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마 사운드를 사용한지 몇 달 지났다. 내가 전자책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늘어나는 책을 감당하기도 버거웠지만 무엇보다 전자책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은 조금 뜻밖이었다. 여름 밤,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창문을 열고 책을 읽노라면 제아무리 방충망이 있다하더라도 어디선가 온갖 벌레들이 날아 들어온다. 불을 끄고 책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전자책을 떠올렸다. 그래서 전자책리더기를 검색하다 알게 된 크레마 사운드는 작은 사이즈에 예쁘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자책과의 만남. 처음에는 기계만 사두고 잘 활용하지 못했다. 사둔 종이책을 읽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전자책리더기에 이렇다 할 콘텐츠를 담지도 못한 채 한 달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을 떠날 일이 있었는데, 아, 내게 전자책이 있었지! 하고 잊었던 존재를 기억해냈다. 그런데, 전자책을 구매하다가 알게 된 사실 중 하나, 사고 싶은 책이 드물구나! 콘텐츠가 빈약하다. 읽고 싶은 책 가운데 전자책으로 나온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나온다하더라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점 등등. 그래도 가끔 사고 싶은 책들이 있기는 하더라.

그리하여 나는 요즘 곧잘 전자책을 읽는다. 창을 열고 불을 끈 채 읽어보기도 했다. 방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벌레의 양은 확실히 줄었다. 어쩌면 여름이 다 지난 시점부터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할 때는 꽤 유용하다. 이런저런 책을 얇고 가벼운 기기 안에 쏙 담아서 갖고 다닐 수 있어 든든하다. 어떤 책을 읽다가 좀 지루하거나 여행지에서 읽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금세 다른 책으로 넘어가도 된다. 비행기나 전철처럼 좁은 공간에서 읽기도 편하다. 한 손에 잡고 엄지로 톡톡 페이지를 넘기면 되니까.

그런데, 이토록 편한 기계에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일이 있을 줄이야. 아무리 읽어도 내가 얼마큼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또 얼마만큼 남았는지 쉽사리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더욱이, 나는 전자책을 읽을 때는 글자크기를 120% 정도 키워서 읽는다. 그러면 전체 쪽수는 그에 맞춰서 늘어난다. 종이책으로 500쪽인 책은 700쪽 이상으로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전자책을 읽을 때는 내가 지금 읽는 페이지가 전체 페이지 중 몇 쪽에 해당하는지 자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120/800, 321/783, 이런 식으로 읽다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때로는 목차까지 다시 확인해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책의 어느 부분에 내가 속해 있는지 안다는 것,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게 독서에서 이토록 중요할 줄이야.

요즘 읽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이 책도 전자책으로 구매했다)에서 아, 하고 무릎을 치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 근거로 전자책은 ‘뭔가 재미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자책에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한마디로 그것은 책이 지닌 두툼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전자책의 단점으로 꼽은 것이다(이 구절이 이 책 몇 쪽에서 인용했는지 정확히 기입하고 싶지만 전자책으로는 그것도 애매하다). 그는 ‘남은 페이지를 모르면 책을 읽기 어렵’다고 까지 말한다. 과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가에 따라 언어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으리라.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는 책을 집어든 두 손바닥에 전해지는 책의 좌우 중량의 차이로 알 수 있습니다. 20페이지쯤 남았구나 싶으면 끝나기 전에 아직 하나 더 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주의 깊게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때 불현듯 ‘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20페이지쯤 남았다 싶을 때 뒤에 남은 18페이지가 신간 광고로 채워져 있다면 낙담하겠지요.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읽어버린 나’의 공동작업입니다. 아무리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수수께끼를 풀기 어려워도,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추리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지막에 탐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을 때, ‘오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다 읽은 나’를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 난 나’가 보증인이 되어주기 때문에 ‘지금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 ‘읽고 있는 나’와 ‘다 읽은 나’는 모래밭 양쪽에서 굴을 파는 두 아이와 같습니다. 계속 파 들어가는 사이에 점점 맞은편에서 굴을 파는 상대방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얇은 모래벽이 무너지면 손과 손이 만나고 바람이 훅 통합니다. ‘아아 드디어 만났구나!’하는 성취감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내가 다 읽은 것을 기다린 나’와 다시 한 번 만나는 것입니다.

