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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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려면 언제나 큰 결심을 해야 한다. 그 첫째 이유는 그의 작품은 보통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 둘째는 그럼에도 첫 번째 산을 넘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집어 들면 수많은 등장인물의 복잡한 이름과 계속 씨름을 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힌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그런 등장인물들과 씨름하기도 바쁜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문장과도 싸워야 한다는 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위에 나열한 세 가지 이유만으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취향은 아닌 작가다. 그럼에도 문학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작품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 또한 그렇다.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죄와 벌>이후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읽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악령>은 도전할 마음은 생기지 않고(엄두가 나지 않고) 먼저 집어든 게 <미성년>이다. <미성년>은 제목이 매혹적이라 끌렸다. 그러고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많은 작품 중 우선 읽어보고 싶어지는 것들은 제목에 끌려서일 때가 많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등 제목만 봐도 좀 끌리지 않나?(사실 분량이 가볍기도 하다..;) <미성년> 이후로 또 읽는다면 <상처받은 사람들>, <영원한 남편> 등을 생각 중이다. 

<미성년>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성장 소설’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도 하다. 주인공인 ‘아르까지 돌고루끼’는 아버지가 있기는 있지만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다. 귀족인 ‘베르실로프’의 사생아인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 존경과 혐오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정신분열적인 인물이다(도스토예프스키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자신만의 ‘이념’을 간직하고 ‘이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지만 그 ‘이념’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장장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아르까지의 이념은 실현되지 않는다). 아르까지가 그토록 추구하는 이념이란 바로 다음과 같다.

“글쎄요.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겠습니다만.... 간단히 말한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제 이념의 핵심은 그냥 나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단 2루블의 돈이라도 있는 동안은 나만의 공간에서 누구와도 상관 관계를 맺지 않고 그냥 혼자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곧바로 반대 의견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끄라프뜨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위대한 미래의 인류를 위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러한 고차적인 것보다도 개인적인 자유, 즉 나 자신의 자유가 우선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자유가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며,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101쪽, 열린책들)


‘개인적인 자유!’ 아무에게도 침해받지 않을 ‘독립적인 공간!’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때문에 아르까지는 로스차일드처럼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돈을 마련할 갖은 방법을 궁리한다(그 중에는 물론 ‘노름’도 있다). 이런 아르까지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방황만을 그린다면 900페이지가 어떻게 채워질까 하는 의문이 들리라. 당연히 아르까지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의 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는 흐른다. 삼각, 사각 관계를 넘는 로맨스와 복수, 협박 등등 흥미로운 요소도 많다. 어찌 보면 <미성년>은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주인공이 끊임없이 방백을 해대는). 때로는 주인공의 방백이 듣기 싫을 정도로 지겨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흥미진진한 요소 때문에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미성년>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베르실로프’- 어떻게 보면 이 인물이 아르까지보다 좀 더 흥미롭다. 인본주의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세계관에 러시아 민족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 방랑자적 기질 등등 매력적인 인격자이자 학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진 또 하나의 ‘정신분열적’인 인물이다. 아들 ‘아르까지’에게 이런저런 ‘사상’에 대해 거창하게 논하지만 실상 그는 ‘정열’의 노예이자 ‘사랑’ 앞에서는 이성의 존재를 상실하는 가련한 인간일 뿐이다. 드디어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황홀해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가 무섭게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180도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측은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미성년’ 아르까지는 시간이 흘러도 결국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사람들 속에서 계속 부대낄 뿐이다. 그가 ‘성년’이 되더라도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영원히 미지수다. 게다가 그가 존경하고 찬탄해마지 않던 ‘베르실로프’ 역시 또 다른 ‘아르까지’일 뿐이다. 이야기가 흘러도 주인공들의 외형적인 모습이나 정신적인 삶은 크게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패자들의 끊임없이 방황하는 삶이 조금 더 와 닿기는 한다. 인간이니까 매일 다른 삶을, 달라진 자기를, 정신적으로 고양된 삶을 꿈꾸지만 결국 인간이므로 실패하고 만다.

