 도시답게 베이징은 ‘세계’를 자신의 서남쪽 구석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관원에 와본 기억이 떠올랐다. 대관원은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홍루몽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살던 곳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가짜(미니어처)라고는 하지만 ‘세계’를 복제해놓다니 그 발상이 가히 중국적이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일찍이 천하를 자임했던 청 왕조 때에 원명원 안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서 서양루(西洋樓)라는 건축물을 만들어 놓은 적도 있었다. 아편전쟁 때 영불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잔해만 뒹굴고 있는 폐허가 되었지만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한다.

천하 개념 바꿔서라도 천하 유지

» 베이징 천안문 광장.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 양쪽에는 ‘세계인민 대단결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판이 걸려 있다.
세계공원은 46만7천㎡에 달하는 면적에 거의 50개 국가의 100여 곳의 유명한 문화유적과 자연경관의 ‘짝퉁’을 모아놓은 곳인 데 1993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개선문, 영국의 빅벤, 런던 브리지, 오스트리아의 슈테판 대성당,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러시아의 붉은 광장, 그리고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등 누구나 가서 한번쯤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있었다. 심지어 9.11로 사라진 뉴욕 맨해턴의 쌍둥이빌딩도 있었고 이라크의 바빌론문(이슈타르 여신의 문)도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누는 아이 동상 같은 것은 작기 때문에 실물 크기 그대로 복제해놓았지만, 에펠탑은 10분의 1로,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은 25분의 1로 축소해놓는 등 축소의 비율은 일정하지 않았다.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사원과 같은 것들은 꽤 근사했지만 대체로 조악하기가 ‘먹가이버’ 칼 수준이 많았다. 하지만 조악하나마 이렇게 ‘세계’를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대면할 생각을 하는 것이 중국이 아닐까, 아니 중국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하노라니 도리어 흥미롭게 여겨졌다. 전통중국은 늘상 천하를 자임하다가 새롭게 강력한 타자가 나타나면 천하 개념의 조정을 통해 그 천하를 유지해오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중국을 “민족국가의 자칭한 하나의 문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짝퉁이라지만 언제 다시 이렇게 ‘세계’를 한 눈에 볼 기회가 있으랴 싶어 하나 하나 살펴보니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모두 유명한 것들이었다. 역시 세계는 넓었다. 나 자신 지구 촌놈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른 봄의 주말이었기에 유람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아주 적지도 않았다. 외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가짜 오대양 육대주이긴 하지만 이곳을 거닐자니 도리어 “가짜를 진짜로 여길 때 진짜 또한 가짜이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길 때 있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니라”의 홍루몽의 ‘태허환경(太虛幻境)’에 빠져 진짜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리고 세계가 온통 주목하고 있는 중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끝은 어디일까.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상념을 하면서 저 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그리스 로마를 거쳐 유럽을 돌아보고 다시 북미대륙으로 갔다가 아시아로 돌아오는데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나에게 세계공원은 식전경이었다. 이제 점심을 해야 했다. 아무리 대충이지만 반나절 만에 세계를 훑자니 배가 고팠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공원을 나와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대충 지저분하고 왁자지껄한 아주 전형적인 중국의 보통 식당이었다. 물만두를 시켜놓고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변했고 또 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중국이라고. “유감스럽게도 중국에서는 변화가 대단히 쉽지 않습니다. 책상을 하나 옮긴다든지 난로를 하나 바꾸는 일조차도 피를 흘리다시피 해야 합니다. 더구나 피를 보고 나서도 옮기거나 바꾸는 일을 꼭 성사시킨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은 아주 커다란 채찍이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자기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채찍은 언젠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별 문제이지만 틀림없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라고 루쉰은 말한 적이 있다. 베이징 역에서 마주친 피곤에 쩐 민꽁(民工: 대도시로 유입되어 각종 노무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변두리로 접어들면서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옛 모습들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다시 살아 돌아와서 격변하는 중국을 목도한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세계화의 채찍이 중국의 등짝을 후려쳤기 때문에 이제 변하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과연 변하는 것은 무엇이며 변치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편전쟁 패한 뒤 열국 자각

