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에 건축가를 대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열가지 선정한 일이 있다.

당연히 영주 부석사가 1위를 차지하였는데 의외로 조계산 선암사가 상위에 올랐다.

선암사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불국사 석가탑 같은 빼어난 건축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선정된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나서지 않고 산속에 아담하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람배치가 자연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근대에 들어 가람배치가 거의 변경되지 않고 원래 모습을 (19세기)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암사를 처음 들어설 때, 작고 소담한 일주문을 마주보게 된다.

대부분의 고찰에서 만나게 되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일주문에 비해 선암사의 일주문은

참배객에게 친근감을 주게된다.

하지만 일주문이 약간 높은 돌계단 위헤 서 있기 때문에 절집으로서 위엄은 잃지않고 있다

 



 

 

선암사의 특징은 소담하고 잘 짜여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품격과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곳곳에 적절한 장엄이 보태어져 있다는 것이라고 본다.

 

대웅전의 경우에도 화려함보다는 절제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대웅전은 돌을 잘 깎아 만든 가구식 기단 위에 지어졌다.

가구식 기단은 통일신라시대 건축된 사찰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그러나 선암사 대웅전 기단은 돌이 심하게 떨어져 나간 흔적이 보이는데

돌이 강한 화기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선암사가 수차례 대화재를 겪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증거라 하겠다.

 

현재 대웅전은 19세기 초반에 중건된 3 칸 짜리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지만

당시 다른 건축물에 비헤 칸살이 넓어 고대형 (백제형) 건물의 흔적이 남았다고 보아진다.

 

앞뒤로 만세루와 대웅전 그리고 죄우의 심검당과 설선당의 ㅁ자형 구조에

가운데 쌍탑을 배치한 것은 아주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불전의 배치라 하겠다.

요즘 중창 불사를 거친 관광 사찰에 비하면 불전앞 마당이 횡하니 넓지 않고 균형감이 있어

참배객으로 하여금 긴장감과 숙연함을 느끼게 해준다.

선암사 가까이 있는 송광사 대웅전 앞의 황량함과 비교하면 그 느낌이 와닿을 것이다.

 



 

 

대웅전 내부의 천정 및 들보다.

두마리 용이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는 장식이다.

용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생물로써 그려진다 한다.

천장의 연화무늬, 대들보의 단청 그리고 정교한 공포가 눈에 띈다.

 

날씨가 더워 마침 법당문을 열어두어 망원으로 내부를 촬영하였다.

선암사에서 좋았던 것 중의 하나가 스님들이 너무 친철하여 오히려 미안할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대웅전 옆을 지나가는데 안에 계신던 스님이 한 보살님과 이야기하고 계시다

나를 보고는 황급히 일어서셔서 합장을 하는데

오히려 내가 당황하여 어떻게 답례를 해야하는지 몰라 허둥거리기까지 했다



 

 

중요한 건축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곳 중 하나가 화장실이라면?

우리나라에 화장실이 유명한 두 건축물이 있다. 첫째는 당연히 선암사다. 다음은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요즘은 많은 사찰이 선암사 뒷간을 벤치마크하여 재래식 화장실을 지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도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송광사 화장실이 어찌도 선암사 화장실을 닮았는지...

다만 조금 업그레이드하여주변에 연못에 연꽃을 심어둔 것을 제외하고는.



 

 

선암사 회장실 간판을 세가지로 읽는다. 첫쩨 뒷간, 둘째 깐뒤 그리고 셋째 싼뒤다.

개방적이라는 것이 선암사 "싼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화장실 각 칸에 문이 없다.

다행인 것은 남녀 화장실은 좌우로 분리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어깨쯤 오는 칸막이가 있다.

그리고 화장실 외벽이 살창으로 되어있어 볼일을 보면서 밖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역시 다헹인 것은 낮에는 살창이 발과 같은 역할을 하여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선암사에 가면 반드시 싼뒤에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된다는 불문률이 있으며

뒷간에서 일을 보지 않으면 선암사를 본 것이 아니라는 옛말이 전해온다.

참고로 이 뒷간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고(가장 오래된)의 화장실이다.

 

화장실의 뒷 모습이다. 뒷쪽 역시 살창으로 되어 있으며 이 뛰어난 자연 환기 장치 덕분에 화장실 내에도 밖에서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심검당은 대웅전에서 동쪽에 있는 2층 다락이 있는 ㅁ자형 건물이다.

본래 심검당은 스님들이 수련을 하는 선원으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다행이 스님의 양해를 구하고 후다닥 둘러 보고 나왔다.

선암사 심검당을 보고 느낀 점은 한마디로 낡았다는 것이다.

