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주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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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했던가. 마르탱 파주의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를 읽고 있으면 내내 정희진의 저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은 주인공 앙투안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도저히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없어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을 선택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그려나간 작품이다.

앙투안은 스물다섯의 대학 시간 강사로 많은 책을 읽고, 예술 작품에도 조예가 깊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은 이른바 '지성인'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세상에 쉽게 융화되지 못한다. 늘 모든 행동을 하기 전에 사회적으로 성찰하는 버릇이 습관처럼 몸에 배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지성은 곧 질병'이며 구약성서에 나온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는 고통도 쌓여간다'는 말이 곧 진리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맥도날드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소굴이며, 기름기와 설탕 공급자이며 생활패턴의 획일화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가난한 앙투안이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곳이었으며 '고급 백화점은 사회 상류층 냄새인 사향 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부르주아 사육장'이기 때문에 고급 백화점도 갈 수 없고, 옷을 사더라도 혹시 '이 옷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옷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기를 주저하고, '헬스클럽은 찌르는 듯하고 최면을 거는 듯한 음악에 맞춰 근육질의 갤리선 노예들이 노를 젓는 곳'이기 때문에 또 가서는 안되는 곳이다. 때문에 그는 가난한데도 자기의 수입이 허락하는 한 유기농 식품을 사먹고, 옷은 최대한 소비하지 않으며 현대인의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자동차는 절대로 소유하지 않으며(때문에 운전면허증도 없다), 헬스클럽 같은 곳에서 운동을 해서 자신의 몸을 과시하느니 체력 약하고 빼빼마른 몸으로 그저 산책을 하는 일 등이 전부인 삶을 살아 간다. 그러다보니 계속 평범한 사람들과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에 애를 먹게 되고 결국 '너무 많이 알아서 괴롭고 불행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기로 한다.

사회에 융화되기 위한 극단적 선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보려다 실패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로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는 대뇌피질 제거 수술을 받으려다 실패하고, 정신과 의사로부터 '에로작'이라는 약을 받아 먹으면서 서서히 바보가 되어간다. 따지고 질문하기 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과 음반 예술품 등등을 다 내다버리고, TV를 사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몸을 가꾸고, 회사를 들어가 떼돈을 벌면서 그 돈으로 고급 백화점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소용도 없는, 사용도 하지 않는 물건을 사기 시작한다. 그리고 포르셰 승용차도 장만하며...

그런데 이렇게 점차 그냥 평범한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앙투안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친구들이 그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폭탄을 배달하는데, 폭탄은 바로 앙투안이 '바보'가 되기 이전에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 플로베르의 서한집이었다. 플로페르의 서한집을 받아든 앙투안은 정말, 마치 폭탄을 맞은 사람처럼 원래의 그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 정말 문학과 음악 그림 같은 예술 창작품들이 사람을 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좀 더 해보게 된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의 비즐러가 그러했듯이.

예전에 본 <잔잔한 호수 위의 파문 : The Rage In Placid Lake> 도 좀 비슷한 내용이다. 물론 주인공 플라시드는 앙투안처럼 많이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개방적이고 좀 남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사회적 규범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 자라나는데, 그러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스스로 가장 사회적인 인물이 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험회사에 일부러 취직을 하고, 가장 전형적인 회사원이 되어가면서... (플라시드 부모는 아들이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고 하니까 막 운다; 애를 버렸다고. ㅋㅋㅋ)

암튼 이런 류의 책이나 영화들을 보면 사회라는 곳, 사회의 규범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이 조금 남다르게 사는 것은 참 힘들고 피곤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말이 대단한 진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이 아는 사람들이 그다지 상처받고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더 뻔뻔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생각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냐, 또는 많이 알면서 불행(?)하게 살 것이냐 조금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책. 나는 생각 없이 살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융화하는) 삶이 딱히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많이 알고 상처 받더라도 고독한 지성의 숲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 삶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인간들은 묘하게도 자기 자동차를 닮았다. 어떤 이들은 옵션이 전혀 없는, 그저 굴러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러니까 속력을 낼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예 멈춰버려서 종종 수리가 필요한 그런 인생을 산다. 그것은 싸구려 인생으로, 견고하지 못해서 사고가 났을 경우 탑승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인생은 가능한 모든 옵션을 다 갖추고 있다. 돈, 사랑, 미모, 건강, 우정, 성공까지. 마치 에어백, ABS, 가죽 커버, 보조방향조정장치, 16기통과 에어컨을 갖춘 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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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13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도 좋고 책은 읽어보고 싶네요 ㅎ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면 이기는 병신이 되어라는 이 병림픽 시대와 걸맞는 책인 듯 싶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ㅎ

잠자냥 2016-07-14 10:51   좋아요 0 | URL
네, 분량도 그리 많지 않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물론 그에 비해 던지는 질문은 쉽지 않지만 ^^) 금세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랍니다!

