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최근 이 책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새로 발간되었더라. 나는 이 책을 예전 버전으로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별로였던 책 리스트에서 이 책을 보고 헉!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된다. 보통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은 대부분 사람들의 베스트에 올라가면 올라가겠지 워스트에 손꼽히는 일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정말 별로였다. <나라 없는 사람>도 딱히 강한 인상은 없었는데, 이걸 읽으니 커트 보네커트도 나하고는 좀 안 맞는 작가, 때문에 더 읽지는 않을 듯한 작가가 되어 버렸다. SF적인, 비현실적인 요소가 일단 별로였다. 물론 드레스덴 폭격의 상흔을 ‘제정신’으로 ‘제대로 된 플롯’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방식이겠지만, 이게 심하다 보니 오히려 장난처럼 느껴지더라. 게다가 ‘그렇게 가는 거지’의 끊임없는 반복도 지겨웠다!!!! 유머러스하다는 면도 동의할 수 없다. 왠지 유머러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유머 같다고나 할까. 극사실주의적인 소설도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황당무계한 작품도 역시 매력이 없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 책의 미덕이라고 꼽는 점들에 대해 난 도저히 공감 안 가더라. '천재'작가가 탄생했다는 둥, '이토록 기막히게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이런 문구들. 다 공감할 수 없다.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아홉살짜리 꼬마가 주인공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어하고 그러면서도 삶의 의미를 깨달아간다는 뭐 그런 내용인데, 도대체가... =_= 책 안에는 정말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파괴하는 시도들이 등장한다. 사진 이미지도 많이 사용되고, 빈 페이지로 그냥 있다던가, 페이지 하나에 한 문장 딸랑 들어간다던가, 글자들 위에 막 빨간 줄이 쳐 있다던가. 그런 시도들. 암튼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이런 독특한 시도들이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동의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는 어떤 감동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홉살 꼬마가 뭐 그렇게 현학적인 말들을 늘어 놓으면서 영악할 수 있을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주인공 꼬마한테 절대로 감정이입이 된다거나, 그럴 수 없었다는 것. 보통 성장 소설의 꼬마들은 나름 다 조숙하기도 하고, 똘똘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하지만 이런 애는 정말...... =_= 꼬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들도(일찍이 꼬마의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한 상흔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공감할 수 없고. 속사포 같이 쏘아 놓는 번지르르한 말들의 잔치 속에서 진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이 책 또한 보통은 베스트에 꼽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난 또 별로였을 뿐이고. 만약 내가 생태주의, 탈성장, 탈자본주의, 반소비문화를 다룬 책을 많이 안 읽은 상태에서 소로우의 <월든>을 읽었다면 이 책은 좀 더 다르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월든>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 및 소재를 다룬 책들을 많이 읽어왔던 터이고, 때문에 이제야 읽는 이 책은 당연히 뒷북처럼 느껴지더라. 게다가 난 소로우의 문체랄까, 고답적인 말투도 별로였다. 무엇보다도 책 곳곳에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는 소로우의 시선이 불편했다. 마치 그들은 바보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의 시선이랄까. 소로우 당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남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게 싫었듯이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도 당신만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보리스 비앙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터라 책 표지가 이런 줄은 몰랐다. 표지 참 비호감이다.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우선 봤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인종 문제, 계급 문제를 다룬 20세기 프랑스 누아르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 소설. 그런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 않을까. 파격적인 성묘사와 여과 없이 드러나는 폭력적 묘사 등, 썩 기분 좋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인종 문제를 이렇게 다뤄야 했을까 싶다. 금발에 하얀 피부 등 거의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그러나 결국은 흑인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주인공은 백인에게 살해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기 위해 부잣집 백인 소녀들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과 무차별적 성관계를 맺고 잔혹하게 죽인다. 그런데 과연 ‘온당한 방식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같은 소재(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흑인의 정체성 및 인종 문제)를 다룬 넬라 라슨의 <패싱>과 비교해 보면 이 작품은 특히 더 형편없게 느껴진다.




