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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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본 고전문학인 <겐지 이야기>를 읽었다.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문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달까. 일본 고대소설로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를 현대 일본어로 옮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여성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가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이다.
 
한길사에서 나온 <겐지 이야기>는 ‘세토우치 자쿠초’가 현대어로 옮긴 것을 김난주가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일본어라고 해도 고어를 헌대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분명 세세한 차이가 있으리라. 특히 한 사람은 여성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남성이니 조금 더 그 차이가 있지 않을까. 내가 읽은 버전은 ‘세토우치 자쿠초’가 옮긴 것을 번역한 본이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겐지 이야기>는 또 어떤 다른 맛과 멋을 보여줄지 좀 궁금하기는 하다.
 
내가 <겐지 이야기>를 언급하는 까닭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고 보니 분명 <겐지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 뒤에 수록된 저자 연보를 읽어보니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 뒤에 <세설>을 썼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으리라. 단순히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학을 비롯해서 일본문학의 여러 부분들-특히 연애관이랄까, 에로티시즘-이 <겐지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겐지 이야기>는 시대의 미남자 ‘겐지’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록 그 이야기가 보여주는 남녀관계라든가, 연애관 등에 모두 동의할 수 없고 때로는 불쾌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로 찬사를 보낼만한 점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자연물’에 기쁨, 슬픔, 사랑, 고통, 노여움 등 인간의 성정을 빗대어 표현하는 부분들이다. 그런 장면들은 정말로 아름다워서 아, 하는 찬탄을 하게 된다.


북쪽 나라로 돌아가는 기러기가 울어대듯
어젯밤에는 울면서
그곳에서 돌아왔구나
어차피 잠깐 살다 가는 세상
어디에나 영원히 살 곳은 없으니.

          -<겐지 이야기>, 7권,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세토우치 자쿠초 현대일본어로 옮김, 김난주 옮김, 한길사


<세설>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곧잘 등장한다. 내가 <세설>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올 뻔한 장면이 두 군데 있었다. 반딧불을 잡는 장면과 사치코가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이 두 장면은 자연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 자연물과 빗대어 그 순간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읽는 순간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닌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으리라는 말이 왜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1917년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 생각을 하면 사치코는 자신이 올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나이가 되었고 큰집의 쓰루코는 벌써 그 때의 어머니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는 지금 쓰루코나 사치코보다 훨씬 아름답고 청아한 분이었다. 하긴 돌아가셨을 때의 주변 상황이나 병 등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열다섯 소녀였던 사치코의 눈에 어머니의 모습은 실제 이상으로 단아하게 비쳤을 것이다. 폐병 환자라도 병세가 심해지면 추하게 마르고 안색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어머니는 폐병이었으면서도 임종 때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안색도 하얗고 투명해졌을 뿐 검은빛을 띠지 않았고 몸도 가냘프게 마르기는 했지만 손끝과 발끝까지 윤기가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병이 든 것은 다에코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하마데라, 그다음에는 스마에서 요양했다. 마지막에는 바닷가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해서 미노에 있는 조그만 집을 빌려 그곳으로 옮겨 갔다. 어머니의 말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만나러 갈 수 없었는데, 그것도 되도록 짧은 시간만 머무르다 돌아와야 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와서도 해변의 쓸쓸한 파도소리나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언제까지고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어머니라는 존재를 이상화해서 생각했고 그 영상이 사모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미노로 옮기고 나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으므로 이전보다 자주 문병하러 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임종하던 날은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 와 사치코 등이 달려갔고 얼마 안 있어 곧 숨을 거두었다. 며칠 전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가을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병실 툇마루 유리창에 뿌옇게 빗물을 뿌리던 날이었다. 장지문 밖에는 아담한 뜰이 있었고 거기에서 빗물이 완만하게 골짜기로 흘러내렸는데, 뜰에서 벼랑에 걸쳐 피어 있는 싸리꽃은 이미 떨어진 채 세차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골짜기에 물이 불어 산사태라도 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던 아침의 일이었다. 빗소리보다 섬뜩한 계곡물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고 계곡 바닥의 돌들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쾅쾅 울리는 소리가 집을 흔들었기 때문에 사치코 등은 물이 차오르면 어떻게 하지, 하며 겁을 먹은 채 어머니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하얀 이슬이 사라지듯 죽어 가는 어머니, 너무나도 고요하고 잡념이 없는 그 얼굴을 보자 무서운 것도 다 잊고 한순간에 정화되는 감정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분명히 슬픔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 안타까움, 이를테면 개인적 관계를 떠나 음악적인 쾌감을 동반한 슬픔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세설>, 열린책들, 송태욱 옮김, 508~510쪽

