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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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나의 고 3은 공부와 씨름했던 시기가 아니다. 몹시 무더웠던 그때 여름은 공부와의 싸움이기 보다는 엄마가 앓던 병과의 싸움이었다. 엄마는 내가 고 3이었던 그때 ‘암’이라는 그야말로 ‘암’적인 판단을 받았다. 왜 하필이면 내가 고 3일 때, 왜 하필이면 우리 엄마가 하는 생각에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이야기를 가족이 아닌 그 누군가에게도 하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기 싫었다. ‘우리 엄마가 암이야’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순간, ‘암’이라는 낙인이 엄마는 물론, 우리 가족 전체에게 찍히는 것 같아서 싫었다. 동정 받는 것도 싫었다. 누가 아는 것 자체가 싫었다. 엄마의 ‘암’은 나는 물론 가족에게도 그렇고, 엄마 자신은 더욱 그러했겠지만 형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 책은 '은유로서의 질병'과 '에이즈와 그 은유' 두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다-을 덮는 순간, 아니 이 책을 펼친 순간 잊었던 열 아홉 살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암’을 받아들인 태도와 엄마가 ‘암’을 받아들인 태도, ‘가족’이 암을 받아들인 태도에 있었던 ‘공포’ ‘낙인’ ‘형벌’ ‘부끄러움’ 같은 것들. ‘질병’을 ‘질병’ 자체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관습이나 은유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무렵 엄마가 앓던 ‘암’에 대한 은유를 보면, 왜 엄마는 그때 ‘수치스러워 했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많이 앓는 ‘암’의 한 종류인 ‘자궁암’에 대한 은유. ‘결혼하지 않은 미혼 여성은 잘 걸리지 않을 뿐더러’ ‘그러니까 미혼 여성이 자궁암이라면 화려한(?) 전적을 의심해 봐야 하며’ ‘기혼 여성이 걸리는 경우는 배우자의 외도’ 때문일 경우가 많다는, ‘자궁암’을 바라보는 사회적 은유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것이다. ‘유방암’에 대한 은유도 그렇다. 요즘에는 ‘비만’인, ‘동물성 지방을 너무 많이 섭취하는’ ‘운동을 하지 않는 게으름’이 불러오는 암이라는 은유가 또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이런 은유들이 과연 모두 타당한가?

수잔 손택, 그녀는 아버지가 일찍이 결핵으로 사망했고(손택의 엄마는 그 사실을 끝끝내 숨겼다고 한다. 당시 결핵은 불결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걸리는 수치스러운 병이라는 사회적 은유가 만연했기에) 엄마 또한 폐암으로 사망했다. 더욱이 손택 그녀가 이 에세이를 쓰기 전 ‘유방암 4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형벌’을 선고 받았고 이 에세이가 세상에 빛을 본 뒤에는 유방암을 극복했었지만, 또 다른 ‘형벌’인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이 ‘에이즈’라는 병으로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던 시기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핵이나, 암,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대하는 태도를 깊이 사유하게 된 그녀가 '은유로서의 질병'과 '에이즈와 그 은유'를 쓰게 된 것이다.

결핵, 나병, 매독, 페스트, 콜레라, 암, 에이즈 등 이런 병들을 떠올리는 우리의 머리 속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금 이런 병명과 함께 당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찾아보라, 그게 바로 우리 사회에 있는 질병에 관한 사회적 은유다. 결핵은 불결하고 하층민들이 잘 걸리는 수치스러운 질병에서 결핵이라는 병 자체에서 오는 창백한 안색, 허약함, 콜록거림 등등에서 ‘낭만스러움’ ‘영혼의 상처’ 등 ‘낭만성을 대표하는’ 질병으로서 사회적 은유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그에 비해 ‘암’은 일단 받아들이기 매우 부끄러운 신체(결장, 방광, 직장, 유방, 자궁, 전립선, 고환 등)에 침범하는 것으로 부위부터 낭만적이지 못하며, 손택이 이 에세이를 썼던 1978년 당시만 해도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고 인간 관계에서도 결함이 있는- 그러니까 속으로 삭이는 사람들에게서 암이 잘 나타난다는- 은유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암이 갖고 있던 모든 사회의 악의적인 은유는 영광스럽게도 에이즈가 가져가게 된다. 에이즈는 일단 ‘문란한 성접촉’을 통해 그것도 ‘아프리카’와 같은 미개한 나라에서 시작된, 게다가 동성애자들이 그 ‘혐오스런’ ‘항문성교’로 전 세계로 퍼뜨리고 있는 도덕적 타락이 불러일으킨 대 재앙이라는 은유가 순식간에 퍼져버린 것이다.

