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층 고고관·역사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은 그 곳에 있었다. 후손들에게 기록을 남긴 역사(歷史)시대의 모습도, 지혜가 미치지 못해 문자를 남길 수 없어 유물로만 자취를 남긴 선사(先史) 시대의 모습도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박물관 건물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동관으로 줄지어 이어진다.1층에 들어서면 상설전시관인 고고관과 역사관이 관람객을 맞는다.

구석기 시대에서 남북국 시대까지 한눈에

동관 1층 101∼110 전시실이 바로 고고관이다.

첫 걸음을 떼는 순간 세계전도와 함께 일본·중국·대한민국·세계고고학의 연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학창시절 교과서나 사회과부도·역사부도 등의 첫 페이지에서 볼 수 있었던 ‘빗살무늬토기’(신석기시대·서울 암사동 출토)는 관람객들이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유물. 이어 ‘요령식 동검’(청동기시대·황경남도 신천 〃),‘산수무늬 벽돌’(백제·충남 부여 〃) 등이 눈길을 멈추게 한다.

마치 검은 돌처럼 바싹 말라버린 선사시대 ‘도토리’(신석기시대·경남 창녕 비봉리 〃)는 ‘갈판·갈돌’(〃·서울 암사동〃)과 함께 진열돼 있었다.500년 쯤 지나면 미니홈피 배경 음악이나 배경 화면을 사고 파는 전자화폐 ‘도토리’가 나란히 소개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선을 따라 청동기·초기 철기 유물들이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듯 스치며 지나간다.4∼6세기 고구려 고분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는 벽화는 ‘사신도’가 대표하고 있었다. 비록 모사품이지만 청룡·주작·백호·현무의 모습은 그 시절 고구려인의 호방한 기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백제실을 대표하는 ‘백제금동대향로’(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 앞에서는 좀처럼 관람객들이 눈을 떼지 못한다. 신선들이 산다는 박산(博山) 굽이굽이마다 상상의 동물들과 사람들의 모습으로 장식된 향로는 백제인들의 이상향을 엿보는 듯하다.

가야실에서 볼 수 있는 ‘투구’와 ‘말머리가리개’(부산 복천동 〃)는 외국 영화의 전투장비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과 ‘허리띠’ 앞에서도 관람객들은 오래 머문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아니었지만 발해실의 ‘용머리 장식’이나 ‘도깨비 기와’(중국 헤이룽장성〃)는 세상의 모든 나쁜 귀신을 쫓아낼 듯하다. 반면 두명의 부처가 함께 조각된 ‘발해불상’(발해 팔련성 〃)은 이민족도 너그러이 융합했던 민족의 포용력을 상징하는 듯하다.

▲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

딸을 시집보낸 왕도 범부와 다르지 않았음을…

고고관을 다돌고 나면 맞은 편 111∼120 전시실인 역사관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대표적 기록문화유산인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해 금석문, 문서, 지도 등 당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역사관 첫 전시실인 한글실에는 한글의 과학성보다는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랜 어버이의 모습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새 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 어제는 그리 덧없이 내어 보내 섭섭무료하기 가이 없어 하노라.’며 조선 현종 임금이 궐 밖으로 시집간 셋째 딸 명양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지도실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밑거름이 됐던 ‘동국대전도’가 2.3배 확대돼 바닥 타일로 꾸며져 있다. 허리를 굽혀 살펴보면서 걸어보면 마치 소인국의 ‘걸리버’가 된양 한반도 전체를 걷는 느낌이다.‘수선전도(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도성도’ 등 서울의 옛 모습을 담은 옛 지도도 직접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등기제도, 노비의 경제적 가치, 조선시대의 의술 등 선조들의 생활상을 이해하기 쉽게 배울 수 있다.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소파나 영상물 상영관 등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시설이 전시관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정해진 동선대로 이동하지 않으면 시대 흐름을 놓칠 수 있으니 질서를 지키며 정해진 동선을 따르는 것이 좋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2층 미술관Ⅰ·기증관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올라서면 서예·회화·불교회화 등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인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Ⅰ’과 국내·외 각계각층 213명이 아무런 대가없이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들이 있는 ‘기증관’이 있다. 특히 미술관Ⅰ에는 교과서에 실려 눈에 익은 작품들도 많아 직접 실물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윤두서 자화상

교과서에 실린 그림이네?

