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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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차례 선거가 끝났다. 자신의 이념에 근거한 정당이 승리했거나 패배했거나 그에 따라서 자기 나름의 분석을 하기에 바쁘다. 이런 선거가 끝나고 나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아닌, 자기 이념과 어긋나는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지 의아해하며 그들, 그러니까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궁금해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인터넷을 통해서 퍼지는 가짜 뉴스에 ‘현혹’되었다던가, 신문이나 언론에서 줄기차게 해온 주장에 ‘세뇌’되었다던가 등등.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믿었기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관련한 신념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런 논쟁은 더 첨예해진다. 만일 그 종교가 사회에서 용인받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는, 그래서 이단이라고 취급받는 종교라면 사람들의 비난은 더 심해진다. 어떻게 ‘그런’ 종교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는 믿음, 광신도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면서 개탄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주의주장에 쉽게 ‘현혹’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돌아봐도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동가들의 말과 행동에 ‘현혹’되어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 선동에서 깨어나 지나간 시간의 만행들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태를 달리해 또다시 나타나는 온간 선전선동에 인간은 현혹되어 인류를 저버리는 일들까지 기어코 저지르고 만다. 저 먼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러했고,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그러했으며, 종교 원리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수많은 자살폭탄테러도 그러했다. 이성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새로 등장한 바이러스와 관련한 온갖 괴소문들이 번져가고 거기에 인간은 ‘현혹’당해 도저히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저지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와이파이를 통해 번진다는 이야기에 인터넷 망을 끊고 다니는 저 유럽인의 광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바이러스를 빌미로 일상처럼 번져가는 인종혐오와 차별은 또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다양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한번 어떤 노선에 접어들어 그곳에 고정되고 나면 자신의 다양성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안에 머물러 있게 되고 더 이상은 어떤 것으로도 그를 빠져나오게 할 수 없다. (<현혹>, 9쪽)


<현혹>의 이 한 구절은 광기와도 같은 집단 최면 상태에 종종 빠지는 인간 이성(理性)의 그 참을 수 없는 나약함, 그런 인간의 나약함을 노려 대중의 광기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선동가와 그 추종자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양성’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한번 어떤 노선에 접어들어 그곳에 고정되고 나면 자신의 다양성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인간이라는 허점 많은 존재. 그런 존재들은 쉽사리 선동가에게 현혹되기 쉽고 그 안에 머물러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선동가에게 현혹당해 집단 광기의 상태에 빠졌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뒤, 도시를 등지고 알프스 산간마을에서 은둔하다시피 의사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마리우스 라티’라는 방랑자와 마주친다. 왜소한 체격에 갈리아풍 콧수염, 서른 혹은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 꿈꾸는 듯 멍하면서도 대담해 보이는 눈길. 갈리아 지방 출신 소시민으로 보이는 마리우스는 첫인상부터 왠지 불쾌하다. 이 마리우스는 아랫마을 농부 ‘밀란트’의 집에 임시 일꾼으로 기거하며, 독특한 말과 행동으로 주민들을 점차 현혹시킨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계 타작 금지를 역설하는 한편, 거대한 증기 제분소 때문에 인간이 병들게 되었다며 기계문물과 대량생산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를 비롯해 기성복 구입도 해서는 안 된다. “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은 절대로 몸에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질병은 방탕함에서 오는 것”이라면서 정결한 삶을 주장하며 미혼모를 마녀라고 낙인찍어 따돌리고,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도시인의 생활을 비난하면서 서비스 직종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멸하기도 한다. 때문에 마을에 라디오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는 서비스업 종사자 ‘베취’는 마리우스가 괴롭히기 아주 좋은 대상이다.