전자책의 독서에 깃든 곤란한 점은 ‘다 읽은 나’의 자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 물론 디지털 표시로 ‘몇 페이지 남았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우리는 페이지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이제 몇 페이지가 남았으니 읽는 방식을 바꾸어야겠군’ 하는 귀찮은 방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손으로 받쳐 든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감촉이나 무게감, 손바닥 위의 균형 변화 같은 요소, 즉 주제의 측면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시그널에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읽기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지나치게 섬새해서 책을 읽는 자신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 책을 읽을 때 가슴이 뛰는 느낌은 무의식중에 ‘쾌락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읽어버린 나’의 공동작업이라는 말과 ‘다 읽은 나’를 상정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게감, 손바닥 위의 균형 변화 같은 요소에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읽기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한다는 점에도. 때마침 종이책으로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은 700쪽에 가까운 두께를 자랑한다. 모두 3부로 나뉘어 있어 1부, 2부, 3부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유추해보게 된다. 이쯤이면 이제 사건이 터져야 할 텐데, 마무리가 되어야 할 텐데 등등 머릿속으로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아름다움의 선>과 같은 책이 이럴진대 미스터리 장르는 오죽할까. 만일 추리소설을 전자책으로 읽는다면 책의 무게나 부피, 남은 쪽수 등을 헤아려 이야기의 ‘감’을 잡는 일이 어려워서 종이책으로 읽을 때와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전자책으로 읽을 때는, 실제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진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이나, 문학동네 세계문학, 민음사 세계문학, 대산세계문학, 현대문학단편선처럼 내가 자주 구매하고, 그 생김새를 익히 아는 책들은 전자책으로 구매하더라도 딱히 그 모양새가 궁금하지는 않다. 그런데 최근 구매한 전자책 가운데 커트 보니것,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이라 스트로버, <뒤에 올 여성들에게>, 다이앤 세터필드, <벨맨 앤드 블랙>과 같은 책들은 한 번도 그 실제 모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산 책들이라 그 생김새가 무척 궁금하다. 이 책,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도 마찬가지이다. 조만간 서점에 가려고 하는데, 아마 이 책들부터 살펴볼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샅샅이.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는 이제 ‘제7강 계층적인 사회와 언어’를 읽을 차례다. 절반쯤 온 셈인가? 아닌가? ‘다 읽은 나’와 ‘지금 읽고 있는 나’가 만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감으로 헤아리기는 여전히 어렵다. 이렇듯 전자책은 책이 지닌 고유의 물질성에서 종이책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다. 시디를 MP3로 대체할 수 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책의 부피감마저 독서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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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군요 잠자냥님 글 읽으니 전자책과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는 느낌이 드는군요...ㅎ

잠자냥 2018-12-19 17:07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래도 전자책의 장점도 있어요. 일단 보관과 이동할 때 편리하다는 막강한! ㅎㅎ

목나무 2018-12-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자의 저 말에 공감하면서 전자책을 갈아탈까 말까 고민하던 마음을 그냥 가차없이 버렸답니다. ㅋㅋ
그래도 이사를 해야할 계절이 돌아오면 전자책으로 어쩌면 갈아탈지도.....--;; 이사의 가장 큰 적은 정말이지 책이지 싶어요! ㅎㅎ

잠자냥 2018-12-19 17:1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꽤 오래 전자책을 염두에 두다가 올해 마련했는데요, 확실히 책이 늘어나는 숫자가 조오오오금 줄긴 했습니다. 12월엔 종이책보다 오히려 전자책 구매량이 더 많네요.
이사할 때처럼 책이 원수 같을 때는 없죠. 이사할 때만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변환해서 옮겨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어요. ㅋㅋㅋ

