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더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의 2, 3, 4편인 <발타자르>, <마운트올리브>, <클레어>를 내리읽음으로써 드디어 이 소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난 ‘장편’에는 약하다. 대하 장편소설이라고 부르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총 4권이니 내게는 꽤 길었던 셈. 1편인 <저스틴>은 로렌스 더럴의 현란한 문장에 익숙하지 않아 읽는데 좀 애를 먹었는데, 2편인 <발타자르>부터는 읽기가 수월해졌다. 같은 사건을 다시 복습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조금 더 탄력을 받기 시작. 특히나 <발타자르>는 <저스틴>에서 ‘진실’이라고 여겨졌던 내용에 갖가지 의혹이 던져지며 대대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때문에 좀 더 흥미롭게 읽힌다.

<발타자르>만 그런 게 아니다. <마운트올리브>, <클레어> 등 매 편마다 전편에 나온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진실에 반하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니 결국 내가 보고 있는 이 진실이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의문은 점점 증폭된다. 결국 이 긴 장편소설을 다 읽고 나면 내가 본 모든 진실은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보는 사람의 입장, 시각에 따라 같은 사건이(혹은 인물이) 이토록 달라질 수도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전에 언급했듯 <저스틴>은 한 편의 단순한 불륜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발타자르>까지는 그렇다. 달리, 멜리사, 네심, 저스틴 이 네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한 편의 불륜 드라마, 연애 소설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저스틴>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사이로 보였던 달리와 저스틴 그 둘 사이가 어쩌면 한 사람만의 착각일 수도(환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타자르>에서 알게 된다. <마운트올리브>는 다른 세 편에 비해 상당히 정치적인 색깔을 띤다. 로렌스 더럴은 단순한 멜로소설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걸까?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편이라고 여겨졌다. 이 정치적인 편에서조차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또 한 번 비틀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인 <클레어>는 그 후 그리고 그들은 어찌어찌 살았다는 식의 후일담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은 사족이 길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 사중주>의 모든 편 <저스틴>, <발타자르>, <마운트올리브>, <클레어>를 읽고 나면 인간의 삶이란 참 쓸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참 고독한 존재구나 싶다. 완벽하게 잘 어울리고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부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그들만의 속사정이 있고, 그토록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비밀이 존재한다. 연인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각자만의 비밀과 고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은 자신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어떤 한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 사람의 모든 진실을 ‘안다’고 말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꽤 길기도 하고, 호불호가 좀 갈릴 듯할 작품이라 섣불리 누구에게나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굉장히 매혹적인 작품일 수도 있을 듯.


다음과 같은 구절은 꽤 공감갔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소유하거나 전부를 잃는 것이다. 연민이나 다정함 같은 다른 감정들은 오직 표면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회적인 구조와 관습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131쪽)

연인들은 결코 동등하지 않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언제나 한쪽은 상대방을 우울하게 만들고,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의 성장을 막아버리잖아. 그래서 우울한 쪽은 언제나 탈출하고 싶고, 자유롭게 성장하고 싶은 욕망에 괴로워하지. 사랑의 유일한 비극은 그런 것이 아닐까? (300쪽)

-로렌스 더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저스틴>


사랑이란 전쟁터의 참호와 같다. 적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적이 그곳에 있다는 것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79쪽)

소유욕이란 90퍼센트가 질투인 거 아냐? (122쪽)

사랑의 위대한 모순 중 하나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전념과 소유는 독이 된다. (139쪽)

사랑의 법칙에서 소위 ‘어울리는’ 사람은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는 거라네. (145쪽)

만일 누군가 가면을 쓴 채로 가면을 쓰고 있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 가면을 먼저 벗을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연인들은 평생을 함께하면서도 계속 가면을 쓴 채 살아야 하는 걸까? (249쪽)

얼마나 끔찍하고 말이 안 되는 사랑인지! 난 그 자리에서 내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 존재(같은 인간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네.)에게 아주 오랫동안 여신 같은 숭배를 받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숨에도 그 사람은 고통스러워했을 테지. 어쩌다가 이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당신은 동물의 다양함에 대해 생각할 테지? 난 화가 났고 분개했어. 그리고 동시에 상처를 받았지. 어찌된 영문인지 그 사람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그렇지만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끼어든 그 사랑에는 모멸감이 느껴졌어. (285쪽)

                                                            -로렌스 더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발타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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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하소설을 끝까지 못 읽습니다. 그 대신 바다에 사는 대하는 배터져도 먹을 수 있습니다.

잠자냥 2016-08-24 13:35   좋아요 0 | URL
대하소설은 정말... 읽는 중간중간 다른 책 읽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드는지 말입니다. ㅎㅎ
대하구이 먹고 싶네요 ㅠㅠ

Falstaff 2016-10-31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저스틴>읽고 왜 이렇게 재미없는 게 인긴가... 의아해하다가 한 1년 있다가 <발타자르>를 넘기는 순간 어느새 끝까지 다 해치워버린 소설입니다. ㅎㅎㅎ 잠자냥 님하고 비슷한 순서를 밟았군요.
근데 바다에서 양식하는 대하는 왠만하면 피하세요. 키우는데 항생제를 너무 많이 줍니다. 잔류농약보다 더 안 좋은 게 잔류 항생젭니다. 회사 저희 부서 아줌마 친정에서 대하 양식하는데 그 아줌마 양식 대하는 절대 안 먹습니다. ㅠㅠ

잠자냥 2016-10-31 17:11   좋아요 0 | URL
네, 이 작품은 좀 탄력이 붙어야 읽기 수월해지는 책 같아요.ㅎㅎ 읽고 나면 잘 읽었단 생각은 듭니다.
네! 대하 ㅋㅋㅋㅋ 잘 알겠습니다!