한술 더 떠 마리우스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전설처럼 전해오던 ‘황금 채굴’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마을 사람들을 강력하게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마리우스 가까이에는 그의 손발 같은 역할을 하는 ‘벤첼’이라는 자도 있다. 마리우스는 뒤에서 말을 할뿐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데, 벤첼은 선동꾼 역할을 자처한다. 마리우스와 벤첼, 두 이방인이 벌이는  선동으로 말미암아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의 반목은 심해지고, 마리우스를 믿는 자들과 그를 의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도 깊어지면서 이 조용하던 산간마을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만다. ‘나’는 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서술하는 기록자 역할을 하지만 그 선동가를 막는 일에는 앞장서지 못한다. 마리우스에 반감을 가지는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집단 광기와도 같은 축제에 참여해 그 공기에 취해버리는, 이 마을에서 가장 이성을 갖춘 존재이면서도 그 자신마저 때로는 이성의 끈을 놓고 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오면 의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네.” 말하면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상황 아래 이 마을은 마리우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콧수염을 기른 이 선동꾼 마리우스는 당연하게도 히틀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산간마을 사람들, 그들의 암흑 같은 삶은 종교도 구원해주지 못한다. 마을의 무기력한 가톨릭 신부는 어떤 영적 도움을 주지 못한지 오래이다. 그런 상태에서 외부에서 들어온 이 신비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는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을 반대하고 엄격한 규율을 내세우면서 의지할 것 없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 차츰 스며들어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는 심지어 황금까지 약속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마리우스의 행동대장이 벤첼의 모습에서는 괴벨스가 떠오른다. 그 두 사람은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누군가를 배제해야한다. 볼품없는 외모에 마을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던 사나이, 그런데다가 서비스업 종사자인 ‘베취’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벤첼은 베취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계속 번식을 하려고 하다니.......” “그런 것이 세상에 아예 나탄지 않는다면 더 좋겠죠.” 등등. 마을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어 베취를 따돌리고 괴롭힌다. 여기에 죄의식은 없다. 심지어는 한 여성을 제물로 바치는 일에까지 동조하게 된다. 히틀러와 괴벨스, 그 추종자들이 자행했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이 떠오르는 섬뜩한 장면이다.

마리우스는 벤첼을 단지 익살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익살꾼.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의사에게 마리우스는 벤첼이 하는 일은 곧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베취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공격하는 일들이 결국 사실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취를 괴롭히도록 선동하는 일도 정의에 속하는 것”이며 “그저 민중의 목소리일 뿐”이다. 마리우스가 보기에 “모두가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이 낫다(206쪽). 홀로코스트가 정당화되고 그것에 동조했던 수많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들이 떠오른다.


“현혹되지 말도록 해. 그러면 자네가 도울 수 있을 거야.”
“우리를 현혹시키는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나 있을까요? 우리는 그걸 막아낼 수 없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자네도 그 일을 겪어내야 하는 거지.” (<현혹>, 374쪽)


의사인 나는 끊임없이 마리우스와 벤첼을 의심하고 불쾌해하며, 그들에게 반감을 갖고 그들의 영향력을 마을에서 거두고 싶어 하지만 딱히 행동은 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어머니 기손’의 존재는 이 마을에 드리운 암흑과도 같은 집단 광기를 거둬낼 수 있는 유일한 빛과도 같다. 그녀는 애초부터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마리우스의 약점과 그 약점에서 비롯된 일그러진 생각과 욕망,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그에 대한 경고를 하는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리우스의 ‘현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증오가 두려움과 함께 와야만 해. 그다음에 사랑이 오는 거야..... 중요한 건 잘 죽는 거라네....”라고 말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인간과 달리 산, 그러니까 자연은 절대 마리우스 같은 자의 현혹에 속지 않는다. 어머니 기손의 이런 주장은 기술 발전과 문명 진보에만 치중해온 서구 문명에 대한 일침이 아닐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다가 이렇게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다니! 대단한 현혹이다! 이제 자연은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복수하게 될까! 자연은 폭력에 희생된 정신에 대해 복수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자연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연과 그 무한으로 가는 길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정신, 인간의 자비, 그리고 인간의 신적 탁월함이다. (<현혹>, 556쪽)