루쉰P 2016-07-15 00:16   좋아요 0 | URL
흠 질문이 쉽지 않다라...구미가 당기는 군요 훗 전 모험가 체질이라 ㅋ
 
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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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고전적인 질문을 던져보겠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외모가 먼저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영혼이 먼저일까? 아마도 다들 외모는 한 때이니 영혼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대답(은)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또 다른 질문, 당신은 아주 뛰어난 문장실력을 갖고 있다. 그런 당신에게 누군가가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해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연애편지를 쓸 대상은 평소 당신이 짝사랑해 오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을까?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에는 바로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 17세기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바로 그 주인공. 시라노는 검술은 물론 예술에도 능통하고,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나다. 게다가 ‘참나무와 떡갈나무는 못 되더라도.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을 걸세. 아주 높이 오르진 못해도, 혼자 힘으로 올라갈 걸세!라고 평소 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출세나 권력보다는 정의롭게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그에게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바로 엄청나게 큰 코다. 큰 코 때문에 지독한 추남으로 불릴 정도(프랑스에서는 동명 영화에서 ‘제라르 드 파르디유’가 시라노 역할을 했다던데 무척 어울렸을 듯). 그런 그는 사촌지간인 록산을 가슴시리도록 짝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의 추한 외모 때문에 고백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앓고 있을 뿐이다. 시라노를 그저 좋은 사촌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록산은 어느 날 그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알고 보니 그 상대는 시라노와 같은 근위대에 있는 젊고 잘생긴 크리스티앙.

젊고 잘생긴 크리스티앙 역시 록산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 처지라 이 둘의 사이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크리스티앙은 잘생긴 외모에 비해 입만 열면 여자들이 도망가 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크리스티앙은 말을 너무 못해 그에게 잘생긴 외모처럼 낭만적인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던 여자들은 금세 다 떠나고 만다. 록산을 놓치고 싶지 않던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에게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하고, 록산에게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고백하고 싶던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뜨겁고 달콤한 구애의 말을 쏟아 놓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앙이 ‘외모’만 멋있는 사람이 아닐까 걱정했던 록산은 ‘정신적인 아름다움까지 간직한’ 그에게 더 빠져버리고 만다.

실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썼으니 그 편지에는 얼마나 달콤하고 열정적인 말로 가득했을까!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남을 위한 일이었다 해도 가능할까? 시라노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남 좋은 일을 하면서까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혹은 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크리스티앙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그녀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보며 희열을 맛보았던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지켜보고 그와 그녀가 결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모습에선 정말 이 사람 미친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같으면 아예 진작 ‘당신이 반한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결국엔 내 편지! 곧 나!’라고 밝혔을 거 같은데 말이다. 실제로 록산은 크리스티앙과 단 둘이 만났을 때 크리스티앙이 달콤한 말을 쏟아 내주길 기다렸지만 ‘사랑하오.’라는 말 밖에는 못하는 그에게 짜증을 내고 돌아서버리고 시라노의 편지에 빠지다 못해 나중에는 크리스티앙에게 ‘당신이 세상 제일가는 추남이라고 해도 이제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그런 말을 들을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시라노라며 괴로워하게 되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영화 <비포 선 라이즈>, <비포 선 셋>에서 제시와 셀린느를 보면 딱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를 즐겁게 해준다. 굳이 그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그 모든 대화 속에 ‘사랑해’가 숨어 있다. 록산이 그저 ‘사랑하오’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크리스티앙에게 화를 냈던 것은 그 이상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화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해’가 숨어있는 수많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역시 쉽지 않은가 보다. 록산 역시 그토록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있어도 커다랗고 못생긴 코에 가려 ‘그’가 ‘그’임을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주 뒤늦을지언정 결국 ‘진실’은 통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너무 늦어서 좀 슬프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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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7-15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라노>는 이태리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베흐쥐라의 시라노>란 제목으로 오페라로도 만들어 들어봤거든요. 거기선 연애편지는 물론이고 로잔느의 창문 아래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창문 까지 가는 사다리 위에선 크리스티앙이 립싱크로 입만 벙긋거리는 장이 나오는데, 그것도 원작과 같나요?
<시라노> 읽어볼 건 아니지만 걍 내용이 궁금해서요. ㅎㅎㅎㅎ

