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책을 안 읽었다’는 글을 써볼까 한다.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얼마 전 지인에게 내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안 읽었다고 하니 그 친구를 비롯하여 다들 놀라더라. 나 같은 독서광(?)이! <백년의 고독>을 안 읽었다니! 그런 분위기였달까. 그래서 난 의외로 그런 책이 많다고 고백했을 뿐이고. 그런 책 리스트를 한 번 뽑아보았다. 사실 나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읽었을 법한 책들 가운데 안 읽은 책이 제법 많다. 그리고 나름 이유도 있다....


1. 내겐 너무 극복 불가능한 의식의 흐름
독서광이라면 당근 읽었을 법한 책으로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작품은 늘 꼽힌다. 그러나 나는 제임스 조이스 작품 읽은 게 <더블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조이스의 <율리시즈>,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읽지 않았다. 그나마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제목 때문에 은근 끌려(지가 젊은 예술가라 생각한 어처구니없던 시절 끌렸음. 푸하하 ㅠ) 집어 들었으나(집에 책도 있음), 도저히 몇 장 못 넘기고 살포시 내려두었다. 그나마 버지니아 울프는 좀 낫다. <자기만의 방>이랑 <세월>은 읽었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은 안 읽었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선두주자(응?)로 꼽힌다는 점. 난 이 기법이 정말 싫다. 재미없다. 난해해. <세월>과 <자기만의 방>도 딱히 좋지 않았다.




















2. 중남미 환상 소설
문제의 <백년의 고독>이 여기에 속한다. 나는 판타지나 SF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짜 유명한 작품이라면 좀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거짓말을 대놓고 하는 듯해서 손이 안 간다. 중남미 환상 소설, 마술적 리얼리즘. 이런 문장 들어간 책은 그래서 덩달아 잘 안 읽는다. 마르케스 작품은 그런 이유로 외면해왔다. 그나마 읽은 건 이 사람이 다 늙어서 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하나 딸랑인데 별로 좋지 않았기에 더 기피하게 된 작가인 듯. 이 부류엔 보르헤스도 들어간다. 책 좀 읽네 하는 사람들 중 보르헤스 책 안 읽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난 보르헤스 작품 하나도 안 읽었다. 그다지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 한번쯤은 그래도 읽어볼까 싶어서 사두었지만, 아직도 손대지 않고 있다. <백년의 고독>도 마찬가지다. 책은 서가에 살포시 꽂혀 있는데..... 어쩐지 손이 가지 않는다. 한번 도전해볼까 싶지만,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다.




















3. 영국 빅토리아 시대 문학
난 이 시기가 매력적이지 않다. 일단 여자들이 주렁주렁 치마 입고 우아하게 차 마시며 가식 떠는 모습을 보는 게 그다지 흥미 없다. 아마도 이런 시기를 다룬 영화를 볼 때마다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다고 여긴 적이 많기에 문학작품도 그러리라는 편견이 생긴 듯하다. 그 좋다는 제인 오스틴 작품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엠마> 등등 하나도 읽은 게 없다. 앞으로도 과연 읽게 될지; 같은 이유로 브론테 자매의 작품도 덩달아 안 읽었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안 읽었음. 그나마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재미있게 읽었다.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카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의 찰스 디킨스 작품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지만  디킨스의 작품은 꼭 그래서만은 아닌 듯하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더 크다.


































4. (영화로 너무 많이 봐서) 이미 내용을 다 아는 작품
그렇다. 디킨스의 책은 그렇기에 잘 안 읽게 된다. <위대한 유산>을 비롯하여 <올리버 트위스트>도 그렇고 <크리스마스 캐럴>이야 말해 무엇 할까! 영화로 너무 많이 봤기에 책을 읽을 감흥이 떨어진다. 이미 영화로 매년 스포일러 당했어! 게다가 <올리버 트위스트>나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작품은 어릴 때 동화로 많이 읽었기에 성인이 되어 다시 또 읽게 되지는 않는 듯하다(생각해 보면 이런 작품도 꽤 많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도 그렇다.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이미 읽었지, 게다가 툭하면 텔레비전에서 영화로 나오지. ㅠ_ㅠ 도저히 다시 책으로 읽을 기분이 안 난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도 그런 축에 속한다. 나는 이 영화를 엄청 재미나게 봤기에 아직도 몇몇 장면은 기억이 난다. 책으로 읽어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살포시 내려놓기를 반복.



































