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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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 먹는다, 싼다, 읽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의 꾸준히 하고 있는 행위이다. 이 가운데 ‘읽는다’는 자고 먹고 싸는 일에 비해 조금 뒤늦게 시작했다.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글을 빨리 익힌 편은 아니라서 읽기도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글씨를 알고 난 후부터는 늘 읽었다. 말없이 얌전히 책만 읽는 아이-내 유년 시절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또래와 노는 일보다 책 읽기가 더 좋았고 그런 성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보다, 그 공허하게 느껴지는 시간보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이 좋다.

‘지상의 다락방’- 알라딘의 내 서재 이름이다(다락방 생각해서 지은 거 아님). 홀로 책 읽기 좋았던 어린 날의 그 다락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속의 한 구절,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와도 일맥상통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못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가시가 돋는다.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날은 괴롭다. 고통스럽다. 에이, 거짓말! 반문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런데 정말이지 나는 그렇다. 그게 무엇이든 한 글자라도-아니 이건 너무 부족하다- 몇 쪽이라도 읽다 잠들지 않는 날은 잘못 산 기분이다. 술에 취한 날도 무조건 읽다 자야 한다. 읽지 못할 것 같은 날에는 아침이든 점심이든 그 어느 때라도, 어디서라도, 틈을 내서라도 조금이라도 읽어야 한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강유원, <책과 세계>)라는 말도 있는데 이 정도면 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읽지 못하면 우울하다. 나는 책 읽기를 왜 이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책을 펼치면 그곳이 어디든, 누구와 함께 있든 혼자만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크게 공감한다. 혹시 나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예부터 세상 속에 섞여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은 책 속으로 도피해왔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사람보다 책과 함께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아스퍼거증후군 초기 사례연구에는 책에 파묻혀 병동 구석에 앉아 있던 여덟 살 소년이 등장한다. (...) 인간의 행동은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책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 소년이 학교 친구들보다 책을 더 편안하게 느낀 이유도 비슷하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 p.149) 공교롭게도 내 오래된 일기 속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인간과 책_ 인간은 너무 가변적이다.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수밖에 없다. 책은, 그것도 오래된 책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2017년 11월 6일)’   

그런데 이토록 내게 절대적인 책을 못 읽게 된다면, 아니 읽을 수 없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그 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한 번도 읽지 못하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읽지 못하게 될까 봐, 눈을 다칠까 봐 조심하고, 시력이 떨어질까 봐 눈에 좋은 영양제만큼은 열심히 챙겨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읽지 못하게 될 내 인생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고 나서 ‘읽지 못하는 삶’을 심각하게 떠올려보고는 그것이 아주 잠깐의 가정(假定)에 속했을지라도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신도 언제든지 문해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읽기 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실독증’이라는 덫에 걸릴 수 있다고 위협한다. 경고한다.

