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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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그녀의 연인인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의 답장은 자주 오지 않는다. 남자는 그저 여자의 편지 뒷장에 메모를 할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 남자는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힌 상태다. 여자와 남자는 결혼을 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여자는 때문에 그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의 소식이 담긴 편지를 남자에게 보낼 뿐이다.


여자의 이름은 아이다(Aida), 남자의 이름은 사비에르(Xavier)- 이렇게 해서 이 소설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은 이루어진다. 존 버거는 소설의 첫 도입부에서 이들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그러나 발견하게 된 경위는 밝힐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편지 속의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 같은, 아니 어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다.

사비에르는 왜 감옥에 갇혔을까? 그것도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살았던 나이만큼 그 시신을 감금해 놓는다는 가혹한 형벌, 이중종신형이라는 무거운 선고를 받게 된 것일까? 해답은 금방 알 수 있다. 아이다의 편지 뒷면에 적힌 그의 메모를 통해 그는 반정부 투쟁을 벌여온 테러리스트였으며 그로 인해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사비에르의 메모에 담긴 내용은 하나 같이 자본주의, 세계의 불평등, 신자유주의 세계화,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맞서는 내용이다. 프란츠 파농이나 차베스 등 부당한 현실에 반대해 혁명을 꿈꾸던,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들의 잠언이나 명언들도 상당수 차지한다. 이런 메모로 인해 사비에르가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다국적기업의 폭력적인 지배 등에 맞서 싸웠기 때문을 알 수 있게 된다.

바깥에 있는 아이다 역시 그런 삶과 무관하지는 않다. 약제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투쟁을 하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군인들의 총에 맞아 다리를 다친 소년을 돌봐주는 등 돈 없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묵묵하게 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편지 속에 적힌 ‘카드놀이’라는 암호화 된 이야기로 사비에르와 함께 투쟁을 하던 이들과 그녀는 계속 연결되어 있음도 유추할 수 있다.

아이다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과 곁에 있던 존재가 사라진 상태, 즉 부재의 상태는 다르다면서 그가 없는 현재의 상태를 외롭게, 그러나 꿋꿋하게 버틴다. 면회의 기회라도 얻고자 번번이 결혼 신청을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다. 이들이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이중종신형을 받은 이 남자, 사비에르와 아이다가? 이 두 연인의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편지 속의 이들을 보면 그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폭압적인 세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과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올곧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처한 현실은 정말로 어디선가 지금 일어나고 있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남아메리카일 수도 있고, 아프리카일 수도 있고, 아랍 땅일 수도 있다.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얼굴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 살아가고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아이다가 사비에르를 부르는 호칭은 스페인어, 터키어, 아랍어 등등 다채롭다. 때문에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소위 제3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제3세계에 이런 척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단지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일깨우게 된다.

오늘날 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의 횡포, 세계화가 가져온 불평등의 심화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존 버거의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역시 크게 본다면 그런 범주에 속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책이 그런 책들 중에서 조금 더 돋보이는 이유는 연인들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통해 문학이라는 장르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런 장치를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얼굴을 한 수많은 개인이 지금 이 순간도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지배 아래 세계 곳곳에서 쓰러져 가고 있음, 신음하고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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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만나는 건 어딘지 좀 연애 관계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만나는 행위에는 분명 좀 연애 관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절대로 사귈 수 없는 타입이 있다

