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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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아껴가며 읽었다. 자신의 치부마저 숨김없이 드러낸 치버의 일기. 외로움, 절망,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 등. 작가이자 인간 존 치버를 아주 가까이서 느껴본다. 외로움 속에서도 끝까지 문학의 힘을 믿고 글쓰기에 노력한 그의 삶이 묵직한 감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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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 뭐 비단 알라딘뿐만이 아니다. 블로그 같은 곳에서 즐겁게 도서 리뷰, 서평을 읽다가 맨 끝에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라고 밝히는 문장을 읽으면 김이 팍 세는 느낌, 나뿐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그런 문장을 맨 앞에 적어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정말 공짜는 없다. 공짜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에 비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정말 자유로운 리뷰가 될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값 부담없이 신간 도서를 읽고자 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출판사 제공 책 리뷰'라는 그 사실을 글 맨 뒤가 아니라 맨 앞에 적어놓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난 그런 글을 읽느라 헛된 시간을 쓰지는 않을 텐데..... 아니면 그런 사실을 감안해서 읽어보던가 하겠지. 에휴, 아침부터 낚였다. 앞으로는 낚이고 싶지 않다. 정말.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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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그런 걸 왜 적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글귀가 있으면 오히려 신뢰도가 더 떨어진다는 걸 출판사에서 모르는 걸까요? 제가 출판사라면 제공 받아서 썼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할 것 같은데요....

잠자냥 2017-12-08 10:25   좋아요 0 | URL
ㅎㅎ 그게 아마 제가 잘은 몰라도, 밝혀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법적으로 문제가 된다거나 하는?).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블로그 같은 곳 보면 어떤 제품이나, 여행기 등등 읽다 보면 꼭 마지막에 ‘어디서 제공 받은 상품으로 블라블라‘ 이런 문장이 요즘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런 사실을 밝히면 그 순간, 신뢰도가 팍 떨어지는데, 굳이 밝히는 건 분명 이유가 있겠죠.... 근데 맨 처음부터 그런 문장을 넣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100% 신뢰하지 못하니까 맨 끝에 ‘교묘‘하게 적어두는 것 같습니다. -_-;;

잠자냥 2017-12-08 10:47   좋아요 0 | URL
궁금해서 혹시 하고 찾아보니,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추천, 보증 등에 관한 표시. 광고 심사지침‘ 개정으로 블로그 등에서 대가성 리뷰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서 권고한지 꽤 되었군요(2011년부터 시행한 듯합니다).

아래와 같이 밝혀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예)

경제적 대가 받은 사실을 표시하라는데 표시수준이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지요?

ㅇ 공개문구를 보고 소비자들이 광고임을 알 수 있도록 대가 받은 사실을 객관적․직접적으로 표시하시면 됩니다.

- 또한,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용어보다는 소비자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공개문구를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 공개문구 예시 >
․이 추천글은 A(상품)사의 광고이다.
․B사로부터 대가를 받은 추천글이다.
․C사로부터 해당제품을 무료로 받았다.
․D사로부터 원고료를 받았다.
․E사로부터 해당제품 공동구매 주선 대가로 일정금액을 받았다.


출처는

http://www.ftc.go.kr/solution/skin/doc.html?fn=5b08a1d6feecb30c5546d5a1960d1916e2ccfd6c66600ce389a1ba9510048270&rs=/fileupload/data/result/news/ann/2011/

syo 2017-12-08 10:46   좋아요 0 | URL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손해날 일을 왜 하고 있나 했더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네요 ㅎㅎㅎ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잠자냥 2017-12-08 10:4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도 덕분에 궁금했던 점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ㅎㅎ

cyrus 2017-12-08 1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출판사 제공 사실’을 숨기는 리뷰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어떤 출판사는 저에게 ‘출판사 제공 사실’을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리뷰를 써달라고 제안한 적 있어요. 출판사의 부탁이 탐탁지 않아서 리뷰 쓰는 것을 포기했어요.

잠자냥 2017-12-08 12:19   좋아요 0 | URL
오 그런 일도 있군요! 그런 경우에 비하면 제공 사실을 알리는 건 양심적이네요....

