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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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버의 편지와 일기가 동시에......... @.@ 울면서 웃는다. 또 사야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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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편지
존 치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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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존 치버의 편지라니.. 반드시 사야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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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빗 열린책들 세계문학 169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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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루이스의 <배빗 : Babbitt>을 읽다 보면 익숙한 도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물이 떠오른다. 1920년대 미국의 중서부, 중년의 부동산 업자 ‘배빗(Babbitt)’이 살고 있는 (가상의 도시) ‘제니스’는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의 ‘위스테리아’와 닮았고 배빗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중산층의 표본이다. 배빗은 중산층으로서의 ‘표준화’된 삶을 가히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소녀와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과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배빗>의 주인공 ‘배빗’은 일반 명사가 되어 영어 사전에 올라 있다고 한다. ‘Babbitt’이란 ‘스스로 중산층인 체하는 저속한 실업가’ 혹은 ‘중산 계급의 교양 없는 속물’이라는 의미이다. 이름만으로 하나의 명사가 되어 사전에 오른 이 남자 ‘배빗’- 배빗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속물적이고 현실적이며, 표준화된 한 남자의 모습에 혐오감과 함께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그러나 이 혐오감과 짜증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로 그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그는 기계 장치들을 칭송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기계 장치는 그가 신봉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새롭고 복잡한 기계들- 금속 절단기, 2중 분사식 카뷰레티, 기관총, 산소 아세틸렌 용접기-을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아주 실용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풍길 수 있는 용어를 배웠고, 그것을 되풀이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기술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사람이라는 기분을 만끽했다. (91쪽)’

 ‘전국 규모의 대형 광고 회사들이 그의 대외적 생활 혹은 그의 개성을 결정했다. 이 표준적인 광고 제품들- 치약, 양말, 타이어, 카메라, 순간 온수기-은 그의 상징이자 그의 탁월함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었다. 처음에 이런 물건들은 그가 느끼는 즐거움과 열정과 지혜를 가리키는 기호였으나, 곧 신분의 대용품이 되었다. (123~124쪽)’


위와 같은 구절을 보면 1920년대 제니스에 사는 중년 남자가 아니라 2016년 이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복잡한 기계들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새롭게 나오는 전자 제품을 계속 업데이트해가며 그런 기계를 소유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스마트해진다고 착각하는 얼리어답터들, 광고에서 제시한 규격화된 삶을 고스란히 살면서 ‘나는 개성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수많은 현대의 속물들…. 어찌나 표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죽어서 가는 천국조차 ‘개별 정원이 딸린 고급 호텔’ 같으리라고(260쪽) 생각하는 빈약한 상상력의 소유자들. ‘배빗’은 거의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돈과 사회적 명예와 성공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표준적인 생각, 표준적인 종교, 표준화된 상품, 사회의 주류라고 여겨지는 생각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물론 때로 이런 삶에 ‘돈을 버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키우고, 이어 그 아이가 또다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엇일까?(341쪽)’ 라며 회의를 느끼고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결국은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두려워, 그 따돌림과 배척이 무서워 끝내는 포기하고 마는 이 남자. 이 남자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 이런 재수 없는 놈이 다 있나!’ 하며 욕을 하다가도 결국 그 욕하는 손가락이 나를, 또는 우리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배빗>은 바로 그런 속물들의 삶이 지나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씁쓸한 웃음은 그 끝이 아프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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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지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1
아베 고보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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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들은 왜 뒤쫓을 권리가 있다고 믿어버릴까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기 의지로 도망친 인간을 당연히 붙잡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 - 아베 고보, <불타버린 지도>, 173쪽


이따금 사회.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적을 두지 않을 때가 있다. 견디다 못해 튕겨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사회에 그다지 맞지 않은 사람인데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최면을 걸면서 그 속에서 머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회의감도 들고 염증도 커져간다. 그러다 보면 그냥 그 안에서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 사회 속에서 머물러야만 제대로 인간답게 잘,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다. 가끔 그들은 내 걱정을 하는 거라면서 자신들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쉬고만 있을 거니, 어떻게 벌어서 먹고 살 거니, 나이 들어 돈도 없고 병까지들면 어떡하려고 하니 등등.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는 거라고 하면서 내가 다시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내가 다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또한 행복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 세상에는 마땅히 인간이 누려야 할 자리가 있다고. 가정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인간은 머물 자리, 마땅한 자기 자리가 있다고.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머물렀을 때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낙오자. 패배자. 쓰레기. 잉여라고 한다. 지도 안에서 자기 자리를 굳세게 지키라고 한다.