건수하 2025-02-28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스틴>은 좀 읽기 힘들었고
- 독백이면서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문체도 그랬구요 - 그 뒤로는 재미있어서 쭉 읽었어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다르게 보이는 점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생각이 나더군요.

그리고 문학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퍼스워든과 관련된 부분은 처음에는 생각하면서 읽다가 나중에는 그냥 대충 넘겼어요 ^^

어쨌든 스토리 부분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잠자냥 2025-03-04 10:06   좋아요 0 | URL
인터넷이 안 되는 지역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으신 것 같네요!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 공부의 시대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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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 김영란 전 대법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른바 쓸모없는 책읽기(문학 같은)의 `위대한 쓸모있음`을 이 책은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자신의 입신양명만이 아닌 소수자와 약자를 헤아릴 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은 분명 그 `쓸모없는 책`들을 어릴 때부터 다독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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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사람 공부 공부의 시대
정혜신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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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제대로 하고, 쓰는 법을 생각하게 한다. 세월호는 많은 이들에게 그렇겠지만 내게도 트라우마였나보다. 잊고 지내자 애썼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곳곳에서 눈물이 터졌다. 이 책은 울어도 괜찮다고 하고, 울지 않아도 괜찮다 한다. 치유는 공감이고, 치유는 집밥과 같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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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저스틴 펭귄클래식 65
로렌스 더럴 지음, 권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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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더럴의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는 국내 초역된 작품으로 ‘사중주’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이다. 각각은 독립적인 한편의 소설로 읽을 수 있다는데, 아무래도 4권을 다 읽어야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연작 소설 중 첫 번째에 속하는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저스틴 The Alexandria Quartet : Justine>을 읽고 먼저 리뷰를 남긴다.

이 책을 왜 읽게 되었더라? 그건 잘 모르겠다. 난 언젠가 사거나 빌려서 읽어 볼 생각인 책은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 그 리스트를 종종 들여다보는데, 어느 날 이 책이 위시리스트에 들어있는 걸 발견했다(최초에 이 책을 어떤 이유로 담았는지는 모르겠다;;). 온라인 서점 리뷰에선 ‘온다 리쿠’의 어떤 작품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언급되었다하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듯한데, 난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온다 리쿠의 그런 작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고...

서점에서 서서 몇 장 읽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사들고 왔는데,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문장이 상당히 시적이다! 나는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꾸밈없는 문장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시적인 문장에 적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처음엔 좀 짜증났음;). 은유, 비유, 상징 등등 현란한 문장 때문에 슬렁슬렁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불친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저스틴>은 주인공들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되었다는 식의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살짝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저스틴>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불륜의 사랑’ 이야기다. 이집트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불륜의 사랑. 아, 그 흔한 불륜의 사랑!? 그런데 이 작품은 굉장히 독특하다.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는 <저스틴>, <발타자르>, <마운트올리브>, <클레어>로 구성되는데 이 4권의 연작 소설은 각각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에서 보여준다. <저스틴>은 화자인 ‘나’(달리)가 사랑했던 여자 ‘저스틴’을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 그녀와 겪은 일들, 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달리에게는 동거녀인 ‘멜리사’가 있고, 저스틴 또한 이미 결혼한 몸으로 남편인 ‘네심’이 있다. <저스틴>은 이 네 명의 등장인물 위주로 흘러간다.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나’의 독백을 통해 설명되기도 하지만, 갑자기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편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인물에 대한 정보가 처음부터 세세하게 설명되지도 않는다. 읽다 보면 달리, 멜리사, 저스틴, 네심, 발타자르, 클레어 등등 주요 인물들의 관계 및 그들의 직업, 현재 처한 상황 등을 서서히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불친절함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소설 속 인물에 대해 독자는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역시 소설 속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책을 읽는 사람도 (등장인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서히 각 인물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앞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언급했으나 뒷부분에 가서 큰 역할을 하는 내용도 종종 있다. 때문에 더 집중해서 봐야한다(슬렁슬렁 읽었다가 앞으로 다시 돌아간 적이 몇 번이나 있다;). 

나오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지만 다양한 인종과 언어, 종교가 나온다. 때문에 생소한 단어도 많아 그럴 때마다 책 뒤에 붙어있는 주석을 찾아봐야하는 불편함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점도 매력으로 다가온다. 낯모르는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양한 계급과 인종, 성적 취향을 가진 이 인간 군상들이 한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나갈 ‘드라마’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저스틴>에서 ‘달리’는 그가 사랑한 여인 ‘저스틴’을 굉장히 매력적인 ‘팜므파탈’이자 ‘섹스중독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건 ‘달리’만의 관점일지도 모르겠다. 가련한 동거녀를 뒤로 한 채 불륜에 빠진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2권인 <발타자르>를 펼쳐보니 초반인데 벌써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사람이 누군가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자기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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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9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가는 알라딘 매장에 가면 <사중주> 시리즈 중 한 두 권은 꼭 있어요. 네 권 모두 있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매장에 네 권 다 있으면 사서 읽어보고 싶어요. ^^

잠자냥 2016-08-19 17: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자주 가는 알라딘 매장이 두 곳 있는데 두 곳 모두 갈 때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책 한두 권은 꼭 있더라고요. 네 권 모두는 없고요. ㅋㅋ 전 이 책을 한꺼번에 샀던지라 중고 매장에 싸게 나온 걸 보면 좀 배가 아팠지요. ㅎㅎ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사그라들고 바스라들고 언젠가는 흩어져버릴 것들에 대한 따스하면서도 애잔한 시선. 윌리엄 트레버가 보는 방식으로 사람을 본다면 이 세상에 안쓰럽고 불쌍하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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