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이라고 해봤자 큰 빌라 한 채가 들어설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곳이다. 그런데도 나름 나무도 우거졌으며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벤치도 있고, 비도 피하고 그늘도 만들어주는 작은 정자도 하나 있다. 운동 기구도 몇 개 있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근처 주민들은 헬스클럽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공원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공원이 내 눈에 띈 이유는 순전히 고양이 때문이다. 이사 오고 나서부터 이 공원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곳은 녀석들 천국인지 여러 마리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원 녀석들을 꽤 챙겨주고 있었다.

공원을 지날 때 보면 샌드위치, 김밥, 참치 캔, 소시지, 우유 등등 사람들이 놓고 간 음식들이 언제나 보였다. 물론 그중에는 고양이 사료도 있고, 물도 누군가가 꼬박꼬박 챙겨주는 것 같았다. 나도 가끔은 고양이 사료를 놓기도 하고, 벤치에서 식빵 자자세로 앉아 있는 녀석들을 보게 되면 캔 하나를 따서 주기도 했다. 때는 가을이라 녀석들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겨울이 찾아오자 걱정이 되었다. 이 추위를 어찌 견딜까. 그런데 놀랄만한 일이 생겼다. 수풀 사이사이에 누군가가 네모난 스티로폼 상자에 녀석들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을 뚫어서는 놓고 간 것이다. 밥이라도 주러 가면 비척비척 녀석들이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걸 보니, 아주 따뜻하지는 못해도 지낼만 한 것 같았다.

지난 가을, 내가 녀석들을 처음 봤을 때는 흰 양말 신은 검은 고양이 둘. 치즈 냥이, 삼색이, 잿빛 꼬마 냥이, 턱시도 냥이 두 마리 이렇게 일곱 마리가 늘 보였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면서 녀석들이 드문드문 보이더니, 그중에 치즈 녀석과 잿빛 꼬마는 요즘 아예 보이지 않는다. 꼬마는 내가 좀 예뻐했던 녀석이라 어찌된 일일까 더 걱정이 된다. 부디 조금 더 살만한 곳에서 자리 잡았기를 바란다.

요즘에는 턱시도 냥이 두 마리 중 우리집 고양이 닮은 녀석과 삼색이 이렇게 둘이 거의 안방마님처럼 늘 식빵을 굽고 있다. 이 녀석들 가운데 턱시도 녀석은 사람을 참 잘 따른다. 내가 만져줘도 그릉그릉대고, 밥을 주면 밥보다도 사람이 좋은지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곤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녀석은 나만 예뻐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에 보니, 웬 여자가 녀석을 부둥켜안고는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통통한 여자 아이가 '돼지야~' 하면서 녀석을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한번은 밤늦게 밥을 주러 갔더니 녀석이 보이지 않아서 벤치 근처에 놓고 가려고 했는데, 웬걸, 벤치에 앉아 있던 한 여자 품에서 녀석이 야옹하면서 밥을 보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지난번에 녀석을 안고 있던 사람과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퇴근 후 집에 올 때쯤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늘 그 공원 벤치에서 밥을 먹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내려온 듯하다. 딱히 많은 돈은 쓰지 못하고 편의점 도시락을 녀석하고 나눠먹는 것 같다. 그 남자가 밥을 먹을 때면 늘 그 옆에는 고 녀석이 식빵을 구우면서 앉아 있곤 한다. 남자가 자기가 먹는 음식을 주기도 하는데, 녀석은 밥을 먹기 보단 멀뚱멀뚱 그를 바라본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동안 녀석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을 본 게 족히 네다섯은 된다. 초등학교 아이부터 20대로 보이는 긴 머리 여자, 안경 쓴 단발머리 여자, 30대는 훌쩍 넘은 듯한 여자 등등. 도시락을 먹으며 녀석에게 말을 거는 남자도 두 셋은 봤다. 어느 중년 남자도 밥을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허허 웃으면서 녀석에게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출근 할 때도 녀석은 벤치에 앉아 식빵자세로 느긋히 앉아 있다. 내가 부르면 멀리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꼬질꼬질하고 썩 예쁜 고양이는 아니다. 유치원 가는 꼬마들이 녀석을 보고는 “엄마 저기 고양이 응가해요. 응가! 혼내주세요.” 소리 지르기도 한다. 그래도 녀석은 지그시 앉아 햇살을 즐긴다.