보리스 비앙 <세월의 거품>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는 전혀 다른 소설이다. 낭만적인 로맨스를 다룬 작품. 워낙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작품에도 좀 기대를 걸고 읽기 시작했으나 시작하자마자 조금씩 뭔가 어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이 이상한 생쥐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닌가! 아놔-. 이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부잣집 도련님인 콜랭은 사랑에 대한 환상, 열정을 갖고 있던 중 클로에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클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콜랭은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클로에의 병도 참…. 가슴에 수련이 피는 병이라;;; 물론 비유적으로 ‘암’을 상징한다는 걸 읽는 사람은 대뜸 눈치 챌 수 있지만, 그냥 암이라고 하던가. 수련이 피는 병이 뭐니. 생쥐랑 이야기를 나누질 않나, 애인 가슴에서 수련이 피질 않나. 그걸 치유하기 위해서 방안에 꽃을 계속 갖다 놔야 하질 않나. 이런 모든 비현실적, 초현실적 설정이 나하고는 정말 맞지 않았다. 보리스 비앙은 아무래도 안녕,





마커스 주삭 <메신저>
대책 없는 희망으로 범벅된 책. 시민을 길들이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도덕책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할리우드 영화를 고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적당한 스릴러적 요소도 넣어야겠고,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도 넣어야겠고, 세상은 삭막하지만 지금 당신이 조금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좀 바꿀 수 있으리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착해 보이려고 아주 용을 쓴다. 아주 매력 없는 모범생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국 현대 소설에 대한 거부감도 심하지만, 이런 작품 읽다 보면 외국 현대 문학도 좀 함량미달, 수준미달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의 다른 작품인 <책도둑>도 읽어볼까 싶었는데,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이 책은 아마도 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사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 잘 팔린다는 소리. 그런데 난!! ‘사지마세요!’ 하고 뜯어 말리고 싶어지는 책이다. 작가가 철학 전공자다. 아는 것도 좀 많은 듯하다. 그런 사람이 소설을 썼는데 자기가 아는 철학과 지식을 몽땅 넣어보려고 기를 썼다. 그러니 소설에서 작가의 잔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중인물은 사라지고 작가만 남는구나. 게다가 근거를 알 수 없는 일본에 대한 절절 끓어 넘치는 애정은 정말 못 봐주겠더라. 작가가 일본을 사랑하면 혼자서만 조용히 사랑할 것이지 책에다가 이게 무슨 짓이야! 마커스 주삭의 <메신저>와 함께 외국 현대 소설에서도 멀어지게 만드는 강력한 책이다. 뮈리엘 바르베리 씨는 소설 그만 쓰고 그저 철학도로서 계속 나아가길 바란다.






