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동서문화사 월드북 39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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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책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수많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마지막 장에 이르러 드디어 황금가지의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 탄성과 함께 가슴이 벅차오른다. 인류는 주술->종교->과학으로 발전해왔다. <황금가지>는 그 과정을 온 세계 신화, 전설, 관습에서 찾아내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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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거지 펭귄클래식 55
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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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토록 좋아했던 작품이라 ‘소유’하고 싶었으나, 왠지 다시 읽으면 감흥이 깨어질까 두려워 말 그대로 ‘소유’만 하고 있던 <왕자와 거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흥이 퇴색하기는커녕 정말로 그 옛날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세계명작전집으로 어린이용 <왕자와 거지>를 만났던 그 순간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 읽는 <왕자와 거지> 역시 놀랍도록 흥미진진했다. 그 옛날과 똑같은 장면에서 분개하고, 안타까워하고, 조마조마했으며 마지막에 모두가 다 알고 있듯 왕자 에드워드가 제자리로 돌아가 나쁜 놈들을 벌할 때 느꼈던 카타르시스까지 똑같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때는 웃지 않았던 장면에서 낄낄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달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그 옛날의<왕자와 거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아마 이런 용어도 몰랐겠지) ‘풍자와 해학’이 느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줄거리인데도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 솜씨는 얼마나 놀라운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예전엔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책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옛날의 그 아이를 역시 또 책으로부터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재미있다’는 감각에 온통 사로잡히기는 얼마만인지. 올해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마크 트웨인을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해로 정해볼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어릴 때 나는 그토록 이 책을 좋아했을까? 곰곰 돌아보기도했다. 돌아보니 나는 공상을 꽤 많이 했던 아이다(모든 아이들이 다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공상 속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 공상 속에서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다.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두들겨 맞고 거리로 구걸을 나선 꼬마 거지 톰에게 유일한 낙은 ‘공상’이었다. 왕자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했고, 왕자가 되는 공상을 즐겨했던 아이. 그런 공상을 할 때 가장 행복했던 톰. 두들겨 맞고 구걸을 한 적은 없지만 톰처럼 나 또한 공상 속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톰의 공상이 현실로 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랄까, 이런 것들이 주는 쾌감이 무척 컸던 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톰이 왕자가 된 현실에 만족하기 시작하면서 왕자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화가 났다. 이런 점은 지금 읽어도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정말 불쌍한 건 톰인데, 왜 나는 왕자인 에드워드를 응원했을까?

왕자와 거지라는 신분의 차이, 계급의 차이(모순)에 주목했기 보다는 왕자는 왕자의 자리로, 톰은 톰의 자리로 가는 게 옳다고(비록 톰이 불쌍하더라도),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왕자와 거지>에서 톰이 고생하는 장면은 작품 전반부에만 살짝 나오지, 그 후에는 왕자가 되어 행복한 모습만(물론 마음속으로는 고달프지만) 나온다.

그에 비해 왕자였던 아이, ‘에드워드’는 지나치게 심한 고생을 한다. 이 때문에 고생하는 왕자가 너무 불쌍해서 어서 빨리 다시 왕자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랐던 듯하다. 에드워드가 왕자로 돌아가면 톰을 잘 보살펴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했던 것 같고.

하층민으로 태어난 고생만 왕창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톰이 잠시나마 행복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그건 네 자리가 아니야!’라며 격분하고, 왕자였던 아이의 고생에는 너무나도 공감하며 마음 아파했던 나는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줄 알았던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에드워드’를 응원하고 있으니 여전히 나는 그때의 나에서 자라지 않은 채 아이의 마음, 아이의 정신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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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봤던 동화나 만화 제목은 기억하는데, 정작 결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결말을 봤는데도요. ㅎㅎㅎ

잠자냥 2016-09-27 15:02   좋아요 0 | URL
전 사실 비단 어릴 때 본 책만이 아니라 몇 년 전에 읽은 책도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 게 많습니다! ㅋㅋㅋㅋ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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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대한 또다른 우화. 폐지더미 속에서 찾아낸 온갖 책들. 그 안에서 주인공 `한탸`는 아무리 고독해도 `텍스트`가 있기에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텍스트 없는 세계, 이제 `백지`앞에 서야 할 그에겐 오직 `절망`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탸의 이 희망과 절망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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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면서 책이 너무나도 짐스러워져서; 책 사는 일에 신중해지기로 했다. 웬만하면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가끔 정말 사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이 잡지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장정일이 새 주간을 맡으면서 어느 언론사와 한 인터뷰 기사를 읽고는 이번 호는 꼭 챙겨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응원하는 마음에서 한 권 꼭 사보기로.