케이 2018-12-19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서 전자책으로 읽고 정말 좋았던 책이면 종이책도 또 사고 있답니다.;;;; (제대로 돈낭비 ㅋㅋㅋ)
저도 처음에 전자책 읽을땐 참 답답했어요. 그런데 그 답답함을 넘어서는 편리함이 있죠. 역시 가벼운 게 최고 장점이지만 저같은 경우는 전자책에 내장된 사전도 참 잘 쓰고 있어요.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전 책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꽤 많이 나오거든요. 그때마다 바로 찾아서 보니 너무 편리해요.
CD가 MP3 로 완벽 대체될 수 있었던 이유는 CD를 이용한 인류의 역사가 워낙 짧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책은 그렇지 않죠.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인간 곁에는 책이 있었고, 그렇게 책을 읽어왔던 인류의 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책처럼 즐기기에 간단하고 완벽한 물건도 없죠.동력도 필요없고, 몇 년 지나도 그대로 읽을 수 있으니까요.
작년에 봤던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류 대정전이 발생했을 때 전기를 이용해 저장한 모든 자료는 다 날아가고, 아이러니하게도 전기를 이용하지 않고 저장된 정보만이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책도 이사 다닐때마다 웬수 같아서 그렇지, 내가 잘 들고만 다니면 전자책보다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잘 읽고 있어요. 잠자냥님 감사해요!

잠자냥 2018-12-19 17:45   좋아요 1 | URL
하하하, 종이책을 또 사시는군요! ㅋㅋㅋ
전자책은 정말 편리하기는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사전 기능도 그렇고, 포스트잇을 일일이 붙일 필요도 없고 등등.
CD가 MP3로 완벽하게 대체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케이 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정말 공감합니다. (근데 저는 MP3로 듣고 좋은 음악은 여전히 다시 CD로 사기는 해요. 애초에 처음부터 CD로 사는 음악도 있고요. 그러고는 그걸 또 굳이 추출해서 아이폰에 넣지요. 이게 무슨 짓인지 ㅋㅋㅋㅋㅋ 이 죽일놈의 소유욕때문에 ㅋㅋ)
그리고 정말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편리한 전자책을 잘 사용하다가도 문득 두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이 기기가 완전히 망가져버리면 이 안에 있는 책들은?!!

암튼 책환자들한테 전자책은 보조 수단은 될지언정 메인은 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ㅎ

크리스마스와 연말 잘 보내시고 한해 마무리 잘하세요~!
 
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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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음이 꽃필 무렵 고약한 마음의 병에 걸렸던 나는 그 삼 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상처 입은 것이 나 혼자뿐이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 쓰련다. (<세기아의 고백>, 9쪽)


뮈세의 <세기아의 고백>은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린다. 재능 넘치는 시인이자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단 하나의 소설 <세기아의 고백>에서 열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광기 어린 사랑을 시적 언어로 절절히 고백한다. 뮈세의 소설을 ‘고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작품은 뮈세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서두에서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기아의 고백>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뮈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더욱이 그 절절한 애정의 대상은 조르주 상드임을.