잠자냥 2016-07-15 12:3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그 오페라는 보지 않았지만 원작에 시라노는 대필만 해주는 게 아니라, 록산느 발코니 아래 가서 (어둠속에서) 크리스티앙인 채 대신 격렬하게! 사랑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라노가 대신 고백해 주기 전에 크리스티앙이 나름대로 고백을 하는데 말을 더듬는 것은 물론.. 사...사...사랑합니다. 계속 이런 말만 하니까 록산느가 매몰차게 나오기도 하지요.
 
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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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나? 전공 외 교양 수업으로 ‘일본근대문학’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수업 시간에는 일본 문학사에서 아무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읽어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후미코의 발(富美子の足)’이었다. 그때 정말 이 단편을 읽고 나서의 충격이란!

제목을 보니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어쩐지 여성의 발에 집착하는 중년 ‘오덕후’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가? 만약 그런 상상을 했다면 제대로 집었다. 이 단편은 어린 첩의 발에  집착하는 노인의 이야기인데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하며 일종의 성도착이라고 할 수 있는 발 페티시즘에 걸린 노인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그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읽고 논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란 ‘탐미주의’ ‘유미주의’ ‘악마주의’ 이런 단어들이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실제로 ‘후미코의 발’ 외에 이런 성향의 작품들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일본에서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지만 그보다 먼저 노벨문학상 후보에 심심찮게 오르락내리락했던 이가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다.

‘후미코의 발’에서 느낀 변태 이미지가 컸던지 그 뒤 오래도록 그의 작품은 선뜻 다시 읽어보게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엔가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는 나도 모르게 새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라고 있더라. 아무튼 이 책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집이다. 예전에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출판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늘’이라고 번역한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우리말로는 선뜻 풀이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다다미 방이나 건축문화에 스며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그늘’ ‘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예찬인데 딱히 ‘건축문화’하나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전통 연극,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효용성 등 서구 문물과 대비되는 동양(일본)의 정서적인 ‘그늘’에 대한 찬미, 일본의 전통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그늘에 대하여’가 첫 장을 이루고 있으나 이 책에는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과 같은 수필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연애와 색정’- 이 수필을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변태 이미지가 더 굳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는 싱거웠다. ‘색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이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놓고 드러내기 보다는 감출수록 색기가 드러난다는 그런 주장이랄까.

‘손님을 싫어함’이라는 수필에서는 자기에게도 고양이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한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대화를 하는 중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다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곧잘 빠졌다. 때문에 제 때 대꾸하지 못해 손님에게 불성실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는 한다. 해서 자기에게 고양이처럼 꼬리가 있다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내가 너 이야기를 듣고는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나도 고양이 꼬리 좀 주슈~). 남들이 다 가는 명소와는 정반대의 여행지로 떠나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자기만 아는 최고의 여행지를 수필에서조차 끝내 밝히지 않는 괴팍함을 드러내는 ‘여행’이라는 수필도 꽤 공감이 갔다.

다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나 여체에 대한 묘사 등이 권위주의적인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하고, ‘하이고~ 웃기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서양에 비해 동양(즉 일본)의 우월함을 계속 강조하는 태도도 껄끄럽다. 같은 동양을 이야기할 때도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비하는 물론 일본의 상대적 우월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어쭈, 자화자찬은 참…’하며 혀를 차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별것 아닌 소재 속에서 뛰어난 묘사와 관찰을 통해 그토록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작가만의 꼴통 기질이랄까 괴팍함을 발견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었다.


문득 ‘후미코의 발’도 읽고 싶어져서, 생각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을 다시 읽었다. '후미코의 발'은 고려원에서 나왔던 <일본대표단편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돌아보니 이 일본대표단편선 시리즈에는 꽤 괜찮은 단편이 많이 실려있어서 뒤늦게 1권 외에 더 사두려고 찾아보니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아무튼, '후미코의 발'은 예전에는 충격적(?)이었는데, 어제는 좀 많이 웃겼다. 키득키득.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미친 듯이 웃었다.