나는 그 공원에 자리 잡은 고양이들이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서 그나마 다른 길냥이들보다는 견디기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두운 밤이나 해질 무렵 벤치에 앉아 녀석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돼지야, 돼지야 녀석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초등학생도, 공원에 앉아 차디찬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청년도, 녀석을 무릎에 놓고 그 따뜻한 체온을 느끼던 단발머리 아가씨도. 어쩌면 녀석으로 인해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공원의 그 녀석이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문득, 고양이를 좋아하는 작가들이 떠오른다. 지금 선뜻 생각나는 이들로 헤밍웨이와 찰스 부코스키가 있다. 찰스 부코스키는 좀 뜻밖이었는데,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에 대한 헌사이자, 고양이를 키우며 힐링 받는 찰스 부코스키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고양이를 키우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부코스키의 이야기에 절로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하게 될 것이다. 고양이를 찬양하는 우스꽝스러운 시도 있고, 집사로서의 삶을 담담히 묘사한 에세이도 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부코스키가 고양이를 안아들고 행복해하는 표정이다. 나는 결단코 그의 다른 사진에서 이런 웃음이랄까, 온화한, 행복한 미소를 본 적이 없다. 고양이는 정말로 그런 힘이 있다. 부코스키는 고양이의 그 치유의 힘을 알았기에 그토록 곁에 많은 녀석들을 두고 있지 않았을까? 아, 물론 헤밍웨이도.




고양이를 안고 흐뭇해하는 찰스 부코스키 -<고양이에 대하여>에서 발췌


'동물들은 영감을 준다.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르니까. 걔들은 자연의 힘이다. 텔레비전은 5분만 봐도 메스껍다. 하지만 고양이는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볼 수 있다. 은총과 영광밖에 보이지 않는다. 본연 그대로의 훌륭한 생명.' -찰스 부코스키, <고양이에 대하여> 중






부코스키가 그린 고양이 그림 ㅋㅋㅋㅋㅋ - <고양이에 대하여>에서 발췌



이것들,
하는 짓이라고는 뛰어다니고, 먹고, 자고, 똥싸고
싸우는 것밖에 없었지만
어떨 때는 얌전히 앉아서
나를 쳐다봐
그 눈으로
내가 이제껏 본 어떤 인간이 눈보다 훨씬 아름다운
눈으로.
착한 애들이야. 

 - '너를 위한 자연 시' 중-


고양이에게 가장 좋은 점은
기분이 나쁠 때, 몹시도 나쁠 때----
고양이를 한 번 쳐다보면
걔들이 그러듯이 열을 확 시킬 수 있다는 것
그건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지켜나가야 할 교훈. 그리고
고양이 다섯 마리를 보면
다섯 배 낫지.

슈퍼마켓에서 참치 통조림을 수십 개 사야 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어. 그건 건드릴 수 없는
위엄을 위한 연료이니까---- 근사하고
매끄러운
좋아의 에너지
특히 모든 게 너무 과하다 싶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해
이렇게 너무 많은 생각이 들 때.

-'딱 좋군' 중-


나는 차로를 올라갔다.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퍼져서 똥을 싸고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고양이가 되고 싶군.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고 가만 앉아 밥을 기디라고, 엉덩이만 핥으면서 빈둥대고. 인간은 너무 비참하고 화만 내고 외골수라서.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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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고양이처럼 빈둥거리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동물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사람만 없다면요. ^^;;