2017-12-08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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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만 봐도 아, 이 책은 경제성장을 비판하는 책이겠구나, 추측해 볼 수 있다. 맞다.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을 조목조목 집어가는 내용들이 어떤 면에서는 꽤(?) 충격적이다. 이 책 자체가 전복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읽다보면, 어쩐지 과거 불온 서적이라고 명명되었던 어떤 사회과학서적의 이론들과 맞물려져 있는 듯 하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도 있고, 어떤 지점은 그래서 모두 ‘아나키스트’가 되자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게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자체에 대해서도 이 책은 처음부터 이렇게 지적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될수록 무시하고 목전의 돈벌이에 전념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상식’이라고 생각해온 상당수의 개념들이 절대로 ‘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생각들 때문에 ‘도저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이구나. 하는 '앎' 때문에 괴로움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저자는 그런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작은 소명 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엄청 ‘괴롭고’ 있으니 이 책은 내게는 소명을 다한 셈인가?

20세기에도 그렇고, 21세기도 그렇고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 되어서 전 세계적인 헤게모니로 군림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나치나 레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등이 모두 공유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중 어느것이 경제발전을 가장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에는 20세기의 이들 주요한 이데올로기 간에 의견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21세기에도 계속된다면, 모두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기다.

‘발전’이라는 말, ‘세계화’라는 말의 등 뒤에서 교묘히 감춰진 채 자행되는 ‘착취’를 사회 구성원들 자체가 스스로 ‘착취’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갈수록 무감각해져서. ‘착취’의 대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노동력의 대가로 돈을 받아 별로 쓸모도 없는,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고 정신을 갉아먹는 물건들을 소비하는데 쓰여지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

돈을 벌지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또는 병이라도 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공포가 기본적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 저자는 이러한 공포가 사회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안전구조가 취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어쩌라고? 대안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이 제안한 대안은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소비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인 ‘인재(人材)’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고, 소비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경제인간에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정작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들은 상업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사라, 사라, 외치는 물건들만이라도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지름신’이나 ‘뽐뿌질’ 같은 인터넷 용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SNS나 블로그 등등 남에게 보여주는 삶이 지배적인 생활이 되면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지르는 것’ ‘지른 항목’ 등등의 폴더까지 만들어 가면서서 무의미한 소비, 사지 않아도 될 것들을 산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런 ‘지름’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상층 지배계급에게 노동력은 더욱 더 착취 당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나 또한 이 지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가장 충격 받았던 것은 원주민들이 일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가져야 할 것이 없었기에, 기본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먹을 것 등등만 있으면 되었기에, 그들은 돈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한들 하루 서너 시간 이상, 아니 열 시간 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삶은 견디지도 못했다(그러니 총과 칼,무기를 앞세워 강제로 노예를 삼아 노동력 착취를 자행한 것이다).