5. 흑인이 주인공이거나 흑인이 쓴 문학 작품

이 분류만 보면 내가 인종차별주의자 같아 보인다. 그런 건 아니고;; 이런 장르(?)에도 크게 흥미가 없다. 그냥 내용이 뻔해 보인다. -_-;; 인종차별 속에서 핍박받는 이야기가 왠지 주된 내용일 거 같은 편견. 문학 작품만이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흑인이 주인공이거나 흑인으로서의 삶을 주된 내용으로 다룬 영화는 잘 안 보게 된다. 그런 이유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와 같은 작품 및 토니 모리슨의 작품도 하나도 안 읽었다. 그래도 요즘은 토니 모리슨 작품은 좀 읽어보고 싶어졌다. <빌러브드>부터 읽어 볼 생각.


















6. 제목을 하도 많이 봐서 책을 다 읽은 느낌이 드는 작품
이 부류에는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아들과 연인>이 있다. 어릴 적, 엄마가 갖고 있던 소설 전집에 이 책들이 있었다. 난 그 전집을 이것저것 살펴보는 취미가 있었는데 어느날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부터 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책은 왠지 내가 읽는다는 걸(심지어 제목이라도)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되는 책이라고! 책 표지에 격정 로맨스가 어떻고 외설이 어떻고 이런 말이 적혀있던 기억이 난다. 간이 작아서 읽어볼 엄두는 안 났고 그저 책 표지만 날마다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내 언젠가 크면 꼭 이걸 읽으리... 하며... 그런데 그렇게 제목과 책 표지만 보다가 너무 질렸나보다. 크고 나니 더 이상 관심이 없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 그러다 몇 해 전에 이 두 작품은 읽었다!!!




















7. 너무 너무 길어서 엄두가 나지 않네
대하장편소설 읽기 힘들다. 한국문학 중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박경리의 <토지>가 여기에 속한다. <태백산맥>은 1권까지만 읽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이건 도서대출 시스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장편을 굳이 사서 읽고 싶지는 않았는데, 대학 때 도서관에 가면 이 책들은 항상 대출 중이었다. 1권 읽었다 싶으면 2, 3권은 누가 가져갔고. 이런 시스템 속에서 장편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리.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책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언젠가 꼭 읽을 테야!!! (언제?).


































8. 그리고
성경


이렇게 리스트를 작성해보니, 결국 ‘편견’ 때문에 치우친 독서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좋은 독서를 하려면 저 편견을 넘어서야 할 텐데.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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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7-02-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구텐베르그가 인쇄기계를 발명해서 최초로 찍은 책, <성경>을 아직 안 읽어봤습죠. 누가 누굴 낳고, 누가 누굴 낳고.... 하루 온종일 낳고, 또 낳는 이야기만 몇 번 읽은 거 같네요. ㅋㅋㅋ

잠자냥 2017-02-15 14:09   좋아요 0 | URL
ㅋ 그러게요. 하루 온종일 낳고, 또 낳고 ㅋㅋㅋ

cyrus 2017-02-1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소개된 책들 중에 제가 안 읽은 게 아주 많아요. ^^