잠자냥 2017-05-24 14:37   좋아요 0 | URL
좋은 집사를 만나서 빈둥거리면서 사는 것이죠! 하하하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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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성공한 삶을 살아온 한 남자의 죽음. 그 죽음을 접하는 그의 가족, 친지, 동료들의 온갖 반응. 이반 일리치 그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다. 그럼으로써 죽음과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빼어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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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사생활 -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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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는 '우리'라는 단어에 숨어있는 놀라운 비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들이 나에 대해, 나의 인간 관계와 심리상태에 대해 이토록 많은 것을 말해 준다니! 흥미로운 내용이 무척 많고 글쓰기와 연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연설문이나 시나리오, 문학 텍스트를 분석한 내용들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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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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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조금은 어려운 이름의 이 작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쓴 사람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어쩐지 선뜻 구미가 당기지는 않아서 여태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다. 최근에 출간된 <알렉시 / 은총의 일격>으로 드디어 유르스나르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 얇지 않은 두께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는 가볍게 도전해볼 마음이 들게 했다. 책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허라? 나는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책을 살 때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일단 작가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아, 이런 내용이었어? 하고 살짝 놀랐다. 전혀 뜻밖의 내용이랄까. 그러고 나서 읽기 시작하니 그 서술법에 또 한 번 놀란다. 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알렉시’의 머리말에 앙드레 지드의 <코리동>을 언급한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1929년에 출간되었다. 문학과 관습에서 그때까지 금지의 낙인이 찍혀 있던 한 주제가 수 세기 이래 처음으로 온전히 글로 표현되었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주제가 오늘날 문학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의도적으로 이용되기까지 하면서, 완전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획득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이라 해서 알렉시의 내밀한 문제가 예전보다 덜 고통스럽고 덜 비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 머리말을 읽고 대충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어느 동성애자의 고백이다. 그것도 완전히 내밀한 고백. 알렉시는 아내 모니크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로 그는 아내에게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성적 취향이나 그로 인해 괴로웠고 고통 받았던 삶을 조용하지만 담담히 고백해간다.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이 소설에는 단 한번도 ‘동성애’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동성을 사랑했다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의 고백을 읽어나가면서 알렉시의 내밀한 삶을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상당히 매혹적이다. 독자는 알렉시의 아내 모니크의 입장에서 그의 편지를 읽게 된다. 누군가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이토록 진솔하고도 절절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가 하는 고백이 어떤 내용이든 무척 마음 아플 것 같다. 하물며 함께 살았던 아내라면 자신의 성적 취향의 자유를 찾아 떠나야겠다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그 마음이 어떨까. 그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까? 알렉시의 편지를 읽노라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 섬세하고 나약한 영혼이 숨막힐 듯 경직된 사회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사느라 고달팠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한없이 연민이 들 것 같다. 알렉시가 그려낸 모니크라면 분명 그런 심성을 지녔을 듯하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왜 단 한 번도 이 작품에서 ‘동성애’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을까? 그저 에둘러서 ‘본능’이니 ‘기질’이니 ‘성향’ 또는 ‘과오’ ‘죄’ ‘악덕’ ‘위반’과 같은 단어들로 동성애를, 알렉시의 성적 취향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토록 불명확한 서술 방식 때문에 자칫 이 남자가 정말 남자를 사랑했다는 소리인가? 진짜 동성애자란 말인가 아닌가?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빗대어 표현하는 걸까? 독자조차 헷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 어떤 이유로도 그 금기의 사랑을 직접 말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머리말에서 유르스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만 해도 알렉시와 모니크의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육체적 욕망의 현실이 금지들로 가로막혀 있는 한 앞으로도 이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금지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언어의 금지일 것이다. 언어 속의 장애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큰 거부감 없이 교묘히 피해 가지만, 양심적인 사람들과 순수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장애물에 걸려든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언어가 없음을, 언어조차 금지되어 있음을,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성애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결국 장애물 또는 덫에 걸리고 마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지.

이 기나긴 편지의 마지막 또한 무척 진솔하게, 그렇기에 가슴 아프게 끝맺는다. ‘당신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 당신에게 사죄하리다.’라고. 알렉시 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자신의 도덕과의 화해가 부디 성공할 수 있기를 어쩐지 바라게 된다. 이토록 조심스러우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편지라면 그것을 읽는 그 누구라도 그의 투쟁이 ‘공허한 투쟁’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게 되리라.

또 다른 작품 ‘은총의 일격’도 성격이 비슷하다. 이 작품은 에릭과 콘라드, 소피 세 젊은이의 이야기이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삼각관계를 말한다. ‘은총의 일격’에도 ‘동성애’라는 단어는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는다. 에릭이 콘라드에게 빠져있고 그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또한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그 감정은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소피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콘라드의 누이인 소피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것이 콘라드를 닮은 그녀이기에, 콘라드의 일부분인 그녀이기에 그러한 것이지 그녀를 여자로서, 또는 연인으로서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소피는 자신을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이성으로서, 연인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에릭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희망고문을 당하면서 애를 태운다. 그리고 이 어긋난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즈음에도 ‘알렉시’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무척 시리다.

<알렉시 / 은총의 일격> 두 작품을 읽고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게 홀딱 반해버린 나는 집에 있던 창비 세계문학단편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프랑스편>에서 그녀의 단편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이 세 작품만으로 확신이 섰다. 대단한 작가구나! 이 작가를 이제야 읽다니! 하는 심정. 세 작품 모두 고혹적이다. 문장의 깊이나 어조도 우아할 뿐만 아니라 무척 지적이고 서정적이다. 감정을 절제한 서정시를 읽고 있는 기분이랄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도 사두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다. 너무 늦게 만났지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올해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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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2019-11-2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서 이번에 독서 모임을 이 책으로 준비했습니다. 리뷰가 많지 않아서 찾아보던 중 잠자냥님 리뷰를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책 외에도 <백년보다 긴 하루>라던지 찾는 책마다 잠자냥님 리뷰가 보여서 블로그가 궁금해서 들어왔습니다. 저는 네이버에서 활동을 하긴 하지만 자주 들러서 좋은 책에 대한 정보 얻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11-24 22:57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아름답죠!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책 만나기 쉽지 않아서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제 리뷰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_^
 
개를 키우는 이야기 / 여치 / 급히 고소합니다 루켓유어셀프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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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키우는 이야기‘는 큭큭 웃다가 뒤에 좀 뭉클하고 ‘여치‘는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섬세한 여성 화자 시점으로 읽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 또한 다자이 문학 특유의 감성이다.‘급히 고소합니다‘는 ‘유다의 고백‘으로 많이 소개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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