사람마다 절대로 사귈 수 없는 타입이 있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나는 자기계발서나 말랑말랑, 희망적인 말만 늘어놓는 에세이류, 사진으로 도배된 여행서, 오그라드는 말장난으로 가득한 몇몇 한국 현대소설,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베스트셀러라는 일본 현대 소설 등등은 절대로 읽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잘 읽지도 않는데 이런 책을 사람으로 묘사한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는 절대로 연애할 수 없다. 저런 책을 사람으로 묘사한다면 딱 떠오르지 않나? 내가 너무나도 혐오하는! 역겨운 단어인 ‘스펙’ 쌓기에만 골몰하는 타입, 오그라들게 희망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 내용보다 비주얼에만 치중하는 사람 등등. 정말 짜증나는 타입이다.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사람이나 책이나.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한테는 별로인 사람이 있다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나.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주는 사람이 그 사람 굉장히 괜찮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을 해주는데, 막상 만나보면 ‘오마이갓’을 외치고 싶던 그런 경험- 사람들이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고 칭찬해도 내 눈에는 영 아닌 그런 사람이 있다. 책도 그렇다. 아니, 책은 더 그런 거 같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책(고전이라 불리는 그런 책)을 제외하고 지금 이 시대에 자주 화자 되는 책(베스트셀러)은 이상한 책일 확률이 훨씬 많다. 모든 사람한테 무난한 책은 아무 매력이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많이 해 본 사람이 잘한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알고, 연애도 많이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책도 그렇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책을 보는 눈이 생긴다. 사람들이 베스트셀러에 의존하면서 이상한 책을 집어 들어 읽는 이유는 책을 보는 자기만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눈이 없으니까 일단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는 책부터 시작을 한다. 하지만 그런 책은 이상하기 마련이어서, 그런 책을 오랜만에 집어 들어 읽고는 ‘역시 책은 별로 재미없어’라는 결론과 함께 책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많아지나…. 물론 이건 알 수 없다. 안 그런 사람도 있는 거 같다….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을 만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자기한테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와 맞는 사람이 어떤 타입인지는 알게 되는 듯하다. 보는 눈, 고르는 눈이 생긴다고나 할까. 책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름의 이상형이 있다
사람들마다 연애를 할 때, 혹은 연애를 하기 전에 자기 나름의 이상형이 있고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려고 애쓴다. 아쉬운 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 무척 크다는 점이다. 연애처럼 책을 고를 때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물론 이것도 연애를 많이 해봐야 기준이 생기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연애를 해본 지 하도 오래된 사람이거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상형이고 뭐고 일단 사람부터 만나고 싶은 것처럼. 책도 하도 안 읽은 사람은 일단 이상형이고 뭐고 책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책을 읽은 사람, 책을 정기적으로 꾸준히 대하다 보면 아, 내가 좋아하는 책이란 이런 책이구나, 이런 글쓰기,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내가 좋아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다. 나는 일단 남는 게 있는 책이 좋다. 시간 들여 읽었는데 허무한 느낌이 들면 좀 많이 억울하다. 깊이도 있고, 통찰력도 있고, 좀 삐딱해도 좋으니 그저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책이 좋다. 거기에 재치도 있고 위트도 있으면 좋고. 왠지 울컥울컥 감동을 느끼게 하는 책도 좋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계속 알고 싶다
이 제목에 부연설명이 필요할까? 그래도 해보자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고 계속 파고들고 싶어지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어떤 한 책을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 작가의 작품을 다 읽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돈 쓰는 게 아깝지 않은 것처럼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은 왠지 꼭 사서 소유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꼭 붙들어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소유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좋아도 권태기가 있다 &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책을 읽는 행위도 늘 한결같지는 않다. 어느 순간 책이 눈에 한자도 안 들어오는 때도 있고, 뭘 읽어도 감흥이 예전 같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 아예 책을 손에서 놓게 되기도 한다. 연애를 할 때도 사람이 지겨워질 때가 있다. 그 지겨움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를 때, 극복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 사람과 ‘안녕~’을 한다. 아예 책을 손에서 놓게 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시작할 때, 흔히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공감한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만난 그 때가 별로 적절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나기도 한다. 반대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전혀 사귀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을 순전히 타이밍이 잘 맞아서 사귀게 되는 경우도 많다. 책도 그렇다. 계절에 따라 확실히 잘 들어오는 종류의 책이 있다. 계절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 상태나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작가의 책이라도 더 잘 들어오는 때가 있다. 게다가 책은 나이를 타기도 한다. 10대에 읽었다면 절대로 좋지 않았을 책이 20대 30대 혹은 그 후에 만났기에 ‘인생의 책’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할 때가 있다

