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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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때리고 밟고 하는 물리적 폭력,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 등등 파괴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폭력은 언제나 늘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력시위’는 미디어에서 항상 ‘나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눈에 보이는 폭력(지젝은 이를 ‘주관적 폭력’이라고 말한다)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란 무엇일까?

지젝이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 symbolic violence)’은 달리말하자면 ‘구조적(systemic violence)’인 폭력이다. 구조적인 폭력이란 쉽게 말해 사람들이 주관적인(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폭력 시위, 혹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 등등. 이렇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바로 ‘구조적인 폭력’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구조적 폭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을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이들의 ‘위선’에 속거나 현혹되어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은 그런 인물들로 빌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등의 예를 든다(구글, 이베이, 인텔, 아이비엠 등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선을 베풀면 그들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는 듯이 엄청난 기부를 하며 사회적 책임, 인도적 책임을 강조한다. 지젝은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라며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모든 행위가 ‘거대한 기만’ 이라고 주장한다.

지젝은 이런 구조적 폭력이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임을 지적하며 그들을(혹은 그런 시스템을) 바로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으로 간주한다. 원제가 <Violence : Six Sideways Reflections> 인 이 책은 1장에서 이렇게 폭력의 의미를 살펴 본 후 이어 폭력의 원인, 언어와 폭력,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테러리즘 등의 문제를 살펴본다. 물론 이 안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가 갖는 폭력성에 대한 성찰도 담겨있다. 주된 내용은 사람들이 가진 이웃에 대한 공포(폭력적 타자)를 이용해 내부 체제를 공고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비판과 이런 폭력적인 세계를 과연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젝이 내놓은 해결책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소외’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는 말을 인용한 지젝은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에 동의한다. ‘때로는 어느 정도의 소외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며 ‘가끔은 소외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 될 때도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꽤 수긍이 간다. ‘인도주의적 차원’이라는 명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이른바 제3세계에 대한 간섭이 오히려 역사상 언제나 큰 문제를 일으켜오지 않았는가?

지젝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가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참여와 행동이 허락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지젝은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작동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고 이 민주주의 안에서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듯한 착각(그러나 가짜 ‘자유’)를 심어주는 것이 오늘날 지배 계급이 원하는 것이다. 지젝은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라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지젝은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기구의 일부’라며 이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주장한 의견에 동의를 표한다.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아주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로 처음 만났다. 그의 저작 중에는 가장 쉽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하다던 그 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지젝의 온갖 현란한 사고의 결과물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은 오래 전에 읽은 터라  내용의 99%이상은 잊어버렸다. 그래도 남은 게 있다면 지젝은 정말 똑똑하다, 그러나 읽기 어렵다 정도랄까. 그러나 그의 저작은 집중해서 읽다보면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탄성이 나오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힘이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또한 읽기 어렵다는 지젝의 저작치고는 그래도 쉽게 읽히는 편이고 번역도 괜찮다(원문과 비교를 할 수준은 못되지만 국내에 번역된 지젝 저작이 기본 문장도 안 되는 경우가 많음에 비한다면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읽기 힘들지는 않다). 또한 지젝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문학, 영화, 회화, 음악 등 여러 대중매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기에 흥미로운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적 = 폭력 시위’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런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눈을 돌려야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정치적인 문제가 모두 문화적인 현상으로 희석된다면서(대표적인 예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 정치적 투쟁을 ‘관용’의 문제로 돌리는 적들의 이데올로기에도 현혹되면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꼭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지젝이 내놓은 제안 중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바로 그 민주주의가 승자독식 시스템을 공고화하고 지배계급의 배만 불리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그 시스템을 돕는 일을 계속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이 폭력적인 시스템이 계속 굴러가도록 하는 일에 동조하기를 멈춘다면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온한(?) (그러나 실현 가능성 제로인) 상상을 조금 해본다.

