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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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책, 이른바 고전을 좋아한다. 내가 고전 작품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책들은 세월의 검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오랜 시간의 검증을 통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읽을 책이 매우 많고 내가 살다갈 날들은 그에 비하면 짧기만 하다. 그런 세상이니 어느 정도는 검증 받은 책들을 먼저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물론 그런 책들 중에도 딱히 크게 마음에 남는 게 없는 작품도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늘, 고전만 읽겠는가. 요즘 쏟아지는 책에도 당연히 눈길이 간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읽은 사람들 평이 대체로 좋고 ‘호텔에 종신 연금된 백작의 우아한 생존기’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날이 몹시 더운 것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한몫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어쩐지 흥미위주의,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 작품 또한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하지만 묵직하게 남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을, 그런 책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술술 읽힌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나는 세월의 검증을 받지 못한 책을 읽을 때면 좀 까탈스러운 태도로 책을 본다.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읽는 다고나 할까? 여기저기서 추천 받았고, 극찬을 받았다는데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심정. <모스크바의 신사>는 로스토프 백작의 시(詩)로 시작한다. 이 시는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윽고 희곡 형식으로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에 대한 재판이 묘사된다. 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좋은 작품임을 나타내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 것처럼 여겨졌다. 192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종신 연금형을 받는 백작과 혁명 등등의 설정도 어떻게 보면 역사적 무대를 배경 삼아, 단순히 가벼운 작품은 아니라고 역설하려는 듯한 일종의 트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럼 그렇지’하는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100쪽을 넘기고 200쪽을 넘기면서 서서히 나는, 나도 모르게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 이 불쌍한, 그러나 어쩌면 그의 친구 미시카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결심한 대로 마지막으로 추모 와인을 마시고 호텔 난간에서 몸을 던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살을 하려나? 그러면 안 되는데, 절대 안 돼! 이 사람아! 외치고 싶어졌다. 


로스토프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러시아의 어느 백작이 아니라, 한 인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오롯이 지닌, 세상에서 보기 드문 한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 그는 나에게 그저 ‘러시아 최후의 신사’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성숙한 인간미를 갖춘 ‘최후의 인간’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의 삶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기를, 그를 그렇게 가둬버린 혁명 세력들이 원하듯이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허무하게, 덧없이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집도 아닌,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감금된 채 지낸다는 것은 인간에게 더할 수 없이 무지막지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나라면 어땠을까? 로스토프 백작처럼 ‘환경에 굴복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난 감옥 안에서도 책만 있다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기는 하다만. 글쎄 정말 그럴까? 실제로 어느 한 장소에 감금된 채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다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희망조차 없이 살아야 한다면 삶이 견디기 쉬울까? 아마 나 또한 로스토프 백작이 그랬듯이 마지막 와인 한 잔을 마시고 호텔 난간에서 저 아래로 몸을 던지는 상상을 여러 차례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로스토프는 그러기를 거부한다. 어쩌면 그가 감금된 곳이 ‘집’이 아니라 ‘호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호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백작은 친구도 얻고, 연인도 생기며, 심지어 딸도 얻는다. 때때로 자신을 찾아오는 옛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삶을 놓고 싶을 때마다 버티고 견디게 해줄 다른 이의 존재가 ‘호텔’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호텔을 오가는 사람들,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우정, 애정, 지지와 격려, 비록 갇힌 신세였지만 끝까지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럴 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신사’의 의미를 여러 번 생각해 보게 한다. 매너를 잘 갖춘, 귀족으로서의 예절이나 태도, 또는 그 계급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문화와 예술적 지식을 두루 갖춘 것이 과연 진정한 신사다움일까? 만일 로스토프가 그 모든 것을 갖추고도 따뜻하고 배려 깊은 성품,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약한 존재를 깔보지 않는 인격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가 과연 ‘신사’로 느껴졌을까? 그래서 <모스크바 신사>의 ‘신사다움’이란 곧 ‘인간다움’이며, 이 책은 로스토프라는 진정한 신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잘 살다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작품을 읽다가 나는 여러 차례 울컥하고 실제로 몇 번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장면 중 하나는 소피야 때문에 가슴을 졸이다가 로스토프가 다락방에 홀로 앉아 호로비츠가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듣는 장면이다. 또 다른 부분은 미시카가 남긴 ‘빵과 소금’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장면에서였다. 러시아문학 황금기에 쓰인 작품 곳곳에서 ‘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인용구를 나열한 부분에서 나는 주책없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 어떤 부분보다 이 두 장면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느껴졌다. 한없이 암담하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음악을 들으며, 또는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자신이 지닌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인간……. 이 두 장면은 오래도록 잊기 힘들 것 같다.