실독증? 난독증은 들어봤는데 실독증은 또 뭐람?! 이 책에 따르면 실독증은 “더 이상 손글씨나 인쇄된 언어를 읽을 수 없지만 보거나 말하는 등의 다른 일은 계속할 수 있는 신경학적 증후군”을 뜻한다. 읽기능력 상실은 보통 뇌졸중, 종양, 머리손상,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뇌손상 때문에 일어난다. 어린이가 읽기를 배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난독증과는 달리 실독증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성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평생 책을 읽어온 사람이 갑자기 읽은 것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후천적 문맹이라고도 한다. 갑자기 읽을 수 없게 된 사람을 설명할 용어가 마땅치 않으므로 이 책에서는 이런 환자를 ‘문해력 상실인’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보통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들, 그러니까 난독증처럼 글씨를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부터 살펴본다. 그러나 난독증을 다룬 1장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듯해 관망하듯이 읽었다. 그런데 실독증, 문해력 상실인을 다룬 3장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아서 제아무리 지금 잘 읽고, 읽은 것을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그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라고 새삼 깨달으며 몰입해 읽었다. 이 장에서는 읽기능력을 상실한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의 사례가 여럿 소개된다. 저자에 따르면 작가나 학자, 편집자처럼 읽기가 거의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던 사람들일수록 문해력 상실인이 된 이후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신경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는 좌골신경통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다.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읽기다”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갑자기 읽기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읽기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 기술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에 가깝다. 읽기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더는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독증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런 사람들은 더는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사형선고처럼 느껴진다. “읽기와 문해력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 문화, 경제적 혜택”을 비롯해 “현대 사회에서 읽기는 의사소통, 오락, 지식의 원천으로 널리 인식되며 많은 이가 읽기를 의미 있는 삶에 필수적인 지혜의 원천”(p.170)이라는 것을 체득했던 이들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실독증 사례에서 보듯이(물론 난독증이나 과독증과 같은 자폐아들의 읽기,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이 책에서 다루는 다양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단지 눈만이 아니라 뇌로도 본다는 사실을 곧잘 잊곤 한다. 읽지 못하는 날이 올까봐 그저 눈 영양제나 챙겨먹고 시력이 나빠질까, 눈이 다칠까 조심하는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읽기는 ‘수많은 감정적‧인지적‧지각적‧생리적 과정을 동기화하며 일어나는 복잡한 행위’이다. 때문에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읽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롭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실독증은 읽기가 지적 활동일 뿐 아니라 생리적 활동이며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수많은 신체 교환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체화된 행동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읽기장벽은 누구나의 삶에 끼어들 수 있으며 문해력 상실인은 매끄럽게 이뤄지던 읽기가 시각 인식부터 해독, 의미 생성까지 다양한 신경 활동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합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또한 이런 활동이 언제든 오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읽기’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눈으로 글자를 좇아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이 읽기일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사람은 뇌졸중으로 인해 단어의 첫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는 사라진 글자를 손으로 따라 쓰는 등 다른 방법을 이용하면 계속 정확하게 읽을 수 있지만 도무지 이런 기술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방법은 정상적인 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 나쁘다고 판단하고는 이런 읽기 방식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정상적인 읽기일까? 이 책은 온갖 읽기장벽에 부닥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읽기 과정이 순조로이 작동할 때는 감춰졌던 읽기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면서 읽기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성찰한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개탄하는 시대이다. 한 인지신경과학자의 “문해는 문화가 발명한 것”이라는 말도 곰곰 생각해볼 만하다. 읽기는 말하기와 달리 인간의 뇌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읽기가 지위, 특권, 권력을 나타내는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이자 의미 있는 삶의 전제조건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읽기차이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 이제는 읽기가 단순히 언어기호를 해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그치는 과정이라고 보는 좁은 관점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인지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신경 다양성 운동의 핵심 통찰을 바탕으로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이거나 ‘읽기가 아닌 것’으로 치부된 활자와의 상호작용 방식에 주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p.335)는 이 책의 말처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읽기’만이 아닌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세계, 아울러 읽을 수 없는 삶의 고통 또는 읽을 수 있음의 축복까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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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6-27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 나쁘다고 (판단했다고)요?! 읽기 장벽이 무너지는 것만 생각해봤지 반대의 경유는 생각 못해봤거든요. 읽을 수 있는 곳으로 넘어간다고.. 그게 비가역적이리라고 생각해왔던 나를 발견함…진짜 흥미롭네요. 이 서평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이 책을 빌려온다음에 고대로 갖다 준 “읽지 못한 사람”으로서.. 너무 재밌게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4-06-27 16:13   좋아요 1 | URL
네 저 사람은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저라면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읽지 못하는 곳통! 으아아. 그렇지 않나요? 정상적인 읽기 행위에 매몰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요. 이 책 제 리뷰보다 당연히 더 좋은데 ㅎㅎㅎ 나중에 다시 읽어보세요! 제가 쓰지 않은 내용 중에 흥미로운 내용 정말 많아요- 책 읽으면 글자가 다양한 색깔로 보이거나 책을 읽으면서 맛이나 냄새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요...우리의 나보코프는....!

바람돌이 2024-06-27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독증이란것도 있다구요? 아 진짜 그건 죽음이에요. 사람들은 저한테 퇴직하면 뭐할거냐고 심심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저는 몇년 안 남은 퇴직이 너무 너무 기다려지거든요. 그건 순전히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 때문인데 실독증도 있다니... ㅠㅠ 😭

잠자냥 2024-06-28 10:19   좋아요 0 | URL
그쵸? 상상만 해도 죽음이죠?! 으아 정말 상상하기 싫습니다.... ㅠㅠ
대부분 실독증은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나 건강 문제로 발생하는 거 같아요. 건강해요... 우리... 잘 읽기 위해서!