 


반딧불이 잡는 장면은 위 구절처럼 따로 떼어와 읽어보면 그 맛이 살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 장면만 소개한다. 반딧불이 잡는 장면과 어머니의 임종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아름답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런 장면을 보면 문학이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문학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이렇게 ‘자연의 변화’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그리는 것은 <겐지이야기>에서 곧잘 보였다. 참 아름답구나, 느낀 부분이기도 하고. 


<세설>은 별다른 ‘큰’ 이야기가 없다. 오사카 몰락한 명문가 집안 네 자매 –쓰루코,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의 일상생활이 세세하게 그려질 뿐이다. 특히 셋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유키코의 혼담은 이뤄질 듯하다가도 파혼으로 끝나기가 일쑤다. 과연 유키코가 결혼을 하게 될지 궁금한 가운데 나머지 세 자매의 소소한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시절 일본 문화라든지 생활상이 놀랄 만큼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죽 읽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쩌면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이 삶도 솜씨 좋은 문학가의 손끝에서는 ‘아름다운 한편의 문학’으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삶은 결국, 누군가의 삶이든 ‘문학적’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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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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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꽤 통속적인 내용으로 무척 흥미진진하다. 캐서린이라 불리는 여주인공이 있다. 그녀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뉴욕 상류층과 어울리며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다가온다. 파티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캐서린에게 엄청난 호감을 표현하더니 급기야 그녀에게 반했다며 열렬히 구애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 남자, 모리스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 하지만 캐서린은 돈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딱히 볼품없는 여자다.  

독자는 궁금하다. 모리스는 정말 캐서린을 사랑하는 것일까? 정말 그의 말대로 그녀의 평범한 매력 속에 숨어있는 진가를 발견했고, 반한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저, 돈이 필요해서, 그녀의 유산이 탐나서 접근하는 거겠지 등등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 초반에는 모리스가 정말 돈 때문에 캐서린에게 접근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캐서린은 좀 독특한 여주인공이다. 보통 소설 속 여주인공은 이른바 ‘여주인공적인 특질’-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든가, 외모가 좀 떨어진다면 그를 보충할만한 영민함 혹은 재치나 재능을 겸비하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 스퀘어>의 캐서린은! 정말 그 무엇도 아니다.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건장한 체격! 그때문에 건강하다는 것! 정도? 이런 여주인공 같지 않은 여주인공이라는 설정이 이 작품을 독특하게 만든다.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캐서린의 ‘평범함’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소설의 여주인공에 대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좀 거북하지만, 식탐이 약간 있었다고 덧붙여야 하겠다. 내가 알기로 찬장에서 건포도를 훔쳐 먹은 적은 없었지만, 용돈을 크림 케이크 사먹는 데 탕진하곤 했다.’(16쪽) 이런 부분에서는 푸핫! 웃게 된다.

캐서린과 모리스 외에 한 사람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캐서린의 아버지, 의사인 슬로퍼 씨다. 그는 인성과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의사로 뉴욕 상류층에서도 칭송받는 사람이다. 아내 또한 그에 걸맞게 재능과 미를 겸비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아름다운 아내는 캐서린을 낳은 지 1주일이 지나자 죽고 말았다. 외동딸인 캐서린이 예쁘고 똑똑한 아내의 재능을 좀 물려받았으면 좋았으련만 그 어느 것 하나 엄마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늘 딸을 낮게 평가하던 슬로퍼 씨는 모리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캐서린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는다. 아니 그 마음이 절대 순수하지 않으리라 믿고 둘의 교제를 반대하기 시작한다.