이건 내가 종종 써먹는 비유인데, 세월이 지나고 보면 내가 대체 저런 책을 왜 읽었나, 저런 음악을 왜 들었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사람도 그렇다. 아니 사람은 당연히 그렇다. 돌아보면 그런 사람을 만났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으로 이상한 사람을 좋아했거나 만났던 적, 다들 있을 것이다! 책도 그렇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을 보면 내가 대체 저런 책을 왜 내 돈 주고 샀지? 정말 내가 산 거 맞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저건 선물 받은 책일 거야! 절규하는 책들이 있다. 그런 걸 읽었던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

남는 게 전혀 없는 연애도 있다
사람들은 책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대단히 좋은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난 세상에 존재하는 절반 이상의 책은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종이 낭비라고 생각하는 책들이 서점에만 나가봐도 널리고 널렸다. 그런 책을 읽느니 차라리 다른 걸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넘치고 넘친다. 연애도 그렇다. 꼭 연애를 뭔가 남기려고(애를 남기려고? 응?) 하는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굉장히 소모적이었다는(감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등등) 느낌만 강하게 드는 그런 연애가 분명 존재한다. 둘이 함께 한다고 항상 꼭 좋은 게 아니다. 소모적인 연애를 하느라 지치느니 그냥 혼자 조용히 생활하는 게 훨씬 낫다.

좋아하면 스킨십을 마구 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계속 스킨십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좋아하는 책과 무한정 스킨십 하는 사람 있나?;; 궁금하다. 막 책을 쓰다듬어? 책을 껴안아? 책에다 막 뽀뽀를 한다? <-이런 분을 알고 있다면 제보 바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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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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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시리도록 춥다. 이런 겨울에 읽기에 딱 알맞은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이디스 워튼의 <겨울>. 원제는 <Ethan Frome>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다. 문학동네에서는 제목을 <겨울>이라고 명명했다. 문학동네 이전에는 문예출판사에서 <이선 프롬>으로, 열린책들에서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


처음 책을 읽기 전에는 <이선 프롬>이라는 원제와 <겨울>이라는 제목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겨울>이라는 제목이 꽤 그럴 듯하다. 더욱이 문학동네에서는 이 책과 함께 이디스 워튼의 <여름>도 함께 출간했었다. <여름>은 <겨울>과 달리 ‘생의 열기로 뜨거웠던 한여름 소나기 같은 사랑’ ‘젊은 여성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워튼의 이 작품은 <여름>과 대비되는 주제와 내용을 다뤘다는 의미로 <겨울>이라 번역한 것도 꽤 괜찮은 느낌이다.

이 작품에는 평생 ‘겨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겨울과 같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혹독한 추위와 함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겨울. 그런 겨울이 지나면 꽃이 만개하는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봄도 없고 끝없이 겨울만 이어진다면? 주인공 이선 프롬이 바로 그런 남자다. 그의 인생에서 봄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아, 그래 그에게도 봄이 잠시 찾아왔다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봄은 끝내 그와 함께 겨울에 머물고 만다.

<겨울>은 무척이나 차갑고 슬프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설원 위를 혼자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액자 소설 구조를 띄고 있어서 슬픔이 조금 미약해지는 느낌인데 만약 액자 소설 구조를 탈피했다면 이 작품의 우울한 정서, 슬픔은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듯하다. 책의 뒤표지에 “<겨울>이 뿜어내는 암울한 심리를 좋아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마음속으로 혼자만 즐겨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톄닝 (소설가)”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던데, 정말 그렇다. 이 작품은 더없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이선 프롬은 19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항상 겨울만 존재하는 듯한 마을 스탁필드에 사는 남자다. 그에게도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가 아프고 그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부모가 죽은 뒤에 꿈을 찾아 나섰으면 되는데 인생은 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를 돌봐주던 한 여인에게 청혼을 하고 그 여인과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마을의 기운 탓일까, 이 마을은 유난히 병든 사람들이 많고 이선이 결혼한 여인도 결혼 전에는 그렇게 생명력을 뿜더니 결혼 후에는 그녀 역시 병들고 만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줄기 희망 같은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매티- 아내의 먼 친척이다. 병든 아내를 돌보기 위해 매티는 이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다.