잠자냥 2017-02-15 14:41   좋아요 0 | URL
cyrus 님도 안 읽으신 책이 많다니 왠지 위안이 됩니다. ㅎㅎ

Falstaff 2017-02-17 0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말 나온 김에 이 책들에 관한 짧은 소감 한 마디씩만....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는 스무살 때 읽어봐서 지금 기억 안 나 다시 읽어보려 책 샀음. <율리시즈> 17편의 짧은 이야기와 1개의 희곡으로 생각하고 읽으니까 뭐 그 정도는 ㅎㅎㅎ
버지니아 울프: <델러웨이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해골 흔들림. <댈러웨이...>도 중간중간 번역 되게 후짐. 그래도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음. 하여간 조이스와 울프보다 대한민국의 오정희가 의식의 흐름을 훨 잘 구사함.
중남미 환상문학: 폴스타프 왈 ‘아몰랑주의 문학‘들. <100년의 고독>은 소싯적에 재미나게 읽었는데 보르헤스는 읽다가 하도 어지러워 토할 뻔했음. 여기서 주목. 읽기 더러워 토할 뻔한 게 아니라 하도 골 때려서 어지러워 토할 뻔했다는 거. 보르헤스 팬들은 양해하시압. 푸엔테스의 <아우라>는 아, 멋있음.
빅토리아 시대 문학: 그 시대 최고 작가는 누가 뭐래도 엘리자베스 캐스켈과 조지 엘리엇.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신 디킨스. 나머지는 뽕짝. 내가 흔히 쓰는 말. ˝우라질 빅토리아 시대˝ 운운. 특히 샬럿 브론테는 쓰레기. 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호오.
영화로 나온 책들 가운데 <위대한 유산>과 <양철북>은 그래도 책이 훨 남. 일독 권유.
하도 많이 들어본 제목이라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필독서이긴 한데 될 수 있으면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은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것을 권함. 대가리 터지게 법정소송해서 출판 가능하게 만든 출판사가 바로 펭귄. 거기다가 도리스 레싱이 쓴 서문이 기막힘. 다른 버젼으로 말씀드리자면 영화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의 수박만 한 젖가슴이 압권!
흑인문학: 글로리아 네일러가 쓴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강추. 리처드 라이트 <미국의 아들>은 창비 세계문학 넘버 2로 찍은 책. 랠프 앨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은 민음사에서 다시 찍어야 살 수 있는데 요새 나왔나 아직인가는 잘 모르겠음. 생각보다 흑인문학 나름 진지함. <뿌리> 노추.
너무 길어서...: <토지>는 길어서가 아니라 길기만 하고 재미 존나 없어서 비추. <태백산맥> <아리랑>은 괜찮으나, 우리나라 최고의 장편 대하소설은 단연 최명희의 <혼불>. 그러나 아쉽게도 미완성. 해외 장편대하는 <티보가의 사람들>이 대빵인데 민음사가 절판을 해소할 기미가 안 보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미련하게 완독했지만(국일미디어 김창석 역. 번역 죽임) 확실히 과대평가됨. 이거 읽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정치범으로 독방에 한 1년 수감되는 것. 그거 말고 이책을 첨부터 끝까지 정독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사료됨. 나? 나야 며칠 잠깐 미쳤으니까 완독 했음.

잠자냥 2017-02-16 15:11   좋아요 0 | URL
길고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

<양철북>은 그래도 꼭 읽을 생각으로 책은 사놓고 아직 못 봤네요. 조만간 읽을 예정입니다!
조지 엘리엇 소설도 읽어보고 싶고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민음사판으로 읽어버렸네요 0_0;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서 민음사판이랑 펭귄 버전 중에 뭘로 읽을까 고민하다가. 펭귄 버전에서 샤낭터지기가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는 거 보고 김이 확 새서..(전 번역하면서 굳이 사투리로 옮기면서 충청도 사투리로 옮기는 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흑인문학 중엔 <미국의 아들>은 폴스타프 님 리뷰 보고 사두었고요, <보이지 않는 인간> 민음사판도 사실 예전에 사둔 게 있습니다. 다행이죠 ㅋㅋ

장편 중에 <혼불>은 읽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티보가의 사람들>은 제가 워낙 좋아하는 책이라서 민음사 버전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0-01-20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본문 글도 재밌고 폴스타프님 댓글도 재미가 터집니다~~
 