스님들이 이런 낡은 집에서 지낸다는 것이 조금 안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아직도 옛 고옥을 지키고 있는 많은 종가집이 있지만

심검당은 그 이상으로 낡았으면 낡았지 그 이하는 절대 아니다.

물론 많은 사찰에서 요사채를 번듯하게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 새로 지은 것을 보고 속상해하기도 했지만

선암사 심검당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심검당은 2층 다락이 크게 붙어 있는 독툭한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 전체에 다락을 올린 건물은 드물게 보는 구조이며 

선암사의 경우 좁은 계곡에 절이 들어서 있어 공간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다락은 창고 대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일반 민간에서도 2층 다락은 보통 곡물의 저장 등의 용도로 쓰였다.)

지금은 거의 비어 있으며 잡동사니가 굴러다니고 빨래 건조실 용으로 쓰이고 있다.

심검당 구석에 있는 다락올라가는 계단이다.

너무 낡아 딛고 올라 갈 때 무너질까 조금 가슴이 떨렸다.

내 체중이 얼마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락 한 구석에 海와 水라고 투각되어 있는 광창이 보인다. 안에서 봐서 글자가 꺼꾸로다.

선암사가 여러번 화재를 겪어 일종의 비보책으로 곳곳에 바다 해자와 물 수자를 새긴 건물을 볼 수 있다.

화재가 빈발하여 한 때 조계산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하였다 한다.

다락 천장이 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이 통하라고 안 쪽으로는 벽이 없다.




 

 

대웅전 뒷 쪽으로는 장경각, 불조전 그리고 팔상전이 나란히 서 있다.

터가 좁아서 세 건물이 처마에 처마를 맞대고 서 있다.

불조전과 팔상전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면 원통전이 있다.

앞의 두 건물 배치상 원통전의 전경을 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봉렬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원통전을 지은 이후에 불조전을 지었다고 하여

의도적으로 원통전을 외부의 시야를 차단할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원통전은 고무래(丁) 모양으로 된 건물이며 조선조 순조때 왕실 원당으로 설치되었다.

정조가 후사가 없어 치성을 드렸는데 관세음보살의 법력으로 순조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왕실 원당이 되어 주변 양반들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왕실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선암사가 다시 중흥의 길을 접어들게 된 것이다.

순조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오늘날 선암사는 외로운 폐사지로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원통전의 입구 앞 튀어나온 포치(Porch)의 천정 장식이다.

연꼿과 학이 아름답게 그려져있다.



 

 

원통전 내부에는 캐노피 같이 기둥을 세우고 불단을 별도로 만든 다음 관음보살을 모셨다.

본래는 문이 달려 있어다 하니 내부에 분리된 공간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라 하겠다.

앞쪽 현판에 쓰인 大福田은 순조가 내린 것으로 왕실 원당이라는 증거이다.

사찰의 불당에 불전함이라쓰인 상자가 있는데 간혹 대복전이라 쓴 경우도 있다.

아마 시주를 의미하는 말이라 추정되는데 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선암사 가장 뒤에 있는 건물이 응진전과 각황전이다.

응진전은 선방으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각황전은 본래 장육존상을 모셔야 하나 지금은 철불을 모시고 있다 한다.

불전이지만 외부인의 참관이 허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불전 및 건축물의 구조는 그 절의 종파에 따른 불교 교리를 형상화 하는 것이다.

선암사는 선을 중시하여 두개의 선방을 두고 있으며 하선방은 심검당이며

상선방은 칠전선원이며 응진전이 그 중심이다.

응진전이 가람배치상 선암사의 가장 윗쪽에 위치한다.

 

칠전선원 앞에는 작은 문이 있으며 호남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역시 여러단으로 된 계단 위에 있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내비친다.

칠전선원은 옛부터 이름난 선원으로 많은 선사를 배출한 명문 선원이라한다.

그래서 호남제일선원이라는 자부심 가득찬 현판을 떳떳이 내걸 수 있으리라.




 

 

본래 응진전은 선원으로 출입금지 구역이지만 지금 보수공사중이라 출입제한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계단을 올라 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마당한 구석에서 공사 인부가 볼일을 보고 있었다.

순간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 인부는 젊은 사람으로 아마 보조인부같기는 했다.

하지만 절 한 구석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그리고 문화재인데 방뇨를 하는 사람이

어찌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어 문화재 수리를 제대로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곳을 다녀보면 옛 건축물을 보수한 것이 오히려 망가뜨린 것인지 모를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그 이유가 어찌보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문화재를 보수한다는 것은 건설 공사가 하니라 우리의 집단 자아를 다시 확인하고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데 이를 무시하고 보수를 하면 옛 건축물의 정신이 소실되는 것이리다.