손택이 지적하는 점은 질병을 다루는 사회적인 은유들이 종종 질병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주고 공포적인 은유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더 나아가 군사적 은유로까지 쓰이는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혐오감이자 경종이다. 보통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사회는 전염병을 하나같이 제3세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병이 처음 알려진 그 시기부터 선전선동 한다. 그 좋은 예로 에이즈가 아프리카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미국, 그 미국인들 때문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유럽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때문에 질병의 이런 사회적 은유는 사회의 중간 계급, 혹은 지배 계급들이 파시스트적인 선전선동을 하기에 딱 좋은 대상이 된다. ‘제3세계에서 역병이 들어왔으니’ 그들의 이민 및 이주를 막아야 한다. 제3세계의 인종들을 격리하고 차별하는 것은 마땅하다. ‘동성애자들의 문란한 성행위가 에이즈를 확산하니’ 그들을 격리하고 사회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논리들. 우리에게 적이 되는 ‘암’적인 존재들은 종양을 제거하듯 잘라내고 방사선치료를 해야 하는 것처럼 핵폭탄 투하와 같은 방법으로 적을 제거해야 한다는 군사적인 선전선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인 은유나 잘못된 공포가 질병을 질병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환자들로 하여금 ‘낙인’과 함께 맞서 싸울 의지나 능동적인 환자가 될 의지를 꺾어 놓는다고 손택은 지적한다. 손택 자신이 유방암을 극복했고 자궁암을 이겨냈던 것들 자체가 그런 은유와 맞서 싸워 능동적인 환자로써 질병을 극복하는 현명한 방식들을 찾아 헤맨 결과임을 이 책을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질병을 신비화하는 언어를 쫓아내고 우리가 질병,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을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다.

내가 엄마가 암에 걸린 적이 있었고 그걸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아무렇지’않게 하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열 아홉에서 수년이 지난 뒤에야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나마 처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도 비슷한 병을 ‘선고’ 받고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극복’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물론 그 사이 사회에서 ‘암’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 예전처럼 그리 절망적인 선고도 아니며, 암이 생기는 부위가 부끄럽더라도 그때보다는 쉽게 밝힐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 끔찍한 은유는 이제 에이즈가 대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좋지 못한 은유는 그것을 능가할 만한 질병이 발견되지 않는 한 쉽사리 극복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질병'을 '질병'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곧 우리의 삶과 죽음을 제대로 마주할 방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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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7-03-07 11:30   좋아요 1 | URL
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그 병도 그렇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cyrus 2017-03-0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병’ 자체 이름만 들어도 무섭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게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언어와 이미지입니다. 질병에 안 걸리는 사람도 벌벌 떨게 만들죠. 은유를 이용한 공포 효과를 잘 이용한 게 공익광고입니다.

잠자냥 2017-03-07 15:43   좋아요 0 | URL
네 그러고 보니 금연 광고 정말 무시무시하지요. 그런데도 피우는 사람은 여전히 피우지만 말입니다. 하하.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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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한때는 지녔을 법한, 소중하고도 눈부신, 그러나 영원할 수 없어 안타까운 우정에 대하여....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땐 그저 먹먹해서 눈물이 솟구친다. 짧지만 강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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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친구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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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그녀의 책을 참 오랜만에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 뭐였는지 기억조차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책을 덮으며 이제 앞으로 아멜리 노통브 작품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막연하게 생각했다. 맨 처음 읽었던 작품인 <적의 화장법>을 읽었을 때의 신선함과 놀라움, 전율 같은 것은 그녀의 작품 몇 권을 읽다보니 시들해졌다. 뻔한 패턴이 있고, 예측 가능한 도식적인 결말, 비슷비슷한 주제의 반복이었다.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았다.

<샴페인 친구>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아멜리 노통브 신간이 나온 줄도 당연히 몰랐다. 그런데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 중 유독 눈에 잘 들어오는, 신간임을 당당히 뽐내는 깨끗한 표지를 보고 집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꼬질꼬질한 사람들 가운데 혼자만 깨끗하게 세수한 듯한 ‘신간 서적’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힘들지 않은가! 게다가 아멜리 노통브의 책은 길어야 200페이지 남짓. 한두 시간만 집중하면 금세 읽는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오랜만에 정말 그녀의 책을 빌려왔다.

그리고 몇 페이지 읽는 순간 나는 마트에 가서 화이트 와인을 사올 수밖에 없었다. 한 잔 시원하게 따라서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 책을 읽는데, 그토록 맛있을 수가. 펼쳐진 책장 위에 나열된 글자들을 읽노라니 참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계집애 여전하네, 이런 생각이 든다. 술맛 좋고, 너의 입담은 여전히 톡톡 쏘는구나.