천하를 자임해 왔던 중국. 그 중심에 문화적인 중국이 있고 주변에 번국(藩國)이나 교화 대상인 이른바 네 오랑캐 즉 남만(南蠻)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이 있다는 천하관을 견지해온 나라. 어느 나라건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마련이지만 중국의 이러한 천하관 혹은 화이관념(華夷觀念)은 단순한 허장성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지리적 실체감을 동반한 것이었기에 상당히 강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서양이라는 강력한 타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아편전쟁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중국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통적인 천하관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천하는커녕 열국 중에 하나의 나라, 그것도 강한 나라가 아님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이제 근대적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중국의 현대화란 루시앙 파이(Lucien Pye)의 말처럼 거대한 하나의 문명체계를 민족국가인 것처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중국은 20세기에 신해혁명, 국민혁명, 공산혁명, 문화대혁명 등 많은 혁명을 겪어야 했으며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을 치러야 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보통국가’였다면 감내할 수 없을 이러한 엄청난 격동을 수용해냈다는 점에서 중국은 크고 넓은 나라다. 이것은 단순히 땅덩어리가 넓고 큰 문제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저력이 있었기에 개혁 개방 20여년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급부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 경제 개혁의 와중에서 세계로 진입한(2001년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것을 중국에서는 ‘입세=入世’라고 부른다) 중국은 만리장성도 날려버릴 세계화의 거센 바람 앞에서 사회적 분화와 갖가지 모순으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천안문 앞을 지나면서 차창에서 마주친 마오쩌둥 초상화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이라는 편액 사이에서 말없이 중국과 세계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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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마오’는 거슬러 오는가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 생전 마오는 그렇게 읊었건만
천안문 초상화 앞 인파는 ‘어제’를 본다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 중국인들은 왜 마오를 품는가
거대한 중국의 신체에 스며든 작은 영웅 세번의 마오 열풍 거
한겨레
» 로스 테릴이 쓴 <마오쩌둥전>.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②

웬지 모르게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러보게 되는 곳이 천안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마오쩌뚱(이하 마오로 칭한다)의 초상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지 천안문의 마오 초상 앞에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자기 손으로 일으켜 세운 나라를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키듯이 대동란 속에 빠뜨리기도 했던 마오. 일평생 투쟁을 좋아해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며 인간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더더욱 무궁하다”고 설파했던 그가 저렇게 변함없이 고요히 천안문에 수십 년에 걸려 있는 것이 ‘달나라의 장난’ 같기도 하다.

“마오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주변에 있는 아는 중국인에게 물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저는 우선 능력이 대단하고, 사상이 있으며, 그리고 문학적 재능이 빼어났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론 말년에 과오는 저질렀지만 그래도 공적이 많지요.“라는 예의 상투적인 평가. 마오에 대해 관심이 있냐는 질문에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대답하리라.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사범학교 출신의 일개 반지식인(半知識人)이었던 그가 혁명에 뛰어든 지 불과 20여년 만에 그 거대한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했으니 그는 참으로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마오 혼자서 한 일은 아니지만 마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처음으로 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내세워 혁명에 성공하기도 하고, “뒤집어엎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造反有理)”라는 반항의 철학을 일생 견지했으니 그에겐 남과 다른 확실한 사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적 시인이기도 하였다. “애석하게도 진시황, 한무제는 문화가 조금 부족했고, 당태종 송태조는 시재(詩才)가 조금 무뎠더라. 일세의 영웅 징기스칸도 다만 활쏘기만 잘하였을 뿐. 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는 마오의 시가 언론에 실리자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일개 무장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손오공처럼 천하를 쥐락펴락