진실에 눈을 뜨다 - 우리 시대 대표적 리더와 사상가 20인의 인생을 바꾼 정치적 각성의 순간들
해리 크라이슬러 지음, 이재원 옮김 / 이마고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해리 클라이슬러 <진실에 눈을 뜨다 : 우리 시대 대표적 리더와 사상가 20인의 인생을 바꾼 정치적 각성의 순간들>을 읽었다. 이 책은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왔던 <휴머니스트를 위하여 : 경계를 넘어선 세계 지성 27인과의 대화>와 비슷한 책이다. 다만 <휴머니스트를 위하여>는 ‘경계를 넘어선’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좌우를 넘나들어 세계적인 명사들과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반면 <진실에 눈을 뜨다>는 그런 명사들 중에서 흔히 좌파라고 불리기 쉬운, 진보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고 살아가는 명사들과의 대담집이다.


이 책은 ‘진실에 눈을 뜨다’와 ‘정치적 각성’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20명의 명사들이 어느 순간 세계의 진실(결국은 이 세상의 모순)을 깨닫고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때문에 촘스키, 하워드 진, 대니얼 엘스버그, 오에 겐자부로 등등 20명의 대담자들은 어린 시절 영향을 준 사람을 비롯하여 교육 환경은 어땠는지, 어떤 계기로 지금과 같은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게 되었는지 등등을 질문 받고 이에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런 질문과 대답으로 베트남 전쟁, 아파르트헤이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등 굵직한 현대 세계사를 훑으며 이를 통해 인종차별, 제국주의, 자본주의, 반전과 평화, 이슬람, 페미니즘, 환경, 예술, 계급, 인권의 가치 등을 다룬다.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스무 명의 대담자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모습은 ‘더 나은 삶,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끊임없는 노력한다는 점이다.

‘나만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닌, 이 세상의 모순을 깨닫고 그것을 타파하여 사회적 약자도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노력해온 그들이 자라온 환경을 보면(정치적으로 각성하는 순간을 비롯하여) 결국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한국에서 하는 입시위주 암기식 교육, 사교육전쟁, 우리 아이만 1등해서 좋은 대학 가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자리 하나 꿰차서 성공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하는 그런 교육은 절대 아니다.

스무 명의 대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는 현상은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좋은 부모’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식에게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것, 말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고 가르쳤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버릇, 이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질문, ‘왜?’라는 질문을 항상 하도록 가르쳤다. 게다가 그것을 ‘입으로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평소 자신들의 생활 태도 자체가 그랬다. 때문에 스무 명 중 대부분은 부모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그렇게 컸다. 부모가 아니더라도 가까이에 그런 영향을 주는 친인척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촘스키는 자신이 지금처럼 자랄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이모부가 운영하던 신문가판대를 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신문을 읽고, 신문을 사러 온 사람들이 나누는 토론을 들으며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해나갔다.