그럼 그들은 남는 시간을 무엇을 했느냐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등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력 넘치는 하루 하루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배고프면 사냥하고 고기 잡아 먹고. 남는 시간은 다시 ‘유희’와 함께 하루를 만들어가고. 그랬던 원주민이 거의 씨가 마른 까닭은 하지 않았던 일을 강제노역 당하면서 스스로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해 병들어 죽은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면서 대체 뭘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채,그렇게 살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지고, 타인에게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 공포감 때문에 계속 일한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타인과 보조 맞추기 위해 사고, 지르고, 소비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다시 메우기 위해 또 일하고, 일한다. 그것이 모두 파이가 커지면 나눠먹는 조각도 커질 것이라고,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이 경제성장, 발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환상’을 계속 부추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진실로 풍요로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돌아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조금 덜 쓰고, 나 스스로를 위해 즐거워질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갖도록 하자. 그게 진짜 ‘성장’이고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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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 땅에서 엄연히 인기(?) 작가가 된 줄리언 반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1년 전이다. 그때도 딱히 빠르게 안 편은 아니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당시에도 유명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 역사>가 아니라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이라는 작품으로,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된 한 남자가 질투와 망상에 시달리는 내용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또 다른 작품을 빌려 읽게 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내 말 좀 들어봐>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그대로 반스의 팬이 되고 말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때문에 ‘이 사람의 작품은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럴 정도로 이 책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그 무렵 나는 책 읽기 슬럼프 시기였는데, 반스 때문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린책들에서 속속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나는 그 책들을 하나씩 사 모으면서 기뻐했다. 이제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반스의 작품들도 거의 절판 또는 품절이니, 세월이 또 그만큼 흐른 셈이다. 요즘은 열린책들 대신 다산책방에서 반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열린책들에서 발간했던 그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내 말 좀 들어봐>나 그 후속작이었던 <사랑, 그리고>도 그중 하나이다. 줄리언 반스는 예술 작품이나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비틀어 쓰는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그만의 글쓰기 스타일이 독자를 살짝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봐>나 <사랑, 그리고>는 반스의 작품 가운데 그 ‘비틀어 쓰기’가 좀 덜 한, 그래서 가장 읽기 수월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두 작품은 ‘사랑’이야기이며, 그것도 삼각관계, ‘불륜’ 이야기다. 그런데다가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참 수다스럽게도 풀어놓는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세 사람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털어놓고 있으니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내 말 좀 들어봐>를 읽을 때,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스튜어트’에 심하게 감정 이입을 할 것이다. ‘올리버’는 ‘스튜어트’와 ‘질리언’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사랑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참 사랑에 빠진 이들이 올리버를 좋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왜 질리언이 그 충직한 스튜어트대신 조금은 얍삽해 보이는 올리버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면 질리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더욱이 내가 기억하기로 스튜어트와 올리버의 가장 다른 점은 질리언의 '머리빗'을 대하는 태도였다. 올리버는 질리언이 그림 복원 작업을 하면서 종종 빗어 넘기던 그 이빨 빠진 머리빗을 보면서, 그 빗을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빗이 몹시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문제의 스튜어트는 그 빗대신 다른 빗을 사다 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이게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들은 보통 이런 두 가지 면을 보이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그게 이빨 빠진 머리빗일지라도) 사랑스럽고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경우와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물건이나 행동 가운데 자신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새로 사주던가 해서라도 바꾸길 바라는 경우 등등. 당신이라면 어떤 사람에게 더 애정이 가겠는가? 아마도 질리언은 자신의 이빨 빠진 빗마저 사랑한 올리버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내 말 좀 들어봐>는 이렇게 ‘사랑’의 여러 모습을 세 화자 모두에게 공감이 가게끔,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해되게끔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내 말 좀 들어봐>를 읽고 나서 줄리언 반스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 정보를 찾다 보니, 후속편도 있는 게 아닌가! 주인공들의 10년 뒤 이야기라는데, 아 정말 궁금한 거다. 그때 당시, 번역본은 아직 안 나오고 영어판과 불어판만 판매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또 참지 못하고 열린책들 홈페이지를 찾아가서는 내 생애 처음으로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독자가 편집장에게’를 클릭하고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안녕하세요.
    귀사에서 줄리언 반스 작품을 계속 번역해서 출간하고 있기에 문의해봅니다.
    줄리언 반스 <내 말 좀 들어봐>의 후속 작인 <love, etc.>의 출간 계획은 없으신가요?
    꼭 읽어보고 싶어서 문의해봅니다.
    수고하세요;


그리고 놀랍게도, 거의 즉각적으로 답장이 왔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은 앞으로 두 권이 더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중 <사랑, 그리고>는 올해 안, 가을 무렵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줄리언 반스와 열린책들에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메일을 주고받은 게 2007년 7월이니 거의 10년 전이다. 문제의 <사랑, 그리고>는 2009년 1월에 출간된 것으로 기억한다.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서 샀던 나. <사랑, 그리고>는 조용한 밤, 혼자 살며시 펼쳐 읽어야만 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이유는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내게만 자신들의 은밀한 속내를 고해성사 해오기 때문이다.