»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대형 초상화를 배경으로 서 있는 중국 신세대 여성.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가 됐어도 마오에 대한 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베이징/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렇지만 그야말로 이 모두가 지나간 일이 아닌가. 지금은 개혁 개방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가는,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의 시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은 왜 마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하긴 부시도 마오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마오의 전기를 읽고 동독 출신의 독일 총리에게 추천까지 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말이다. 최근엔 그 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바야흐로 마오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르곤 하는 서점에서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그에 관한 책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이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전혀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아큐’ 같이 생긴 분이 진지하게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감탄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에는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일본 관련 서적이 하나의 코너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많이 출판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 일본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동북아 정세의 미묘한 변화 등으로 중국사회는 전에 없이 일본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또 한 가지는 붉은 표지의 마오의 전기가 당당히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실. 이 책은 현재 하버드대학 아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있는 호주계 미국인인 로스 테릴이라는 사람이 쓴 전기였다. 이건 중국인민대학 출판부에서 마오에 관한 외국의 유명 연구서를 총서의 형태로 펴낸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베스트셀러를 겨냥해서 기획 출판된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미 5만부가 팔려 나갔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원래 1980년에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는 이미 1989년에 허베이 인민출판사에서 번역되어 12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 새롭게 뜬 책은 마오 이후 진행된 중국과 세계의 변화, 그리고 새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마오에 관한 자료를 반영한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개정판(1999)을 새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미 120만부나 팔린 책이 다시금 출판되고 또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5만부 넘게 팔린 일은 아무리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 2003년 12월26일은 마오 탄생 110돌, 올해는 타계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마오 열풍이 다시 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그의 고향 후난성 샤오산에서 열린 마오 탄생 기념 행사 장면.
로스 테릴은 이 책에서 마오를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질(猿氣)을 동시에 지닌 매우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마오는 한때 그의 아내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에겐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운(猿氣)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호랑이의 기운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호방하고 장중한 기세로, 원숭이의 기운을 B 지점에 도달하려는 원망(願望)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태도로 해석, 마오를 모순으로 가득한 아주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사실 마오는 어릴 적부터 <서유기>를 좋아했고 손오공을 높이 평가했다. 아무튼 이 책이 중국의 독서시장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은 마오의 열기가 새롭게 고조되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오 전기 개정판 또 베스트셀러

돌이켜보면 마오 사후에 세 번의 마오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86년에 열기가 일기 시작하여 88년에는 상당한 기세를 이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979년에 번역된 스튜어트 슈람이 쓴 <마오쩌뚱>이 내부자료로 번역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로스 테릴의 마오 전기가 처음 번역된 것도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해엔 처음으로 마오를 신이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 묘사한 취엔옌츠(權延赤)의 <신단(神壇)에서 내려온 마오쩌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두 번째 마오 열기는 마오 탄생 100주년(1993년)을 즈음한 시기에 불었는데 이번에는 마오에 대한 찬송가라고 할 수 있는 ‘홍태양(紅太陽)’이라는 카세트 테이프가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무려 100만개가 팔렸는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그 어떤 가수도 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택시 안에 무사고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마오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마오에 관한 영화도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역설적인 것은 마오가 농민들과 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다시금 신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마오 탄생 110주년이 되는 2003년에 달아오른 세 번째 마오 열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일어났다. 상업적 측면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특기한 만한 일이다. 순금으로 된 마오의 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수천만 원에 달하는 마오의 금상이 주조되어 수집가들의 애장품으로 혹은 뇌물로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마침 올해는 마오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중국의 언론은 이 굵직하고도 중량감이 있는 마오 전기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이 또 다른 마오 열기의 징조가 아닐까 주목하고 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최근 급속히 불거지고 있는 빈부격차가 마오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생전 단지 두 사람 반(충성스런 기밀담당 비서 두 명과 장칭의 반)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농담반 진담반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던 마오. 그런 마오가 사후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록새록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오에 관한 책을 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회고하기 위해서 읽고 젊은이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다고 한다. 그들은 마오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각자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은 소망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마오의 열기는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기상도(氣象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여전히 마오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신체에 스며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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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6-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안문 하면 덩샤오핑과 더 가까운 일인데 중국 사람들은 마오에 대한
미련(?)에 참 오래 집착합니다. 마오의 장점만을 보려하는 것일까요?
대륙적 리더십을 가지고 마오를 회고한다면 그가 자행한 무수한 폭력은?
허긴, 울나라도 여전히 다카기 마사오를 추종하고 사모하는 세력이 남아있긴하죠
잘 읽고 갑니다. 해콩님! 더운 날에 건강하세요^^
 

우연히 만난 ‘쿵이지 주점’ 술청에 선 루쉰이 부르네
‘샤오쯔하는’(돈 쓰며 즐기는) 이들이 찾는 허우하이
뜻밖에도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를 만났네
모순 가득한 그의 무거운 행보 떠올라
‘샤오쯔’처럼 가볍게 소흥주 한잔 걸칠 수 없었네
한겨레
» 허우하이 호수가에 있는 콩이지 주점. 허우하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국 수뇌부가 살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뒤쪽에 있는 호수를 가리킨다.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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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③

베이징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들러보고 싶던 곳이 있었다. 바로 허우하이(後海)라는 곳이다. 이른바 샤오쯔(小資)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기 때문에 근자에 새롭게 부상한 곳이다. 샤오쯔란 원래 문자 그대로 소부르조아의 준말이지만 의미가 점차 변해서 요즘은 일정한 학력과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생활의 ‘격조’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젊은이들을 지칭할 때 쓴다.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생활방식이나 정취를 지칭하기도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동사로도 쓰이기도 한다. 가령 샤오쯔하자!(小資一下)라고 하면 돈 좀 쓰면서 즐기자! 라는 정도의 뜻이다. 짧은 일정에 이곳저곳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종로에서 볼 일 마치고 잠시 인사동의 찻집을 들러보는 심정으로 허우하이를 찾았다. 그래 나도 잠시 샤오쯔 좀 하자!