아래는 인터뷰 기사 중 발췌


‘말과활’ 쇄신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지식인 잡지 대다수가 빠져있는 ‘성맹(性盲)’을 탈출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한국 계간지들은 여성 편집위원 몫이 지나치게 적거나 형식적이다. 비판적 지식계를 대표해 온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사회’는 남성지식인을 위한 ‘지큐(GQ)’ 혹은 ‘맥심(MAXIM)’과 다를 게 없다. 우리 잡지가 그 고민을 시작했으니 다른 잡지들도 바뀌지 않을까.”


기사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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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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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 10년 전에 읽었다면 나도 이 작품 속 샐과 딘처럼 미친 듯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을 듯하다. 그 사이 늙어버린 것인지, 하염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그들을 보아도 그다지 큰 동요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이 무대책 젊은이들의 방랑기에 살짝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특히 딘처럼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오로지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두자면 무척 버거울 것 같다.

<길 위에서>는 케루악 자신의 경험담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두루마리 원고’로 유명하다. 종이를 갈아 끼우면서 원고 쓰는 게 거추장스러웠던 케루악은 타자지를 길게 이어 붙여 만들어 약 40미터 길이의 종이 위에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커피와 각성제에 의존하며 약 3주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초기 원고는 여백도 단락 나눔도 없고 마침표나 쉼표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초기 두루마리 원고에서 수정과 수정을 거쳐 출간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수다, 지칠 줄 모르는 리듬감, 도저히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열정은 작품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때문에 좀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딘과 샐은 함께 혹은 샐 홀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다.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 다시 동부로 때로는 멕시코로 목적지가 바뀌기도 한다. 가진 것도 없는 이들이 여행하는 방법은 히치하이크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또 달린다. 그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이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다. 달리고, 마시고,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여자를 사귀고 다시 달리고. 자동차, 히치하이크, 술, 마약, 섹스, 재즈 이런 단어들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그들은 즐겁다. 내일은 필요 없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샐과 딘은 ‘이 인간 세계에서 무명으로 사는 게 저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대체 저 세상이란 뭔가? 이 지상은 뭔가? 모두 관념이 아닌가.’(‘길 위에서’, 2권 108쪽) “정치가나 부자 같은 다른 사람들이 뭘 바라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거야.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거지.”(‘길 위에서’, 2권 116쪽)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어디에도 오래 안주하지 못하고 계속 길 위를 헤맨다. 샐보다 방랑벽이 더 심한 딘은 이곳저곳에 아내를 두고 아이까지 낳지만 그 평범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떠날 수밖에 없다. 길에 서지 않으면 그들의 자유는 감금당하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으로 가득한, 부패한 미국 사회에서 모범생처럼 살며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아무런 속박도 구속도 없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계속 길 위에 서는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낭만적이고 달콤한 유혹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 수많은 청춘을 길 위에 오르게 했고, 지금도 여전히 청춘의 바이블처럼 읽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오늘의 청춘은 샐과 딘처럼 돈 한 푼 없이 길 위에 서지는 못한다. 여행의 낭만과 자유를 찾지만 그 자유도 보통은 어떤 일정한 기간 내에만 허락된 것일 뿐이고, 그마저도 돈이 없으면 갖기 어려운 ‘여유’가 되어버렸다. 물질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샐과 딘의 ‘길’은 이미 사라져 버린, 전설 속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가 떠올랐다. 오토바이를 타고 끊임없이 달리는 그들. 이십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들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으며 더는 <이지 라이더>의 빌리와 와이어트 같은 딘과 샐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좀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다고나 할까. 늙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예전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자유에 대한 갈망 자체가 사라져 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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