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M.T.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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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읽기엔 어쩌면 너무 뻔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아름답다. 정치가이자 웅변가로 더 유명한 키케로. 이 책에서는 아름다운 문장을 쓴 문학가이자 철학가로서의 키케로를 만날 수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어쩌면 현대인보다 아름다웠던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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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남혜현 옮김 / 작가정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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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 직장에서 만나 이제는 친구가 된 이가 있다. 나이가 동갑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된 그 친구와 나는 비록 부서가 달랐지만 ‘입사동기’랄까 이런 공통사항 때문에 어느덧 점심시간에 같이 산책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햇살 좋은 봄날 산책을 하며 벤치에 앉아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대부분 ‘대학 때가 좋았죠.’ 이런 종류였다. 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회사의 갑갑함에 몸이 아플 것 같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첫 월급 액수에 놀라던 그때의 나와 그 친구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를 했으니 고작 스물셋 혹은 스물넷이었던 우리에게 나이 서른을 넘은 대리, 과장, 차장급 사람들의 삶은 무료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저 나이가 되어도 이런 답답하고, 비전도 없어 보이고, 어쩐지 고인 물 같은 느낌이 드는 이런 회사에서 멍청하게 하루하루를 죽여가면서 세월을 보내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 회사를 퇴사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이런 갑갑한 회사에 다시 올까요?’ 그런 이야기들-

한자리에 자리를 잡으면 듬직하게 오래 앉아있는 성미의 그 친구와 나는 어쨌든 그 회사에서 3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침에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일념에 새벽같이 만나 학원을 같이 다니고, 건강도 챙겨야겠다며 새벽에 스쿼시를 함께 배우러 다녔다. 그때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보통 새벽 6시 혹은 5시이랬다. 종로 근처 외국어 학원에서 함께 강의를 듣고 그리 멀지 않은 회사까지 함께 걸어오는 이른 아침 출근길은 어쩐지 무척 뿌듯했다. ‘아,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이런 기분들.

3년이 넘어 더는 그 회사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우리는 또 비슷한 시기에 그곳을 떠났다. 같은 회사에 있었지만, 서로 할 줄 아는 부분은 달랐던 그 친구와 나는 각각의 ‘밥 벌어먹는 재주’를 살려 서로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인연의 끊은 계속 이어져 이제는 ‘회사동료’였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편안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외국어 관련 출판사에서 일하던 그 친구는 필요성을 느껴 어느날 훌쩍 어학연수를 떠났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홀로, 불현듯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10개월 가까이 지나서 그 친구가 돌아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백수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 친구와 나는 자주 만났다. 한가한 평일 오후 홍대나 광화문 근처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수다를 떨었다.


대화 내용은 보통 이렇다. ‘그때 우리는 무엇 때문에,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몰라’ 이런 이야기들. 새벽같이 만나서 학원을 다니고, 건강을 챙긴다며 스쿼시를 배우러 다니고 이런 시간의 의미 없음을 이야기 한다. 우리도 나름 순진하게 ‘사회의 제도권’ 안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계발’이라는 것을 하면서 부단히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혀를 찬다.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던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 사실은 ‘무얼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고 ‘사회가 원하는 규격화 된 사람’이 되기 위한 부끄러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와 나는 그때의 우리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민망해했다.