베르실로프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결국 그녀 ‘까쨔’가 아니었을까.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면 평생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아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자기를 비굴하게 만드는 존재, 그녀 ‘까쨔’. 정신적으로 아무리 편안하게 해주고 고양시켜주는 ‘소피아’ 같은 사람보다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치졸한 면모까지 드러내게 할지언정 그만큼 이성을 마비시키는 존재가 바로 진짜 사랑하는 대상이 아닐까? 아르까지와 베르실로프를 보고 있노라면 결국 인간이란 영원히 ‘미성년’일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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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뭉크 관련 책을 읽고 있어서 이러다가 도끼 소설까지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뭉크가 니체와 도끼를 좋아했고, 그들의 책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어요. ^^

잠자냥 2016-09-13 10:29   좋아요 0 | URL
네, 그러고 보니 뭉크 그림과 도스토예프스키가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ㅎㅎ
책 읽을 여유가 더욱 넘치는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cyrus 2016-09-13 20: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잠자냥님도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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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나. 독후감 숙제였을 것이다. 아무런 책이나 선택해서 읽고 쓰는 과제였다. 나는 <이방인>을 읽고 숙제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교무실에서 나눈 그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방인>을 볼 때면 언제나 그 장면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그때,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야, 너, 이 책이 이해가 되니?”
“네” 라고 나는 당돌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뫼르소가 왜 살인을 했는데?”
“태양 때문에요.”

선생님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나는 그때 열 네살이었고, 선생님은 나보다 두 배 조금 더 많은 나이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물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방인’이 이해가 되느냐고 물었던 선생님도 이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으리라. 아, 선생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그렇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이어 예전에 읽은 작품 중 <이방인>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 책을 들었다. 카뮈 번역으로는 최고(?)로 대접받는 김화영 선생의 번역본이었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뫼르소가 ‘엄마’ 혹은 ‘어머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예전과는 달라졌다. 훨씬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예전에 내가 읽은 번역본에서는 모든 부분이 ‘어머니’로 통일되어 표기되었던데, 뫼르소의 성격상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어쩐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잘 알다시피 <이방인>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엄마의 죽음 소식을 들은 뫼르소는 장례 준비를 위해 엄마가 머물던 요양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기이한 ‘이방인’. 그는 너무도 담담해 보이고, 심지어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등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오열은커녕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낯선 이방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뫼르소는 심지어 엄마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날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녀와 영화(그것도 코미디)를 보기도 한다.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 이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32쪽)' 그의 이런 평범치(?) 못한 태도는 나중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작용을 하게 된다.

우발적으로 ‘아랍인’을 살인하게 된 뫼르소는 법정에 서게 되고 검사를 비롯하여 그에게 유죄를 선언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뫼르소의 이방인적 태도-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고, 엄마의 죽음 이후에 여자친구를 사귀어 영화를 보고, 정사를 벌인 점 등등-를 짚어가며 그가 냉혈한, 감정도 없는 살인자임을 증명코자 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모든 게 그저 낯설 뿐이다.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웅변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마치 잘 아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이 그저 기이하고 놀라울 뿐이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독방에 갇혀 자신의 사형 집행일을 기다린다. 뫼르소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126쪽)'라며 담담히 죽음을 기다린다.

뫼르소가 ‘이방인’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가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규범을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고(그러나 단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혼하자는 여자친구의 말에 결혼의 필요성을 잘 못 느끼겠다고 말하고, 법정에서는 다른 사람(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항변하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성공을 향한 의미가 도대체 모르겠다며 ‘안주’를 선택한다.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가 불만스러운 눈치를 보이며 하는 말이, 나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 언제나 딴전이고 나에게는 야심이 없는데 그건 사업하는 데는 아주 좋지 못한 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려고 자리로 아왔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51쪽)