책을 많이 읽는 습관 또한 중요했다. 대부분의 대담자들이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어릴 때부터 책속에 파묻혀 살았다. 하워드 진은 가난했던 부모가 쿠폰을 일일이 모아 한 권씩 사다준 디킨스 전집을 읽으며 계급의식을 키워갔다고 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아홉 살까지 책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는데, 대신 할머니가 전해주는 생생한 이야기가 늘 곁에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처음 책을 선물 받았는데 무려 마크 트웨인의 책이었단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하여 <허클베리 핀>을 읽고 또 읽은 기억을 털어놓는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교육도 중요하고, 책읽기도 중요하고, 멘토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환경만큼 인간의 본성도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조금은 남들보다 ‘정의로운 유전자’,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유전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유전자’ 등이 많았던 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인간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이들 중 몇몇의 저작은 더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 유쾌한 발견도 있었다. 반면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한국에서 공동체를 위한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우울한 생각도 들더라. 아무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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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의 참혹함은 말할 것도 없고, 전후 독일은 왜 자국민의 처참한 희생에는 침묵했는지, 또 독일 문학가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그 침묵에 동조했는지 제발트는 날카롭지만 그 특유의 우아한 문체로 비판한다.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빠진" 독일에 대한 비판이자 문학의 의무를 생각케 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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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1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빠진˝.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잠자냥 2017-02-13 14:39   좋아요 0 | URL
네, 제대로 애도할 줄 아는 것도 인간의 고귀한 능력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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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 알림을 신청해놓고 그 알림이 이따금 올 때마다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도서 정보를 살펴본다. 체호프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이번에는 어떤 책이 소개된 것일까 궁금하여 알라딘 사이트를 클릭한다. <지루한 이야기>라는 처음 듣는 제목의 작품이다. 장편은 아닌, 그렇다고 단편이라고 하기엔 좀 긴 분량. 중편이다. 반갑다. 국내 초역 작품이라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그런데 함께 실려 있는 작품은 ‘검은 옷의 수도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다.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국내 초역 작품이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든다.

‘검은 옷의 수도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내가 갖고 있는 다른 체호프의 책에 실려 있다. 심지어 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세 가지 출판사 버전을 갖고 있다(열린책들/펭귄클래식/범우사). 이번에 새로 창비에서 나온 <지루한 이야기>는 살까 말까 처음에는 꽤 고민했다. ‘지루한 이야기’ 정도만 읽어보고 싶은데, 그렇다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아무리 체호프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같은 작품을 여럿 갖고 있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결국 나는 이 책을 사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체호프니까…….

체호프와 함께 여러 권의 다른 책도 주문했다. 책이 배달되고 나서 경건한 마음으로 체호프의 책부터 읽기 시작한다. 몇 페이지 읽지 않고서 나는 책을 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지루한 이야기’를 거의 다 읽어갈 때쯤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슴의 통증 같은 것을 느낀다. 급기야 ‘지루한 이야기’의 맨 끝 구절 ‘안녕, 나의 보석이여!’를 읽는 순간 눈물방울이 맺힌다. ‘지루한 이야기’는 아마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체호프의 작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 나의 내면에서는 노예에게나 걸맞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어. 머릿속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사악한 생각들이 요동을 치고 영혼 안에는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둥지를 틀고 있지. 요컨대 나는 증오하고, 경멸하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나는 극도로 엄격하고 까다롭고 짜증스럽고 야비하고 의심 많은 인간이 되었어. ………….” ( 체호프, <지루한 이야기>, 60쪽)



나(니꼴라이 스쩨빠노비치 아무개)는 명예교수이자 3등 문관으로 그 이름이 꽤 알려졌다. 그러나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린 덕분에 명성은 드높지만 부유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늙음과 함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듯이 ‘지루한 이야기’는 이 노교수가 바라보는 삶의 비루함, 쓸쓸함, 고독함, 애잔함이 그 주를 이룬다.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한때는 아름답고 눈부셨던 삶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딸. 진짜 가족이라 여겨졌던 그들과의 단란하고도 행복한 한때. 그런데 지금의 그 앞에 있는 아내와 딸은 한없이 속물스러울 뿐이다. 아내가 하는 이야기는 오직 돈, 돈, 돈에 관한 것뿐이며 그토록 영특하고 예쁘기만 하던 딸은 어느 사기꾼 같은 녀석한테 홀딱 빠져서는 한없이 그를 실망시키고 있다. 이 노교수가 아내와 딸을 바라보는 시선은 체호프의 빼어난 묘사로 읽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밥줄과 기타 사소한 걱정거리로 생기를 잃은 표정과 빚더미와 궁핍에 관한 끊임없는 생각으로 어두워진 눈빛, 오로지 지출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오로지 물가 하락에만 미소 지을 수 있는 이 여자. 이 늙고 뚱뚱하고 굼뜬 여자가 언젠가 그토록 날씬했던 바랴.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랴란 말인가? (15쪽)