‘모든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지젝이 말했듯 ‘계급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라는 존재와 폭력은 분리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종속적이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국가라는 존재 자체가 폭력’이기에 그의 말처럼 ‘이와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국가에 저항하는 모든 폭력은 궁극적으로 ‘방어적인’ 것이 되지 않겠는가. 아랍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적’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지의 여부의 문제는 결국 지젝의 말처럼 ‘언제나 전략적 고려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쪽)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149쪽)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151쪽)

왜 오늘날에는 그토록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이나 착취나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불관용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왜 해방이나 정치적 투쟁도 아니고, 하다못해 무장투쟁도 아니라 관용이라는 게 해결책으로 제안되는 것일까? 즉각 떠오르는 답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즉 ‘정치가 문화화’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화 되면서 정치적인 차이(정치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들)는 본래의 정치적 의미가 중화되어 ‘문화적’ 차이, 즉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차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는 이미 정해진 것,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199쪽 -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결정하라는 요청을 받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것을 강제당하는 역설적인 순간에 처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조국을, 혹은 부모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런 역설, 즉 자유로운 의지나 선택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것이 의무이며,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데 마치 있는 것처럼 외양을 유지하는 역설은,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제안)라는 텅 빈 상징적 제스처와 그 개념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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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클레르 카스티용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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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큰일이나 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그 관계로 인해 성가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딱히 눈에 드러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어 ‘감정 소모’에 진이 빠지게 되면 사랑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면? 잠시 혼자 있을 수는 있지만 묘하게도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이타적인가? 사랑은 관대한가? 사랑은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성질의 것인가? 사랑의 모습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지지만 어쩌면 사랑이란 애초에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에 반대로 그렇게 꾸며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사랑의 표본처럼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도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자식이 이렇게 해주길 바라고, 자신의 기대에 차길 바라고, 노후의 보험처럼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많다. 나는, 내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참 순진하군요.’ 말해주고 싶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에서 순수한 사랑의 전형처럼 그려지는 짝사랑도 그렇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럴까? 짝사랑은 이미 대상을 욕망하면서 발생한다. 욕망은 이기적이다. ‘그저 바라만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에게로 와서 내 것이 되어주길 고대한다. 내 사랑의 부름에, 내 마음의 욕망에 그 또는 그녀가 화답해 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고백하지 않고 혼자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렇다. 그 사람의 작은 친절에 감동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보통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대하는 걸 발견하는 순간 짝사랑하는 이의 마음에는 파문이 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진 만큼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화가 난다. 단지 그걸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런데도 짝사랑은 이타적이며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인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수많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제는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의 크기와 똑같지 않아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 내 마음은 작은데 상대방의 마음은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거나 그와 반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데 상대방의 마음은 이미 다른 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거나, 애당초 크기가 작았는데 마지못해 관계를 시작했다거나 등등. 사람은 내가 준 것만큼 내가 준 크기만큼 받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은 너도 나를 꼭 사랑해야 해.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약속들.

사랑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라 사랑이 그렇게 변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마음이 매혹에 이끌려 움직이는 상태라고 본다면 결국 사랑이란 사람 마음속에 존재할 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으므로 사랑을 사람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이 23편의 단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단편 속에 드러나는 사랑은 뻔뻔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이다 못해 사악하고 비열하다.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려고 안달일까?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를 속이고 펼쳐지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 아들과 섹스 하는 엄마 등 근친상간은 아무 일도 아니며 행복한 부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바람난 남편, 바람난 부인, 남편을 갖다 버리고 싶어서 안달 난 여자, 부인에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형제의 치부와 상처를 이용하는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계의 삐걱거림이 ‘이제 그만!’하고 외치고 싶어질 정도로 펼쳐진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를 실물로 보면 알 수 있듯 책의 두께는 무척 얇다. 200페이지 남짓한 크기. 그런데 담겨 있는 이야기는 23편이다. 그만큼 짧고 간결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서걱서걱하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런 불편한 사랑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노통브의 작품을 읽으면 느껴지는 기분처럼 클레르 카스티용 또한 인간에 대한 모든 ‘선한’ 기대는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작가들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이런 작품을 쓰는 걸까 사생활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궁금해서 찾아봤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와는 달리 가치 전복적이며 도발적인 작품을 쓰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로 악마의 글을 쓰는 작가’라는 호칭이 있다고 하니, 노통브와는 달리 외모가 좀 특출(?)난 듯하다. 1975년 프랑스 불로뉴 비앙쿠르 생. 열여덟 살 때 광장공포증에 걸려 길고 지난한 정신과치료를 받던 중, 스물다섯에 첫 소설 <다락방>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음. 그 후 거의 매해 한 편씩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노통브처럼 소설은 엄청나게 써대고 있는가 보다. ‘광장공포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 받았다는 사실에 살짝 호감 증가. 그러나 사진을 찾아보니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는 좀 무리인 듯 싶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은 이쯤에서 접었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극악무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서도 책의 제목이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라니 이럴 수가 있나? 뭔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려니 하고 낚이는 사람들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사랑을 하면 발생하는 감정소모를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왜? 외로우니까.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서 그런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정말로 백치처럼 구는 날이면 나는 그에게 묻는다. 아무 문제없냐고, 정말 괜찮으냐고. 그러면 그는 ‘괜춘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비타민을 먹여보려고도 했다. 그의 사고 체계가 약간이나마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는 인상을 쓰며 완강하게 도리질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대신 먹고 있다. 나는 내 지적 수준을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요구르트를 별로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스물네 개짜리 묶음보다 두 개짜리 묶음을 구입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흥분해 날뛰는 남자와 같이 살면서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뭔가에, 가령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음악은 그에게 수면제나 다름없다. 게다가 서정적인 것들은 괜히 사람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며 그는 투덜댄다. (‘한없는 관용’ p.47~48)