<워싱턴 스퀘어>는 캐서린과 모리스, 캐서린의 아버지, 그리고 또 한 사람, 로맨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캐서린의 고모 이 네 명의 등장인물이 이끌어간다. 캐서린을 묘사하는 문장에서 살펴볼 수 있듯 이 작품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데, 헨리 제임스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충분히 잘 활용한다. 적절한 개입이라고 해야 할까? 완급조절이 뛰어나다. 평소 나는 소설에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은 어쩐지 작품 수준을 떨어뜨리고, 자칫 유치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그런 편견을 완벽하게 깬다. 전지적 작가 시점도 잘만 활용하면 퍽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모리스에게 빠져들고 급기야 결혼을 감행하려는 캐서린, 그들에게 반대하는 아버지- 허락 없이 결혼할 경우 유산은 한 푼도 물려줄 수 없다는 아버지- 옆에서 로맨스를 구경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제대로 오지랖질 하는 고모- 캐서린과 모리스는 어떻게 될까?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결국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모리스도, 아버지 슬로퍼 씨도 자신들의 시선으로만 캐서린을 판단했을 뿐이지, 진짜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잘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던 캐서린-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그런 캐서린을 잘 대변한 듯한데….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자신의 여동생 앨리스 제임스 대해서는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잘난 아버지, 잘난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그녀, 앨리스 제임스가 캐서린의 모습에 살짝 오버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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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 -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 유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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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 어허, 이건 사실 어쩌면 내가 잘하는 일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자신의 방에서 칩거하는 것을 ‘여행하는 법’이라 이름 붙인 것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18세기 사람인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히키코모리의 원조(元祖)가 아닐까? 그런데 사실 그의 은둔은 처음에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금지된 결투를 벌인 죄로 42일 동안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집안에 갇히게 되니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방 안’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방을 그래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느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방에서 이제까지는 그냥 지나쳤던, 그의 세계를 둘러싼 물건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읽었던 책이나, 들었던 음악, 벽에 걸린 온갖 회화들도 이제 그의 눈에는 새롭다. 그에 얽힌 지나간 추억을 불러와 곱씹으며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침대도 새롭고 의자도 새롭다. 그 안에서 철학을 하며 하인 조아네티나 애견 로진에 대한 전에 없던 사랑 혹은 잊고 지냈던 고마움을 다시 발견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이 ‘내 방’ 여행에는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위험 또한 도사린다. 꽈당!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이토록 위험천만하다니! 그는 이렇게 온갖 발견과 추억과 위험(?)을 맞닥뜨리면서 이제껏 가지 못했던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다. 아무리 즐거운, 돌아오고 싶지 않은 여행이라도 돌아와야 한다. 그렇기에 ‘여행’이리라. 만일 돌아올 곳이, 돌아와야 할 이유 없이 계속 떠돈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되리라.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도 드디어 여행을 마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그의 여행은 가택연금이 풀려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됨을 뜻한다. 그리고 그때가 오자 그는 오히려 구속을 느낀다.

상상력이 넘치는 매혹의 세계여, 그대는 자애로우신 그분께서 현실의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 준 존재였다. 이제 그대를 떠날 시간이 된 것 같다.