<세기아의 고백>은 알프레드 뮈세와 조르주 상드, 이탈리아인 의사 파젤로와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4대 시인으로 꼽히는 뮈세는 십대 시절부터 당대 최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천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열렬한 사랑을 꿈꾸던 그는 1833년 여름, 만찬 자리에서 상드를 처음 만난다. 뮈세는 스물세 살이 되기 전이었고, 서른의 상드는 이혼 뒤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함께 베네치아로 떠난다. 그러나 기대로 가득했던 여행에서 뮈세와 상드는 번갈아 병석에 눕게 된다. 먼저 상드가 몸져누워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파젤로의 간호를 받는다. 상드가 회복한 뒤에는 뮈세가 병이 나고 그사이 상드는 파젤로의 연인이 되고 만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홀로 귀국해, 거의 4개월 동안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화해하려는 노력에도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뮈세는 <세기아의 고백>으로 이 사랑의 내막을 폭로했고, 상드는 <그 여자와 그 남자>라는 책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렇다고 <세기아의 고백>이 뮈세와 상드의 사랑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르주 상드를 모델로 한 ‘브리지트 피에르송’은 상드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에서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사회 변동은, 붕괴하는 구세대에게는 환멸과 비애감을, 앞날을 모색하는 신세대에게는 불안과 초조감을 드리웠다. 이 무렵 청년들을 괴롭힌 우울증과 염세적 고독감을 뮈세는 이른바 세기병(世紀病)이라 말한다. <세기아의 고백>의 주인공 옥타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즉 ‘세기아’이다. 이제 막 꽃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인 그는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연인 사이가 아닌가! 믿었던 애인이 배신,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심지어 애인이 또 있다! 심하게 마음을 다친 옥타브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타락한다.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기에, 단 한순간도 그녀의 배신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배신은 더없이 치명적이다. 더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는 차라리 인간 사회를 믿지 않고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내 연인과 흡사한, 악과 위선의 소굴’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실연에 빠져 상심한 채 사회와 담쌓고 지내는 옥타브를 보다 못한 데주네는 선배로서 그에게 온갖 사랑의 충고를 한다. 그가 보기에 옥타브는 소설가들과 시인들이 그려낸 사랑, 이 세상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 같다. 그런 옥타브에게 데주네는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을 믿더라도 실제로 이루려고는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절도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듯 사랑을 마시게, 주정뱅이가 되지는 말게. 연인이 진실하고 충실하다면 그 이유로 사랑하게. 충실하진 않지만 젊고 아름답다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게. 상냥하고 재기발랄하다면, 더 사랑하게. 만일 그녀가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지만 오직 자네만 사랑한다면, 그녀를 더 사랑하게. 사람이 밤마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네. (<세기아의 고백>, 56쪽)


옥타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파리 근교 시골에 머물던 옥타브는 그곳에서 바로 운명의 여인, ‘브리지트 피에르송’을 만난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일찍 남편을 잃은 여인, 고결한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의 칭송받는 순수함의 결정체인 브리지트, 그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사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옥타브와 브리지트로 변형되어 뮈세와 상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했던 상드와 달리 브리지트는 더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뮈세가 상드에게 바랐던 여인상일까? 어쨌든 옥타브는 그녀와 단둘이서 걷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외친다. “신을 찬양하라! 너는 아직 젊고,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

그러나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그 진행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첫 번째 사랑에서 실패한 옥타브이기에, 그 사랑의 그림자가 쉽사리 걷어지지 않는다. 의심과 질투, 불안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다. 첫사랑 연인을 완벽하게 믿었으나 그 신뢰가 깨져버리자 두 번째 사랑에서는 연인을 100% 믿는다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녀를 믿다가도, 때때로 질투와 의심이라는 망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든다. 심지어 이 어리석은 남자는 브리지트가 자기에게 몸을 허락한 사실을 갖고도 자신을 괴롭힌다. 의심에 빠진 모든 사람들처럼 그 또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고는 사실과 다투고, 의미 없는 말에 집착’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지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수록 정말 이 여자가 그토록 순수하고 칭송받아 마땅한 여인일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물론 철저히 옥타브 관점에서 그려졌으므로 <세기아의 고백>에서 묘사된 브리지트의 모습을 100% 믿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끝부분에 이르러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는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브리지트의 말처럼 ‘사랑은 행복이거나 고통’이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의심과 질투와 망상으로 깨져버린 이 사랑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는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그들, 아니 옥타브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신뢰로써 사랑하는’ 그 행복을. 브리지트의 예언처럼 이 어리석은 청년은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완벽하게 믿고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사랑만’이 그에게 남겨지리라. 그런데, 이 모습은 오늘날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모습과 닮았다. 100% 완벽하게 연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데주네의 충고처럼 ‘완벽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기아의 고백>은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며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또 어떠한지.