위 구절을 읽는데 정말 너무 너무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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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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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판본 복간 붐에 이어, 리커버 붐인가 보다. 어제 교보문고에서 온 메일을 확인해보니, 문학동네에서도 세계문학 전집 가운데 몇 권을 리커버로 출판하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롤리타>가 있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롤리타>는 번역이 괜찮다는 평이 많아서 이 판으로 다시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이 리커버판 출판 소식은 살짝 구미가 당긴다. 알라딘에도 올라왔는지 검색해보니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과 관련한 소식은 교보 링크로 대신한다. (요기를 클릭)


나는 이제는 절판된 민음사 버전 <롤리타>로 예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문학동네 판을 구매해서 다시 읽어볼까 싶다. 그런 참에 예전에 써두었던 <롤리타> 리뷰를 옮겨본다.


롤리타 콤플렉스, 롤리타 신드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통은 아는 사실이리라. 아동 포르노 관련 기사나 아동 성범죄 관련 기사 이런 것들을 읽을 때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아동을 보고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어떤 면을 보고 성적으로 끌릴 수가 있을까?

나보코프의 <롤리타>에는 님펫(Nymphet)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정확히 9살에서 14살까지의 사춘기 증후가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소녀들을 의미한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그런 님펫에 미쳐있는 중년의 남자다. 자신의 이런 욕망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그저 그런 님펫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어린소녀를 훔쳐보며 자기만의 도취된 세계  안에 갇혀 산다.

그러다가 험버트는 그의 영원한 ‘롤리타’- 열두 살 난 완벽한 님펫 ‘돌로레스 헤이즈’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갖기 위해,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돌리, 돌로레스, 로, 롤라, 롤리타! 그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의붓아버지가 되어 계속 그녀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어느 날 사고로 돌로레스의 엄마가 죽자 험버트와 돌로레스 둘만 남게 된다. 험버트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천국이 따로 없다. 그 완벽한 천국에서 험버트는 그의 완벽한 님펫인 롤리타의 육체까지도 소유하게 된다.

역겨운가? 나는 좀 처음에 솔직히 역겨웠다. 소녀들이 뛰어노는 공원 근처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며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험버트의 시선을 따라가자니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할까, 이런 고민까지 들었다. 그의 읊조림은 아동을 대상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변태 중년남의 변명, 자기합리화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아픈지. 읽을수록 쓸쓸하고, 애달픈 감정이 드는 것인지. 내가 왜 이 변태(!)에게 동조하고 있는지. 이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집착이, 광적인 열정이, 헌신적인 애정이 왜 그렇게도 안타깝던지. 슬프고 씁쓸했다. 돌로레스의 육체는 가질 수 있을지언정 마음은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불쌍한 남자. 어쩌면 돌로레스의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원할 수 없었던 사랑. 님펫은 영원하지 않다. 성장하고, 결국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잡았다 해도 결국은 영원하지 않은 세계. 그 모든 것이 무척 슬프고 서글펐다.