덧붙이자면, ‘회사’라는 공간이 사람의 자율성을,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얼마나 좀 먹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돈을 주기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시켜도, 회사 규칙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에도 다 따라야 한다는 그런 폭압적인 광경에 아연실색한다. 그렇게 돌아보면 그 친구와 내가 만난 그 첫 직장이 ‘고인 물 같이’ 조용하고 갑갑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 강압적인 상사도, 야근문화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야근이라고 해봐야, 8시만 되면 불을 끄려고 당직 직원이 돌아다닌 곳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그곳을 나가 다른 직장을 전전하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조금 덜 받아도 좋으니 인간의 자율성을 덜 침해하고, 야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는 없는 걸까 우리의 결론은 늘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런 지옥 같은 생활’로 돌아가기 싫어서 할 수 있는 한 백수 생활을 지속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갑부 집 자식들도 아니고, 가족일지라도 타인에게 손 벌리고 사는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성미라 어쨌든 다시 그 ‘지옥과 같은 전쟁터’로 나아가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곤 했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재주가 특출 나지도, 용기가 남보다 많은 이들도 아니라 백수로 자유롭게 지내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갈 것을 그 친구도 나도 늘 인지했다. 다만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래도 우리가 좀 더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안톤 체호프의 중편 <산다는 것은 : ‘원제 : 나의 인생’>을 읽으며 그 친구와 내가 나눈 어느 오후의 대화들이 떠올랐다. 체호프가 담담히 조용하게 써 내려간 <산다는 것은>에서 주인공 미하일은 행복해지기 위해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육체노동’을 하는 ‘도장공’이 된다. 지식노동을 하는 귀족들의 위선과 허울에 환멸을 느끼고 육체노동자들의 단순하고 건강한 삶에 매료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농부’가 되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하층민의 무례함, 무식함, 그들 사이의 위선, 난폭함 등에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들이 사는 곳이고,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계급이나 위선과 난폭함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미하일은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일을 선택하고, 그렇게 조용히 늙어간다. 처음에는 귀족이었던 이가 육체노동을 한다며 손가락질 하고 비웃던 이들 모두가 마침내 그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미하일의 선택이었고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미하일처럼 수많은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하고 그 안에서 좌절도 겪어야 하고, 시행착오도 겪어야 하는가 보다. 그런 순간을 지나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 잘하는 일, 행복해 지는 일을 발견하게 되는가 보다. ‘나는 어떤 것도 그저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아주 작은 걸음조차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는 미하일의 말처럼 친구와 나의 그 모든 시간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가 있으리라. 이십대 시절의 그 시행착오들도 그렇고. 적어도 그 시절을 통해 우리가 ‘사회가 바라는 규격화 된 인간형’에는 아무리 끼워 맞추려 해도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깨달음은 얻지 않았는가. 살아가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친구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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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고,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잠자냥이 부럽습니다. 두 분 모두 행복해지는 날이 찾아올 겁니다.

서재의 달인으로 선정돼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잠자냥 2016-12-28 11:07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
올해 처음 서재 활동하면서 서재의 달인도 되니 기분이 꽤 좋더군요. 그런데 cyrus 님은 그 서재의 달인을 무려 몇 년이나 계속 하신 겁니까?! 대단하십니다. ㅎㅎ cyrus 님도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6-12-28 18:53   좋아요 0 | URL
그냥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다보니 좋은 결실을 얻었습니다. 잠자냥님처럼 꾸준히 기록을 남기는 분들의 서재를 구경하면 늘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많은 걸 배우게 됩니다. ^^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간 책 중에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 괜히 생각이 나는 작품이 있다. 읽을 때도 좋았지만 좀 지나고서도 여전히 좋은 책, 읽을 때는 크게 좋은 줄 몰랐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난 후 더 좋아지는 책. 그런 책 위주로 몇 권 소개해 본다.



조르주 페렉,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


이 기묘하고도 긴 제목의 작품은 읽을 땐 뭐야? 싶었는데 두고두고 곱씹게 된다. 제목도 그렇지만 형식은 더 특이하다. 이 작품은 100페이지를 조금 넘는 분량인데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데 직접 펼쳐보면 알리라. 조르주 페렉은 실험적인 글쓰기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실험’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한 문장으로 이뤄진 만큼 줄거리는 단순하다. 쥐꼬리만 한 봉급을 받는 대기업 말단 사원이 임금 인상을 요청하고자 과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과장을 찾아가 약속을 잡고 임금을 올려달라고 말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장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고 과장이 건강 혹은 집안 문제로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다. 이런 때에 임금 인상을 요청했다가 괜히 불벼락만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 이 말단 사원은 그래서 과연 임금 인상을 요청할 수 있을까? 그의 이 지지부진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종종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에는 씁쓸함과 자괴감, 슬픔 등의 감정이 솟구친다. 고작 임금 인상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이토록 수많은 난관을 만나야 하는 말단 사원의 모습을 통해 ‘회사’라는 공간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말단 사원의 우스꽝스러운 임금 인상 요청기를 읽다 보면 불합리한 직장 생활, 조직 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좀 서글퍼진다.