 

아래 사진은 응진전 부엌 뒤 물확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석조물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물확이 배치된 각도, 비례 그리고 모양의 자연스러움에 찬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우스게 소리 같지만 이 물확을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지하수는 차기 때문에 햇볕에 달구어 음기를 중화시키려는 지혜가 담긴 설계다.

고찰에 가면 이런 종류의 물확을 종종 볼 수 있으나 선암사의 물확만큼 균형잡힌 작품은 보기 어렵다.

지금은 공사장 인부들이  냉장고로 쓰시는지 음료수 통이 여럿 띄어져 있었으나

사진은 건져내고 찍었다.

 



 


 

선암사에는 설선당, 창파당과 같은 승방이 있으나 외부인 출입이 안되는 탓으로 관람이 불가능하였다.

이외에도 선암사 내에 아주 오래된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그 휘어진 모습이 장관이다.

- 쌔깜둥이 http://blog.yes24.com/chajutae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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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삶터 깨운 ‘철마의 경적’
[기획] 칭짱 철도 타고 티베트를 가다
① ‘성스러운 땅’이 열리다
한겨레 이상수 기자
» 지난 7월1일 개통한 칭짱(청장) 철도도 오지 티베트를 중국, 그리고 세계로 열어놓았다. 푸른 하늘과 설산으로 꽉 찬 자연 속에서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해온 티베트는 이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베이징에서 라싸까지의 거리가 총 4000km가 넘는 칭짱철도의 열차가 설산 옆 철교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기획연재 : 칭짱 철도 타고 티베트를 가다
[관련기사]
철길은 세상을 잇는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7월1일 개통한 칭짱(청장) 철도도 오지 티베트를 중국, 그리고 세계로 열어놓았다. 푸른 하늘과 설산으로 꽉 찬 자연 속에서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해온 티베트는 이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독립적인 현대화와 본격적인 중국화의 갈림길에 선 티베트를 네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마지막 숨은 ‘성스러운 땅’ 하늘 길 넘어 방문객 급증

티베트에는 유난히 성스러운 땅이 많다. 자치구의 수도인 라싸 자체가 ‘성스러운 땅’ ‘신의 도시’란 뜻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색감과 조형미가 뛰어나다. 아파트 창문에조차 조그마한 단청을 꾸민다. 화려한 색감은 티베트 자연의 수려한 풍광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티베트인들 만큼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겨레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통 장례인 ‘토쭌’(천장)은 죽은 이의 살과 뼈를 찢어 독수리나 물고기한테 주어 치른다. 이승을 떠난 부모형제의 살을 먹고 자란 새나 물고기를 만날 수도 있다고 믿기에 티베트인들은 새나 물고기를 사양한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조차 먹이사슬의 둥근 원 안에 자리한다.

티베트인들은 한평생 ‘성스러운 땅’ 라싸를 맴돈다. 온몸을 땅바닥에 엎드리며 걸어(오체투지) 라싸까지 순례한다. 라싸에서는 달라이라마의 겨울궁전인 포탈라궁이나 유서깊은 조캉 사원(다자오쓰) 주위를 기도하며 맴돈다. 이들의 발걸음은 한평생 둥근 원을 그린다. 죽은 뒤에도 윤회의 둥근 고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환생한다고 믿는다. 관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라마나 무량광불의 화신인 판첸라마가 숨지면, 온갖 힘을 기울여 그가 환생한 어린이를 찾아낸다. 티베트에서는 삶과 죽음조차 윤회의 원 안에 있다.


 

»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종교와 세속적 권력의 중심이었던 포탈라궁은 티베트인들에겐 여전히 마음의 중심이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던 지난 12일, 중국 윈난성에서 온 티베트인들이 포탈라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전통복장을 준비해 와 궁 앞에서 갈아입고 사진기 앞에 섰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윤회의 터전에 직선의 칭짱철도=모든 사람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살아가는 라싸에 가장 직선으로 달리는 교통수단인 열차가 지난 7월 첫 경적소리를 울렸다. 철마가 마지막으로 숨은 경건한 땅까지 들이닥쳐, 지난 200년 동안 자신이 수행했던 산업화와 근대화의 상징 구실을 마지막으로 수행한 셈이다.

2002년 중국 서남 열차의 종점이던 칭하이성 거얼무에서 첫삽을 뜬 칭짱철도는 지난해 10월12일 거얼무∼라싸 구간의 공사를 마친 뒤 시험 운행을 거쳐 지난 7월 1일 성대한 개통식을 열었다. 개통식에는 1988~92년 4년 동안 티베트 공산당위원회 서기를 맡았던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직접 참석했다. 평균 해발 4천m를 지나는 이 철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을 운행해, 이미 ‘하늘의 길’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 고원 열차는 칭하이성 서쪽의 거얼무에서 고원용 기관차로 머리를 바꿔단 뒤 칭짱고원을 오른다. 시닝에서 라싸까지는 26시간, 베이징에서 라싸까지는 48시간을 꼬박 달린다.