생활 격조 찾는 젊은이 ‘샤오쯔’

허우하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국 수뇌부가 살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뒤쪽에 있는 호수라는 말이다. 스차하이(什刹海)라고도 하는데 다시 치엔하이(前海), 허우하이, 시하이(西海)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베이하이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3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상당히 커다란 호수다. 해질 무렵에 찾았는데 정말 운치가 있었다. 강추! 가서 보니 예전에 한번 와 봤던 곳이었다. 이 일대는 고궁의 뒤쪽이어서 과거엔 사실 웬만한 권력을 갖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쑨원의 부인 쏭칭링(宋慶齡), 유명한 역사학자 꿔모러(郭沫若)의 옛 집, 전형적인 쓰허위엔(四合院)으로 유명한 꽁왕푸(恭王府) 등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예전에 없던 술집이나 카페들이 ‘샤오쯔하게’ 호수 주변으로 꽉 들어차 있었는데 가끔 외국 관광객을 태우고 후퉁 투어를 하는 자전거 인력거가 10여대 씩 줄지어 호수 주변을 도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나도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맥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저 멀리 호수 너머 시산(西山)에 지는 석양을 바라볼까 하다가 그냥 걷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 혼자 들어가기가 좀 멋쩍은데다가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호숫가를 걷다 보니 한 모퉁이에서 서민들이 한적하게 산책을 하거나 체조를 하고 있었고 또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예전에 봤던 광경인데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소박한 서민의 기운이 넘쳐나는 베이징의 정취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콩이지(孔乙己) 주점이라는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콩이지를 여기서 만나다니…. 콩이지는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루쉰의 단편소설의 제목이자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아닌가. 아주 짧은 작품이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쓸쓸한 여운은 아주 오래 동안 가시지 않는 그런 작품이다. 두루마기를 입고 와서도 돈이 없어 안채에 들어가 앉아서 술을 천천히 마시지 못하고 술청에 서서 마시곤 했던 몰락한 지식인 콩이지. 그는 정말 죽었을까. 그러나 아무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이 없었던 콩이지. 루쉰은 자신이 쓴 단편소설 중에서 어느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콩이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주점의 주인은 그런 콩이지가 못내 불쌍했던 것일까. 아예 그의 이름을 딴 술집이 만든 이유는 혹 <콩이지> 보고 돈 걱정 말고 술 마시라는 뜻은 아닐까.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이 주점의 주인은 루쉰과 동향인 베이징 대학의 중문과 출신이라고 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베이징대 비정규직 사서 ‘마오’

» 치엔하이와 허우하이 중간에 위치한 인팅챠오(銀錠橋)에서 바라본 석양. 예전에 왕들은 이곳으로 산책을 나와 시산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베이징 10경 중의 하나다.
하여간 <콩이지>는 나로 하여금 루쉰, 그리고 다시금 마오를 올리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루쉰이 1918년 겨울에 쓴 것인데, 마오는 마침 그해 8월 후난성에서 처음으로 베이징에 올라와 스승 양창지(楊昌濟)의 소개로 11월부터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주된 업무는 15종의 중국과 외국 신문을 관리하고, 신문을 열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비정규직’ 일이었는데 월급은 8인위안(은원)이었다. 전문적인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1인위안은 요즘의 50위안(1995년 기준), 즉 15㎏의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8인위안은 요새 돈으로 400위안, 대략 120㎏의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다. 한편 당시 문과대 학장이었던 천두슈(陳獨秀)는 300인위안(요즘의 1만5000위안), 도서관 관장이었던 리다자오(李大釗)는 120인위안을 받았고, 얼마 뒤 겸임강사로 부임했던 루쉰은 교육부 관리이기도 했으므로 300인위안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월급의 양극화! 마오는 4개월 만에 그만 두었고, 루쉰은 1920년부터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므로 대학의 교정에서 두 사람은 같이 만날 수는 없었지만 루쉰이 이 작품을 쓸 당시 마오도 베이징의 회색빛 하늘 아래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마오가 만약 베이징대학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면 중국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중국의 가장 중요한 두 거인 마오와 루쉰은 평생 만난 적은 없지만 당시 마오는 그의 동생인 저우쭈어런(周作人)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1920년 4월의 일인데 사실 5ㆍ4운동 당시에 저우쭈어런이 루쉰보다 유명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저우쭈어런은 중국 신촌(新村)운동의 최초의 주창자였고 마오는 이 운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촌운동은 요즘 중국에서는 추진되고 있는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운동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이다.