어렸을 때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몹시 좋아해서 나는 종종 제과점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척도였다. 나를 칭찬하고 싶으면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바닐라 맛이야.”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피스타치오, 다른 하나는 바닐라, 세 번째는 산딸기. 이런 식이었다. (17쪽)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기만 하는 딸애가 저 넥타이와 저 눈깔과 저 흐물거리는 뺨따귀를 사랑한다는 것이 사뭇 이상하기만 하다……………… (51쪽)

한때 나는 진짜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았었지만 지금은 내 진짜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님으로 와서 식사를 하고 있으며 진짜 리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53쪽)


아내 ‘바랴’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부터 ‘아, 체호프!’ 하게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 딸에 대한 묘사도 그렇다. “아빠는 바닐라 맛이야.” 이 문장 하나에 그토록 귀엽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그리고 그러한 딸과의 아름답기만 한 추억이 절로 떠오른다. 더불어 이제는 그렇지 않으리란 것도 이 대사 하나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무척이나 아름답던 시절이 어느덧 저 멀리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심정. 그 안타까움이 이 한 문장에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왠지 딸에 대한 그의 묘사를 읽노라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이 모두 흩어져버린 듯해 마음 한쪽이 무척 아파온다.

가족에 대한 불만은 주변 사람들과 그를 둘러싼 생활환경 모든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그는 명성과 고위 문관의 직함 또는 금전적으로 넉넉한 생활, 명사들과의 알음알이 등을 바라는 사람들의 속물스러움과 저속함에 넌더리를 낸다. 그 모든 것들이 거대한 눈덩이처럼 몰려왔으며, 아내 바랴와 딸 리자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그 ‘눈덩이’에 깔려버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일상사가 되어버린 ‘무지와 무례한 행동거지’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짜증이 날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또 책망한다. 증오하고 경멸하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 야비하고 의심 많은 자신의 성격을 바라보며 ‘노예에게나 걸맞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자괴감에 빠진다. 그런 그에게도 단 하나의 위안이 있으며 숨 쉴 곳이 있다. 바로 ‘까쨔’이다. 18년 전 그의 동료가 6만 루블과 함께 가짜를 남겨놓고 죽었다. 동료는 그를 까쨔의 후견인으로 지정해놓았고, 까쨔는 열 살 때까지 그의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또 다른 딸과도 같은 존재이다.

까쨔는 그의 친딸과는 달리 이제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그의 친딸과 아내가 그에게서 경제적인 대가만 바란다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까쨔는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호기심 많고 천진난만하던 까쨔에게도 이상 징후가 엿보인다.

까쨔는 사랑하고 있었고 자기 일을 믿었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몰락의 분명한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몰락은 우선 자기 동료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몰락의 첫 번째이자 가장 사악한 전조였다. 만일 젊은 학자나 문필가가 자신의 업을 시작하는 마당에 다른 학자나 문필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면, 이는 그가 이미 탈진해 있으며 그 업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43쪽)

지금 까쨔는 우리 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를 빌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안락하게 꾸미고 살고 있다. 만일 누군가 그녀의 인테리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림의 주된 기조는 나태가 될 것이다. 나태한 몸뚱이를 위한 부드러운 소파와 의자들, 나태한 발을 위한 양탄자, 나태한 시각을 위한 바래고 침침하고 광택 없는 색상들, 나태한 영혼을 위해 벽에 빼곡하게 걸린 싸구려 부채들, 기법의 독창성이 내용을 압도하는 자질구레한 그림들, 전적으로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물건들이 들어찬 잉여의 선반과 작은 탁자들, 커튼 대신 사용된 형태 없는 천 쪼가리들……. 이 모든 것은 선명한 색상과 균형과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영혼의 게으름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취향의 왜곡을 입증해준다. (46쪽)

현재 그녀의 표정은 오랫동안 기차를 기다려야 하는 승객의 표정처럼 차갑고 무심하고 산만하다. (47쪽)