하지만. ‘불타버린 지도’- 이 사회에서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다시 그 지도 안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보통은 다들 강제로 그 지도 안으로 끌어들여 놓으려고 하겠지?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지도 안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테니까.

그런데 왜, 스스로 지도 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지도 밖으로 탈출한 사람을 강제로라도 찾아서 그 안으로 끌어들여다 놔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지도 밖에서도 얼마든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왜 구태여 지도 안에서만 머물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모두가 다 그렇게 사니까, 너 혼자 괜히 튀지 말라고? 혹시라도 내가 그 지도 안에 없기 때문에 언젠가 당신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서는 아닌가?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는 스스로 지도 안에서 사라져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평범한 회사에서 과장 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다. 그리고 남자의 부인은 6개월 동안 그를 찾다 못해 흥신소에 의뢰를 한다. 흥신소 직원 ‘나’는 이 남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사실 이 탐정(?) ‘나’도 사회에서 일탈한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그 또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아내와도 이혼하고 구린 일을 한다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흥신소에서 남의 뒷조사나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 ‘남자’를 찾으면서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실종된 남자와 얽힌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 남자는 대체 왜 사라진 것일까?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이 탐정 ‘나’에게서 종종 실종된 남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는 추적을 할수록 이 실종된 남자를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모래의 여자>나 <상자인간>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아베 고보는 <불타버린 지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지도 안에서 사라져버린 사람. 스스로 지도를 불태우고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과연 이곳이 당신이 원래 있던 자리니까, 돌아오라고! 라면서 강제로 끌어다 놔야할 권리가 다른 인간(들)에게 있을까? 그것이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처럼 실종은 아니지만 나 또한 때때로 사회적 지도 안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도 안으로 이제 다시 들어가라고, 누군가는 걱정해준답시고 내 삶의 방식에 간섭을 한다. 하지만, 그래서 만약 내가, 지도 안에서 미쳐버리면 그때는 어떤 책임을 져 줄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왜 뒤쫓을 권리가 있다고 믿어버릴까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기 의지로 도망친 인간을 당연히 붙잡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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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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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스릴러'라는 대중적인 장르를 썼음에도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인정을 받는 존 르카레. 이 작품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1963년작)>와 함께 그의 양대 걸작으로 꼽힌다. 나는 존 르카레 작품 중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만을 읽었는데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었을 때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읽었을 때 더 감탄이 나왔다. ‘아, 정말 잘 쓰는구나! 대단하다!’ 이런 생각... 이 작품이 <추운 나라>보다 한 10년 뒤에 쓰인 작품인데 그래서 그런 걸까?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예리해졌고, 이야기의 구조도 보다 원숙해진 느낌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두더지’ 즉 이중간첩을 찾아내는 게 주된 내용이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 냉전 상황에 각국의 스파이전은 심화되었고 영국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실제로 냉전시대에 영국 최고 엘리트들 중에는 소련의 첩자 역할을 한 이들이 많았고 이런 이들의 정체가 발각되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단다). 영국 정보부 최고위직에 소련에서 심어놓은 이중간첩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은퇴한 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는 스파이 혐의자들을 대상으로 누가 진짜 ‘두더지’인지 밝혀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조지 스마일리의 외로운 싸움은 시작된다.

그저 단순히 두뇌게임을 하듯 그래서 누가 두더지인가를 밝혀내는 일에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이 작품은 그저 ‘스파이 스릴러’로 끝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덕은 단순히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기 위한 ‘스파이 찾기 게임’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이 어쩌다 스파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하여 스파이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등을 보여줌으로써 ‘이데올로기’ 앞에 선 인간 삶의 고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은퇴한 정보부 요원인 조지 스마일리의 삶도 그렇고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주로 정보부와 관계있는)은 기이하게도 뒤틀려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만 판단하자면 남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가진 이도 있고, 엘리트코스를 밟고 창창한 미래가 빛나던 이들도 많다. 그런데 그들의 현재 삶은 어떤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소련, 빛나던 대영제국, 동서갈등 등등 숱한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던 시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것이 옳은 길이다’라고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가지만 남은 건 ‘허상’뿐이다. 스파이로 살기 위해 가진 수많은 이름, 가짜 여권,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가짜 혹은 진짜일수도 있는) 가족, 연인…. 어느 것이 진짜 삶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그저 세상을 부유할 뿐이다.

조지 스마일리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전도유망하던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국가’라는 혹은 ‘체제’라는 허상을 위해 개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쓸쓸한 한 단면을 보는 듯해 어쩐지 마음이 싸해진다. 서글프기도 하고 씁쓸하다. 결국 ‘두더지’로 밝혀지는 그 사람조차도 개인의 영광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이념’의 희생자, 자신이 믿었던 세계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가련하고 불쌍하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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