자연으로 돌아가려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는 깨달음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마을은 씻을 수 없는 상흔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연은 계속 흘러간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생명을 잉태하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럼에도 마리우스라는 그림자는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아니, 마리우스와 벤첼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더라도 언젠가 또 다른 마리우스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고자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누구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인간들이 어떤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서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 결국엔 무능과 절망에 빠져, 잠에 취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해를 가하게 될 거라는 사실’(346쪽). 이런 사실을 늘 상기하지 않는다면 틈을 노리는 자가, 그리하여 자기 이득을 꾀하는 자가 언제고 나타날 것이다. 이 어둠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마저도 현혹당해 그 일을 겪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기손의 이 경고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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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1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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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한 가지일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고, 아주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에서 생긴 그 상처들은 사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알아봐달라고 손짓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상처가 치유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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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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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상실한 대중광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인간에게 믿음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철학적 깊이가 넘치는 작품. 일주일 넘게 이 책과 씨름하듯이 읽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차고도 남는다. 이제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에 도전해 봐야지. 그의 작품을 읽은 일은 말 그대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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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4-15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유병자들>..... 이 책이야말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면 그때나 읽을까, 아이고 전 두 손, 두 발 다 든 책입니다. 잠자냥님, 통촉하시와요. 흑흑흑....

잠자냥 2020-04-15 14:23   좋아요 1 | URL
늘 마음만 먹고 여태 못 읽은 책인데 코로나로 사람들 잘 안 만날 때 읽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요. ㅎㅎㅎ
 
[전자책] Y 교수와의 대담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3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이주환 옮김 / 읻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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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교수라는 인물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인터뷰한 셀린. 그 인터뷰를 통해 프랑스 출판계의 행태와 어리석은 독자, 문학 작품 본질을 왜곡하는 데 열중하는 비평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바탕 우스꽝스러운 소동이 끝나고 나면 지독한 나르시시스트 셀린의 초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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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색깔에 관한 에세이를 써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색을 머릿속에 떠올릴까. 빨강? 검정? 초록? 파랑? 아니면 흰색? 그리고 그 색에 대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풀어갈 수 있을까? 나 또한 머리로 특정한 색과 관련된 이야깃감을 떠올려본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카키색?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누군가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검정? 그래 검정은 그래도 몇 자 끼적일 수 있을 것 같다.

검은색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상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째서 당신은 늘 검은 곳을 입고 다니는 거죠” 묻는 메드베젠코에게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불행하니까요”라고 말하던 마샤. 체호프의 <갈매기>에 나온 그 유명한 대사처럼 검은색 옷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복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아직은 장례식에 갈 일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그럼에도 이십대의 어느 날, 지금보다는 낯설었을 장례식에 참석했던 날이 떠오른다. 한 여름이었고, 얇은 천으로 지은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장례식 내내 입고 있으려니 햇볕을 고스란히 흡수해 무척이나 더웠던 기억. 슬픔도 더위 앞에서는 무색해지던 그런 기억.  