‘원형’의 문화 가로지른 ‘직선’ 어디로
“물류 비용 1/5로 줄어” 윤택한 생활 기대
중국화 가속·자연친화적 삶 파괴 우려도

» 칭짱 철도 이용한 티베트 여행 안내
고원의 절경이 요구하는 대가인 고산병=거얼무에서 퉈쥐까지 11시간 정도 달릴 동안 차창 밖에는 삭막한 황무지가 이어진다. 황허와 양쯔강의 발원지인 싼장위안, 세계에서 가장 높이 있는 해발 5072m의 탕구라산역, <서유기>의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지나갔다는 설산 등의 절경이 황량함을 달래준다.

퉈쥐를 지나 해발 4702m인 안둬에 이르면 이끼와 잔풀이 융단처럼 황무지를 감싸기 시작한다. 황무지 위로 풀빛이 짙어지면서 차창 밖에 등장하는 생명체 또한 양, 야크(들소), 노루, 까마귀 등 다양해진다. 철마가 춰나 호수를 지나면 풍광은 절정에 다가간다. 이끼와 잔풀은 고원의 바람에 나부끼며 무성해진다. 옛 서북방 민족들의 활동무대인 나취와 당슝을 지나면 눈산과 끝없는 고원, 부드러운 초원과 늪지대, 복류천과 강물 등 고원의 모든 풍광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대단원에 이르렀음을 고한다.

평균 해발 4000m에서 연출되는 절경들은 두통과 호흡곤란, 협심증 등 고산병 증세를 대가로 요구한다. 칭짱열차는 객실 좌석마다 산소를 공급하며, 두 명의 의사가 비상 대기한다. 열차 운행 때마다 3~10여명이 산소마스크 신세를 진다. 이 철도 개통 이후 지금까지 고산병 증세로 숨진 사람은 아직 없다. 칭짱철도공사 외사판공실의 왕페이쉰(51) 주임은 “칭짱철도 개통 이후 9명이 사망했다는 일부 중국 매체의 보도는 오보”라고 밝혔다.

개발과 파괴의 두 모습, 칭짱철도=철도 개통 이전에 티베트로의 주요 교통수단은 불편한 버스나 비행기였다. 중국의 서민들은 감히 티베트 여행을 꿈꾸기 어려웠다. 화물열차가 운행되면 티베트를 오가는 물류비용은 더욱 떨어질 전망이다. 니마츠런 티베트자치구 부주석은 15일 “철도 이용 전 물류비용은 1t의 화물을 1㎞ 우송하는 데 5~6마오(약 62.5~75원)였으나, 철도를 이용할 경우는 1마오(약 12.5원)로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싸시의 통계는 철도 개통 이후 라싸 방문객이 두 달 동안 50~60% 이상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도의 개통이 티베트인들의 삶을 한결 윤택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예상은 개발에 따르는 당연한 기대다. 티베트인들이 꾸려 온 자연 친화적인 삶을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 역시 따른다. 한족의 빠른 유입으로 티베트 지역의 ‘중국화’가 가속화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소리가 가장 높다. 라싸 지역에서 택시 운전기사는 80%가 한족이다. 라싸의 경제는 외지에서 온 투자자들이 쥐락펴락한다. 분명한 것은 칭짱철도가 원형의 윤회 터전인 티베트에 현대화된 직선의 삶을 옮겨올 것이라는 점이다. 그 직선의 삶이 외지인들에 의한 티베트 사회·경제 지배 현상의 심화일지, 아니면 티베트인들 스스로의 현대화된 삶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라싸/글 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 지난 7월 첫 기적소리를 울린 칭짱철도가 티베트를 변화시키고 있다. 라싸 인근의 당슝 지역의 티베트 주민들이 철교 옆 들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티베트의 성스러운 3대 호수 중 하나인 나무춰 호수가 설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해발 4718m에 위치한 이 호수는 서울 면적의 세 배 가까이 되며,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소금호수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소금호수이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티베트의 사원과 궁전, 산과 호수와 강, 마을과 가정집 지붕에는 ‘타쭤’라 불리는 오색찬란한 기도문이 만국기처럼 걸려있다. ‘타쭤’는 기도문이나 경전의 내용을 오색의 천에 새겨 줄로 꿴 것이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티베트의 산에는 양들과 야크가 부족한 풀을 뜯기 위해 이곳저곳을 휘젖고 있다. 라싸 인근 4000여m 고원에서 목동이 풀먹는 양떼들을 지켜보고 있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종교와 권력의 중심지였던 포탈라궁.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기차 안에서 본 강. 하늘인지 강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색깔이 비숫하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하늘에서 본 티베트. 굽이 굽이 산 능선을 따라 길들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민가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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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따라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다
2005년 09월 06일(화) 오후 07:09
[오마이뉴스 안병기 기자]
▲ 사적 301호 궁남지
ⓒ2005 안병기