<내 말 좀 들어봐>에서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자 악다구니를 쓰던 세 사람,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돌아온 것이다. 첫 등장부터 재미있다. “이봐! 오랜만이야. 10년 만이군! 많이 변했다고? 당신도 많이 변했다.”라며 아주 오래 전에 만났던 친구와 해후를 하듯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정말로 이 작품을 10년이 흘러 다시 읽은 사람이라면 감회가 새로웠을 듯하다. 스튜어트의 말처럼 변한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많이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랑이나 결혼, 인생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었던 전작처럼 속편인 <사랑, 그리고> 또한 단순한 ‘삼각관계 러브스토리’로 읽어버리기엔 그 깊이가 무척 깊다. 10년이 흘렀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1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책장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하다. 책을 읽으면 이들이 늙었구나 하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데 그저 흰머리나 불어난 체중 등 외모의 변화에 대한 묘사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런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도록 표현하고 있는 반스의 글솜씨에 감탄이 나온다. 물론 올리버는 여전히 속사포처럼 얄미울 정도로 현학적인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스튜어트는 변함없이 어딘가 꽉 막힌 답답한 느낌이고, 질리언은? 전보다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여자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올리버의 모습을 보면서 살짝 두려워지기도 한다. 올리버는 여전히 낭만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질리언이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 ‘Love, etc’에서 ‘etc’가 아닌 ‘Love’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그런 삶.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온(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스튜어트가 10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루어온 ‘etc’적인 삶(세속적인 성공)에 비해 올리버의 삶은 초라하고 볼품없다. 때문에 질리언의 재기 발랄함은 올리버의 낭만주의자적 삶 속에서 빛바래진다.

이쯤에서 ‘어, 그렇다면 이 이야기 너무 뻔한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연애와 달리 결혼은 현실이어서, 현실적이기 보다는 낭만적인 남편 올리버를 택해 살던 질리언이 결국 돈에 굴복해 불행하게 되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전히 10년 전에 그랬듯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며,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셋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첫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첫사랑의 배신에 상처를 받고 오랜 세월 삶을 그저 버텨온 남자 스튜어트, ‘가능한 한 많이 하는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세상의 우선순위는 오로지 사랑이라는 무일푼의 낭만주의자 올리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자신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을 뿐이라는 질리언. 이렇게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너무나도 다른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러브스토리가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의 고백이?

더 흥미로운 사실은 <사랑, 그리고>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도 어쩐지 끝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내 말 좀 들어봐 Talking It Over>를 1991년 발표한 뒤 2000년에 <사랑, 그리고 Love,etc>를 발표한 줄리언 반스. 2010년은 그냥 지나갔지만 혹시 2020년 최후의 속편 발표를 목표로 지금 열심히 쓰고 있는 거 아닐까? 어쩐지 반스는 스튜어트와 올리버, 그리고 질리언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아마존: 이제 이들 세 인물에 대해 끝을 냈다고 생각하나요?
반스: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끝냈다고 생각하고 나서 8년 뒤에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었거든요.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 그 인물들은 지금의 인생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 그들에게 적어도 10년은 더 주어야 할 겁니다! (영국 아마존과의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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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0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출판사는 반스의 책을 절판시켰다... ^^;;

국내에 반스의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을 때 열린책들 출판사가 재출간할 거로 믿었어요. 열린책들 문학전집 특별판 만들지 말고, 절판된 반스의 책을 다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잠자냥 2017-12-06 13:33   좋아요 1 | URL
네... 재주는 열린책들이 넘고 돈은 다산책방이 주워담는 형국이랄까요... ㅎㅎ 열린책들이 절판 안 시켰다면 요즘 반스 덕분에 재미 좀 봤을 텐데 말이지요. ㅎㅎ

cyrus 2017-12-06 13:34   좋아요 0 | URL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열린책들 의문의 1패.. ㅎㅎㅎ
 