어린 시절의 검은 고양이도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영향 탓인지 검은 고양이를, 아니 고양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에는 완벽하게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마당의 쥐를 잡고자 할머니가 어디선가 데리고 온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귀엽다면서 늘 끌어안고 다니던 동생과 달리 나는 녀석과 마당에서 마주치면 무서워서 도망가곤 했다. 어둑한 밤이면 까만 몸은 보이지 않고 마당 어디선가 번쩍 빛나던 그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이 오싹해지곤 했다. 변덕이 심했던 할머니가 어느 날 고양이는 아무래도 요물이라면서 내다버릴 요량으로 녀석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셨는데, 할머니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서 지붕 위에서 느긋하게 가르랑거리던 녀석. 그걸 보고 질겁하던 할머니. 나는 그 후로 검은 고양이는 역시 무서운 존재라고 그렇게 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몇 가지 더 풀어갈 수 있을 만큼 검은색과 관련한 기억은 다른 색깔보다는 많은 편이다. 다른 이들도 그럴까? 적어도 알랭 바디우는 그런 것 같다. 아니 그이만큼 이토록 검은색에 관해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어려우리라.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에서 바디우는 ‘검정(le noir)’이라는 단어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철학적 사유로 빛나는 어려운 글들이 아니라서 더 친숙하다. 그는 먼저 군대에서의 춥고 ‘어두운 밤’에서 시작해 유년 시절의 깜깜한 방에서 이루어지던 어느 놀이를 추억한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와 그 잉크와의 씨름을 통해서 얻은 글쓰기의 기쁨을 노래하고, 스탕달의 <적과 흑>의 주인공 ‘소렐’로부터 자리 잡음의 욕망(검은 충동)과 자기도취의 욕망(붉은 충동)이라는 이중적 욕망, 초라한 삶의 충동과 과도한 죽음의 충동을 탐색하기도 한다. 때로는 ‘누아르 데지르(noir desir)’라는 이름의 1990년대에 절정의 인기를 누린 유명 록밴드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기도 한다. 어둠, 밤, 석탄, 잉크, 검은 개, 음흉함, 검은 대륙, 적과 흑, 블랙 유머, 검은 표범, 흑인……. 검은색의 찬란한 사유는 그칠 줄 모른다.

그의 글 한 편 한편은 깊이와 아름다움에서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잉크통’에 관한 사유는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더럽고 지저분한 재료의 검은색과 잉크통 속에 담가 놓으면 ‘잉크 덩어리’라 불리는 것을 쏟아내곤 하는 변덕스러운 펜의 마술을 통해 기적적으로 얻게 되는 기호들의 검은색. 분명하고 또 어쩌면 매력적일지도 모를 한 문장을 끈적한 잉크로부터, 그리고 그 덩어리들 사이로부터 굽이쳐 나가며 얻게 되는 기적! 그것은 재료의 검은색으로부터 떼어 낸 의미의 검은색이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는 읽기와 쓰기라는 필수적인 기초를 통해 변증법의 기초를 가르쳤던 셈이다. 무시무시한 검은 색과 흰색 간 변증법의 기본. 시험, 작문, 쪽지 시험, 보충 과제 등등 이 모든 학습의 함정을 생각해 보라. 처참하게 망쳤을 때 우리는 백지를 낸다고 말하지 않는가? 반대로 영감을 받으면, ‘여섯 페이지를 까맣게’만들었다고 거만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잉크통’, 22~23쪽)