만수산 무량사에서 돌아오던 발길을 부여에서 멈춘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사적 135호 궁남지였다. 속칭 '마래방죽'으로 불리는 곳이다. 1965∼1967년 사이에 실시되었던 복원 공사 이전까지만 해도 자연적인 저습지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왕 35년조에 보면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 왕궁지의 남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연못의 이름을 궁남지라 부르는 것이다. 현재 복원된 궁남지는 본래 크기인 3만여 평에서 크게 축소된 규모로 1965년 정비작업을 했으며 다리와 누각은 1971년에 지었다.

궁남지 옆으로는 최근에 조성된 방대한 연꽃 방죽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른 연꽃들이 피워내는 해맑은 미소가 아름답긴 했지만 연꽃 방죽이 너무 넓어 궁남지가 오히려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고 산만한 느낌도 드는 건 문제였다.

▲ 궁남지 초입에 서 있는 서동요비. 주변이 너무 간결해서 어떤 종류의 상상력도 허락하지 않는다.
ⓒ2005 안병기

궁남지 옆에 있는 서동요비는 말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7년 전만 해도 노래비 주변에 산다화도 피어 있고 잡초도 우거져 마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떠올릴 만한 공간이었으나 이 말끔하게 다듬어진 공간에서 무슨 옛 이야기를 떠올릴 것인가. 말끔하게 단장된 유적들은 우리에게서 이렇게 역사적 상상력을 앗아가 맨송맨송하게 만들어 버린다.

궁남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생가가 있다. 시간상 시비가 서 있는 백마강 기슭 백제나성 자리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는 둘러보지 못하고 시내 복판 동남리에 있는 생가에만 들르기로 한다.

▲ 신동엽 시인 생가 대문
ⓒ2005 안병기

▲ 신동엽 시인의 생가
ⓒ2005 안병기

정감있게 다가오지 않는 시인의 생가
한때 남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미망인 인병선 여사가 다시 사들여 옛날의 모습을 찾아 놓았다. 복원 당시는 신동엽 시인이 살던 때 그대로 초가집이었지만 지금은 새뜩한 기와집이다.

군청에서는 이엉을 새로 해 이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김유정 생가나 정지용 생가의 경우와 견주면 그리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지난 4월 김유정문학제에 갔을 적에 김유정 생가는 초가지붕 잇는 날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로 열고 있다는 말을 관계자에게서 들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양대 음대 이종구가 신동엽 시에다 곡을 붙이고 이정지가 부르는 노래 '초가을'을 가만히 불러본다.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밑,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궤상(机上) 앞
초가을 금풍(金風)이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멕인 광목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밑, 또 찾아 오는가…
노래 '초가을' 가사

신동엽 시 '초가을'의 어두운 서정이 대금 가락에 실려 가슴을 파고든다. 시인이 세상 떠난 지 45년이 흐른 지금 그가 그리던 '알맹이'만 남은 세상은 어디쯤 와 있을까.

문학이란 "영원한 괴로움이요, 영원한 부정이요, 영원한 모색이다"라고 했던 신동엽 시인. 역사란 모색하다가 날이 샌다. 북망산에 가면 날 새기 전에 죽은 자들의 무덤으로 넘쳐난다. 이 지지부진한 역사에 질려 희망을 버린 사람이 몇 몇인가.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나와 오른 쪽에 있는 정림사지를 향했다. 1942년 정림사지 터를 발굴했을 때 '대평8년무진장림사대장당초'라고 정림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나왔다 한다.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다는 것은 그렇게 확인된 셈이지만 백제 당시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국보 제 9호 정림사지 5층석탑
ⓒ2005 안병기

정림사 터 한 가운데는 망국의 설움을 온몸으로 견뎌낸 5층석탑이 서 있다. 기단은 1층 지붕돌에 비해 훨씬 좁은 단층이다. 면석의 모서리 기둥이 위로 갈수록 좁아져 목조기둥의 배흘림 수법을 취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한 판석이지만 처마를 살짝 치켜 올라가게 해 보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경쾌한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1층 몸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라 새겨넣은 자리가 있다.