미하일 조센코, <감상소설>


미하일 조센코의 작품은 처음 접했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약장수 말투라고 해야 하나. 조센코는 딱딱한 문어보다는 ‘구어’ 위주로 글을 썼으며 작품 내내 ‘작가는~’ ‘독자는~’ 이런 식으로 마치 약장사나 변사가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읊어주듯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금은 수다스럽고 장황하기도 하고 ‘작가’와 ‘독자’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작품에 대한 완벽한 몰입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상소설>은 어느 순간 읽다 보면 이 소박하고도 꾸밈없는 작가의 말투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조센코가 서문에서 밝혔듯 <감상소설>은 ‘별로 잘나지 못한 작은 사람에 대한, 서민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품에는 영웅이 등장하지도 않고 딱히 큰 사건이 펼쳐지지도 않는다. 또한 조센코의 말처럼 ‘사라져가는 가련한 삶에 대한 것’이다. 그런 이들의 삶을 유머러스하면서도 풍자적으로 묘사한 <감상소설>은 192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현재의 우리 삶을 묘사한 듯 느껴진다. 단편 속 대부분 등장인물의 꿈은 현실의 우리 삶이 그러하듯 그 어느 것도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그녀의 작품은 ‘아프다’. 읽고 있으면 아프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슴을 후벼 판다고 해야 할까. 이 투박한 언어로 쓰인 거칠고 짧은 소설은 그 어떤 미문의 긴 장편보다 여운이 길다. 왜일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그랬고 <어제>는 더 그렇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을 읽노라면 결국 소설이란 어쩌면 ‘언어의 놀음’ 혹은 ‘말장난’ 보다는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문학에서 ‘어떻게’가 더 중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을’이 더 중요하달까. 이 삭막하고 메마른 이야기, 어떻게 보면 초등학생이 쓴 듯한 투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고국을 떠나 망명자이자 노동자로 살아온 작가의 절절한 삶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노라면 눈물이 뚝 떨어진다.





크리스토프 바타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가 ‘무엇을’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어떻게’에 더 중점을 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 단순하고 건조한 문장의, 어떻게 보면 뻔하다 싶은 이야기(오리엔탈리즘도 느껴지고 종교적인 신앙의 냄새도 물씬 묻어나오는)를 ‘흠.. 글쎄...’하는 시선으로 삐딱하게 읽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읽고 나니 여운이 정말 길다. 한 번, 아니 두 세 번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그 여백의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베트남에 선교를 간 성직자들의 이야기다. 작품 속에는 처음엔 베트남도 있고 성직자도 있고 왕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읽다 보면 이 모든 게 사라진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텅 빈 고요함’만이 남는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으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빈 공간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유진 오닐, <지평선 너머>


유진 오닐의 희곡이 보통 그렇듯 <지평선 너머>에도 한 가족이 나온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 곁의 다정하지만 유약한 어머니, 그리고 두 아들. 두 아들은 기질상 서로 굉장히 다르다. 큰 아들은 큰 농장을 경영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일꾼’ 스타일로 건강하고 굳세고, 단순하며 현실적이다. 반면 둘째 아들은 현실적인 삶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몽상가로 책 속의 삶, ‘지평선 너머’의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이 두 아들 사이에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여자로 인해 형제의 삶, 더 나아가 가족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지평선 너머>는 유진 오닐의 다른 희곡들처럼 역시 쓸쓸하고 허망하다.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우리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생이란 ‘지평선 너머’ 무언가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삶이지만, 사실 지평선 너머에도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차라리 그 지평선 너머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 순간이 차라리 더 행복한 삶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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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지혜 - 그림과 함께 보는 서양철학사
B.러셀 지음, 이명숙 외 옮김 / 서광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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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철학/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러셀의 관점으로 돌아본다. 서양철학 전반을 훑어볼 수 있지만 결코 쉽지는 않다. 철학사를 이미 조금은 아는 사람이 읽기에 적당하달까. 그럼에도 러셀의 명료한 문체와 온갖 그림이 곁들여 있어 다른 철학서보다는 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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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여 안녕 창비세계문학 46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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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처럼 담담하게 1930년대 베를린의 인간 군상을 그린다. 그 시선은 따스하고 연민이 서려있다. ‘나‘에겐 자유로운 공간이었을 베를린을 결국 떠날 때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든다. 어딘가에서 또 이방인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모두 퀴어죠. 정말 너무나 퀴어죠‘ 구절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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