미술관Ⅰ에서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보물 527호)’. 춤추는 아이, 행상, 벼타작, 담배잎썰기, 씨름도 등이 눈길을 모은다. 꽉 짜인 원형 구도에 간략한 필선으로 조선시대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담았다. 작품 크기는 30㎝ 안팎으로 아담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씨름도’의 씨름꾼 옆에는 이들의 신발로 보이는 신발들이 내팽겨쳐져 있다. 그런데 하나는 짚신, 하나는 고급신발로 보이는 고무신이다. 신분의 차이가 나는데도 공평한 승부 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구경꾼들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경기를 보고 있다.‘허허, 저런’‘빨리 넘겨 버려.’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구경꾼들의 긴박한 표정과는 달리 엿판을 매고 떠꺼머리 총각은 아랑곳없이 천연덕스럽게 가위를 치면서 열중하는 것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얼핏보면 빛 바랜 누런 종이에 검은 잉크가 뭉개져 있는 듯하다. 한참 들여다보면 왼쪽 하단 현실세계를 보여주는 야산에서 오른편 상단 도원의 세계가 보인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풍경을 안견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것이다. 전체적인 경관은 짙은 안개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잘 어우러져있다. 꿈과 현실을 한폭의 화폭에 담은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철학적인 질문도 떠오를 법하다.

▲ 몽유도원도

두루말이 형태로 폭이 20m에 이르는 이 작품은 당대 지적 권력이 집약된 작품이다. 작품 양쪽에 자신이 안평대군이 직접 지은 제발(題跋)뿐만 아니라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서거정, 성삼문 등 당대 20여명의 문사들의 찬시가 곁들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진품은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려한 불교회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표현한 그림들이 모여있는 불교회화관에 들어서면 좀 더 화려해진다.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 등 선과 악을 상징하는 오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대웅전 석가모니 불상 뒤에 놓였던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은 석가가 인도 마가다국의 영취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한 사실을 화려한 색깔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원근법을 쓰지 않아 평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어찌보면 불화의 세계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세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사 김정희가 쓴 자신의 별호에 대한 글인 ‘묵소거사 자찬(默笑居士 自讚)’은 날카로움 속에서 정중함과 정성을 담아 쓴 흔적이 엿보였다.‘침묵할 때 침묵하는 것은 때에 맞는 것이요,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은 중용에 가까운 것이다.’라는 글귀가 담겨 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에서는 내면의 세계까지 드러나는 듯하다.

문화재 사랑으로 만들어진 기증관

기증관은 11개실로 구성됐으며 이홍근 박병래 등 문화재를 기증한 이들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1946년 이희섭 선생이 금동불상 세 점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모두 213명이 청동기 금속공예 회화를 비롯한 국보 6점과 보물 32점 등 모두 2만 2091점을 기증했다. 특히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 운영자인 가네코 가즈시게 선생 등 일본인 3명도 기증자 대열에 포함돼 있어 눈에 띈다.

기증관에서는 손기정 선생이 기증한 그리스 청동 투구(국보 904호)를 볼 만하다. 투구는 1500년쯤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경기에서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제작됐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 선생에게 부상으로 주어졌다. 투구는 베를린 박물관이 보관하다가 1986년 뒤늦게 손 선생에게 돌아왔다. 그는 이 투구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 생각해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3층 아시아관·미술관Ⅱ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곳이나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특히 3층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인기 유물’과 그렇지 못한 ‘비인기 유물’ 사이의 차이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교과서를 통해 숱하게 봐 왔던 익숙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인도네시아·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물도 ‘아시아관’에 전시돼 있다.