▲ 보물 제 108호 정림사지 석불좌상
ⓒ2005 안병기
정림사지 북쪽 강당 자리에 있는 전각에는 석불좌상 한 분 모셔져 있다. 정림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대로 고려 현종 때 절을 중수할 때 모셔진 듯하니 11세기 불상이다. 얼굴이나 몸체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돼 있긴 하지만 아래쪽 대좌에 새겨진 안상이나 연꽃 조각만은 비교적 뚜렷하다.

부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낙화암이다. 낙화암으로 가려면 도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부소산성 길을 허위허위 올라간다. 역사의 고난을 호흡하기엔 너무나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간다.

백제의 충신들인 성충ㆍ흥수ㆍ계백장군의 넋을 기려 지은 삼충사를 지나 영일루를 거쳐서 군데군데 띠처럼 쌓아올린 토성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20여 분 정도 발품을 팔면 백마강을 낀 서북쪽 낙화암에 이르게 된다.

낙화암, 이 은유적인 이름은 뭔가
금강은 백마강 말고도 지역에 따라 백강, 창강, 곰강 등으로 불린다. 탁 트인 풍광과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어우러진 낙화암. 부소산의 북쪽 끝에 위치한 40~50m 높이의 암벽인 낙화암에 대해서 최초로 기록한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조에는 낙화암에 대해 다음같이 말한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 돌이밑으로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면서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것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속설이니 궁녀들만은 이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나라 역사에 명백히 쓰여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인 고려 충렬왕 때까지는 낙화암이 지금과 달리 타사암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지리지>에는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200년의 시간은 바위라는 무생물의 이름마저 직유법에서 은유법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타사암이라면 몰라도 낙화암이란 서정적인 이름 앞에서 어떻게 역사의 통증을 맛볼 수 있단 말인가.

▲ 고란사
ⓒ2005 안병기

나라가 위태로울 때 계백장군은 겨우 5천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맞서 싸우다 죽음을 택했고, 궁녀들은 적에게 잡혀 능욕당하느니 차라리 낙화암에서 죽음을 택했다는 전설은 분명 비장하면서도 애국적인 장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 수가 유행가 가사처럼 3천이냐 아니면 몇 백이냐 따위의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숫자의 크기가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영역에 속한다
역사는 기록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역사는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자의 영역에 속한다는 뜻이다. 역사를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본다거나 미화하려 들어선 안 된다.

내가 이 '낙화암'의 전설에서 맡는 것은 케케묵은 국가주의의 냄새이며, 왕을 모시던 궁녀들이니 행여라도 적에게 능욕당해선 안된다는 '순결 이데올로기'의 냄새이다. 지배 권력의 시각에 맞춰 재단된 이런 이데올로기가 궁녀들을 집단자살로 몰고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낙화암 정상에는 지붕이 6각형인 정자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00여 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고사 직전에 놓인 고란초는 사람들의 손을 타지 못하도록 유리벽 속에 들어 있었다.

▲ 백화정에서 바라본 석양
ⓒ2005 안병기

▲ 산마루에 반쯤 걸린 태양이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왜 슬픈 것일까!
ⓒ2005 안병기

일몰, 그 장엄한 하루의 에필로그를 지켜보며
곧 장려한 해넘이가 시작될 시간이다. 일몰을 바라보기 위해 갔던 길을 황급히 되짚어 올라와 낙화암 정상에 있는 백화정으로 다시 올라온다.

보령 성주산 쪽으로 서서히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노을이 백마강 물결 위에다 무심코 제 붉은 마음 한 점을 떨어뜨린다. 강물이 점점 핏빛으로 붉어진다. 붉은 노을 속에는 비장한 선율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앵앵거리는 아쟁의 소리가 백마강가의 빈 하늘을 가득 채운다.

사비성이 함락 당했던 서기 660년 7월 13일. 그날의 황혼도 저렇게 장려했을까를 생각하는 동안 저녁 해는 산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황혼이 연주하던 아쟁의 줄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리더니 별안간 주위가 칠흑으로 채워졌다.

황혼은 무덤이라는 말과 이음동의어이다. 오늘도 그 무덤에다 하루를 묻었다. 오늘은 황홀한 황혼의 하늘가에 하루를 묻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터덕터덕 부소산을 내려간다.

부여읍내 가득한 집들이 하나 둘 등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렇게 등불이 켜지듯 오늘 저녁 사람들의 마음에도 등불이 켜졌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8월 29일 부여 무량사에 갔다오다 부여에 들러 돌아보았던 여행 기록입니다. 부여가는 길은 따로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노래 '초가을' 가사는 행의 배치가 원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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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있는 연미산으로 오세요"
 
[연합뉴스] 2006년 08월 08일(화) 오전 10:08  (공주=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금강 자연미술비엔날레
10월말까지 국내외 52명 작품 전시 

국내외 예술가들이 자연친화적 작품을 뽐내는 축제 '2006 금강 자연미술비엔날레'가 8일 충남 공주시 우성면 신웅리 연미산 자연미술공원에서 85일간의 막을 열었다.