그런 그는 사회에서 영원한 ‘이방인’일 뿐이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뫼르소’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는 모두가 마땅히 여기는 사회적 가치나 척도에서 조금 물러나 있을 뿐이다. 그런 그가 과연 ‘이방인’인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사람을 이방인으로 내모는 사람과 사회가 ‘낯선’ 것일까?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뫼르소의 행동이 열네살 그즈음에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그가 왜 그랬을지 이해가 간다. 사회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뫼르소를 보며 공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결코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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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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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사슴은 여전히 멋진 뿔과 날씬한 다리를 보여주며 물을 마시고 있을 것이고, 젖가슴이 드러난 인디언 여자는 계속 담요를 짜고 있을 것이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이번에는 코트를 입고 왔다든지, 지난번에 왔을 때 짝꿍이었던 아이가 홍역에 걸려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처럼. 아니면, 에이글팅거 선생님 대신 다른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다든지, 엄마하고 아빠가 욕실에서 심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은 다음이라든지, 아니면 길가의 웅덩이에 떠 있는 기름 무지개를 보고 왔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늘 뭔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 (중략)……
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 진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두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164~ 165쪽)



며칠 전 늦은 밤 <호밀밭의 파수꾼>의 위 구절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10대였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처음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던 그때는- 홀든과 비슷한 나이였을까? 아니면 더 어렸던 것 같기도 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처음 읽던 그때, 비슷한 또래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이 작품이 그때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크게 와 닿은 게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지금 이 나이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밤에 운다. 홀든이 툭툭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 하나 하나가 가슴에 콕콕 박힌다. 나이를 거꾸로 먹나? 아니면 홀든이 느끼는 세상에 대한 분노나 낭패감, 절망감 같은 것을 이제 내가 너무도 잘 알아서 더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성인 샐린저가 쓴 작품이라 10대의 시점보다는 어른의 관점이 녹아 있기에 성인에게 더 와 닿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간다. 홀든이 찾아간 박물관 유리 진열장 속 모형들만이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것들은 그대로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것들은 그와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간다.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조차 쉬이 변한다. 그것들을 모두 붙잡아 유리 진열장 속에 보관할 수도 없다. 그저 변해감을 지켜봐야만 한다.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그 안타까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마음이 시리다.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까봐 그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홀든- 홀든이 지키고 싶은 것은 단지 그냥 아이들만은 아니리라. 아이들이 지닌 상징성- 순수함일 수도 있고 위선과 가식이 없는 세상일 수도 있다. 홀든 콜필드는 그런 세계를 꿈꾸고 그런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이 못난 소년은 쉽게 상처받고 부적응자로 낙인 찍혀 이 학교, 저 학교 전전하는 인생이 된다.

언젠가는 학교가 아닌 사회로 나가야만 하는 홀든의 삶은 그래서 더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런 홀든의 모습에서 나,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도 아닌, 그렇다고 어른은 더더욱 아닌 것만 같은 어정쩡한, 영원히 어정쩡할 것 같은 ‘어른아이들’의 모습이….. 이 ‘어른아이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히는 굉장한 작품이다.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같은 책, 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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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이 열린 결말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어요. ^^

잠자냥 2016-09-07 17:16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읽었을 땐 왜 이 책을 그렇게 칭찬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던데(아마 그때 읽었던 판본의 번역 문제도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ㅎㅎ) 어른이 되고 나서 읽으니 아아... 이래서... 싶더군요.
 
오셀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9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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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작년부터 셰익스피어 작품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줄거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여겨졌고, 인물들의 대사, 행동, 심리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싶었다. 작년에는 <맥베스>를 읽었는데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오셀로>는 또 어떨까?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두 번째로 집어 든 작품은 <오셀로>다.

이아고: 공기처럼 가벼운 하잘것없는 것도, 질투하는 자에겐 성서만큼 강력한 증거가 되지. (제3막 제3장)

에밀리아: 하지만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소용없어요. 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질투심이 많아서 질투하는 것이죠. 질투심은 스스로 잉태되어 태어나는 괴물이에요. (제3막 제4장)


<오셀로> 또한 굳이 내용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의 이야기. ‘질투’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겠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감정 때문에 괴로웠던 기억이 있으리라. 그러나 보통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이 감정을 적절한 선에서 다스리게 된다. ‘오셀로’는 그렇지 못해 파멸한다. 그런데 이 ‘질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바로 ‘오셀로’를 질투하는(혹은 시기하는) 또 다른 사람, 이아고의 ‘말’에서 비롯된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비단 ‘오셀로’ 뿐만 아니라 극에 등장하는 여럿 인물들이 ‘질투’라는 감정에 시달린다.