아아, 인생이란 왜 이토록 아름답고 고귀하고 찬란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부셔져만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그런 과정을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일까?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서서히 망가져 가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는 그래서 잠자리에 들어서는 뜬금없이 울기도 한다. 눈물을 흘리며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나는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는다. 이 시간이면 누군가 방에 들어올까봐 두렵고 갑자기 죽을까봐 두렵고 내 눈물이 부끄럽다. 전반적으로 내 영혼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램프도 책들도 마룻바닥 위의 그림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참을 수가 없다. (57쪽)



<지루한 이야기>는 체호프의 단편치고는 꽤 길다. 중편에 속한다고 할까.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와 제목처럼 어찌 보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교수의 불평불만이 정말 지루하지나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체호프가 자신의 문학 10년을 결산하고 원숙기로 접어들면서 쓴 작품이니만큼 그 깊이와 울림은 남다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이, 인생이 어린 시절에 꿈꾸던 것만큼 아름답지도 찬란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삶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비루하다. 눈부시게 빛나던 순간도, 그런 사람도 점차 퇴색해 간다. 그건 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그렇다. 곱게 늙어가기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 가혹하고도 시련으로만 이어진 듯한, 도무지 살아가기 어려운 것만 같은 인생에서도 분명히 한때는 빛나던 순간과 사랑하거나 아끼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빠는 바닐라 맛이야” 라고 말하며 꺄르르 웃는 사랑하는 딸과의 행복한 추억. 이런 추억들이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앞두고 니꼴라이가 하는  ‘안녕, 나의 보석이여!’라는 말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보석 같은 순간이 분명히 있고, 언젠가는 그 보석을 보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옴을 모두가 알기에…….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 안녕, 나의 보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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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10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개인적으로 서양문학사를 통틀어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가 체호프, 오 헨리, 레이먼드 커버라고 생각합니다. 세 사람의 단편을 읽어보면, 여운이 남거나 생각거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

잠자냥 2017-02-10 11:08   좋아요 0 | URL
체호프의 위대함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ㅎㅎ
 
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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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영화 재개봉이 유행이다. 얼마전에는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도 다시 개봉했다. 예전에 영화를 꽤 좋게 봤던 터라 이번에 한 번 더 보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영화를 본 뒤 원작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생략된 것, 영화와 달라진 것, 한나(케이트 윈슬렛 역)에게서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 등을 알고 싶었다. 영화에서 모호했던 한나와 미하엘(영화에서는 ‘마이클’)의 모습을 책을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이 영화보다 훌륭하다, 라는 이야기도 많던데 딱히 영화가 더 낫다, 책이 더 낫다, 라고 평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을 듯하다. 책이 좀 더 잘 표현한 부분도 있고, 영화가 더 훌륭하게 재현한 부분도 있다.

영화 <더 리더>

영화의 배경이 전후 독일이라 한나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독일의 정치적 상황(한나는 동독이나 서독의 스파이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이런 상상)과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을 했다. 그러나 영화 중반쯤 한나의 작은 비밀은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 마이클과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메뉴판을 건네자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 이 여자는 글자를 모르는구나.’하고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 밝혀질 그녀의 큰 비밀은 그때도 그저 짐작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의 커다란 비밀이 밝혀지면서 한나와 마이클의 개인적인 역사에서 독일(때문에 세계 전체)의 역사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한나는 나치 친위대에서 감시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전력 때문에 전후 처리 과정에서 그녀는 재판대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주모자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차라리 종신형을 언도 받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일까, 그녀는? 한나는 그렇다 해도, 마이클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면서 그녀가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도록 방관하는가. 그녀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저 존중하는 것일까? 이 둘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화에서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장면이 있는데, 감옥에 갇힌 그녀를 위해 마이클이 책을 낭독한 테이프를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고 그 테이프로 한나가 드디어 글을 깨우쳐, 마이클에게 어린아이 같은 글씨로 편지를 보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한나의 죽음 뒤에 그녀의 쓸쓸한 독방을 보며 마이클이 울음을 삼키는 장면도 그렇고. 두 사람의 긴 세월동안 이어진 사랑‘만’을 생각하면 한없이 쓸쓸하고 서글퍼져서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책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에서 조금 모호했던 것은 한나가 정말로 마이클을 사랑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의 관점으로 그려져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한나의 진짜 성격도 궁금했다. 그러나 책 역시 미하엘(마이클)의 시선으로 그녀가 그려지고 있기에 ‘한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처럼 질서와 정돈된 상태를 좋아하고 그것이 파괴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책에서는 그런 그녀의 성격이 글자를 모르는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게 좀 더 명확해 졌을 뿐.