오늘은 내 운명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내게 나의 자유를 돌려주는 날이다. 그들이 정말 내게서 그것을 빼앗기나 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자유를 박탈하고 내 앞에 항상 드넓게 펼쳐진 이 넓은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 것을 두고 순간이나마 좋아했다면 말이다. 그들은 내게 어떤 곳도 가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그들은 내게 이 우주 전체를 남겨 놓았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이 내 뜻에 좌우되었다.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변덕스런 여신이 있어 내가 경험한 이 두 세계를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 주고, 다시는 이 위험한 연금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내 여행을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나를 방에 가두는 게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간직한 이 멋진 공간에서 말이지? (183~184)

그가 가택연금이 풀려나 사회로, 일상으로 돌아감은 곧 상상의 세계가 끝남을 뜻한다. 발견의 세계 또한 끝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두 발로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그저 ‘기계적인 돌아다님’에 그치리라. 씻지도 않고 잠옷 바람으로 널브러져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격식을 차리고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와 똑같지 않은가!

42일 동안의 가택연금 속에서 이뤄진 ‘내 방 여행’은 이렇게 우리에게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여행은 그저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제아무리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어떤 새로운 발견이나 상상을 할 수 없다면 그 여행은 떠나지 않은 일상의 연장과 마찬가지이다. 반면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등등 수고를 들여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그 어느 곳에서라도 새로운 발견과 상상을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행’이 된다. 때문에 ‘내 방’ ‘내 집’ ‘내가 사는 동네 골목길’ ‘이 도시’ 등등도 얼마든지 여행 장소가 될 수 있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상상이며 발견’인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고 그저 떠났다가 되돌아옴을 반복하면서,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증거 또는 흔적(사진 찍기, 여행 가방에 나라별 입국 스티커 붙이기, 여권에 온갖 나라 도장 찍기 등등)을 남기기에 급급해하면서 ‘여행’을 다녀왔다는 공허한 만족감만을 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자, 이제 당신도 새로운 의미의 진정한 여행을 떠나보지 않겠는가? 오늘 지금 바로, '내 방'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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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 -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 유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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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행은 어쩌면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가능한 것인지도. 42일 동안 이어진 가택연금, 그 안에서 저자는 참된 자유를 만끽한다. 감금이 풀려 사회로 나갈 때 오히려 속박을 느끼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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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론리하트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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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소개된 너새네이얼 웨스트 소설 전집은 단 3권으로 끝난다. <미스 론리하트>, <거금 100만 달러>, <메뚜기의 하루>가 전부이다. <거금 100만 달러>안에는 그의 첫 작품인 ‘발소 스넬의 몽상’이라는 짧은 단편이 하나 더 들어있다. 그가 살아 남긴 소설은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다.

그가 작품을 쓴 기간은 고작 몇 년 되지 않기 때문이다. 1903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931년에 첫 작품을 쓰고 그 이듬해 <미스 론리하트>를 출간했는데 출판사의 도산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거금 100만 달러>, <메뚜기의 하루>를 차례로 발표했지만 거의 무명이었던 그는 결국 서른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부인과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던 그는 죽은 뒤에 프랑스에서 작품이 번역되면서 성공을 거두고 1957년, 미국에서 전집이 출간되면서 비로소 영미문학사에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와 더불어 20세기 미국 문학의 3대 봉우리로 평가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20세기 미국 산문 문학에서 그와 비견될 작가는 포크너 단 한 사람뿐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의 전집 중 <미스 론리하트 Miss Lonelyhearts>를 첫 번째로 읽었는데 그냥 무명으로 파묻혔으면 왠지 억울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짧다. 그런데 술술 쉽게 읽기는 힘들다. 상징이나 숨어있는 의미 등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여러 번 더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니 골치 아픈 책은 아닐까, 편견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흥미진진하다.