‘오셀로’는 ‘이아고’의 계략으로 아내인 ‘데스데모나’의 정조를 의심하고 한 번 의심이 생기자 의혹과 질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그토록 사랑한다며 아끼던 아내에게 ‘창녀’ 혹은 ‘갈보’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으며 학대를 하고 결국 목숨을 빼앗는다. 이성이 감성에게 잠식당한 것이다. 그저 ‘오셀로’가 싫어서 이런 계략을 꾸몄다는 ‘이아고’ 역시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셀로에 대한 질투가 꿈틀거렸다. 이방인 주제에 승승장구하는 오셀로가 미웠고, 오셀로 역시 자기 아내 ‘에밀리아’와 잠자리를 했으리라 의심하며 복수를 꿈꾼다.


이번에 <오셀로>를 읽으면서 ‘어허라?’하면서 조금 놀랬던 것은 성적으로 굉장히 노골적인 묘사나 표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남성 캐릭터들이 자기 아내나 연인의 정조를 의심하고 그것을 옭아매려는 시도 또한 거침없다. 이 작품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터라 표현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조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여과 없는 표현들을 읽고 있자니 불편한 감정과 함께 왠지 모를 쓴 웃음이 나기도 했다.


오셀로는 물론 이아고, 캐시오, 데스데모나의 아버지인 ‘브라벤쇼’ 등 등장하는 남자 인물에게 여자란 정조를 지켜서 순결한 상태로만 있어야 하는 존재, 그러나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창부와 같은 존재, 혹은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에 대한 이런 의식을 기반으로 서로 알게 모르게 ‘연대’한다. 예를 들어 브라벤쇼는 자기 몰래 오셀로와 결혼한 데스데모나를 비난하면서 오셀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어 장군, 그 애를 잘 지켜보게나. 아비를 속인 애이니 그대도 속일지 모르네” (제1막 제3장)


남성인물은 그렇다 치고, 순결하고 고귀한(?) 인물로 그려지는 ‘데스데모나’는 굉장히 평면적인 인물이다. 사실 그녀가 오셀로를 사랑하게 된 계기도 ‘엥?’ 싶었다. 그가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겪은 일들을 들으며 서서히 오셀로에게 반한 것으로 그려지는데, 어쩐지 불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정말로 데스데모나의 무의식에는 강하고 다른 것에 대한 열망이 잠재되어 있던 것일까(이 작품에서 남자들은 데스데모나의 이런 성적 취향을 정숙하지 못한 여자의 증거로 덧씌우며 공격하기도 한다). 극 초반에는 전장까지 따라가서 오셀로와 함께 살겠다며 상당히 적극적이던 그녀가 극 후반에는 억울하게 의심받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줘 그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이아고의 아내인 ‘에밀리아’의 캐릭터가 더 생동감 있다. 에밀리아는 만약 세상을 다 준다면 남편 몰래 부정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스스럼 없이 말한다. 그러면서 여자에게만 정절의 의무와 순결을 강요하는 남자들을 비꼰다. ‘아내들의 타락이 남편들의 잘못’이라며 한없이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이중성을 비난한다.