발뒤꿈치의 곡선을 살며시, 그러나 머리 속이 타버릴 정도로 뚫어지게 탐닉했습니다. 밑에 어떤 뼈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식으로 살이 감싸고 있기에 저리도 부드럽고 원만하며 윤기 도는 뒤꿈치가 되었을까요? 후미코는 태어나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 뒤꿈치로 다다미와 이불 외에 그 어떤 딱딱한 것도 밟아 본 적이 없었겠지요? 저는 한 남자로 태어나 살기보다는, 이렇듯 아름다운 뒤꿈치가 되어 후미코의 발 뒤에 붙을 수 있다면 그쪽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미코의 발뒤꿈치에 밟히는 다다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생명과 후미코의 발뒤꿈치 중 이 세상에서 어느쪽이 더 존귀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일언지하에 후자 쪽이 존귀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후미코의 뒤꿈치를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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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아이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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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며칠 동안 실종되었던 4살 된 남자 아이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 아이의 이름은 ‘그레고리’다. 이 아이는 어떻게 실종이 되었고 어떻게 익사체로 발견된 것일까? 소설은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아이의 부모인 피에르와 발레리가 10대에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그레고리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며 행복에 빠졌다가 그 행복이 무너지는 순간을 3인칭의 화자가 무척 담담하게 서술한다. 가끔은 그레고리의 엄마인 발레리의 독백이 따르기도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든 몇 가지 생각 중 하나는 ‘지구’라는 곳에 기생하는 ‘인간’이라는 종족은 얼마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였다. 그레고리의 부모인 피에르와 발레리는 그들이 속한 사회 구성원들과 달랐다. 그들은 10대에 만나 사랑에 빠졌고, 폐쇄적이고 침울하고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아이에게는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속한 세계의 사람들과 달리 너무도 서로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기를 받는다. 이웃의, 일가친척의 질투와 시기 미움을 받는다. ‘저것들은 뭔데 우리처럼 살지 않는 거지? 뭐가 잘났다고 저렇게 고고한 척을 하는 거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저렇게 돈을 벌 수 있지?’ 시기와 질투, 미움이 그들의 삶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저속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회
그레고리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사체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을 달래기보다는 과연 누가, 무슨 이유로 그레고리를 죽였을까 궁금해 하기 바쁘다. 언론도 이 사건의 진범이 빨리 잡히지 않기를 바란다. 미스터리가 계속 되길 바랄 뿐이다. 피에르와 발레리의 행복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모두 용의선상에 오르고 한 명씩 취조를 받을 때마다 언론은 신이 난다. 사람들의 저속한 호기심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생겨먹었다. 도로에서 사고를 목격하면 우리는 길가 한 옆으로 서행한다. 순간적으로, 희생자들을 구조하려는 생각보다는(구조는 늘 이런 상황에 대비해 훈련된 사람들이 하게 마련이다), 그들의 참상을 구경하려는 생각을 먼저 하고, 도로 위나 깨진 유리들 사이, 혹은 우그러진 차체를 따라 흐르는 피가 눈에 띄기를 바란다. 익히 알려져 있듯 매스미디어는 우리의 병적인 호기심과 불행하게 끝나는 이야기에 대한 취미와 극적 사건에 대한 편향을 충족시키는 데 골몰한다.’ (필립 베송, ‘10월의 아이’, 124쪽~125쪽)