독서괭 2024-06-27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독증이라구요...??? 헉.. 너무 무서운데요?? 저는 잠자냥님만큼 책을 읽지 않으면 괴로운 정도는 아니지만, 읽는 대상이 책 뿐은 아니니까요. 와,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잠자냥 2024-06-28 10:20   좋아요 1 | URL
˝와, 너무 힘들 것 같은데˝에서 진심 느껴짐ㅋㅋㅋㅋㅋ 건강 관리 잘해요!
실독증은 대부분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나 뇌졸중, 치매 등으로 오는 거 같아요.. 으아.

다락방 2024-06-28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기를 어릴 때부터 워낙 좋아하기도 했지만 읽기는 또 저랑 가장 오래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막연히 그랬지요. 그런데 몇 해전, 핸드폰을 보다가 초점이 안맞아 눈에서 좀 떨어뜨리면서 갑자기 너무 놀랐어요. 이게 뭐지? 왜 잘 안보였지? 왜 뒤로 핸드폰을 밀어야 했지? 근무중이었는데 벌떡 일어나서 보쓰에게로 가 ‘병원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부랴부랴 그 길로 안과를 갔어요. ‘내가 읽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두려움이 찾아와서였어요. 그건 ‘보이지 않는‘데에서 시작했죠. 이대로 안보여서 못읽게 되면 어떡하지? 읽기를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너무 큰 공포였어요. 아 안돼 어떡하지, 읽지 못하면 대체 뭘 하라는 거야. 너무 두려웠어요. 침착하자, 오디오북도 나오고 있으니까 다른 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거야. 그렇지만 그건 그게 아닌데...
병원에서는 저에게 노안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너무 안타까워서 ‘선생님,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루테인 먹을까요?‘ 했는데, 이미 노안이 온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받아들이다가 돋보기를 쓰는 것 뿐이라고... 여전히 읽기는 할 수 있지만, 그런데 예전보다 좀 힘들긴 해요. 이건 보이지 않아 읽을 수 없는 경우에 관한 것인데, 그렇죠, 읽기는 눈만이 하는게 아니죠. 보이더라도 읽을 수 없기도 하는거네요. 그럴 때는 오디오북도 소용이 없는 거겠죠? 그건.. 너무 무섭네요 ㅠㅠ 그러면 어떡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이 책 무섭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4-06-28 12:59   좋아요 1 | URL
엥? 그냥 페이퍼를 써 이 사람아! 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길이 좀 봐! ㅋㅋㅋㅋㅋ
다들 실독증에 충격 ㅋㅋㅋㅋ 계속 읽기 위해서는 눈만 관리할 게아니라 뇌 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뇌가 참 뜻대로 관리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는 하죠.... -_-;;
뇌의 영역이 고장나면 오디오북도 소용이 없기는 합니다..... 뇌의 서사를 구성하는 영역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치매 환자들의 경우) 계속 읽고 또 읽고..... 같은 페이지에서 머물기도 한답니다;;;

구단씨 2024-06-28 14: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 번째 단락 소개해주신 인용구.
시기와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책에게 향하는 마음은 비슷한 시작인 것 같아요.
책이 도피처가 될 수는 없지만, 도피처가 되어버리고 마는 순간도 있는 듯 하고요.
활자잔혹극 다시 읽다가 실독증, 문맹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리뷰 보니까 더 깊어지는 주제가 되어버렸어요. ^^

잠자냥 2024-06-28 14:38   좋아요 1 | URL
책이 도피처가 되니까 책에 파묻히는 사람들 사례도 나오는데, 책이 도피처가 되기에는 그럴 만한 상태여야 한다는 내용에도 공감했어요. 너무 우울하거나 생활에서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면 책으로 도피할 수조차 없는 거죠(<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의 이야기도 잠깐이지만 나오거든요) .
오잉? 활자잔혹극에도 실독증 이야기가 나오는가보군요? 그 책도 재미나 보여요.