한재호 <부코스키가 간다>
이 책은 순전히 '부코스키'에 대한 관심때문에 읽었다. 그렇다. '찰스 부코스키'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읽는 내내 ‘이 책을 왜 읽고 있나’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제2회 창비 장편소설상 수상작이라는데, 정말 ‘장편’썼다고 ‘장’하다고 상준 거 같다는 생각만 들더라. 우리나라 문학상에 대한 회의감이 다시 한 번 들었고, 이런 책에 주례사 비평해주는 사람들은 또 역시 뭔가 싶어서 욕 나왔고. 이래저래 한국 현대 소설에서 계속 멀어지게 하는구나 싶었다.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이런 몹쓸 자신감은 고전을 만나는 순간 바로 가차없이 박살이 난다.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혁명을 팝니다>
이 책의 몇몇 주장에는 심히 동조할 수가 없다. 읽다 보면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표지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일회용 커피컵에 인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혁명의 상징이었던 체 게바라가 커피와 함께 소비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현상을 비판한다. 이른바 사회에서 일탈적 행위로 간주했던 급진적, 혁명적인 반문화(저항문화) 현상(히피나 펑크족 등등)이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그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비현상으로만 남는 것을 비판한다. 혁명과 저항정신은 사라지고 패션과 장신구만 남았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체 게바라의 정신보다 그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때문에 이런 반문화(저항문화)는 계속 해서 또 다른 소비문화를 만들 뿐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행동을 멈춰야 하는가? 과도한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동감한다. 그러나 소비물결을 타고 저항문화가 메인스트림에 오르면서 발생(한)하는 장점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기타노 다케시 <위험한 일본학>
일본 사회에 대한 쓴 소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아저씨가 머리에 똥이 가득 찼나 싶더라. 일본이 불행한 이유를 정치, 사회, 가정 편으로 나눠서 꼬집고 있는데 근거도 빈약하고, 노망난 늙은이가 추한 잔소리를 한다는 느낌만 들더라. 특히 가정 편에서 아이에게 예전과 달리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그래서 히키코모리가 생겼다나)이 가정이 불행해지는 원흉 중 하나라는 소리는 어이가 없더라.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모든 악의 근원이 민주주의, 남녀평등교육 때문이란다. 일본 사회 전체가 여성, 어린이 중심의 사회가 되다보니 일본이 힘이 없어지고 불행해졌다는데 더 말해 무엇 하리. 평소 이 노친네, 마초에 완전 가부장제 노예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지 정체를 밝히니 그처 황망할 뿐. 그나마 기대했던 유머조차 없어! 최악의 책이다. 이보게, 다케시! 일본이 불행한 이유는 당신 같은 꼰대들이 많아서라네.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에 관한 이야기는 더 흥미를 끈다. 이 사람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어떤 책에서 감명을 받았을까, 혹은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 책인데, 별로였던 책은 없을까 등등. 호기심이 반짝한다. 하물며 책이 좋아 서점에서 일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란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기대를 했는데…. 실망스러웠다.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라?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솔직히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책에 관한(특히 도서관이나 책, 서점에 관한) 역사를 다룬 다른 책에서 다 볼 수 있는 그런 흔해빠진 이야기가 계속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부분도 딱히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나마 서점에 가는 이유, 서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흥분이랄까, 편안함을 다룬 구절은 꽤 공감 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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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0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리스 비앙의 품절된 책을 중고매장에서 사려다가 표지 보자마자 포기했습니다.. ㅎㅎㅎ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도덕주의자>를 억지로 읽었습니다. 책 속에 맞는 말도 있었지만, 읽는 내내 꼰대스러운 느낌을 참을 수 없었어요.

잠자냥 2017-04-04 12:53   좋아요 0 | URL
네 표지가 정말 ㅎㅎ 저도 만일 도서관에서 표지를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뒀다면 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하하하.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는 괜찮은데.... 책은 읽고 좋았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ㅠㅠ

Falstaff 2017-09-04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뮈리엘 바르베리의 <맛>을 맛나고 읽고 그이의 다른 책 어떤 걸 살까하고 쇼핑 중에 ㅎㅎㅎ 깜짝 놀랐습니다. 아, 그래요?
그래서 패스!
고맙습니다. ㅋㅋㅋㅋ

* <제 5 도살장>은 재미있던데요. 착상이 기발하잖아요.
* <월든>은 백퍼 공감. 저도 다 읽느라 죽을 뻔했습니다.
* <세월의 거품> 역시 다 읽고 어디가서 얘기도 못했습죠. 도무지 기억이 안 나서요. ㅎㅎㅎㅎ

잠자냥 2017-09-04 14:28   좋아요 0 | URL
요즘 커트 보니것의 단편집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를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5 도살장>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ㅋㅋㅋㅋ

<맛>은 오히려 검색해서 정보를 살펴보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ㅎ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제가 팔아버리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드릴 수도 있는데- 아, 저는 구버전 책으로 읽었어요. 근데 집에 어디 있나?;;;; 암튼, 문학동네 새로운 출판 버전은 번역이 더 낫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쵸쵸 2019-07-0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너무 너무 좋아요. 덕분에 <고슴도치의 우아함> 거르고 갑니다. 감사해요. ^^

