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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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목요일이었던 남자 The Man Who Was Thursday : A Nightmare>, 나는 이 책이 제목과 표지 등을 보고 매력적이라 느껴져서 읽게 되었는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책을 읽다 말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결국 끝까지 읽고 말았다.


이 책의 표지 뒷면에는 체스터턴을 에드거 앨런 포나 아서 코난 도일과 함께 가장 재미있는 추리소설의 작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을 일컬어 ‘에드커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 소설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목요일이었던 남자>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단순한 추리 소설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목요일이었던 남자>는 정치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이라는 언급 때문에 머리가 아플 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술술 읽힌다. 그런데 그 술술 읽히는 문장들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체스터턴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지녔던 인물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다분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도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한다.

추리 소설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니 자세히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주인공은 우연히 무정부주의자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되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종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주인공이 대항해서 싸우는 조직이 '무정부주의자 조직‘이라는 점에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갈등하게 된다. 과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처럼 무정부의자가 악(惡)인가, 끊임없이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으로 번역되는 무정부주의를 굳이 아나키즘과 똑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적인 수단을 해체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는 비폭력 아나키즘을 신봉한다. 국가나 정부, 제도가 오히려 사람의 삶을 속박하고 인간은 어쩌면 그런 제도들이 없을 때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사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위험한 범죄자들은 교육받은 자들이죠. 우리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철저히 무법적인 현대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도둑이나 중혼자들이 근본적으로는 도덕적이에요.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죠. 인간의 근본적인 이상은 수용하는데, 단지 잘못 추구할 뿐이니까요. 도둑들은 재산을 존중합니다. 그걸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할 뿐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재산을 증오해서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해요. 중혼자들은 결혼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의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중혼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결혼 자체를 경멸합니다. 또, 살인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생명의 더 큰 충만함을 맛보려는 것뿐이죠. 그런데 철학자들은 생명 그 자체를 증오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증오합니다." (54~55쪽)


이 작품에서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국가를 지속하는 법이나 제도 등을 해체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이들이 잘못된 것일까? 물론 체스터턴은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종교마저 거부하려는 그들이 썩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으리란 추측도 든다. 나 또한 무정부주의자들이 폭력적으로 사회 전복을 꿈꾸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나 국가, 종교, 법 등 권위주의적인 관습, 제도, 권력이 인간을 오히려 타락하게 하고,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오히려 무정부주의자 조직을 해체하려는 주인공의 생각과 노력이 좀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체스터턴이나 이 책의 주인공이 보자면 나 역시도 그들이 주적으로 삼고 없애야 할,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썩은 사상을 지닌 사람일 텐데…. 글쎄 무엇이 선(善)이고 악(惡)인지 쉽게 판가름하기 어렵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체스터턴이 생각했던 무정부주의자와 내가 생각하는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느낌도 든다. 체스터턴은 ‘무정부주의=무질서 혹은 혼란상태’로 보았고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인간의 오만함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의 회복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책의 중반쯤 넘어가면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대충 ‘어떤’ 짐작들을 할 수 있으리라. 이 작품의 결말은 전반부에 비해 좀 싱거운 느낌도 들고, ‘흠, 뭐야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거야?’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흥미진진하다. 끝으로 이 책 서두에는 <목요일이었던 남자에 관하여>라는 1935년 <런던 뉴스>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룬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는 분은 이 서문은 읽지 않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스포일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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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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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농담>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 게다가 <농담>이 그의 첫 작품이라는데 놀라움은 더욱 크다. 첫 작품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부럽고 대단하다. 글쓰기는 노력하면 된다지만 작가적인 재능도 실은 타고 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농담>은 농담이 전혀 용납되지 않던 시대의 이야기다. 공산주의 시절 체코에서 주인공 루드빅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회색분자로 찍혀 심한 인생의 굴곡을 겪게 된다. 가벼운 말장난, 혹은 젊음의 치기어린 행동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 경직된 공산주의 시대의 체코, 어떤 강요된 주의(ism)에 희생당하는 개인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루드빅은 애초에 그런 농담을 하지 않았어도 그래서 당에서 축출되지 않았더라도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살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살기에 그는 처음부터 너무나도 짙은 ‘회색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에도 깊이 빠져들 만한 인간 유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 인간임에도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공산당원이 되었고 열렬하게 그 사상을 전파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디 루드빅만 그러할까, 사람들에겐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시기가 있다. 어떤 사상이나 사물, 현상, 사람에 빠져 버리는 시기. 이것은 우정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버린 순간을 돌이켜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별다른 계기가 아닐 때가 많다.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 (129쪽)’처럼 어떤 사상, 사람에 빠져버리는 순간은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버린 뒤에 사람들은 그 사상이나 사람을 특별한 것처럼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잘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100쪽)’처럼-