도취는 즉흥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재능과 몰두가 요구되는 예술에 속한다. 술을 무턱대고 마셨다가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 최초의 만취가 대개의 경우 기적적인 것은 순전히 그 유명한 초심자의 행운 덕분이다. 정의상, 그 행운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샴페인 친구>, 5쪽)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입담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윽고 술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샴페인. 나는 좋은 샴페인을 구해서 마실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화이트 와인으로 대신한다. 술과 책과 문학이라니. 대단한 조합이다. <샴페인 친구>에서 노통브는 술맛, 그러니까 샴페인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쫄쫄 굶기까지 한다. 역시, 뭘 좀 안다. 샴페인은 아니지만 정말 시원한 맥주 한잔을 따라서 첫 모금을 마실 때, 배가 고플수록 그 맛이 기막히다는 사실은 맥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샴페인도 그렇겠지? 그럴 거야.

훌륭한 와인을 맛볼 때 <안주 챙겨 먹기>를 강요하는 사람들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음식에 대한 모욕이고, 음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안 그러면 취해 버리거든요’ 설상가상 그들은 이렇게 웅얼거린다. 난 그들에게 예쁜 아가씨들에게 아예 눈길도 주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반해 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성스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숭고한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다. (6쪽)


이 구절을 읽다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낄낄 웃기 시작한다. 맞아 맞아, 맞는 소리지. 나는 와인 한 잔과 함께 <샴페인 친구>를 읽으면서 나와는 조금 다른 술을 좋아하고 문학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친구 한 사람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 친구와 서로 각자 좋아하는 술을 따라 놓고는 문학과 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 아멜리 노통브는 샴페인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 샴페인이냐고? 샴페인에 취하는 건 다른 술에 취하는 것과 전혀 다르니까. 술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힘은 서로 다른데, 샴페인은 천박한 메타포를 불러오지 않는 몇 안 되는 술 중 하나다. 이 술은 신사라는 멋진 말에 의미가 있었던 시대에 아마 그 신사의 조건이었을 것 같은 상태로 영혼을 고양시킨다. 사람을 우아하고, 가벼운 동시에 깊게 그리고 사심이 없게 만들어 준다. 샴페인은 사랑을 부채질하고, 사랑의 상실에 고상함을 부여한다.  (7쪽)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도 그 샴페인 한 모금, 아니 한 병 마셔보고 싶네. 나 좀 한 잔 따라주지 않겠니? 싶은데, 아멜리 그녀는 내가 샴페인에 너무나도 무지하다면서 다른 친구를 찾아 나선다. 게다가 이야기 좀 해보니 문학 취향이나 깊이도 자기와는 아주 다르단다. 쳇, 그래 가라! 그렇게 떠난 아멜리, 그녀는 다른 친구를 만난다. 자신의 팬 사인회에서 만난 친구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로니유’ 술 취향도, 기괴한 취향도 아멜리 노통브와 아주 죽이 잘 맞는다. 문학적 깊이나 취향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둘의 대화는 탁구공 주고받듯이 통통 잘도 튄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그런데다가 ‘페트로니유’는 어떤 면에서는 아멜리보다 한술 더 뜬 괴짜이다. 아멜리 노통브는 페트로니유에게 흠뻑 빠진다.

나는 이제 혼자 술을 홀짝 홀짝 마시면서 그녀들의 샴페인 찬양과, 술에 취해 벌이는 온갖 만행과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녀들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엿듣는다. 페트로니유는 아멜리 노통브처럼 글을 쓴다.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노통브는 그녀의 작품을 읽고 한마디로 꽂혀버린다. 그런데 어째, 프랑스 출판계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은 것 같다.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출신인 페트로니유의 작품이 프랑스 문단에 받아들여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그녀를 위해 아멜리 노통브는 여러모로 애를 쓴다.

술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더욱이 글을 쓰고 싶거나, 이미 쓰는 사람이라면 <샴페인 친구>는 꽤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단, 이 작품을 손에 든 순간, 당신은 나처럼 술을 따르게 될 것이다. 샴페인이라면 더 바랄 게 없고 그렇지 못하다면 아쉬운 대로 와인인든, 맥주든, 소주든 어떤 술이라도 좋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정말로 술친구를 앞에 두고 있는 착각에 빠질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글쓰기에 대한 위로이자 찬가이다. 허위와 가식 가득한 이 세계에서 글을 쓰는 행위, 읽히지도 않고, 어쩌면 출간될 희망조차 없음에도 글을 쓰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위로이자 격려이다.