중국·일본·중앙아시아 유물도 전시

3층에는 306∼311호까지 인도네시아·중앙아시아·중국·일본의 유물이 전시된 ‘아시아관’이 있으며,301∼305호까지 ‘미술관Ⅱ’에는 불상·청자·백자 등 우리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보통 301호부터 관람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3층에 올라오면 바로 왼쪽으로 ‘아시아관’입구인 306호가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람객들은 306호 ‘아시아관’을 먼저 관람하게 된다.

306호를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다시 나가 301호로 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시아관’을 얼른 둘러본 뒤 ‘미술관Ⅱ’에서 우리 유물의 아름다움을 느긋하게 즐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아시아관’에서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다른 전시관에 비해 조금 빨라지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2개의 팔을 가진 부처 조각상이나, 인자해 보이지 않는 부처의 미소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다른 전시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유물에 대해 박사 수준의 설명을 해 주던 엄마들도 이곳의 잘 모르는 유물들 앞에서는 슬쩍 조용해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아시아관’에서 잠시 풀 죽은 엄마들은 3층 북쪽에 자리잡은 ‘미술관Ⅱ’에서 활기를 되찾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볼것 많고 배울것 많은 고려청자 전시실

자비롭고 은은한 미소로 가득찬 301호 불교조각 전시실을 지나면, 전시된 모든 유물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친숙한 금속공예(302호)·청자 전시실(303호)을 지나게 된다.304호에는 수수한 느낌의 분청사기 전시실이 있고 305호에는 백자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유물에 대해 ‘일자무식’이라도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국보 78호 미륵반가사유상도 이곳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따로 마련된 방에 모셔진 이 불상은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전시실 자체에서 풍기는 위엄만으로도 관람객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미륵반가사유상 외에도 고려청자 전시실은 관람객들의 ‘정체현상’이 가장 심한 곳이다.

사방이 온통 비취색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옮길 생각을 잠시 잊게 된다. 또 국보와 보물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에 메모하는 학생들의 손놀림도 빨라진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진열된 어느 것 하나 국보·보물 아닌 것이 없을 듯한데, 그 가운데서도 국보가 있고 보물이 있는 것을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층부터 차례로 관람하면서 올라왔다면 3층이 마지막 장소다. 특히 조선백자들이 전시된 305호를 마지막으로 관람하게 된다면, 어수선하게 관람했던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차분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손목없는 부처님…왜?

“엄마, 왜 부처님 손이 없어요?”

3층을 관람하면서 엄마들이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301호에 마련된 불교조각 전시실에는 많은 불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 3개 철조불좌상의 양 손목이 없다. 공교롭게도 ‘손목 없는 불상’3개 모두 철로 만들어졌으며 앉아 있는 자세도 비슷하다.

첫번째 ‘손목 없는 불상’은 301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볼 수 있다. 약 2m크기이며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충남 서산군 운산면에서 출토된 철조불좌상이다. 두번째는 충남 서산군 보원사 터에서 출토 된 것으로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며, 세번째는 10세기에 만들어져 경기 포천군에서 출토된 철조불좌상이다.

‘손목 없는 불상’에 대해 불상 전문가인 홍익대 김리나 교수는 “불상의 손목은 다른 곳에 비해 가늘고 몸체에서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유실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누군가 고의로 잘랐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불상의 손 모양새(손갖춤)는 부처나 보살이 깨달은 중생 구제의 소원을 밖으로 표시하기 위해 짓는 것으로 부처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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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도 글로벌 스탠더드 세례
찬 돼지머리 고기도 먹기 쉽잖았던 20세기 공자
최근 중국에 전통문화 대표자 신분으로 부활
하나의 모습 띤 ‘표준상’ 전세계 보급한다는데…
내가 아는 공자만도 천의 얼굴이렷다
한겨레
»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후손들이 공씨 가문의 족보를 살펴보고 있다. 중국 동남부 푸젠성의 ‘공자 마을’로 알려진 시쥔 촌에는 126가구 600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푸저우/신화 연합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⑥