루드빅이 공산주의에 매료 되었던 순간을 돌이켜 보자. 그는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자랐고 그의 재능을 탐냈던 친척의 지원을 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그 집안의 부르주아적인 분위기에 반발감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산주의에 매료된다. 커다란 계기가 있는 게 아니었다. 루드빅만 그렇지 않다. 이 작품 속 개개인들이 어떤 사람에게 반해서 그 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어떤 사상에 빠지는 순간은 모두 하나 같이 특별하지 않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나 신념이 특별하다고 끊임없이 재포장하면서 이들의 인생은 굴곡을 겪게 된다. 나에게 좋으니까 상대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념), 사랑(애정) 등이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기에 인생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좋은 것이 타인에게도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깨달았다고 여기더라도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농담>은 보여준다(루치에의 비밀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루치에의 상황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는 루드빅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인간은 영원히 서로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아닐까 싶어진다). 사람과 주의(ism) 사이에서도 진정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진정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드빅은 자신이 믿었던 신념에 배반당하고 야로슬라브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고 애쓰다 상처받는다(그리고 또 어떤 의미로든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그 전통적인 가치 때문에 상처를 준다). 코스트카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닮은꼴 때문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회색분자 취급을 받게 된다. 헬레나와 루치에는 사랑한다고 믿었거나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무참히 상처를 받는다.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은 동시에 악마에게도 속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연인들의 동작까지도. (324쪽)’ 라는 구절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형의 신념이나 주의, 행동, 사랑, 애정 등등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문화적 산물과 감정의 씨앗들은 때로는 선(善)이 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악(惡)이 될 수도 있음을 <농담>은 보여준다.

그렇기에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강요된 행동이나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타인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따랐던 신념이, 사람이 우리를 배반하고 그래서 우리가 상처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상처는 우리 내부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소통능력은 인간이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만큼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한 인간은 영원히 고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므로. (227~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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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6-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쿤데라 가운데 <불멸>을 제일 재미나게 읽었습지요.
원래 잡것이라 <농담>에서도 여배우 있잖아요. 그 여자가 약 먹고 벌어지는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16-06-10 16:18   좋아요 0 | URL
네~ <불멸>도 재미나고, 말씀하신 그 장면도 무척 생생, 흥미롭지요. 그렇게 생생하게 인상적으로 쓸 수 있다니 참 쿤데라는 쿤데라입니다. ㅎ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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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편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또 어느 단편에서는 탄식을 하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단아한 문장과 깊이 있고도 세심한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들. 이제서야 줌파 라히리의 세계로 발을 디딘 것이 어쩌면 축복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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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2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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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없는 언어로 노래한 남루한 생활, 남루한 인생, 남루한 사랑. 그러나 진실로 가득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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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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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장식한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원작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하다. 저 소녀의 얼굴은 내가 영화를 본지 십 년 이상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생하다.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배 위에서 강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소녀의 모습. 이제 생각해보니 영화 속 그 이미지는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고등학생 때 영화 <연인>을 봤다. 영화는 당시 파격적인(?) 섹스신이 많다는 이유로 당연히 미성년자관람불가였다. 그런 영화를 미성년의 신분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비디오’가 존재했기 때문. 어른들이 집을 비운 친구네 집에 삼삼오오 모여 이 영화를 봤다. 같이 보던 아이들은 중간 중간 하나둘씩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우리가 그때 기대했던(?) 그런 영화가 아니었으리라. ‘야하긴 뭐가 야해! 지루하기만 하다!’며 볼멘소리를 하며 쓰러져 잠이 들어버린 아이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나도 안 야하다’는 그 투덜거림은 실은 ‘너무 야한 영화’를 봐버린 아이들의 방어기제였다는 것을. 아니면 왠지 어른인 척 하고 싶던 치기 어림이었다는 것을.