아멜리 노통브가 이 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고 하듯이 프랑스에서도 글을 쓰고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러시안룰렛’과도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겠다며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노통브가 발견한 술친구 페트로니유 또한 그렇다. 취할 줄 알면서도 너무 많이 마시면 숙취로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듯이, 안될 줄 알면서도, 그 실패로 깊이 좌절할 줄 알면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샴페인 친구>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작품이다. 술이 깨고 나면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리고 지난밤의 일들이 후회될지라도, 또다시 술이 주는 그 도취의 순간을 찾듯이, 문학을 읽을 때의 즐거움, 바로 그런 문학을 ‘짓는’ 일을 하는 즐거움에 빠진 모든 이들을 위한...... <샴페인 친구>는 그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마셔라, 읽어라. 취해라.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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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들레르도 <파리의 우울>에 이런 말을 남겼어요.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이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저는 책에 취하고 싶습니다. ^^

잠자냥 2017-03-03 16:05   좋아요 0 | URL
ㅎㅎ cyrus 님은 이미 책에 취하신 것 같은데요! ㅎㅎ

cyrus 2017-03-03 16:06   좋아요 0 | URL
책뽕에 취했습니다.. ㅎㅎㅎ
 
거금 100만 달러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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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이 있다.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작품이 그렇다. <미스 론리 하트>가 그랬고 <메뚜기의 하루> 역시 그렇고, 얼마 전 읽기를 마친 <거금 100만 달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끔찍하다! 안그래도 팍팍해서 살기 힘든 사람들한테 이런 책까지 읽으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선뜻 추천하기 뭐한 그런 책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몇 자 적는 이유는 뭘까? 세상엔 이런 책도 있다고 알리고 싶어서? 아니면 너새네이얼 웨스트 전집에 대해 모두 코멘트를 남겨야 속 시원할 거 같은 기분 때문에? 어쩐지 후자 같다. 

“죗값은 어떻게든 치러야 하는 법. 그나저나 돈이 얼마나 있나?”
“90달러 있습니다.”
렘이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적군. 그냥 죄를 인정하는 게 낫겠어.”
(…)
“말했잖아요. 저는 죄가 없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걸 입증할 돈이 없지 않은가.” (126~127쪽)


이 구절은 <거금 100만 달러>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열일곱 소년인 레뮤얼 피트킨은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집도 구하고 어머니도 편하게 모실 생각으로 고향을 떠난다. 목적지는 뉴욕. 레뮤얼(렘)은 100만 달러를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었다. 보통의(?) 소설들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어느 정도 자신의 꿈에 다다르거나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다른 가치를 발견한다든가 등등 어떤 희망적인 구석이 존재한다.

그런데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거금 100만 달러>에 그런 희망이란 없다. 고향을 떠난 렘의 인생은 비참함 그 자체다. 기차를 타자마자 소매치기, 사기꾼에 돈을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도둑질한 죄까지 뒤집어쓰면서 교도소에 가게 된다. 앞선 인용문에서 보듯 돈이 없기 때문에 그는 유죄다. 이 가난한 청년의 고생은 끝이 없다. 감옥에 가고 사기를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이용당하고. 그런 과정에서 신체를 훼손당하고 등등. 언제쯤 이 청년의 고난이 끝날까 한숨만 나온다. 렘이 어떤 소녀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그가 그래도 한줄기 ‘사랑’에 기대고 의지할 수 있으려나? 기대를 품어보기도 하지만, 그런 기대조차 무참히 부서진다. 

같은 고향 마을에서 알고 지냈던 이 소녀 또한 가진 게 없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다 보니 삶이 순탄하지 않다. 렘만큼이나 처절하게 인생의 온갖 고난을 겪는다. 이렇게 <거금 100만 달러>는 가진 것 없는 두 청춘 남녀가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 추적한다.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이 눈물겨운 고행극에 중간 중간 연사가 스토리를 읊어주듯 개입한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청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꿈은 부서지라고 있는 것!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 그대로 드림일 뿐!”라고 외치는 듯하다.

고향을 떠난 렘에게 단 한순간이라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글쎄... 그에게 행복했던 순간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불행하게 삶을 마친다. 이런 힘겨운 스토리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아메리칸 드림의 허망함이 절로 느껴진다. 운 좋은 사람 중에는 정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대부분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큰 꿈을 꾸더라도 ‘거금 100만 달러’를 손에 쥐기란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도 세상은 당신도 가능하다며, 꿈을 꾸라고, 왜 당신에게는 꿈이 없느냐고 다그친다.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그런 이들에게, 그런 사회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썩어빠진 사회에서 꿈을 꾸라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도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당신부터 꿈 깨라고!’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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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든 사람일수록 젊은 사람에게 ‘꿈‘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서 고생하라는 말을 좀더 좋게 표현하기 위해서 ‘꿈‘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요.

잠자냥 2017-03-02 14:12   좋아요 0 | URL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때 바로 꼰대인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생을 사서라도 하라니 말도 안됩니다. ㅎㅎ
 
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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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노라면, 지금 이 사회가 곧 ‘게 가공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직 자본을 위해서 인간성 말살은 물론 극악한 노동착취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세상. 이 폭압적인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노동자, 약자들‘의 연대만이 답이다. 그 답을 투박하지만 뜨겁고 생생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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