지난 달 13일 중국에서 공자 표준 조소상(彫塑像)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산동성 문화산업박람회 조직위원회와 중국공자기금회가 산동성 지난(濟南)에서 공자의 표준상 시제품(初稿)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공모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하니 아무리 완성품이 아니고 시제품이라고는 하지만 급조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엄격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육칠십 대의 공자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향후 지속적으로 국내외의 여러 의견을 참고하여 오는 9월 공자 탄신 2557주년 제사 때에 최종 완성본을 정식으로 전세계에 공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제 공자상마저 국제적 표준이 제정되는 것이다.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돈도 재물도 없는 공자 사당은 썰렁

이러한 소식은 그간 간간이 들려오던 공자학원(Confucius Institute)의 세계적 확산, 공자에 대한 성대한 제사 그리고 유가 경전 읽기 붐 등 일련의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공자의 위상이 중국 전통문화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에 극복해야 할 구질서나 봉건문화의 상징으로 매도되던 공자가 21세기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세기에 공자의 신세가 ‘하한가’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상종가’를 구가하던 시절도 없지 않았다. 민국시대였던 1925년에 교육부가 주관해서 소학교에서 유가 경전을 읽도록 한 경우도 있었고, 1930년대에는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유(四維, 예의염치)와 팔덕(八德, 충효인애신의화평)과 같은 유가 도덕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신생활운동의 본질은 일본이 무력침공을 기도하자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구국의 기운에 대항해서 장제스 일파가 자신들의 군사독재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국민적 정신동원을 도모하려는 데에 있었지만….

» 작가 루쉰의 고향 샤오싱의 시엔헝 주점 앞에 서 있는 쿵이지상. 쿵이지 손가락 사이의 작은 물건은 소설에 등장하는 회향콩이다. 쿵이지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나눠줄 콩이 없다고 하면서 “군자는 다재다능한가, 다능하지 않은 법이다.(君子多乎哉 不多也)”라는 공자의 말을 연상시키는 “많지 않아. 많지 않아. 많은가? 많지 않다(不多不多 多乎哉 不多也)”라고 주절거린다.
돌이켜보면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교화된 이후 청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수천 년 동안 공자의 형상은 역사적으로 부침을 겪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폄훼보다는 포양된 경우가 많았다. “성인과 왕은 마치 한 핏줄인 쌍둥이 형제처럼 도처에서 궁지에 빠질 때마다 서로 의지하는 구석이 있다. … 왕은 그의 칭호를 성인에게 나누어 주어 왕이란 글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인 또한 그의 칭호를 왕에게 나누어 주어 ‘성(聖)’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후흑학(厚黑學)의 창시자 리쭝우의 이러한 지적은 역사적으로 공자가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밀의 한 자락을 말해준다.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고 당대의 임금은 언제나 ‘성군’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공자의 사당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스개 소리 하나. 공자의 사당(文廟)은 한적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관운장을 모시는 관제묘(關帝廟)라든지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묘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래 하루는 공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나의 사당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 사당엔 기도하는 사람들의 향냄새가 가득하냐고. 그들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돈도 없고 칼도 없는데 누가 당신에게 와서 향불을 바치겠냐고….

5ㆍ4 시기의 공자를 타도하자는 타도공가점의 구호나 문혁 때의 비림비공 운동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20세기의 공자는 쇠락한 문묘에서 몇 몇 제자들과 정겹게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신세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공자는 칼 마르크스라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마치 700여년 전쯤에 주희(朱熹)를 통해 부처를 만났듯이. 궈모러의 역사소품 모음집인 <족발(豕蹄)> 가운데에는 이러한 공자와 마르크스의 세기적 만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목은 ‘마르크스, 문묘에 가다’(1925년)