그즈음 나는 영화 속 중국인과 백인 소녀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게 사랑인가?’ ‘단순한 육체적 호기심인 걸까?’ ‘사랑이 저런 것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을게 낫겠다.’ 등등. 세월이 흘러 원작 소설을 읽고 나니 얼핏 중국인 남자와 백인 소녀의 그 마음이 헤아려지기도 한다. 15세 소녀를 처음 보자마자 반해버린 중국인 남자, 그 소녀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그 남자, 그 남자의 마음은 물론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하던 소녀의 마음까지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이 소설에는 이른바 ‘정상’적인 인물이 한 명도 없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분신인 ‘소녀’는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중국인 남자와의 섹스에 탐닉한다. 중국인 남자 또한 이 어린 소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것은 소녀의 가족이다. 특히 ‘엄마’와 ‘큰오빠’- 엄마는 ‘소녀’를 비롯하여 세 명의 자식 중 오로지 ‘큰아들’에게만 기형적인 사랑을 베풀며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억압’만이 있을 뿐이다. 왜곡된 사랑 때문에 점점 망나니가 되어가는 ‘큰 오빠’와 그 틈에서 질식사할 것 같은 나약한 ‘작은 오빠’- 소녀는 작은 오빠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큰 오빠를 죽이고 싶은 증오감으로 삶을 버티는 듯하다. 정신병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엄마는 한 술 더 떠 소녀가 중국인 남자와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유한 중국인 남자의 돈이 탐이나 그 관계를 묵인한다.

가족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극에 달해 있을 때 소녀는 중국인 남자를 만났고 그와의 관계에 탐닉한다. 일종의 도피처이자 탈출구로 그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오로지 섹스만 할 뿐이다.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며 소녀는 때때로 중국인 남자를 가학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가족 앞에서 그를 경멸하는 듯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억압을 받던 사람이 다른 이에게 가해자가 된다. 그렇게 가해자로 굴던 소녀는 남자에게 자기를 괴롭혀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마치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그렇게 터뜨려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런데도 남자는 그저 소녀를 잃을까 두려울 뿐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중국인 남자와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소녀가 결국 이별하는 장면은 퍽 쓸쓸하다. 피난처를 잃어버린 아이, 안식처를 빼앗긴 아이, 일생의 단 하나의 사랑을 그저 황망하게 떠나보내는 남자.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도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살지도 모르는 삶.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말하던 소녀는 남자와 헤어진 뒤 ‘사랑은 아니’라고 말했던 그 감정이 얼핏 사랑과 닮았음을 깨닫는다. 배 위에서 허망한 눈으로 강 너머를 응시하던 소녀. 소녀가 그토록 바라보던 것은 강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세상이었고, 그 세상은 결국 중국인 남자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순간은 아니었을까. 벗어나고 싶은 현실, 도망치고 싶던 가족의 굴레에서 잠시라도 그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중국인 남자는 뒤라스에게 그래서 ‘첫사랑’의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으리라.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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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6-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 김인환 교수가 <애인>이란 제목으로 번역했는데, 이 책 그림의 여자 제인 마치 나오는 영화가 <연인>으로 되는 바람에 이젠 <연인>으로 굳어진 작품이지요? 저도 그 분위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메콩강(임에 분명한) 하류의 나른하고 권태스런 그런 거요.
근데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 한 30년 된 거 같습니다.

잠자냥 2016-06-09 13:38   좋아요 0 | URL
아하.. <애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군요! 애인보다는 <연인>이 왠지 더 이 책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네요. ㅎㅎ 이 책 읽으면서 영화도 다시 한 번 봤는데 어릴 때는 안 보이던 게 보이긴 하더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