“아내들도 남편들처럼 보고, 냄새 맡고, 달고 쓴 것에 대한 미각도 갖고 있어요. 그들이 아내 대신 딴 여자를 택할 때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이지요? 재미 보는 일일까요? 그럴 거예요. 욕정 때문에 그런 짓을 할까요? 그럴 거예요. 그런 실수를 하는 건 나약해서 일까요? 역시 그럴 거예요. 그러면 우린 남자처럼 욕정도, 재미 보고 싶은 욕망도 나약함도 없나요? 그러니 남편들은 우리를 잘 대접해야 해요. 우리들의 잘못은 그들의 잘못이 가르친 결과임을 알아야지요” (제4막 제3장)


사특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아고’ 또한 묘하게 매력있다. 그는 이 모든 극의 연출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데 그만큼 인간의 나약한 속성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십분 활용할 줄 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장점으로 비추는 인간의 선한 면을 약점으로 잡아 그것을 공격한다. 그만큼 인간의 나약함에 정통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럴까? 이 작품에서 내가 공감한 구절 가운데는 이아고가 던진 말들이 많다.



이아고: 사람이 이런 사람이냐 저런 사람이냐 하는 것은 다 우리 마음에 달린 겁니다. 우리의 몸뚱이가 정원이라면 우리의 의지는 정원사죠. 그래서 쐐기풀을 심든, 상추를 뿌리든, 박하를 심고 백리향을 뽑아 버리든, 한 가지 풀만 심든, 여러 가지를 심든, 게으름을 피워 불모지로 만들든, 근면해서 잘 가꾸든, 이런 것들을 좌지우지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권능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지요. 만약 우리 저울에 정욕의 저울판을 균형 있게 만들어 줄 이성의 저울판이 없으면, 우리의 본능 중 정욕과 천박함이 우리를 터무니 없는 결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뛰는 감정과 음욕의 자극과 끓어오르는 정욕을 식혀 줄 이성이 있지요. 나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제가 보기엔 음욕의 곁가지이거나 어린 가지에 불과합니다. (제1막 제3장)

이아고: 악행이란 실행될 때까지는 진면목을 보이지 않는 법이지. (제2막 제1장)

이아고: 인간은 역시 인간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때로는 자신을 망각하는 법입니다. 사람이란 화가 나면 호의를 베푼 자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제2막 제3장)

이아고: 명예보다는 몸의 상처가 더 아프죠. 명예란 남이 안겨 준 가장 헛되고 공허한 것으로, 종종 아무런 미덕 없이 얻기도 하고 또 별 이유 없이 잃기도 합니다. 부관님은 명예를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잃었다 생각하지만 않으면요. (제2막 제3장)

이아고: 장군님, 남녀 할 것 없이 좋은 평판은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보석입니다. 제 돈주머니를 훔치는 자는 곧 쓰레기를 훔치는 셈입니다. 돈은 중요한 듯하나 아무것도 아니고, 제 것이었다가 타인의 것이 되며, 수많은 자들의 종이니까요. 그러나 제 명성을 훔치는 자는 스스로 부자가 되지도 못하면서 저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을 훔치는 셈입니다. (제3막 제3장)

이아고: 공기처럼 가벼운 하잘것없는 것도, 질투하는 자에겐 성서만큼 강력한 증거가 되지……. 위험스러운 억측은 원래 독약과 같아서 처음에는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을 잘 모르지만 혈액에 조금만 작용하면 유황 광산처럼 타오르지. 내 뭐랬나. (제3막 제3장)



160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셀로>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작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나 말(데스데모나 제외하고 -_-)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공감을 얻는 것은 이 작품이 그만큼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정서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탁월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세 번째 작품으로는 <햄릿>을 생각하고 있다. <햄릿>은 또 어떻게 새롭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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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햄릿》을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읽으려고 하는데, 관련자료까지 참고하면 독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잠자냥 2016-09-01 16:06   좋아요 0 | URL
읽고 나셔서 쓰실 글이 벌써 궁금해지는군요. ㅎㅎ

cyrus 2016-09-01 18:22   좋아요 0 | URL
기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 책 읽고, 글을 쓸 지 몰라요. 잠자냥님의 <햄릿> 읽기가 제일 궁금합니다. ^^
 
강만길의 내 인생의 역사 공부 공부의 시대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짧고 평이한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역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해준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를 해방 이후 시대가 아닌 분단시대라고 부르는 게 이채로웠다. 그런 관점에서 통일 문제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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