이쯤하면 병든 아내를 사이에 두고 매티와 이선의 그렇고 그런 불륜(?)이 그려지려니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매티를 향한 이선의 가슴앓이, 혼자만 앓는 질투와 사랑, 기대, 아내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배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처음에는 병든 아내를 곁에 두고 다른 여인을 욕망하는 이선의 행동에 화가 났는데 점점 매티를 향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최고 절정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의 간절한 희망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나 어쩐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 가련한 꿈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책을 덮고도 한 동안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겨울 공기는 찬 만큼이나 투명하고 가슴 시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차갑지만 오염되지 않은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이선의 사랑이 딱 그랬다. 원문으로 읽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싶어진다. 비록 번역서로 읽었지만 이디스 워튼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섬세한 심리 묘사, 눈에 잡힐 듯한 아름다운 배경 묘사, 녹록치 않은 주제의식까지….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디스 워튼의 열렬한 팬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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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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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하인학교’라는 제목 때문에라도 꽤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 그 발상부터가 무척 독특하다. 아니, 이 세상에 주인이 아닌 하인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어? 하는 생각. 게다가 주인공인 ‘야콥 폰 군텐’은 소위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자진해서 하인이 되고자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 가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자 하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정말 독특하다. ‘학교’에 들어간 소년의 이야기이니, 성장 소설인가 싶지만 성장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성장’이란 전혀 없다. 성장, 발전, 진보, 앞으로 나아감, 나아짐, 변화, 달라짐 이런 단어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야콥만 성장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 즉 이야기 자체의 어떤 변화도 전개도 없다. 스토리 자체가 멈춰있다. 때문에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게 뭐야?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 질 거야, 뭔가 색다른 변화가 있을 거야.’ 라고 믿고 넘겨보지만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야콥도 제자리, 이야기도 제자리. 야콥 주변인물,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아이들도 제자리다. 그래도 명색이 학교인데, 뭔가 배우지 않아?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이 학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저 인내하고 참는 법, 견디는 법을 배울 뿐이다(이것도 배움의 하나일까?).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하인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하인으로 취직되어 나갔을 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실감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며, 세상에 대한 어떤 의문도 제기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저 제한된 어떤 시스템 안에서 복종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 견디는 일만이 허락될 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살기 때문에 벤야멘타 학교의 아이들은 별다른 걱정과 근심거리가 없다. 밝고 천진난만하다. 단지 야콥, 야콥만이 계속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 또한 이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점점 의문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견디는 능력은 늘어나게 된다. 야콥은 그런 자신이 괴로워 의문하는 능력을 없애버리려 애를 쓰기까지 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그의 가장 커다란 목표이므로.

이런 성장 없는 인물, 변화 없는 인물, 전개가 없다시피 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성장’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닳고 닳도록 말하는 ‘발전’ ‘진보’ ‘변화’ ‘혁신’ ‘미래’ ‘나아감’ 이런 것들이 대체 뭔가 싶어진다. 꼭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발전해야 하고, 성장해야만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라도 야콥처럼 제자리걸음만 하더라도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뜨거움 정도만 간직하고 살 수 있다면 되지 않을까. 왜 세계는 끊임없이 발전, 진보, 성장을 외치는 것일까. 그래서 인생이, 세계가 과연 행복한가? 야콥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 어떤 것도 자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불모의 상태가 어쩌면 가장 영원한 행복의 상태는 아닐는지.


이 작품은 여러 번 읽어 보고 싶고. 발저의 다른 작품도 읽어 보고 싶은데….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이 작품 외에 청소년용 도서 <프리츠 콕의 작문시간>, 어린이용 도서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부인 듯하다.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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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노트 - 가장 순수한 음악 거장이 만난 거장 1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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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순수한 음악 쇼팽- 쇼팽의 곡을 지드의 언어로 부드럽고도 우아하게 산책하듯 거닐면서 만난다. 지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쇼팽의 곡을 애정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거나 또는 재발견, 혹은 오해를 풀도록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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