이날 개막식은 최민호 충남도 행정부지사와 이준원 공주시장, 배귀섭 비엔날레조직위원회 위원장, 주민, 관광객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식전행사와 개막식, 작품 관람 순서로 진행됐다.

㈔한국자연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충남도와 공주시가 후원하는 이 행사에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출품작이 연미산 주차장에서부터 진입로, 등산로까지 산 곳곳에 설치된 가운데 오는 10월31일까지 계속된다.

참여 작가는 고관호, 김도명, 윤석숙, 이애자, 전원길, 홍현기 등 국내 작가 28명과 페터 팔(루마니아), 안 이벙(프랑스), 핀루(중국), 벤자민 태핀더(영국), 로저 티본(필리핀) 등 세계 17개국 작가 24명 등 모두 52명이다.

출품작들은 자연환경을 소재로 삼아 새로운 아이디어로 구성해 낸 작품들로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끌게 되며 행사가 끝난 뒤에도 자연미술공원에 남겨져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게 된다.

또 행사기간 '어린이 자연미술전'과 '자연미술 체험학습'이 함께 진행되며 주말에는 각종 공연과 퍼포먼스 등 부대행사도 마련됐다.

㈔한국자연미술가협회 측은 "자연환경이 위기에 닥친 만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며 "이러한 시각에서 만든 자연미술 작품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입장료는 일반 4천원(25명 이상 단체 3천원)과 중.고등학생 3천원(단체 2천원), 초등학생 2천원(단체 1천원), 4인 가족 1만원이며 유아와 노인, 장애인은 무료.
 
세계 미술인들 "자연을 생각한다"
 
[대전일보] 2006년 07월 26일(수) 오후 09:07

예술, 자연을 만나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자연미술 전통이 그 어느 지역보다 오래된 대전충남이다. 그 중심에는 한국자연미술가 협회, 일명 야투(野投)가 있었다.

개념조차 생소했던 자연미술을 80년대초부터 추구했던 이들이 충남 공주시 연미산 자연미술공원 지역에서 ‘2006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개최한다. 지난 2004년에 이어 두 번째 여는 행사다. 특이한 점은 공주시에서 추진하는 연미산 자연미술공원 사업과 맞물려 기획돼 비엔날레 참가작 자체가 공원의 조각품으로 영구 보존된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작가들은 지난 5월 공모 결과 선정된 대전충남지역 작가를 비롯 한국 작가 29명과 외국 17개국 24명이다.

유동조, 고승현, 정장직, 이종협, 강희준, 이응우, 이용덕, 허강 등 국내작가와 안케 멜린, 핀루, 타츠노리 프지히, 브랑고 스몬, 게오르그 디츨러, 안 이벙, 바롤 토팍크 등 외국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국적은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남아공, 인도네시아, 이탈리아, 터키, 슬로베니아, 네덜란드, 헝가리, 영국 등 다양하다.

외국 작가들은 지난 7월 중순 입국한 뒤 한국 작가들과 연미산 일대에서 작품 설치에 한창이다. 이들은 개막 전까지 매일 작품설치 등 기술적인 부문에서부터 작품 개념 등 다양한 방면을 논의한다.

작가 이종협과 같이 5.5m 규모의 거대한 철판에 잎사귀 모양의 형태를 바탕과 분리시켜 인공적 자연을 통해 자연의 본질을 되돌아 본 작품 ‘잎’을 설치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 설치가 진행 중이다.

독일 출신으로 큐레이터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게오르그 디츨러는 “환경을 고려한 자연미술을 매게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간 점이 인상적”이라며 “전통적 형태의 조각에서부터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설치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게돼 설렌다”고 밝혔다. 그는 볏단으로 만들어진 ‘자가분해 오두막(self decomposing hut)’을 제작할 예정이다.