안에든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와인은 생산된 해, 생산된 지역의 모든 자연 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한 모금만 마셔도 와인은 생산지의 그해 겨울 추위가 풀린 시기, 여름 강우량의 정도뿐 아니라 그해 바람의 특징이나 구름 낀 날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에 관한 것까지 머리에 떠오르게 할 것이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233쪽)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나며,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표지와도 같다며 모든 와인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으로만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하게 된 세상. 그런 상황 속에서도 로스토프는 끝까지 와인 하나하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고자 애를 쓴다. 위 구절에서 ‘와인’은 ‘인간’으로도 읽힌다.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이 지닌 개성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그를 와인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며 깊고 순수한 향을 지닌 그런 와인이 아닐까.


<모스크바의 신사>는 이렇듯 주어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이 마지막까지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뻔한 스토리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몇몇 장면에서 완전히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결말 또한 그렇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두꺼운 책을 한 번 집어 들면 흥미진진하게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검증을 받기에는 아직 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런 작품은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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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나서 에이모 토울스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을 읽고 있습니다.

작가의 고급진 취향은 역시나 대단하네요.
다만 너무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 상대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잠자냥 2018-08-08 09:2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그 책 나중에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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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만 있어야 하는 세상에서 이름을 가진 하나의 와인으로 존재하기를 바란 한 인간의 감동적인 생존기. 그의 신사다움이란 곧 인간다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어느 순간 콧끝이 찡해진다. 그는 진짜 신사, 진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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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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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단편을 읽는 일은 늘 즐겁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보통 나는 그런 작가의 책을 선뜻 사서 읽지는 않는다. 정말로 나와 잘 맞을지 미심쩍고 아직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을 이용해서 첫 만남을 시도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단 한 번 읽어 본 적이 없는데도 덜컥 책을 사는 작가도 있다. 그레이스 페일리《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이 그런 책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이 책 표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수록’이라는 코멘트가 적혀 있다. 내게는 그 코멘트가 이 책을 선택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도 않았고, 그가 쓴 서문조차 책을 다 읽은 뒤에야 대충 훑어보았다. 오히려 출판사 책 소개 글 가운데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라는 문구에 눈이 갔고, 그래서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첫 번째 작품의 몇 줄을 읽다가,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내가 반한 구절, 이 책을 사게 만든 그 문장은 바로 다음과 같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소망」, 15쪽)


전남편, 27년을 함께 살았던 그를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꽤 신선했다. 이런 표현을 쓰는 작가라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흥미가 돋았다. 이 책을 구매할 무렵, 때마침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던 참이었다. 단편 모음집의 장점은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단편모음집끼리)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19호실로 가다》와《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은 주인공이 거의 여성 화자이며 그 목소리로 그들의 삶을 다룬다. 그런데 도리스 레싱의 작품을 읽다 말고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요즘- 그러니까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 쓰인 작품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대부분의 작품들이 1960년대에 쓰였단다. 그런데도 시대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엄청 쓰다. 독하다. 이토록 독설 가득한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단편 모음집을 읽은 적이 언제였더라? 있기는 있던가?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작품이 쌉싸래하다.《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에 실린 작품들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겨자를 잔뜩 친 음식을 먹고 난 뒤 혀끝에서 느껴지는 알싸함이라고나 할까. 또는 눈물이 날 만큼 아주 매운 맛.



크리스마스 2주 전 엘런이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페이스, 나 죽으려나 봐.” 그 주에 나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다」, 88쪽)


첫 작품소원만큼이나 강렬한 도입부를 보여주는살아 있다는 위와 같이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두고 친구를 비롯해 자신 또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보통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주인공 주변에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돌아보면서 회한에 쌓인 정서를 내뿜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미화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삶의 지리멸렬함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을 비롯하여 그 주변 인물들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실은 그다지 대단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고 낱낱이 까발린다.