사는 것, 그렇다. 존재하고,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임을 강하게, 깊이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첫 번째 혜택, 가장 커다란 혜택이다.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어떤 사슬로, 어떤 불행으로, 그리고 나는 세상이 어떤 혐오감으로까지 사랑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할 것인데, 사랑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편견의 산 아래 푹 파묻혀 있어, 사람들이 모든 추악함 너머로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사랑, 강인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하늘에 태양을 매달아 놓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하늘의 법칙이다. (<세기아의 고백>,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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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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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와 가식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가는지를 조용히, 섬세하게 써내려간 수작. 1부와 2부에서 켜켜이 쌓아놓은 이야기들이 3부에서 압도적으로 폭발한다. 신기하게도 주인공 닉에게 안타까움이나 연민이 들지 않는다. 그 또한 어쨌든 반쯤은 그 세계의 일원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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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를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렇게 말하니, 페소아를 다룬 영화라도 상영하는지 오해할 수 있는데, 정확히는 ‘페소아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거나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영화제이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3일 목요일부터 23일까지 딱 열흘 동안만 열린다.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고 영화들도 단편이거나 상영 시간이 짧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지만 페소아를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까.


내가 관심 가는 작품은 크게 셋이다. 먼저 주앙 보텔료 감독의 <불안의 영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 소개를 살펴보면, 리스본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실과 구분하기 힘든 신비한 꿈을 꾼다는 내용으로 그림 같은 화면과 연극적인 연출, 몽환적 분위기로 인간의 고독을 그려나간다. 고요하고 적막한 리스본 풍경과 남자의 혼란스러운 표정 뒤로 <불안의 책> 구절이 흐른다고.


<불안의 영화>의 한 장면

















페소아의 이명인 ‘알베르토 카에이로’ 시 ‘양치는 사람(O Guardador de Rebanhos)’의 낭송을 들을 수 있는 작품 <금발 소녀의 기벽>도 궁금하다. 이 작품은 상영 시간은 1시간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은데 2015년, 106세의 나이로 타계한 포르투갈의 거장 올리베이라 감독의 작품이다. 삼촌의 사무실에서 회계로 일하는 한 젊은이의 사랑과 성공에 대한 이야기로, 주인공 마카리오는 사무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사귀게 되고 결혼하려고 하지만 매번 다른 장애물이 나타나면서 결혼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접한 몇몇 스틸 컷만으로도 독특한 미장센이 특징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금발 소녀의 기벽>의 한 장면















거의 평생을 리스본에서 살았던 페소아가 관광객들을 위해 영어로 쓴 리스본 가이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페소아의 리스본>도 흥미로워 보인다. 1920년대에 쓰인 페소아의 리스본과 2000년대 리스본의 풍경의 대비가 독특한 향수를 만들어낸다고. 이 영화를 보면 당장 리스본으로 날아가고 싶어지는 건 아닐지.


















평생 75개에 이르는 이명을 갖고 있었던 페소아. 이 영화들을 본다 해서 절대 그의 수많은 정체성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페소아가 남긴 일기나 시, 에세이를 읽는 편이 그를 아는 데 한결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스크린 속에서 페소아의 향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분명 반가운 소식일 듯. 그나저나 아예 페소아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은데....

상영작 목록 및 상영 시간표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cinematheque.seoul.kr/rgboard/addon.php?file=programdb.php&md=read&no=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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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2-11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메일로 받아본 페소아의 영화들 소식듣고 반갑더라구요. 욕심같아서는 다 보고싶네요. ㅎㅎ

잠자냥 2018-12-11 11:35   좋아요 0 | URL
역시 알고 계셨군요. ㅎㅎ 그런데 너무 기간이 짧고 평일 저녁에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별로 없어서 슬퍼요.. 흐흑...ㅠ_ㅠ
 