사회에서 이른바 ‘비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사랑, 변태라고 부르는 사랑, 그 사랑의 감정을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가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애끓는 사랑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영화 롤리타(Lolita)에서 험버트 역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한없이 쓸쓸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이 불쌍한 남자에게 더 동조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없는 세계, 이미 잃어버린 세계, 영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끝없는 열망, 동경…. 이런 것들이 한편의 시(詩)처럼 펼쳐진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이 혐오스러운 사랑, 금기의 사랑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의 엄청난 문학적 재능 때문일 것이다. <롤리타>를 읽고 나면 이 세상에 과연 변태의 사랑, 금기의 사랑,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한 도덕적 잣대에 따른  구분은 사라지고 그저 오로지 ‘사랑’ 그 자체만이 남는 기분이 든다.  


자, 이제 문학동네 버전으로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를 만나볼까......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 (<롤리타>, 민음사,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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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 이마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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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쾨펠의 <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을 읽었다. 이 책은 바나나의 모든 것(?)을 망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 따 먹은 열매가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주장부터 시작해 바나나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며 우리의 식탁 위에 올라오는지, 그런 과정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특히 중남미 국가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졌는지 등등 바나나의, 바나나에 의한 세계 역사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바나나에 대해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난 바나나는 다 ‘노란색’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빨간 바나나도 존재한다! 바나나의 종류가 기껏 몇 종류겠지 했는데 수백 가지도 넘는다! 그 중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가장 맛없는 종류인 ‘캐번디시’라는 것, 인도에 가면 정말 맛있는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등등), 바나나를 둘러싼 돌이나 치키타 같은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그로 인한 중남미 국가의 고된 역사 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산으로 올라간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인 댄 쾨펠을 비롯하여 바나나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는 바나나 연구 학자들은 바나나가 이대로 가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그 대안으로 유전공학을 통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강한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나나는 씨가 없기에 혼자 번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만 번식할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한 복제품과 다를 바가 없다.

유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소리는 곧 바나나가 병에 무척 취약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나나는 싱카토카병 및 파나마병으로 하루아침에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우리가 현재 먹는 캐번디시 전에는 그로미셸이라는 품종이 인기였다. 이 바나나는 캐번디시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하는데, 1960년대 파나마병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고, 그 뒤 파나마병에 더욱 강하게 개량되어 나온 품종이 현재 주로 소비되고 있는 캐번디시다). 그러나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바나나는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고 영양도 풍부한 좋은 과일이다. 때문에 중남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가난한 나라의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런 식품이 파나마병 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저자는 때문에 이 가난한 나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GM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GM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나나 연구학자들의 논리도 바로 이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전자조작 농작물들이 처음에는 이런 선의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결국 다국적기업들의 배만 불리고 중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라카의 땅은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바나나를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알겠다. 바나나가 가난한 나라의 주요 식량공급원이라는 것도 알겠다. 병에 약한 것도 알겠다. 그래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유전자조작 바나나를 만들어야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순진하지 않나?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시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 보다는 치키타나 돌 같은 바나나 기업들이 GM 바나나를 유럽이나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그들의 배만 더 부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물론 영국 국민의 82%는 GM 바나나가 나올 경우 결코 사먹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유전자조작 식품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 긴 세월을 버텨온 이 노란 과일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바나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GM 바나나만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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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ㅠㅠ 눈물눈물....





지난번 에코백은 그래도 꾹 참았는데.....

헐.... 비틀즈 에코백이라니... 꽈당 o.O


게다가 그랜드부다페스트 아코디언 북램프까지.......



이쯤하면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사은품을 타려고 책을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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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7-1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이갓 아코디언 북램프요??? 😩😫😭 아 저 지금 너무 웃픈 상황이에요 ㅠㅠㅠㅠ 본투리드 백 한개만 할 걸 그랬나봐요. 이런게 증정품으로 나올줄이야 ㅠ 이번 달은 돈 더 못쓰니 그냥 눈물을 머금고 맙니다.

잠자냥 2016-07-14 12:50   좋아요 1 | URL
네 ㅠㅠ 아 정말 웃프네요... 아니 슬퍼요. ㅠㅠ 미운 알라(딘)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