영화는 자칫 한나가 그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마이클을 이용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법하다. 이런 의문은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정말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는 그들이 정말 사랑했음을 나타내주는, 아니 한나가 마이클을 정말 사랑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를 생략했던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이 장면은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에서 사면을 앞둔 한나가 느닷없이 자살을 하는데, 그 과정이 설득력이 좀 떨어졌다는 점이다. 마이클이 차갑게 대해서?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두려워서? 홀로코스트의 대리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그저 추측할 뿐이었는데, 책에서는 이 점이 더 명확해졌다. 이것도 어떻게 좀 설명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영화에서 마이클이 딸을 데리고 한나의 무덤을 찾는 엔딩은 사족 같기도 하고, 느닷없어 낯간지럽기도 했는데 책의 엔딩을 따랐다면 더 여운이 남았을 듯하다.

책을 읽어주다 / 사워를 하다 / 사랑을 하다

영화나 책이나 가장 중요한 행위는 한나와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고, 샤워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문맹인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미하엘은 그녀에게 이제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던,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세계를 일깨워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특히 한나가 직접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과 자료를 구해서 읽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글을 알기 전 한나는 홀로코스트를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미하엘을 통해 드디어 세상의 진실과 맞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그들이 진실로 통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한나가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중요한 길이기도 하다. 그런 세계를 알게 해준 사람이 미하엘이므로 나이가 아무리 어릴지언정 한나가 그를 사랑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나는 무척 청결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샤워하는 것도 자주 등장하고, 제복을 입은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미하엘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모습도 자주 나온다. 마치 무언가 더럽혀진 것을 씻어내듯 강박적으로 씻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녀가 그렇게 씻어버리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씻을 수 없는 과거는 아니었을까. 의식처럼 행해졌던 책 읽기, 샤워, 그리고 사랑의 순서를 기억한다면. 그들에게 샤워는 단순히 씻는 행동으로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15세 소년과 36살의 여성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성적인 욕망을 채우는 관계? 흔히 사랑을 나누는 것을 ‘관계를 맺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나는 홀로코스트를 직접 체험한 세대이며, 어떤 의미로는 그 피해자이자, 주동자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독일 전후에 태어난 세대이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그 둘이 ‘관계’를 맺었다. 성적으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단순히 성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윗세대가 저지른 일을 아랫세대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어떤 의미로는 윗세대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어야(한나에게 책 읽기를 통해 세상의 진실을 알게 해준 것처럼)하고, 이해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용서와 화해
이렇게 본다면, 미하엘이 한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한나를 외면했던 자신의 배반을 괴로워하는 모습은 ‘홀로코스트’ 세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옹호’로 읽힐 수도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실제로 홀로코스트 주동 세력에 대해 옹호의 입장을 내비친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은, 특히 한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개인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생각해 본다면 그런 세력에 대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한나가 감옥에서 읽은 책 목록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던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때문에 ‘관료적 의무’를 ‘기계적’으로 충실히 수행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면서 한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게 나의 일이었는데, 어쩔 수 있었겠느냐’며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단지 나는 나의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한다면 세상에 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처럼 무지로 인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죄라는 것도 모른 채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읽어주는 남자>는 이렇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영화와 책 그 어느 것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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