소년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8
앙리 드 몽테를랑 지음, 유정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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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표지 이미지와 <소년들>이라는 제목에서 처음에는 짐작 가능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몇 쪽 넘겼을 때는 살짝 수다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젠체하는 느낌이랄까, 기존 소설과는 색다른 시도들도 어쩐지 잘난척하는 것 같고. 어쨌든 처음에는 썩 좋지는 않았다. 가톨릭 학교 파르크 콜레주,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합친 콜레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역시 예상대로 흘러간다.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천사 같기도 한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 소년들. 그들의 당돌하고도 열정적인, 순진무구하지만 어느 땐 지나치게 약삭빠르기도 한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니 슬쩍 웃음이 나온다. 첫인상이 딱히 좋지 않았던 사람과 몇 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좀 더 대화를 나눠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소년들>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의 심정이다. 그러다가 나는 중반 이후부터 완전히 이 책에 빠져들었다. 아, 이런 작품이 이제야 찾아왔다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 이 나이에 읽을 수 있어서 어쩌면 이 작품을 이렇게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안도했다. 사랑, 그렇다 사랑.


파르크 콜레주 철학반 우등생인 알방은 학교를 대표하는 기구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뽑힌다. 이 아카데미 소속 엘리트 학생들은 선배가 자신이 점찍은 후배를 돌보는 ‘보호 그룹’이라는 활동을 시작한다. 알방은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두 살 아래인 세르주를 자신이 보호할 후배로 점찍는다. <소년들>은 알방과 세르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 즉 콜레주 학생들, 콜레주를 이끄는 원장 신부, 세르주와 남다른 관계인 드 프라츠 신부, 알방의 어머니 등을 중심으로 좀처럼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알방과 세르주의 관계는 작가인 몽테를랑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알방처럼 콜레주 철학반 학생이던 몽테를랑은 후배인 필리프 지켈과 특별한 우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바 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곱씹으면서 무려 50여 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소년들>은 몽테를랑 필생의 역작이자 얼마쯤은 자서전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작가는 ‘자전적 요소는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나이 열다섯 살 반쯤 되면 사랑에 빠지는 덴 이골이 붙는다.’ 이런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년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이 작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온다. 심지어 파르크 콜레주의 원장 신부가 학교에 세운 규칙은 ‘많이 사랑하기, 많이 포옹하기, 많이 기도하기’일 정도이다. 그는 진정한 애정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 ‘사랑받는 자는 어디서든 사랑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간 감정의 움직임이라고 여긴다. 원장 신부의 이런 가르침(?)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이 학교 학생들, 특히 ‘보호 그룹’에 속한 소년들은 하나같이 선후배 커플을 이뤄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주인공인 알방과 세르주는 좀 더 특별하다. 


알방은 그야말로 세르주에게 미쳐있다. 똑똑하고 집안 좋은 그에 비해 세르주는 학교의 문제아다. “아,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세르주에게 늘 붙어 다니는 말이다. 이상야릇한 작은 괴물, 학교의 말썽꾸러기 세르주는 끊임없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짓을 찾아다니고, 교사들과 자습 감독이 싫어하는 골칫덩이이다. 품행 점수가 이십 점 만점에 오 점인 학생이자, 학교에서 모두가 견딜 수 없어하는 아이. 알방이 사랑해마지 않는 세르주 수플리에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알방은 왜 이런 세르주를 사랑할까? 알방은 ‘선을 향해서든 악을 향해서든 무차별적으로 치우치는 어떤 막연할 열정’을 지닌 소유자로 정의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그가 보기에 세르주에 대한 이런 평가와 대우는 정당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연약하고 가난한 소년에게 그는 한없는 사랑과 연민을 느끼고 그를 좋은 길로 이끌고 싶어 한다. 사랑에 빠진 알방에게 세르주는 완전히 특별한 존재다. 세르주에게는 특별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나는 건지 알방이 평생 궁금해 한 일종의 향기’. 세르주를 사랑하는 알방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면 어스름한 저녁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를 더 잘 떠올리기 위해 일부러 램프를 약간 기다렸다 켜곤 한다.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년들의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데,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사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가톨릭 학교에서 동성 친구 사이의 ‘사랑’을 용인하고 허락한다고? 공공연하게 소년들끼리 사랑한다고? 하는 생각들. 물론, 원장 신부가 ‘더 많이 사랑하기’를 학교 규칙으로 세웠듯이 선후배끼리 서로 보호하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일은 어느 정도는 허용된 일이었다. 단 그것은 서로 영혼의 성장을 돕는 사랑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보호 그룹’ 학생들은 신부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육체적 사랑의 쾌락도 마다하지 않는다. 알방과 세르주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낭만적’이라는 말로 파르크에서 일어나는 이탈을 관대하게 보아주던 학교 지도자들도 알방과 세르주의 어떤 사건 앞에서는 더는 그 일탈을 너그러이 넘어가주지 않는다. 그리고 알방은 세르주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학교를 떠난다. 아니, 퇴학당한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간다.