» 위엔스카이의 얼굴이 새겨진 1914년 당시의 은(인)화 1원. 그러니까 마오는 이걸 8개 받았다는 얘기다.
이처럼 마오는 루쉰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일생을 통해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대략 1934년 전후였는데 1931년 “매우 엄중하고도 일관된 우경 기회주의”라는 이유로 당의 수뇌부에서 배제당한 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고독 속에서 루쉰을 ‘만났다.’ 한번은 펑쉬에펑(馮雪峰)이 마오의 시를 가져다가 상하이에 있는 루쉰에게 보여준 일이 있었다. 당시 펑쉬에펑은 상하이와 루이진을 오가며 중공(중국공산당)의 연락책 노릇을 하고 있었다. 루쉰은 이 시를 보고 산적 두목(山大王)의 시 같다고 평했는데 펑이 마오에게 다시 이런 평가를 전하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마오는 정말로 얼마 있다가 준의회의(1935)를 통해 중공의 ‘산적 두목’이 되었다. 마오는 루쉰이 서거한 다음 해에 루쉰을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루쉰의 가치는 내가 보기에 중국의 최고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중국의 성인이다.”

문혁때 루쉰만 자유롭게 읽혀

일찍이 루쉰은 ‘현대중국의 공자’라는 글에서 “공자는 중국에서 권력자들에 의해서 떠받들어졌고 그 권력자나 권력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성인이었지 일반 민중과는 매우 인연이 먼 존재였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런 그가 마오로부터 이런 ‘공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성인 콤플렉스를 가졌던 마오의 속마음이 루쉰에 대한 평가 속에 드러난 것은 아니었을까.

두 번째의 ‘만남’은 문혁 전후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전후에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실패, 소련 기술자의 철수, 당내의 비판 등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었다. 사면초가 속에서 다시 루쉰을 ‘만난다.’ 그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광대한 천지와 연결된 호탕한 마음속 심사, 소리 없는 가운데 요란한 천둥소리 들리네(心事浩茫連廣宇 于無聲處聽驚雷)”라는 루쉰의 시로 이런 자신의 마음속 심사를 드러내었다. 얼마 뒤 마오는 문혁이라는 ‘천둥소리’로 중국을 뒤흔들었다. 그렇지만 루쉰은 문혁의 와중에서 왜곡된다. “루쉰은 위대한 문학자일 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혁명가다”라고 널리 선전되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책은 문혁기간에 마오의 어록 외에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러나 그런 만큼 풍부하고 모순으로 가득찬 루쉰의 사상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신성화되고 권력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명랑하지 않은 루쉰의 글은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방대한 중국의 문화가 근대적 전환기에 펼쳤던 무거운 행보를 침울하게 펼쳐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고, 또 언제 읽어도 신선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결코 선구자가 아니라 역사적 중간물임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길에는 하나의 종점이 있고,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누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다.”