총감독 고승현(50) 작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한 작품들로 꾸며질 것”이라며 “환경과 자연을 그 중심에 놓고 만들어지는 자연미술의 본질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27일 오전 10시 공주대 산학협력관에서는 자연미술을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린다. 이날 행사는 김영길 교수(공주대)가 진행하며 한국과 영국,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자연미술, 환경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미술평론가 김종길씨는 ‘자연의 미학적 이해와 의미론 탐구를 통한 야투의 개념 연구’, 영국 현대 미술과 자연미술 센터 클라이브 아담스 회장은 ‘인간과 지구의 재관계화’, 그린뮤지엄 샘 바우어 관장은 ‘그린뮤지엄 소개’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한다. 또 영국야생조류협회 데이브 프리차드 회장은 ‘예술과 국제 환경정책- 습지보호에 관한 람사 협약의 발전과 계승’을 주제로 발표에 나선다. 비엔날레 개막은 8월 8일이며 폐막은 10월 31일로 예정돼 있다.<南尙賢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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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0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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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tureartbiennale.org/index.html

해콩 2006-08-0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들 눈으로 보면 훨씬 멋지다. 뜨고 지는 햇빛의 조명 받으며 숲을 거닐며 자연과 하나된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재미, 무척 쏠쏠했다. 또 한번 가보고 싶은데.. 새벽이나 달밤에.
 



 
[위대한 세기_피카소]
전시일정 : 2006년 05월 20일 ~ 2006년 09월 03일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2층, 3층
 
 
전시회설명 :
1881년 스페인의 말라가(Malaga)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1973년 사망하기까지 20세기의 미술사조를 창조하고 이끌고 또 지배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걸출한 예술가였다. 80년 동안의 작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무려 5만점에 이르는 엄청난 작품을 남긴 그는 20세기 미술의 독보적인 존재로 전 세계인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 시킨 세기의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20세기는 피카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한 세기를 가로지르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통해 20세기는 가히 피카소의 세기라고 지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전시는 20세기 미술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칭송 받는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를 국내 최초로 대규모 회고전 양식을 빌어 대중의 눈을 통해 조명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기획된 전시이다.
피카소의 1895년부터 1973년까지 작가생활은 크게 7개의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청색시대와 장미시대, 입체파시대와 1차 대전 직후 1920년대의 고전주의시대 그리고 초현실주의적 인체 변형의 시대, 게르니카와 2차 대전시기, 50년대 이후 왕성한 창작시기가 그것이다. 본 전시에서는 초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시기별 대표작이 선보인다. 청색시대의 대표작 “솔레르씨 가족”(1903)을 시작으로, 입체파시대의 “비둘기”(1910), 고전주의 시대의 “우물가의 세 여인”(1921), 초현실주의 시대의 “무용”(1927)), “거울 앞의 잠자는 여인”(1932), 게르니카 시대의 “우는 여인”(1937), 그리고 말기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961)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사람”(1972) 등이 피카소의 대표적인 걸작이자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의 테마는 “피카소의 사람들(People of Picasso)”이다. 입체파시대에 집중된 정물화를 제외하면 피카소의 작품은 대부분이 인물을 다루고 있다. 연대기 적인 서술을 곁들인 전시구성은 인물을 주된 테마로 해서 초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작가의 연대기적, 양식적 변화와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고자 한다. 관람객은 이 전시를 통해 피카소의 여인들의 초상으로부터 그의 자식들, 역사서나 상상으로부터 만들어낸 인물들, 작업실에서의 다양한 자화상과 같은 작품을 통해 피카소의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피카소가 일생을 통해 만난 사람들을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것이다.

피카소의 작품은 흔히 알려진 바대로 그의 삶을 함께 한 여인들의 만남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 해왔다. 피카소가 전 생애를 통해 만난 여인들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고 또 얼마나 많은 숫자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삶에 함께 한 여인들은 그의 작품 속에 명확히 드러나있다.
이번 전시에는 피카소의 여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한데 모은 별도의 전시실이 마련된다. 최초의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1904-1912 ; 연도는 피카소와 관계시기) 로부터 에바 구엘(1912-1915), 첫 부인인 올가 코크로바(1917-1918), 마리 테레즈 발테르(1927-1937), 도라 마르(1936-1943), 프랑스와즈 질로(1943-1953) 그리고 두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여인인 자클린느 로크(1952-1973) 에 이르는 피카소의 여인들이 피카소의 작품 속에 어떻게 그려지고 표현되었는가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만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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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03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빛을 그린 화가들 "인상파거장전" ]

전시 기간 : 2006 / 6 / 2 (금) - 2006 / 9 / 3 (일)
전시없는날 : 2006/6/26 (월) 2006/7/31 (월) 2006/8/28 (월)
시 간 : 10:00-20:00
가 격 : 일반 (대학생) 12,000원 초,중,고생 8,000원 미취학아동(4세이상) 6,000원 단체(30인이상) 2,000원 할인
회원할인 : 골드/블루(일반)회원 10%(일반회원 2매, 골드회원 4매 한도)
장 소 : 한가람미술관
장 르 : 미술
주 최 : (주)문화방송
전화 번호 : 02)789-3727
기 타 : 전시장내 화환반입은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