그런데 알방의 사랑이 벼랑으로 내몰리게 되는 데는 ‘그저, 무얼 하든지 간에 항상 청소년기와 유년 시절을 망쳐버리는 어른들의 속성’이 큰 역할을 한다. 늘 사랑하라고 사랑을 권하던 원장 신부의 비겁함, 세르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알방에게만 유독 가혹한 처벌을 내린 드 프라츠 신부 등은 처음부터 ‘특별한 우정’은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고 줄곧 눈감아주다가 자기들이 마음 내키는 때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알방과 세르주가 며칠 동안 달고 다닌 황금 단추 배지가 어른들에게는 일종의 ‘약혼반지’처럼 보인다. 알방의 어머니 또한 아들과 세르주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른들로 인해 망가진 세계, 내몰린 사랑. 알방과 세르주는 이대로 영영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알방이 퇴학당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이 책 중반까지에 해당한다. 이때 나는 분노와 함께 가슴이 아파왔다. 귀여운 녀석들, 하면서 내내 웃다가 어느 순간 분노하고 있던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부터는 거의 비통함과 서글픔 같은 것들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알방은 어머니가 바라던 남자가 된다. ‘보호받는 후배들’의 명단은 곧 다른 명단,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같이 춤을 추었거나 또는 (사회적 이유로) 반드시 춤을 추어야 할 ‘여자들의 명단’으로 대체된다. 원장 신부의 경박함도, 드 프라츠 신부의 배신도, 어머니의 훔쳐보기도 모두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이 한마디로 무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인생. 인생이 다 그렇지! 더더군다나 알방은 남자가 남자를 욕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젠 비상식적이고 괴상망측하고 혐오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린 소년들에게서 여자로 옮겨가기, ‘많은 사춘기 소년들이 경험하는 이 통과의례’는 일종의 성숙을 의미했고, 알방 또한 그렇게 그 시기를 지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정말, 그럴까?


파르크, 버릇없고 비겁하고 도벽이 있고 속물근성에 불경스럽고 무절제하고 위선적인 소년들이 있는 파르크는 창부의 집인 동시에 천사들이 옮겨온 집이었다. 이후 어디에서도 파르크에서 경험했던 관대함과 강렬함과 장점을 그는 보질 못했다. 자신에게서도, 주변에서도 다른 존재를 ‘더 훌륭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다른 존재를 위해 자기 인생의 가장 귀한 보물을 희생하려 하는 욕망을 단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다. (<소년들>, 439쪽)


알방이 학교를 떠날 무렵 드 파르츠 신부는 그에게 ‘스무 살쯤 되면 이 모든 일을 비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곧 스무 살을 앞둔 알방의 삶은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알방은 그럼에도 종종 세르주의 그 ‘과일 같은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날에는 약간 상한 과일 같고, 저녁나절 거리의 어둠 속에서는 환하거나 반쯤 밝아지는 과일 같은 얼굴’을……. 전적으로 순수한 애정을 바쳤던 대상, 절교가 눈물 너머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헤어지던 순간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대상. 그 ‘강렬한 추억을 남긴’ 자는 바람조차 건드릴 수 없는 서늘한 저 깊은 곳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파르크 콜레주는 알방에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이자 청춘이며 순수였고, 어떤 존재를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알방이 세르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도 울컥 치솟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은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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