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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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해 전 이스탄불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정확히는 터키 곳곳이었다. 한 달에서 며칠 모자라는 시간. 어찌 보면 길지만 막상 그곳에서는 짧게만 느껴지던 그 기간 동안 오로지 터키만을 여행했다. 이스탄불은 여행이 시작된 도시이자 마지막으로 들른 도시였다. 그때 만났던 터키의 모든 도시들이 아름다웠지만, 이스탄불이 던져준 매력은 그 어떤 도시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 여행은 내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 중 하나가 되었고 그 까닭은 거의 이스탄불 때문이다. 내게 터키는 곧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독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한다는 그 흔한, 수없이 들었던 말을 직접 체험하니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다채로운 인종에 자유로운 사람들, 꿈틀거리던 생의 기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해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도시. 단 며칠 동안 머물렀음에도 홀딱 반해버린 그곳- 이스탄불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읽는 일은 이스탄불을, 터키를 추억하는 일과 같다. 터키를 다녀온 뒤로 파묵의 작품을 읽노라면 자연스럽게 그때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도시 곳곳을 떠올리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에세이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내게 가장 좋은 책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 어쩌면 그 자리를 <내 마음의 낯섦>에게 살짝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한 편은 에세이로, 또 다른 한 편은 소설로 이스탄불이라는 놀라운 도시를 그려내고 있으니, 그냥 나란히 둘까?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을 펼쳐서 몇 장 넘기지 않고도 나는 그해 여름 곳곳을 누비던 이스탄불을 떠올렸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탁심 거리 등등. 터키에 다시 가고 싶었던 소망이 얼마쯤은 이뤄진 것도 같았다. <내 마음의 낯섦>의 주인공은 바로 ‘이스탄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메블루트’라는 가난하고 정직하지만 소심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는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메블루트 못지않게, 이 작품의 숨은 주인공은 신비롭고 열정적인 도시 ‘이스탄불’임을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라크를 홀짝이고 아이란을 마시며, 되네르 케밥과 시쉬 케밥을 먹고…. 이런 기억들이 메블루트가 살고 사랑했던 도시 이스탄불과 함께 되살아난다. 메블루트의 이스탄불은 어쩌면 내가 찾았던 이스탄불과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메블루트는 1969년 늦여름에 이스탄불로 이주해 2012년, 이스탄불의 도시화가 거의 완성되는 그 기간 동안 그곳에서 살아간다. 내가 이스탄불을 찾았던 해는 2011년이니 메블루트에게는 낯설기 만한 현대화된 이스탄불을 만난 셈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보오자아!’를 외치는 메블루트를 스쳐지나갔던 것은 아닐까?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긴 내가 거닐던 곳들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였음이 틀림없을 테니 메블루트, 또는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오스만 스타일, 유럽 스타일 노래를 부르던 유흥 장소들은 폐쇄되고, 그 자리에 시쉬 케밥과 아다나 케밥을 먹고 라크를 마시는 시끄러운 식당들이 생겨났다. 배를 튕기면서 춤을 추며 즐기는 젊은이들은 보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메블루트는 이스틱랄 대로 근처에는 들르지도 않았다. (36쪽)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버지와 함께 무작정 이스탄불로 온 열두 살 소년 메블루트. 아버지와 아들은 1960년대 후반 이스탄불 골목 곳곳을 누비며 터키전통음료인 요구르트와 보자를 팔지만 가난을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터키를 구제하는 것은 밥장수, 행상, 되네르 케밥 장수들이 아니라 학문이다.”(96쪽) 라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공부로 가난을 벗어나보고자 하지만 학문에도 그다지 소질은 없다. 아니, 먹고 살기 바쁜 그에게 공부는 어쩌면 처음부터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사촌형의 결혼식장에서 반한 소녀에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3년 동안 줄기차게 연애편지를 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납치해 결혼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 결혼은 정말 성공일까? <내 마음의 낯섦>은 메블루트라는 평범한 남자와 그의 대가족, 그리고 그들의 삶을 중심으로 1960년대 끝 무렵부터 2012년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이스탄불의 변화와 발전, 더 나아가 터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나간다.