“인생은 그렇게 멋진 게 아니야. 앨런.” 내가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너절한 하루하루와 너절한 남자들뿐이야. 돈은 없고, 늘 깨지고, 바퀴벌레만 득시글거리고, 일요일이라고 해봐야 아이들을 데리고 센트럴파크에 가서 저 더러운 호수에서 배를 타는 게 고작이야. 뭐가 그렇게 멋있어, 앨런? 대단하게 잃을 건 또 뭐고. 겨우 2년 남짓 더 사는 거야. 아이들을 보겠지. 온갖 더러운 것도 볼 테고, 뜨겁게 밀려드는 불꽃 파도 속에서 세상의 모든 치즈 구멍이 터져버리는 것도 볼 거야......”
“난 그 모든 걸 보고 싶어.” 앨런이 말했다.  (
살아 있다, 90쪽)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이 계속 쓰디쓰기만 하다면, 삶의 남루함과 인생의 너절함만 이야기한다면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힘든 걸 몰라서 내가 이런 책을 또 마주하고 있나 싶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바로 저 구절, ‘난 그 모든 걸 보고 싶다’는 앨런의 말 속에 있다. 아무리 삶이 비루하고 넌더리나는 것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살아서 생생하게 보고 싶다는 앨런의 소망은, 곧 그레이스 페일리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과 마주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 바로 그 안에 삶의 위대한 역설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살아 있다에서 결국 앨런은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장례식장에서 앨런의 아들을 보고 동정심이 생긴 ‘나’는 앨런의 아들에게 “내가 널 데려가서 키워줄까?” 하고 묻는다. 하지만 물음과 동시에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만일 아이가 좋다고 하면 돈이며 방이며 게다가 잠자기 전 10분 동안 보살펴주는 문제며 그 모든 걸 어떻게 해결할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앨런의 아들은 말씀만으로 고맙다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녀는 안도한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이렇게 그레이스 페일리의 단편 속 등장인물들은 특별한 지위나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다른 재주를 지녔거나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다. 대단하게 선하거나 모범적이지도 않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며 그 욕망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부분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빠듯하고 벅차서 가장 사랑해야 마땅할 대상인 아이에게도 손찌검을 하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박하게 일자리와 집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물론 아이에게 손찌검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부모가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 저급한 직업과 검댕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구질구질한 집 때문에 미쳐 돌아버릴 만큼 진이 다 빠지지 않은 날이면 내게 이런 일자리와 집을 준 신을 찬양한다.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 115쪽)


적당하게 이기적이고, 때로는 선한 생각을 할 줄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기 잇속부터 챙기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이 사회 규범에 크게 어긋난다거나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못 봐줄 정도는 아닌 평범한, 그래서 비루해 보이는 사람들의 인생. 그런 삶이《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에서 펼쳐진다. 아름답기보다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씁쓸하고 매운 삶.

그런데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찾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위안을 얻는다. 이 책에 실린 17개 단편들이 바로 그렇다. 이봐, 당신,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이렇게 지독하고 씁쓸해. 다들 당신 인생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인생은 결코 달콤하지 않아.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 쓰디쓴 인생 한 번 견뎌봐야지. 그래도 살아야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생의 쓰디쓴 면까지도 성숙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문장, 그러니까 이 책의 정수는 그레이스 페일리의 분신인 ‘페이스’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쓴 시를 읽어주는 부분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시절이 지나가고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인생의 황금기 또한 지나간다.
노년이 지나간다.
내 딸아, 너는 왜
노년은 다를 거라고 여기느냐? (
페이스의 오후 한나절 ,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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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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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생일 때는 뭘 했더라? 소원을 빌어보라면 어떤 걸 말했을까 잠시 추억에 젖게 된다. 지금도 생일에는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빈다.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날을 통해 다짐을 되새긴달까. 그런 생일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품. 근데! 책 값은 정말 양심불량. 애잔하다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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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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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최근 10주년 특별판이 나왔더라. 이 책이 불온도서로 찍히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10년 전에는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10주년 특별판이 아닌, 그때 그 시절- 불온도서라는 게 존재하던 그 시절에 읽었고, 이 리뷰 또한 그즈음에 썼던 글이다.