어린 시절, 흰 종이 또는 새하얀 스케치북 위에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그려 넣은 기억, 삐뚤삐뚤한 숫자나 글자를 맨 처음 적어보았을 때의 그 희열과 놀라움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 같다. 알랭 바디우는 ‘펜, 필통, 불완전한 잉크, 종이, 강렬한 생각과 어쩔 수 없는 덩어리 사이에 놓인 아이의 고민 사이에서 이미 문자의 심급과 그 바탕의 얼룩이 보이며, 글쓰기를 지지하는 것의 미묘함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오직 하얀색 위에 검은색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적당한 정도로 쓰여서 통제되고 형상이 부여될 때, 그것은 구원의 장소’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잉크 얼룩을 묻히지 않기 위해 애써가며 흰 종이 위에 적당히 써내려간 그 글, 그것들이 곧 ‘구원의 장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글이 곧 구원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있을까. 이 글쓰기라는 행위는 곧 바디우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만만찮은 불변성을 지닌 하얀색 위에 세심하게 고안된 양으로 던져진 검은색에서 나온 결과’이며 그렇기에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검은색은 색상이 아니며 빛의 스펙트럼 분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검은색은 모든 색체의 결여인 데 반해, 하얀색은 모든 색채의 불순한 혼합’이라고 말한다. ‘검은색은 색채의 무이며 하얀색은 색채의 전체’인 것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검은색은 식별되지 않는 것들을 상징하며 결여와 초과를 상징’한다. 그러는 한편 ‘검은 물질은 이름이 잘못 붙여진 구멍처럼 과도한 빛의 어두운 결과물이 아니다. 한동안 하늘의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밝힐 수도 있고, 때로는 심지어 대낮에도 밝게 빛나고 남은 육중한 별이 폭발한 뒤 남은 검은 잔여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발견될 수 없는 채로 사유에서의 결여를 메우는 데 열중’한다. 우리는 늘 알지 못하는 것을 검게 칠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식에서 결여된 무언가를 검은색으로 명명하여 사유에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도록 한다. 따라서 ‘우주론에서의 검은색은 하늘의 푸른색에서 대한 시적 대립항인 밤의 어둠이라기보다는, 사라진 무언가의 이름(블랙홀)이며, 모든 가능적 인식의 이름이자 그 무엇도 개념을 결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이름(검은 물질)’이다. 결국 바디우가 보기에 우주론의 검은색은 부재나 죽음보다는 사유에 대립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상복을 떠올렸듯이 바디우 또한 검은색은 당연히 우리에게 애도의 색상임을 지적한다. 그는 ‘빛의 부재, 꺼져 버린 삶, 최초의 오염으로서의 음흉한 생각이라는 이 끔찍하고 치명적인 역할에 수반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검은 휘장을 가득 휘감은 영구차 뒤로  검은 의복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천천히 따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음들 속에 오로지 삶의 덧없음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불가피한 사라짐에 대한 사색만이, 어두운 생각만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애도의 색상인 검은색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흔히 분위기를 살리는 농담의 바탕’ 즉 ‘블랙유머’가 비롯되기도 함을 지적한다. 삶과 죽음, 애도와 슬픔, 유머가 공존하는 검은색이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검은색의 변증법, 의복, 문학, 대중문화, 물리학과 생물학 분야를 아울러 검은색을 사유하던 바디우는 마침내 인류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검은색은 정말 어떤 색깔이냐고, 그것은 백인들의 발명품이지 않느냐고. “검은 고양이를, 악마의 음흉함을, 까마귀를, 검은 누더기를 걸친 마녀들을, 흑사병을, 영혼의 우울함을 악마화한 이후에 우리들, 이른바 서구 유럽의 백인들은 대다수의 아프리카 거주민들이 오로지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노예 또는 점령된 식민지의 유형수가 되도록” 정해버린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누군가의 색깔을 정말로 결정하려고 해보라. 한 사람의 백인은 하얀색인가? 확실히 아니다. (.....) 흑인, 황인, 홍인, 그리고 특히 백인은 그저 억압적인 분류 방식이나 의심스러운 상징적 계산을 지탱하며, 경멸적인 판단 혹은 비참한 자기만족을 떠받치는 헛된 ‘객관적’ 지지대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배열 가운데 어떤 것이든 하나의 색깔을 포함하려 하는 모든 상징화, 집합적 평가, 정치적 시도, 일반적 판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보편적 차원에서는 백인도 흑인도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 (‘백인들의 발명품’, 128쪽)


바디우의 말처럼 인간에게 정말 색깔이 있는가?  당신은 무슨 색인가? 누군가를 색깔로 결정할 수 있는가? 백인이 정말 하얀색이며, 황인은 노란색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손은 정말 노란색인가? 이 색이 정말 노랗다고 말할 수 있는가? 흑인은 정말 검은색인가? 그 피부를 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는 그의 선언은 그래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130쪽 남짓의 짧은 책이지만 검은색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수많은 이야기를,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니 책을 덮을 때는 나도 모르게 찬탄이 나온다.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 앞에서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주저하는 이들이게도 이 책은 검은색에 관한 다정하고도 친숙한 에세이로 읽힐 것이다. 바디우는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책 <행복의 형이상학>에서 ‘모든 철학은 일종의 행복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했는데,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을 읽는 내내 검은색과 사유의 발견이라는 또 다른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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