루쉰에 중독되었기 때문일까. 샤오쯔들처럼 가볍게 콩이지 술집에 들어가 회향콩 안주에 소흥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후회는 없었다. 석양에 물든 호숫가가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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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교수의문학산책] 무지가 앗아간 세가지 환각
한겨레
»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관련기사]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흥교사, 화염산, 박통사언해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소. 대체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물음 앞에 번번이 낭패당한 것으로 회고되오. 13년 전쯤일까, 중국 산시성 시안에 갔소. 거대한 박물관을 외면하고 먼저 달려간 곳이 시안 교외 뚜치(杜曲)에 있는 흥교사(興敎寺). 신라 승려 원측(圓測, 613~696)의 사리탑을 보기 위함이었소. 경내 오른편에 3기의 탑이 솟아 있었소. 중앙의 큰 것이 현장법사의 것, 그 오른쪽이 수제자 규기(窺基)의 것. 왼편이 역시 수제자의 하나인 원측의 것. 탑의 감실에는 사천왕처럼 눈이 치켜올라간 원측의 조각상이 인상적이었소. 송대에 중수한 것이며 비문엔 원측의 행장이 소상히 새겨져 있었소. 다비를 했을 때 사리 49개가 나왔다고 되어 있었소. 그의 저서 <반야바라밀다심경찬>이 티벳어 역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내 발걸음이 일직선으로 흥교사로 향했던 것. 중국인 규기와는 달리, 어쩌면 원측의 사상이 이단으로 몰렸을지도 모른다는 실로 막연한 느낌을 한동안 물리치기 어려웠소.

흥교사 현판은 청대의 대정치가 캉유웨이(康有爲)의 글씨. 어째서 캉유웨이의 글씨를 간판으로 내세웠을까. 그것도 ‘有爲’ 두 글자는 적색으로 했을까. 모종의 위화감을 물리치기 어려웠소. 종교와 정치의 거리감 탓이었소. 이러한 위화감을 나름대로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근자의 일이오. 학병 탈출 제1호에 해당되는 김준엽 씨의 탈출기 <장정>을 읽은 후이오. 충칭으로 모인 탈영 학병들이 시안에 있는 이범석 휘하에서 미군의 O.S.S.(전략정보기관)에 참여했는바 그들의 숙소가 바로 흥교사였던 것.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흥교사 경내에서 아마도 나는 또 다른 환각에 빠지지 않았을까. 신라승 원측과 광복군의 만남이 그것. 시공을 초월한 이런 만남이란 얼마나 굉장한가. 내 무식함이 이 감격을 막고 말았던 것.

이런 무지가 가져온 한스러움이 어찌 이에 멈추었으랴. 둔황과 우루무치 사이에 트루판이 있소. 해저 154미터 분지의 오아시스. 그 길목에 화염산이 있소. 구리의 머리, 쇠의 몸뚱이라도 녹여버린다는 이 화염산을 현장법사 일행이 넘어갔지요. 파초선을 갖고 있는 철선선을 정복한 손오공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 지금은 불 꺼진 그 화염산을 지난 곳에 베제크리크 천불동(千佛洞)이 있되 기가 막힐 정도로 훼손된 채 거기 있었소. 15세기까지 이곳 위구르족은 불교를 믿었기에 막고굴 모양으로 천불동을 조성했던 것. 그 뒤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들은 벽화와 인물상을 크게 훼손시켰던 것. 그렇더라도 제법 원형이 남아 있었는데, 독일 탐험대가 벽화의 벽까지 송두리째 뜯어갔던 것. 한발 늦게 이곳에 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1910)는 이렇게 적었소. “이곳에서의 불상 발굴은 성과가 없었다”라고. 그럼에도 그들은 남은 부분을 또 수습했소. 오늘날 이 동굴 중심벽화의 복원을 위해서는, 우리 국립박물관에 수장된 벽화조각 한 점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알려져 있소. 오타니 수장품의 일부가 서울에 남겨졌기 때문이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벽면 앞에 섰을 때 나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으랴. 어찌 이뿐이랴.

화염산은 그래봤자 그저 산이었고, 서유기도 역시 한갓 소설에 지나지 않는 것. 이 소설의 완성본은 명나라 오승은의 것으로 되어 있소. 이런 대작이 한 사람의 단독저서일 이치가 없지요. 수많은 이본들로 조합, 완성된 이른바 적층(積層) 문학인 셈. 이본 연구가 왕성할 수밖에. 이러한 연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는 썩 오래된, 그러니까 원나라 때 통용된 판본이 있소. 유감스럽게도 그 판본은 중국 천지에서는 찾을 수 없다 하오. 다만 그 판본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우리에게 있다면 어떠할까. 조선조가 중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박통사언해>(숙종 때)가 바로 그것이오. 그 내용 중에 몇 대목이 들어 있었던 것. “우리 책상에 책을 사러 가자”라고 묻고 “무슨 책을 사러 갈까”라는 식으로 된 중국어 회화책 <박통사언해> 속엔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차지국에 가서 백안대선과 투쟁하던 내용이 대화체로 들어 있었소. 이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화염산은 내 앞에서 다시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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