마르크시즘 공자 통해 중국에 뿌리

» 최근 발표된 공자 표준상. <중국사상사>로 유명한 전 국가도서관장 런지위는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온 마르크스가 공자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의 문묘(文廟)를 찾아갔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를 찾은 것은 어떤 사람한테서 자신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자신의 사상이 정말로 공자의 사상과 모순된다면 공자의 사상이 여전히 보편적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중국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공자는 안회, 자로 그리고 자공과 같은 가까운 제자들과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고 있던 중이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수염많은 게같은(개가 아니라) 얼굴을 한 인물이 마르크스라는 것을 안 공자는 크게 기뻐한다. 공자도 이미 마르크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10월 혁명의 포성이 중국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지만 공자는 자신의 사상이 체계가 없다며 사양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먼저 자신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마르크스는 우선 자신의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이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있음을 밝힌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사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마르크스는 만인이 한사람처럼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그들 모두 있는 힘껏 일하되 보수를 바라지 않으며, 생활 보장을 받아 춥고 굶주릴 걱정이 없는 이른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공산사회가 바로 자신의 이상적 세계라고 말한다. 이 말에 점잖은 공자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가 만인의 것이 된다. 사람들은 현자와 능력있는 자를 선출하며 믿음과 화목을 중시하게 된다.…재물이 헛되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이 독점하지도 않는다. 힘써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위해 힘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신의 대동(大同)세계의 이상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냉정하게 자신의 이상이 공상가들과 다르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자 당신은 기껏해야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도 걱정하고 균등하지 못한 것도 걱정하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자 공자는 물질을 존중하는 것이 본래 중국의 전통사상이었으며, 이러한 중국의 전통사상과 자신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산업을 발전시킨 이후에 균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마르크스는 2천여년 전 이 먼 동방에 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공자보다 노자가 빈말쟁이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이는 궈모러가 마르크시즘이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어낸 가상적 이야기이지만 여기엔 두 사람의 핵심 사상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공자와 마르크스를 화해시키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궈모러의 이러한 노력은 나중에 마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민주제) 플러스 진시황(집중제)을 자임했던 마오가 공자를 비판한 것은 그가 빈말쟁이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오가 높이 추앙했던 루쉰은 노자와 비교하면서 공자를 이렇게 긍정한 적이 있다. “공자와 노자가 논쟁을 벌였을 때, 공자가 이기고 노자가 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자는 부드러움(柔)을 숭상한다. (유가의) ‘유(儒)는 유(柔)’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공자도 부드러움을 숭상한다. 그러나 공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나아갔고 노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물러섰다. 관건은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 하는’ 실행자였고, 노자는 큰 소리나 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공담가였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언가 하나라도 하려면 한계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의 표준상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사실 공자의 모습은 하나일 수 없다. 부처와 대결했던 주희의 공자에게서는 어느덧 선사(禪師)의 분위기가 배어 있고, 세계 정부를 구상했던 캉유웨이의 공자에게서는 분열된 난세 속에서 통일을 체현하고자 있는 힘이 느껴진다. 불안한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논어>를 읽다가 문득 문득 공자에게서 ‘공을기’(쿵이지: 루쉰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주인공)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마도 잘못 보았을 것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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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고 진시황은 진정 일을 했다
산 비가 내리려니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마오 암살 기도한 ‘린뱌오 사건’ 계기로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 욕했습니다”
마오, 진시황이 그랬듯 공자 비판 ‘비림비공운동’
한겨레
» 2006년은 중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40돌이 되는 해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만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장차 또 어떻게 바뀌어갈까. 지난 2일 베이징 시장의 문화대혁명 기념품 가게에서 손님이 마오를 추억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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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⑤

아큐가 아니라 IQ가 75인 포레스트 검프가 항상 바보 같지는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포레스트가 미국 탁구 대표팀 선수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인상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어눌하지만 매우 ‘예리하게’ 중국을 단 두 문장으로 개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거의 가진 게 없어요.” “그들은 교회에 가지 않아요.” 사회자는 상상(imagine)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포레스트 검프 옆에 앉아 있던 딱정벌레(비틀즈) 그룹의 영혼, 존 레논은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마치 그의 불후의 명곡 이매진의 노랫말처럼. “상상해보세요 국경이 없는 세상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굴 죽이거나 죽을 이유도 없겠지요 / 종교도 없어지겠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없다면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될 텐데/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로버트 제멕키스 감독은 포레스트 검프의 입을 통해 미국의 보수세력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존 레논과 같은 반전 평화주의자들이 꿈꾸는(이매진) 세상, 즉 종교도 없고 소유도 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의 포레스트 검프가 방문하고 돌아온 “가진 것이 없고 교회도 가지 않는” 다시 말하면 지독하게 가난하고, 신을 업신여기는 불경스런 중국과 같은 세계라고 슬쩍 비꼬고 있는 것이다. 성동격서.