잠자냥 2019-07-09 09:52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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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단순히 샤일록이 아주 악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이제와 다시 읽으니 샤일록이 왜 그리 독해졌을지 이해가 되더라.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란 이유로 그토록 멸시와 조롱받다니 누군들 선량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재산몰수로도 모자라 끝내 샤일록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그들의 횡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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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팝니다 -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고백
미시마 유키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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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를 내걸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인지 도저히 몰랐을 듯. 딱 ‘괴작‘이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지만 이야기가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재미가 덜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은 빛나지만 그의 타 작품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진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불확실성‘임을 확인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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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12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재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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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참 신기한 작가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나는 그가 위대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딱히 그의 작품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의 수다스러운, 끊임없이 지껄이는 서술 방법은 때때로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점은 시간이 좀 지나면- 즉 그의 작품을 읽은 지가 좀 되면- 그 미친 듯한 지껄임, 수다가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언젠가는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을 것 같다. 늘 느끼는 점이지만, 읽고 나면 정말 아, 이런 미치광이 같은 작자를 봤나, 아, 이런 도스토예프스키! 하고는 감탄해마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마치 내가 체호프 작품을 사랑하듯이 아끼지는 않지만 그의 재능, 그의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다.

이번에 읽은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또한 그랬다. 이 작품은 사실 잘 몰랐다면 아주 나중에 읽었을 법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크게 알려진 것은 아니고, 더욱이 미완성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함께 사두었던 <악령>이나 <백치>보다도 먼저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알라딘 이웃의 책 소개 때문이었다. 요즘 나는 그분 블로그에서 좋은 책을 많이 소개받는다. 엄청나게 책을 읽는(그것도 내 취향 세계문학) 분이라서 요즘 책을 선택할 때 그분 포스팅을 많이 참고한다. 암튼 그분이 소개하기를,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을 1인칭 화자로 삼았다는 점, 그리고 미완성이라는 점 등등. 나는 여기에 솔깃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인칭 소녀 시점으로 빙의하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무척 궁금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처럼 도스토예프스키도 여학생, 소녀에 완전히 빙의할 수 있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고도 나는 이미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수다, 그의 지껄임,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미치광이 같은 이들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예민함, 신경증에 시달리는 듯한 이 나약하고 가련한 병적인 인물들. 아, 역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들어왔구나 단박에 알 수 있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일들의 나열일 뿐인데 다음 장이 너무나도 궁금해지는 이 흥미진진함! 그러다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쳤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웃어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인간, 천재야 정말. 소녀 빙의 제대로 하네!

책을 덮을 즈음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매우 궁금해서, 이 작품을 그냥 이대로 미완성으로 끝내버린 도스토예프스키를 저주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다음 편이 몹시 궁금한데 더 이상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 웹툰에 악플을 달고 싶은 심정이랄까. 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의 다음 이야기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해서, 뒤늦게라도 발견되어 세상에 짠! 나타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라보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크게 3부로 나뉜다. 첫 번째 이야기는 화자인 나, 즉 '네또츠까'가 부모와 함께 살던 시절 이야기로, 그녀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사실 이 첫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네또츠까의 계부인 음악가 ‘예피모프’라고 볼 수 있다. 이 인물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인물들이 거의 그러하듯이 어딘가 비뚤어졌고 일그러졌다. 재능은 좀 있는 음악가이지만 자기 재능을 지나치게 믿는지 오만방자하고 턱없이 게으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재능을 의심한다 싶으면 자존심이 뒤틀려 어쩔 줄을 몰라한다. 네또츠까의 엄마와 결혼하게 된 이유도 그녀가 갖고 있던 얼마간의 돈을 노렸기 때문이었고, 그 돈을 탕진하자 그는 아내를 구박하고 못살게 군다. 자기 재능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도 아내 탓이며, 아내와 함께 하는 구질구질한 삶이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고 있다고 모든 것을 아내 탓으로 돌린다. 네또츠까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며 때로는 단순한 관찰자로, 때로는 그 자신도 그런 분위기 속의 피해자로, 또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함께 지낸다. 그러면서 서서히 계부를 향한 사랑이 싹트는데 이 애정은 어딘가 병적이다. 금세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아이처럼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2부에서는 드디어 네또츠까가 주인공으로서 전면으로 등장한다. 어느 공작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 그녀는 이번에는 공작의 딸 '까쨔'와 기이한 애정을 나누게 된다. 수줍음 많고 조용하며 어딘가 억압된 듯한(그럴 수밖에 없는) 네또츠까에 비해 까쨔는 도도함과 오만함, 철없는 아름다움으로 똘똘 무장한 소녀이다. 네또츠까는 이 작은 악마 같은 까쟈를 보는 순간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무장해제 되어버리고 까쨔의 포로와도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까쨔는 그런 네또츠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완전히 ‘밀당’의 선수가 아닌가!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애달픔, 그것을 즐기듯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하는 또 다른 한 소녀. 2부에서는 이 두 소녀에 완전히 빙의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 사춘기 소녀들의 불안한 심리와 격정 어린 애정 또는 우정이 무척 실감 나게 그려진다. 그런데 2부에서도 네또츠까의 애정은 어딘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묘하다.