<내 마음의 낯섦>속 그들의 삶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이스탄불의 도시화와 그 도시화로 말미암은 빈민들 삶의 모습이 이 땅, 즉 서울의 도시화와 그 안에서 살아간 수많은 소시민들의 삶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터키전통음료인 ‘보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골목 곳곳을 누비며 생계를 이어나간 메블루트의 모습에서 어느 추운 겨울밤 골목에서 들리던 ‘찹쌀떡 사려~’를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도시는 현대화가 되어 고층빌딩이 늘어서고 생활 시설이 편리해지고 누군가는 벼락부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수많은 평범한 ‘메블루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아지거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미로와도 같은 이스탄불 골목처럼 헤매게 된다. 그래도 메블루트는 그 하루를 날마다 성실히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기에.


그럼에도 문득 어떤 날은 말 못할 정도로 낯선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십년이 넘도록 이스탄불에서 살아도 어떤 때에는 이 도시가, 자기의 삶이 낯설기만 한 것이다. ‘처음 삼십오 년은 매년 해를 더할수록 도시에 대한 예속감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탄불이 생소해졌다. 막을 수 없는 홍수처럼 도시에 밀려드는 수백만 명의 새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새로운 집들, 고층 건물들, 쇼핑센터들 때문일까? (623쪽)’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영원한 이방인처럼 ‘마음의 낯섦’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런 이스탄불을 떠나면 그는 또 그 도시를 그리워한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이 ‘쓸데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고향에는 더 이상 ‘밥벌이가 없었고’, 그곳에서 그는 ‘그저 손님일 뿐’이었다. 그는 ‘이스탄불로 돌아오고 싶었다. 메블루트의 삶, 분노, 행복, 라이하 그 모든 것들이 이스탄불에 있었’(483쪽)기 때문이다.


어디 메블루트만 그러할까, 세계 곳곳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탄불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간다. 나 또한 서울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이곳을 떠난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동네는 조금씩 바뀔지언정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를 떠나지는 못한 것이다. 그 사이 서울도 눈부시게 변화했다. 오늘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내가 어릴 적 뛰놀던 동네나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동네들은 문득 지나다 보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보다도 더한 고층건물들이 늘어섰다. 때로는 이 소란스러움과 혼잡함, 번잡함, 화려함이 싫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의 전원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있을까? 나의 현재까지의 모든 삶이 서울이라는 도시 곳곳, 골목골목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 메블루트가 살고 사랑한 이스탄불처럼 말이다.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태어나고 숨 쉬고 먹고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픔과 고통을 겪고 등등 모든 일을 함께한 그 도시와 이뤄지고 있음을 이 작품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의 삶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고,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랑’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단순하지만 변함없는 이러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사람은 주인공 메블루트도 아닌, 어느 평범한 이스탄불 여인이다.


“저 천 만 명의 사람들을 이스탄불에 불러들인 것은 생계이고, 이득이고, 고지서이고, 이자라는 것을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거예요. 하지만 이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사람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453쪽)


메블루트는 큰 부를 얻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어떤 성공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기나긴 인생을 지켜보노라면 이 소심하고 나약한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일구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는 어떤 숭고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내 마음속이 왠지 낯설어. 이 세상에 도무지 나 혼자인 것 같아.” 말하는 메블루트. 삶에서 문득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 고독감, 상실감과 같은 ‘낯섦’ 앞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다시는 그런 생각 들지 않을 거야.”(262쪽). 


비록 그의 사랑은 얼굴도 모른 채 시작되어 어떤 ‘혼동’과 ‘혼란’을 겪고, 그의 인생 또한 때로는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 끝없이 마음속에 ‘낯선 느낌’을 불러오지만, 그는 주어진 인생을, 사랑을 진실하게 살아간다. 그 평범하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애쓴 그의 삶은 ‘이스탄불’과 언제나 함께였다.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이라는 혼동과 변화의 도시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바로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의 낯섦조차도 모두 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


언젠가는 터키에 한 번 더 가볼 생각이다. 이스탄불에 다시 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꼭 보자 맛을 봐야지. 운이 정말 좋아서 이스탄불 어느 골목에서 메블루트를 닮은 이에게 보자 한 잔을 사 마실 수 있다면, 그가 외치는 ‘보오자아!’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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