사실 1971년 4월10일부터 17일까지 미국 탁구 대표단과 기자들이 방문했던 당시 중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했으며 물론 교회에도 가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동란’의 와중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대혁명이라는 인류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대격동, 대실험 속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미국 선수단이 이러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직전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중국쪽의 방문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핑퐁외교’ 없었다면 동유럽 신세

» 1972년 2월 냉전체제를 뒤흔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 때 중국 노동자들과 얘기하는 닉슨 대통령.
이를 두고 핑퐁외교라고 부르지만 마오는 1970년에 에드거 스노를 만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초청 의사를 전하는 등 이전부터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벗어나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닉슨 대통령은 197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이 소련을 겨냥한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은 것이다. 문혁의 와중에 있었다고 해서 중국이 10년 동안 세계와 단절되어 국내에 대혼란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와 같이 향후 새로운 동북아 구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때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 소련 일변도로 나아갔더라면 중국은 오늘날 동유럽의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린뱌오(임표) 사건이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문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등 급부상하여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의 후계자로까지 지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마오 암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연료 부족으로 몽고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로 마오와 이전부터 충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린뱌오 사건이 당시 일흔 여덟 살의 마오에게 끼친 정신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는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에 가입하여 대장정을 함께 했으며 결국 후계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군부 내에 그의 세력들도 많이 있었다. 마오의 권위도 추락했고 공산당에 대한 신뢰도 하락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마오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유가에 반대한 루쉰을 다시금 떠올렸다. 린뱌오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후 마오는 한 좌담회에 참석해서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한다. “나는 동지들이 루쉰의 잡문을 보기를 권합니다. 루쉰은 중국의 제일의 성인입니다. 중국의 제일의 성인은 공자가 아닙니다. 나 또한 아닙니다. 나는 현인(賢人), 즉 성인의 학생에 해당합니다.” 이는 일찍이 옌안에 있을 때 루쉰을 논하면서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고 한 발언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만년의 마오는 더 이상 루쉰과 공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병칭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산 비가 내리려니 (중국이라는)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1973년 드디어 공자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마오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이집트 부총통을 접견했을 때 외빈들 앞에서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입니다. 나도 진시황입니다.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진시황이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파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합니다.”라고 천명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진시황이 뭐가 대단한가? 그는 단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6천여명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고 진시황 같다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인정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말한 것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가 더 보충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1958)

린뱌오, 소련으로 가다 비행기 추락

그가 공자에 반대하고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은 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을 따름이지만 진시황은 진정으로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를 받드는 사람들이 평소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진시황은 어떤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세습을 인정하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진시황은 집중제의 한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마오가 진시황과 공자를 병칭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빈말을 한” 공자였지만 그러한 공자 사상의 영향력은 중국에서 정말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중국에서 공자는 지식인들의 ‘교주’였다. 이러한 사정은 공산당에 반대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저명한 사학자인 궈모러(郭沫若)와 같이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과 함께 한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궈모러는 <십비판서>(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중국 고대 사상사>)에서 일찍이 공자를 인본주의자로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었는데, 마오는 이를 두고 그가 공자를 받들고 법가에 반대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입장은 국민당이나 린뱌오의 견해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공자 비판을 린뱌오 비판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마오의 생각은 장칭을 위시한 사인방에 의해서 대중운동으로 증폭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비림비공’운동이 그것이다. 공자는 노예제로부터 봉건제로 이행하는 춘추말기에 몰락한 노예주 계급을 대표해서 노예제 부활을 도모한 보수반동의 사상가로 평가되어 비판받기에 이른다. 사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과유불급)는 공자의 중용 사상은 마오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공자의 사상과 옛 것을 타파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마오의 혁명사상은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림비공 운동은 이미 린뱌오 사건 이후 이미 빛을 잃어버린 문혁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한 비극이었다.