'미스 론리하트'는 독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신문 칼럼을 쓰는 사람이다. 미스 론리하트 앞으로 일주일에 30통이 넘는 편지가 배달된다. 고민상담녀, 절망녀, 절름발이 등등 갖가지 익명으로 날아오는 편지에는 그들 나름의 고통스러운 사연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미스 론리하트에게 묻는다. ‘저는 어떡하면 좋죠?’- 미스 론리하트는 나름대로 칼럼을 통해 그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미스 론리하트’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에 칼럼 쓰는 사람이 여자이려니 하겠지만 그는 남자다! 그의 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정신과 상담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 <In Treatment>에서 남들의 상담을 들어주는 의사도 결국 다른 곳에서 상담을 받는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미스 론리하트 역시 아프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나오지 않지만 독자는 그에게도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마음의 병이 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왜 그렇지 않겠나. 고통으로 범벅 된, 사람들의 온갖 쓰레기 같은 사연을 매일 같이 접하다 보면 제정신으로 온전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기는 쉽지 않으리라. 미스 론리하트는 점점 자신의 일에 환멸을 느끼고 다른 직업을 찾아볼까 생각해보지만 그 조차도 쉽지 않다. 그는 병든 마음을 위악적인 방식으로 해소한다. 점점 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고 술에 취하고, 자신의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간통을 일삼는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다. <미스 론리하트>를 보면 이 세상에는 구원도 존재하지 않고 희망이란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피츠제럴드 작품과 비교해보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 인물들은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꿈이 부서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묘하게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작품에는 그런 낭만이 낄 틈이 없다. 잔혹하리만큼 삶은 고통스럽다고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1930년대 황폐한 미국 사회의 피폐한 인간상을 다루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현재 우리의 삶과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신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자, 처음부터 다시 한번 짚어보자구. 어떤 남자가 어떤 신문의 독자들에게 상담과 조언을 해주는 일을 맡게 되었어. 그 일은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한 판촉 행사의 하나였지만 신문사의 모든 직원들은 그 일을 그저 하나의 농담으로 취급했어.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환영했어. 그걸 맡다 보면 가십 칼럼으로 옮겨갈 수도 있고, 아무튼 그는 외판원 일이 지겨웠던 차야. 그도 처음에는 그 일을 농담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그 일을 몇 달 하다 보니 농담이라는 생각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어. 그는 인생 상담 편지들 대부분이 도덕적, 정신적 조언을 구하는 애절한 호소이면서, 정말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진실한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는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를 반성해보게 되었지. 그 결과 그는 자신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농담의 희생자임을 알게 되었어.” (79쪽)

‘인생이란. 불평 불만을 받아주지 않는 클럽 같은 곳입니다. 카드 패는 딱 한 번만 돌아가고 당신은 싫든 좋든 그 게임에 참가해야 합니다. 그 카드 패가 별 볼일 없고 운명의 손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신사처럼 씩씩하게 카드 게임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 마음껏 취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마음껏 드시고 이층에 있는 여자애들과 즐겁게 사귀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최고의 패를 잡은 바로 그 순간에 게임을 끝내는 검은 휘장이 내려온다 해도, 절대 불평 불만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84쪽)

인간은 늘 꿈을 가지고 자신의 비참함과 싸워왔다. 과거에 꿈은 아주 막강한 것이었지만 그 꿈은 이제 영화, 라디오, 신문 때문에 유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꿈을 배신한 사례가 무수하게 많았지만 최근의 이런 매체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95쪽)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빌어먹을 다리를 이끌고 지저분한 거리와 냄새 나는 지하실을 들락거려봐야 결국은 그게 뭐냐는 겁니다. 힘든 다리를 끌고 억지로 다니다 보면 다리가 너무 아파 퇴근 무렵에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그런데도 집에 가면 듣는 얘기라고는 그저 돈, 돈, 돈 얘기뿐입니다. 그런 집은 나 같은 사람에게 집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말입니다. 이를 악물고 이런 다리를 끌면서 세 구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빨이 너무 아파오는데, 과연 이런 아픔과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나보고 앞으로 6개월 정도는 쉬어야 한대요. 하지만 내가 놀고 있으면 누가 돈을 줍니까.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물어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보고 직장을 바꾸라고 조언할 테니까요. 하지만 직장을 바꾸기가 어디 쉽습니까. 이런 직장이나마 잡고 있는 게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불평하는 것은 직장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지랄 같은 인생이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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