희선 2024-06-29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만 괜찮으면 오래 책을 볼 수 있겠지 했는데... 책을 죽 읽으면 뇌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군요 뇌를 다치거나 뇌가 아프면 책을 못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는데... 뇌를 건강하게 하려면 운동도 조금 해야겠군요 조금이라니...


희선

잠자냥 2024-07-02 10:30   좋아요 1 | URL
네, 보통은 책을 본다고 하니까 눈만 소중하게 생각하기 십상인데 뇌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어요. 뇌를 건강하게 하려면.. 저는 일단 술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ㅎㅎㅎㅎ

관찰자 2024-07-01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오래 읽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시던 어느 어르신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가만히 앉아서 읽는 일인데, 그 일을 위해서 하루에 몇시간씩 달려야하다니.. 나는 너무 힘들어서 싫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정도의 노력은 있어야줘야 평생 건강하게 읽을 수 있는 걸까요.ㅠㅠ 실독증, 정말 무섭네요.

잠자냥 2024-07-02 10:31   좋아요 0 | URL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공간이라 그런지 다들 실독증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시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걸 꾸준히 오래 하기 위해선 역시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24-07-01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솔찬히 읽는 것이 좋아지긴 했지만, 세상에는 읽는 것보다 재밌는게 너무 많아요!! 잠쟈냥님의 읽기를 포함한 ’세상 읽기‘를 응원합니다. 가끔은 책을 딱 덮어버리고 영화도 집어치우고 하늘을 감상하셔요~!!

잠자냥 2024-07-02 10:32   좋아요 1 | URL
ㅋㅋ 솔찬히 읽는 것이 좋아졌으면서 아직 읽기보다 더 재미닌 게 많은 공쟝쟝, 어쩌면 그대가 삶을 더 잘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독서괭 2024-08-04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 책 다 읽고 리뷰까지 쓰고 다시 잠자냥님 리뷰를 보니 얼마나 잘 쓰셨는지 다시 한번 느낍니다😍

잠자냥 2024-08-05 07:18   좋아요 1 | URL
잠사모 회장다운 발언🤣🤣🤣
 
풀이 눕는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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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마리화나의 대비가 인상 깊다. 길가의 풀도 풀이지만 마리화나도 풀은 풀이다. 예술과 자본, 사랑과 생활- 예술도 사랑도 돈과 생활에는 질 수밖에 없는 이 세계의 이야기. ˝사랑이 빵에 바르는 버터는 아니잖아요.˝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대사가 절로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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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6-26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은 싫어할 이야기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6-26 13:22   좋아요 1 | URL
김사과라 걍 패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6-26 13:34   좋아요 1 | URL
아 왜 김딸기는 어때?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6-26 13:35   좋아요 1 | URL
김사과가 쓴 돈 안 벌고 예술하는 여자 이야기=다락방이 ㅈㄴ싫어하는 이야기 🤣🤣

다락방 2024-06-26 14:15   좋아요 2 | URL
저는 십년도 더 전에 김사과 <미나> 읽고 김사과는 패쓰합니다 ㅎㅎ

은오 2024-06-27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잠자냥님 빵에 버터와 사랑 둘다 발라드리겠읍니다.

잠자냥 2024-06-27 08:42   좋아요 2 | URL
나 빵 많이 먹는데 곰탱이 돈 많이 벌어야겠네!!

은오 2024-06-28 09:17   좋아요 0 | URL
그대를 위해 이 한몸 바쳐 돈을 벌겠소

잠자냥 2024-06-28 10:2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눔아, 일단 졸업부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4-06-28 17:00   좋아요 0 | URL
졸업하면 결혼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읍니다~!!
 
사랑의 갈증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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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으로 읽었다. 절판되어 안타깝던 책 중 하나인데(구판 아직도 소장 중) 이렇게 복간이 되다니!?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줄 작품. 문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심리, 특히 에쓰코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압권-미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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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5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박이다 진짜. 나 이거 살라고 오늘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잠자냥 님은 벌써 다 읽었다니..