‘과유불급’ 공자사상 마오와 상극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지난 5월은 마침 문혁 발발 40주년을 맞는 달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이 문혁에 관한 보도를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우리 언론에 약속이나 한 듯이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유명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에 문화대혁명을 검색해보면 “당신의 검색어는 법률에 저촉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뜬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에서 한번 해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혁이라고 치니 수많은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니 ‘문화대혁명’마저도 이상이 없었다. 문혁은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 그동안 중국의 주류적 관념이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유명한 작가인 한샤오꿍이 “편견을 더하거나 기억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빈궁한 대국이 급속히 발전하려는 가운데 겪은 재난은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겪는 사랑 혹은 원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문혁 담론을 비판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과거사 청산을 말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남의 문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거나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쉽게 비판하는 것은 ‘아큐’의 정신승리법이 아니면 ‘포레스트 검프’의 복잡한(?) 단순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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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권 | 북부성역권 | 대도시근교권 | 서남해안권 | 서북해안권 | 서북내륙권
국립공원 계룡산

계룡산은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에 형성된 잔구성 산지로서 저산지대에 유달리 높게 솟은 군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이 산은 동서남북 사방에 동학사, 갑사, 신원사, 구룡사의 대가람을 배치한 불교의 영지이며 자연경관이 빼어난 국립공원으로 이름이 높다.

공주 버스터미널로부터 30분 21.8km
국립공주박물관

백제 25대 무령왕의 부장품과 8,000여 점의 각 시대별 문화 유산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공주 버스터미널로부터 10분 2km
무령왕릉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를 합장한 무덤으로 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2,906점에 달해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이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공주 버스터미널로부터 10분 2km
계룡산도예촌

계룡산분청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철화분청사기는 15세기에 조선요의 한쪽을 대표하는 사장요로서 오직 계룡산록에서만 만들어진 도자기로 지역간의 서로 다른 도자기 형식을 뚜렷이 나타낸 대표적인 것이다.

대전 -> 공주 반포면 상신리
상원골 계곡

태화산 기슭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맑은 물과 계곡 양쪽으로 어우러져 있는 숲으로 인해, 무더운 여름 철에도 더위를 모르는 계곡은 피서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국사봉 정상에는 말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흔들면 아래까지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한다.

마곡사 -> (지방도 604호 유구방향)-> 상원골 계곡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에는 11,000여점이 넘는 귀중한 유물이 소장, 진열되어 있으며 선사시대에서 구한말까지의 각종 문양전, 와당, 토기, 금속장신구, 옹관, 석조, 석불 등이 소장되어 인류생활과 문화 그리고 선조들의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부여 버스터미널로부터 10분 2.3km
무량사

만수산에 자리잡고 있는 무량사는 5층석탑, 김시습 선생의 부도와 자상화 등의 문화재를 접할 수 있다.

부여 버스터미널로 부터 40분 27km
대조사 미룩보살

성흥산성 바로 밑에 있는 작은 절인 대조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유명하다. 이 입상은 관촉사의 은진미륵불과 크기, 양식이 비슷하다.

부여 버스터미널로 부터 30분 21.8km
부여땅 자연미술학교

자연과 어우러진 합수초등학교 5,000여평의 넓은 공간을 활용, 어린이들이 보고, 느끼고, 만져보고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노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으로 창의 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다.

부여 -> 규암사거리 우회전 -> 내지리 -> 부여땅미술학교
관촉사 은진미륵

관촉사 은진미륵은 높이 18.12m의 국내 최대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이 거대한 석불에는 혜명대사의 불심에 감동한 문수보살이 동자를 보내 모래쌓기 공법으로 불상을 세우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논산 버스터미널 로부터 10분 3km
백제군사박물관

오천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나아가 장렬히 전사한 계백장군 묘소 주변 부지에 위치 하고 있으며, 백제와 군사라는 성격을 부여하여 전시물을 구성, 백제시대의 유물을 물론 그 시대의 군사적 모습을 전시하는 등 백제의 군사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논산 -> 부적면 부적농협 외성지소 앞 우회전 4km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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