용의자 중 한 사람이 범인으로 구속되자 언론은 미스터리가 끝난 것에 아쉬워한다. 그러다 범인이 아니라는 증언으로 풀려나자 다시 신이 난다. 사건은 계속 되고 이제 이 저속한 인간의 호기심은 아이의 엄마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그녀를 향한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레고리의 엄마 발레리가 증거 부재로 친자살해의 누명을 벗기까지 8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발레리에게만 이런 불행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녀의 남편 피에르는 더 가혹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둘은 굳건했다. 그 모든 험난한 세월을 함께 보낸 뒤 발레리가 혼자 쏟아내는 독백은 그래서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죽은 아이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피에르와 내가 그 모든 세월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이겨냈다는 것이다.(같은 책, 221쪽)’라는 발레리의 독백을 읽는 순간 눈물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흔히 부부가 아이를 잃으면 함께 지낼 수 없고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진실이라도 되는 듯 실제로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발레리와 피에르는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살아남아 그 모든 불행을 이겨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이다. 1984년부터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그레고리 사건’- 이 사건의 진범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2001년 공소국이 사건 종결을 선언했다. 그러나 발레리와 피에르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아직도 끝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죽은 아이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피에르와 내가 그 모든 세월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이겨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옥살이를 할 때조차 떨어지지 않고 늘 꼭 붙어있던 부부뿐이다. 눈이 시리도록 그것만 보인다.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당신들은 지진을 견디고 살아남은 부부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알 기회도 거의 없이 매우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아주 일찍부터 고통을 겪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가 새 삶을 꾸리고 싶어 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남았다. 서로가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뗄 수 없는 사이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교회에서 식을 올리던 날 아침에 맹세했던 것처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필립 베송, ‘10월의 아이’, 221쪽~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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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0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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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독후감을 냈다. 선생님이 물었다. "너 정말 이 작품이 이해가 되니?" 이 선생님은 내가 이상의 <날개>를 읽고 독후감을 냈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참 어렸구나, 뭘 몰라도 한참 몰랐구나 싶어진다. '이해가 간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나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때 내가 가진 앎의 수준, 경험의 수준 등 그 폭 안에서 아주 좁게.


카프카의 <변신>을 최근에 읽고 그 시절에는 절대로 알 수 없던 의미를 발견한다. 예전에는 절대로 '이렇게' 읽히지는 않았다. '이렇게'란 어떤 의미인가? 오늘의 나에게 <변신>은 노동에 관한 이야기, 평생 노동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서글픈 투쟁기로 읽힌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한 마리 거대한 벌레로 변신해 있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고 일어나기도 어렵다. 째깍째깍 출근 시간은 다가온다. 방문 밖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이 재촉한다. '그레고르야 어서 일어나 출근해야지'- 그레고르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출근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잘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진 빚이며 생활비 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에 벌써 숨이 턱턱 막혀온다.


출근 시간은 이미 넘어가고, 그레고르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그레고르 방문 밖에서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며, 거듭 그를 재촉한다. 이렇게 불성실한 사람인지 몰랐다며 그를 힐난한다. 불성실? 그레고르는 몇 년간 회사에 다니면서 아프다고 결근한 적조차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하루의 지각사태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회사원이 되어 비난을 듣는다. 가족들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드디어 울음보를 터뜨린다. 그레고르는 항변하지만 그 소리는 이미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이 흉측한 소리에 놀라던 그들은 드디어 그레고르의 방문을 강제로 연다. 그리고는 다들 경악!


벌레로 변신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 그레고르는 그때부터 가족의 짐이 된다. 훌륭한 아들이자 오빠였던 그는 어쩌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 가족들에게 애완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이제까지 그가 훌륭한 아들, 좋은 오빠일 수 있던 것은 그가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가 되어서도 출근 걱정을 하던 그레고르 잠자는 점차, 벌레인 자신에게 익숙해져 간다. 방을 슬슬 기어다니며 나름대로 소일거리도 한다. 여동생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황홀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그가 아직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회사 일에 치여 살던 그가 언제 이렇게 음악에 심취할 수 있는 시간이나 있었단 말인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가 짐스러웠던 가족들은 드디어 그를 포기하기로 한다. 여동생은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런 가족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그레고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숨을 거둔다. 잠자가 죽은 뒤 가족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오랜만에 야외나들이를 가고, 나들이에서 그레고르 아버지는 딸의 홍조 띤 뺨을 바라보며 어느덧 그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노동하지 않아 더는 쓸모없어진 그레고르는 그들의 소원대로 죽었지만, 그에게 기생해서 살아왔던 여동생의 육체는 한껏 만개한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가족의 모습은 희망차기까지 하다.


일하지 않으면 벌레만도 못한가? 아니면 벌레가 되어 일할 수 없어서 벌레만도 못한가? 경제적 가치가 없으면 가족으로 인정되지도 않는 그레고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 어디도 없다. 그의 작은 방조차 가족들이 '창고'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저 숨죽여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카프카의 <변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노동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15년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죽음으로 사라졌지만, 오늘의 현대인에게서 또 다른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다.


한 20년 뒤에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그레고르 잠자에게서 어떤 면을 새로이 보게 될까? 고전의 힘이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읽을 때마다 다른 발견과 함께 예전에는 몰랐던 울림을 주는 데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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