잠자냥 2024-06-25 16: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엥 또 사? 맨날 사? ㅋㅋㅋㅋㅋㅋㅋ 리뷰도 썼어...ㅋㅋㅋㅋ 구판이긴 하지만
아 근데 리뷰는 책 다 읽고 읽어요. 줄거리 있음. 줄거리 알면 재미없어!
https://blog.aladin.co.kr/socker/8246824

은오 2024-06-25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거 아까 보관함에 넣었는데... 머싯어...🥹

잠자냥 2024-06-25 16:58   좋아요 2 | URL
엥? 아까 언제 또 보관함에 넣었대??
지하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은오 2024-06-25 23:31   좋아요 2 | URL
악덕 고용인이 일급(뽀뽀) 안줘서 농땡이좀 피웠읍니다 불만있으세요???😡😡😡

잠자냥 2024-06-26 08:36   좋아요 1 | URL
밀린 임금 다음달에 왕창 지불됩니다~ 좀만 참으십쇼!!

독서괭 2024-06-26 09:45   좋아요 3 | URL
뭐야 뭔데? 다음달에 무슨 일이??

은오 2024-06-26 10:15   좋아요 2 | URL
제가 드디어 잠자냥님이랑 1대1 팬미팅....😳😳😳

독서괭 2024-06-26 10:16   좋아요 2 | URL
엄머 만나서 뽀뽀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거예요?? 어머어머어머머

잠자냥 2024-06-26 10:45   좋아요 1 | URL
아니 고기로 지불할 예정인데.........

독서괭 2024-06-26 11:19   좋아요 1 | URL
고기 먹는데 다락방님 빼놓을 거예요?

잠자냥 2024-06-26 11:26   좋아요 3 | URL
다락방은 따로 보기로 했읍니다~!!
꽁냥꽁냥 보기 싫다고 해서 ㅋㅋㅋㅋ

독서괭 2024-06-26 11:30   좋아요 1 | URL
알라딘 셀럽 잠자냥, 오랜 신비주의 깨고 일대일 팬미팅 파격 행보..

독서괭 2024-06-26 11:31   좋아요 2 | URL
만남 후 잠자일보 기사 게재 기대합죠!!!😎

은오 2024-06-25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을 향한 갈증에 시달리는 저도 읽어보겠읍니다.

잠자냥 2024-06-25 16:59   좋아요 2 | URL
엥? 아까 그렇게 물을 뿌려줬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뿌려줄까? 촥!!!!!!

단발머리 2024-06-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말라요? 물 주까요? 라고 드립치려 했는데… 늦었네요. 철푸덕!

잠자냥 2024-06-26 08:38   좋아요 0 | URL
어제 많이 뿌려줬어요 ㅋㅋㅋㅋㅋ🤣🤣🤣촥촥🔫🔫🔫
 
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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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란 무엇인가? 과연 정상적인 읽기라는 게 존재할까? 난독, 과독, 실독, 환각 등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정상적인 독자와 읽기라는 통념을 뒤흔들어놓는다. 더불어 읽을 수 있음이 엄청난 축복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까지 안겨 준다. 읽을 수 있을 때 읽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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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3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읽을 수 있을 때 읽을게요!!

잠자냥 2024-06-24 09:51   좋아요 1 | URL
오냐- ㅋㅋㅋㅋ

이 책 읽으니까 지금 당장 책을 잘 읽고 문해력 수준이 높은 사람도 어느날 갑자기 책을 못 읽을 수 있고 문해력도 떨어져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치매도 그런 영향을 줄 수 있고, 사고로 뇌에 손상을 입으면....... ㄷㄷ 암튼 읽기가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다는 새삼스렁룬 깨달음. 읽을 수 있을 때 열심히 읽읍시다!!!!!!

독서괭 2024-06-24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머 저도 이 책 있는데 아직 못 읽음요 자냥오별이라니 기대만발!

잠자냥 2024-06-24 11:46   좋아요 1 | URL
재미나서 후딱 읽었어요. 싱기방기한 인간의 뇌 세계-
(이거 읽다가 보면 나보코프 좀 부러워짐 ㅋㅋㅋ 싱기한 인간...)