고등학교 때 무척이나 싫어했던 과목 중 하나가 ‘정치경제’이다. 흔히 ‘정경’이라고 부르던 과목. 요즘도 이런 과목을 배우는지 모르겠는데… ‘수능 사회과학탐구’ 영역에 정치/경제에 관한 몇 문제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이 지겨운 과목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들어야 했다. 기말고사나 중간고사에 나오는 ‘정치/경제’ 문제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놀랍기 그지없다. 주관식으로 나오는 문제라는 게 이런 식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을 일컫는 말은?’ 정답은 GATT- 놀랍다고? 이건 정말 실제 상황이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지에이티티’ 이런 식으로 줄줄이 교과서를 외우기 바빴다. 그러고 나서 학교를 졸업하면 GATT 따위가 우리 사는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냐는 듯 금세 잊었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으면서 들던 가장 큰 생각은 ‘정치경제’와 같은 과목을 중고등학생에게 가르칠 때 저렇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적용될 때 어떤 식의 파급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일이 그렇듯이 동전의 앞뒤처럼 좋은 면, 나쁜 면에 대해 조목조목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면, ‘정치경제’라는 과목을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단어들 ‘보호무역, 자유무역, 관세, IMF, 세계은행, WTO,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다. 재미있는 발견 중 하나는 내가 그때 배웠던 정치경제 교과서는 분명 내가 고등학생일 당시 나라를 이끌던 정부의 정책에 따라 철저히 그들 입맛에 맞게 쓰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보호무역이 민족주의적 성향에 입각하여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 속에서만 잘 먹고 잘 살다가 우물 안에서 결국은 그들끼리 빠져 죽고 말 정책인 것처럼 교육 받았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국사책도 다를 바 없던 것 같다. 외국 문물과 교류 없이 폐쇄적인 정책을 실행하다 조선이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식의- 그때는 ‘세계화’와 그에 따른 ‘자유무역’,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 최고의 기치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때이니까.
   
이 책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러니 위와 같은 교육을 받았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재미있고(동전의 양면처럼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통쾌한 책인지 모른다. 저자 장하준은 많은 역사 속의 사례를 들어 현재 최고의 부자 나라인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가’들이 경제 개발 초기에는 높은 관세와 보호자금 등 철저한 ‘자국 산업 보호’를 통해 성장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과 같이 ‘잘 사는’ 나라로 진입하고 나서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과 같은 이론을 거들먹거리면서 개발도상국 등 가난한 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 것을 강요한고 말한다. 정확히는 IMF, 세계은행, WTO라는 사악한 삼총사와 지역별 FTA나 투자협정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의 발전에 알맞은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 이미 잘사는 나라에 진입한 그들에게는 ‘신자유주의’가 그들에게 더욱 유리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나라에게 있어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좋은 제도일 수가 없다. 저자는 역사 속의 각종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신자유주의’ 예찬자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저자가 자신의 여섯 살 난 아들 ‘진규’의 예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여섯 살 난 아들에게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경쟁과 자율과 시장은 좋은 것이니 지금부터 나가서 일찍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것이다(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이 또래 아이들이 일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고 있으니 좀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경쟁에 노출 시켜야 하고, 일찍부터 경쟁에 노출되다 보면 아이의 발전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 살 먹은 아이를 지금 노동 시장에 내몰면 아이는 당장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아이가 이런 직업을 가지려면 적어도 10년 동안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여섯 살 난 아이는 대부분의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진국과 어느 정도의 정당한 경쟁 상태에 오르기까지 개발도상국 및 가난한 나라들은 ‘보호’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자율과 경쟁을 모토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그들에게서 그럴 기회조차 빼앗고 있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올바르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경기가 이루어질 경기장부터 평평하게 만들 것을 주장한다.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한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해 보다 엄격한 규제를 하도록 허용해야 하며, 이들 국가가 선진적인 나라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도록 지적소유권 보호를 완화하는 것도 허용해야 하며, 부자 나라들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가난한 나라에게 기술 이전을 해줌으로써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물론 부자 나라들이 과연 이런 일을 할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으나 저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주장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을 때보다 보호무역, 높은 관세 등으로 자국 시장을 보호했을 때 보다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왔음을 지적하며 개발도상국들의 소득이 높아지면 그만큼 부자나라들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이 넓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즉 개발도상국가를 비롯한 아직도 수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부자 나라만 더 살찌우는 획일적인 ‘신자유주의’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개별국가의 경제 정책과 국가 간의 경제적 상호 작용에 관한 규칙이 변해야 할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결국 이 책이 전반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경제를 '잘' 사용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특정한 개인, 집단, 국가만이 계속 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돈'이 먼저가 아닌 '사람'이 먼저인 경제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극화에, 날로 치솟는 자살률에, 저출산 문제까지-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드리운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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