그 기이한 애정은 3부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옮아간다. 까쨔의 언니이자, 공작 부인의 큰 딸인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공작 부인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까쨔와는 아버지가 다른 셈이다. 또한 까쨔와는 정반대 성격으로 조용하고 세심하며 온화하다. 네또츠까는 알렉산드라의 보호 아래 8년을 지내면서 1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르도록 성장한다. 알렉산드라와의 관계도 조금은 병적이지만 그럼에도 까쨔와의 관계처럼 광적이지는 않다. 알렉산드라의 따뜻한 애정 아래 엄마로부터 채우지 못한 애정을 섭취하듯 네또츠까는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간다. 그런데 이 3부의 큰 사건은 알렉산드라의 비밀을 네또츠까가 우연히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1849년에 나온 판본에는 1, 2, 3부에 저마다 <유년 시절>, <새로운 인생>, <비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고 하니, 3부에서 그 ‘비밀’은 매우 중요한 소재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네또츠까가 이 비밀을 알고부터 그녀의 병적인 증상은 한층 심화된다. 이 ‘비밀’이 조금씩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끝난다. 때문에 그 다음이 몹시 궁금하지만, 궁금증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살리지 않는 한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모든 인물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으뜸인 인물은 네또츠까와 그녀의 계부 예피모프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재능을 망쳐버릴 만큼 병적이고 예민하다. 특히 우울하고 조용한 소녀로만 보이는 네또츠까가 어느 상대에게 애정이 꽂혀버리면 그 열정에는 누구라도 뜨겁게 데여서 다쳐버릴 것만 같다. 그럴 정도로 위태해 보인다. 이 소녀는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되어버린 것일까? 책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네또츠까의 인생을 돌아보면 ‘결핍’과 ‘공허’가 주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도 없이, 엄마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예피모프를 만난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 그의 인정을 받는 순간 네또츠까는 새로운 애정에 눈을 뜨고 거의 집착적으로 그 사랑에 매달린다. 이 과정은 2부와 3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진 상태에서(결핍) 까쨔를 만나고, 그 새로운 애정의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그런 까쨔가 사라진 상태(또 다시 결핍)에서 이번에는 또 다른 애정의 대상 알렉산드라를 만나는 것이다. 공허함이 그 불쌍한 소녀를 그토록 광기어린 열정의 상태로 몰아간 것은 아닐까? 네또츠까가 이런 결핌과 채움의 반복 과정에서 어떻게 자라났을지 끝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쉽지만, 도스예프스키는 인간에게 결핍이나 열등감 또는 자기기만이 어떤 광적인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탁월하게 그려나간다. 그렇기에 미완성일지라도 이 작품은 이 자체로도 대단하다. 그리고 네또츠까는 문학 작품 속 어떤 여성 인물보다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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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12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재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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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작인줄 알면서도 여성화자로 썼다는 점에 끌려서 읽었다. 이 흥미로운 작품이 미완성이라 안타깝고 소녀에서 십대로 넘어가서까지 어쩜 그리 심리 묘사가 빼어난지 혀를 내두른다. 인간의 이상심리를 이토록 잘 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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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3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완성이라서 아쉬운 작품입니다. 작품의 소재와 전개가 독특했어요.

잠자냥 2017-03-31 10:2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너무나 궁금한 순간에 끝나버려서 ㅠㅠ 안타깝습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