은오 2024-06-24 17: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을 수 있는 데다 잠자냥님을 만난 난 정말 축복받은 곰탱이구먼

잠자냥 2024-06-24 17:17   좋아요 3 | URL
기승전잠자냥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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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김새나 체형 등 외적인 면이 먼저 떠오른다. 성격이나 취향, 가치관이나 생각 등 그 사람의 내면이 마음에 들거나 자신과 잘 맞아서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능력? 지위? 재산이나 배경 등 그가 가진 것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일도 있을 것이다. <루시 게이하트>의 ‘루시’- 이 소녀, 아니 스물한 살의 이 여자. 그녀가 사랑에 빠져버린 그 대상으로부터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웠을 그런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서배스천으로부터 보았던 그 빛…. 책을 덮고 거리로 나섰는데 볕이 뜨거운 여름이다. 그럼에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루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루시 게이하트>가 이토록 내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무엇일까.

플랫강 유역의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 사는 루시- 춤을 추고 스케이트를 타고 앞만 바라보며 발 빠르게 걸어가는 루시- 집은 부유하지 않지만 총명하고 재능 있는 루시가 이 마을에서만 살아갈 것 같지는 않다. 얼음을 지치는 루시 곁에 해리가 나타났을 때는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생각하듯이 루시와 해리, 이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선남선녀 커플이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해리는 루시를 자기의 여자로 점찍는다. 루시에 비해, 아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많은 해리, 집안의 재력은 물론 젊고 튼튼하고 잘생긴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아 자기가 원하면 루시가 아닌 다른 여자와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걸 잘 아는 이 남자 해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깊은 짜릿함을 선사하는 여자는 항상 보는 루시, 교회 쥐처럼 가난하며 좀처럼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데다가 종종 비웃기까지 하는 루시뿐이다. 그녀와 함께할 때면 삶이 사뭇 달라진다. 해리는 루시를 갖고 싶다.

루시도 물론 해리를 좋아한다. 해리가 가진 싱그러운 매력을 잘 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해리의 고백에 일순간 우쭐하기도 하지만 루시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그의 아내가 되어 그의 여자로 살아갈 생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인생이, 운명이 어떻게 흐르느냐에 따라 그렇게 살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루시는 생의 흐름 자체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아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루시에게 그 무언가는 피아노, 그러니까 음악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러 시카고로 떠나는 루시. 재능은 있으나 무사태평해서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는 소녀, ‘경력’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음악은 자연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평범한 소녀 루시. 그런 그녀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서배스천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배스천의 공연을 본 순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해리와 함께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하던 천진난만한 소녀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목소리에 감응하고 생의 진실을 깨닫는 여자가 된다.

이 표현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루시는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그의 매력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서배스천은 젊고 잘생긴 해리와는 전혀 정반대의 사람이다. 결코 젊지 않은 중년의 남자, 표정도 어둡고 심각하면서 커다란 눈은 지쳐 보이고. 키가 크고 퉁퉁한, 덩치가 아주 큰 사람. 루시는 그를 보자마자 중얼거린다. “그래, 위대한 예술가라면 저런 모습이어야 해.”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그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전에는 결코 겪어본 적 없던 감정 때문이다. 루시는 서배스천이라는 한 존재가 내뿜는 새로운 매력에 빠지면서 그 이상의 것을 그때 깨닫는다.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임을 깨닫는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고 온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다. 이 강렬한 감정을, 해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비교할 수 있다면, 견줄 수 있었다면 루시에게 서배스천을 운명이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래, 처음에는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가 반해버린 성악가- 음악으로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음악으로 이어진 그들. 그러니까 분명 동경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루시의 마음은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 듯하다. 한 사람의 많은 것을 파괴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단지 동경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서배스천은 루시의 많은 것을 파괴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이다. 서배스천이 루시에게 그렇다. 루시는 고민한다. 그 사람이 나의 미숙하고 무지하고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면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의 다정함 역시 꿈은 아닐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안개로 둘러싸인 산속의 외딴 언덕에 단둘이 있는 것만 같다. 그의 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속 깊은 종을 두드리는 듯해서 듣지 못하는 것까지 전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보낸 몇 주가 그전까지 살아온 21년보다 더 풍요롭다고 느낀다.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그 전까지 자기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은 전부 하찮고 허무맹랑하다고 느낀다. 루시는 서배스천에게 장미를 보낼 권리가 있는 미지의 여자를 질투하고 심지어는 서배스천의 집사 주세페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주세페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서배스천 또한 이 작고 어린 루시에게 자신의 마음을 끝끝내 숨기지는 못한다. 루시의 빨간색 깃털이 길 위로 동동 떠내려 오는 모습을 보면 설레고, 그 깃털이 보이지 않으면 낙담하고. 루시가 한 시간만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그토록 울적하지는 않을 텐데, 지루하고 숨 막히던 시카고의 아침이 루시 덕분에 감미롭기만 하다. 루시가 문을 두드리면 꼭 봄이 찾아온 것만 같다. 루시의 마음은 그가 지금껏 마주쳤던 수많은 위장된 감정들과는 사뭇 달라서 그 자체로 완전해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취할 필요가 없는 감정라고 믿는다. 때문에 그가 루시에게 너는 정말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단지 자라나는 과정이며,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또한 나는 젊음의 싱그러움에 빠진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도 그의 마음이 사랑임을 모두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짧은 포옹이 너무나 애틋하고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루시도 서배스천도 이것이 영원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평생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름다운 것은 오래가지 않는 법. 서배스천이 사라진 후 루시의 마음은 얼어버리고, 세상도 부서져 버린다. 기억으로 되살린 예전의 그 세상에서만 숨 쉴 수 있다. 그런 루시에게 생은 짧다고, 살아가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봄에 힘든 일이 있을지언정 낙담하면 안 된다고, 너의 앞에는 긴 여름이 찾아 올 것이므로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잎을 그러모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충고한다 하더라도 그 말들이 그녀의 가슴속에 다가와 박힐 리가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어쩌면 루시에게는 여름이 펼쳐지지 않았어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인생의 장미 꽃잎을 한 번에 다 가졌었기 때문에. 온 마음을 바쳐 가질 수 있었던 그 장미 꽃잎을 다 가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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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1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ㅑ ~ 이미 인생의 장미 꽃잎을 한 번에 다 가졌었다는 표현이 정말 딱입니다.
좋은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4-06-21 16:29   좋아요 1 | URL
다락방은 주말의 장미 꽃잎(=편육/잠봉) 다 가진 자이므로 주말을 아름답게 보내십시오~

자목련 2024-06-21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 👍
저도 이런 리뷰 쓸 수 있었음 좋겠어요~

잠자냥 2024-06-21 17:36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은 왜 100자평만 쓰셨죠… 훌쩍😭

2024-06-21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1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4-06-21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뭐예요? 이 아름다운 리뷰 뭐예요? 다들 극찬하시는 루시 게이하트 뭐예요? 그래서, 잠자냥님은 장미꽃잎을 다 가져보았습니까?(마이크)

건수하 2024-06-21 22:03   좋아요 2 | URL
그래서 그 마음을 아는 것 같습니다 🙂

잠자냥 2024-06-22 10:32   좋아요 1 | URL
루시 이 책 알라딘 소설마니아들의 5별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능…

장미꽃잎? 안 알랴줌!!😛

건수하 2024-06-21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마구 읽고 싶어지는 리뷰를 만났네요. ❤️

잠자냥 2024-06-22 10:32   좋아요 2 | URL
헐 건수하의 하트라니!!❤️

희선 2024-06-22 0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해준 책이네요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그 방송 오늘 재방송 하는군요 스치듯 또 들을 것 같습니다


희선

잠자냥 2024-06-22 10:33   좋아요 1 | URL
오! 라디오 방송에도 나왔군요?! 좋은 작품입니다. 희선 님도 꼭 읽어보세요!

은오 2024-06-24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막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서배스천을 향한 루시의 사랑보다 잠자냥님을 향한 제 사랑이 더더더 큰 거 같읍니다~!!

잠자냥 2024-06-24 17:20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나타나서 여전히 영역표시 곰탱이!
문학에 좀처럼 감응하지 않는 곰탱이도 5별 준 루시 게이하트!! ㅋㅋㅋㅋㅋㅋ

막냉이 오늘도 뽀뽀받을 예정인데….😛

호시우행 2024-06-30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의 독서생활에 유익한 자극을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