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쟁탈전 (La Curée)>은 말 그대로 탕진, 탕진, 탕진을 위한 숨 가쁜 질주를 그린 작품이다.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2권에 속하는 이 작품은 피에르 루공의 셋째 아들 아리스티드가 제2제정하의 파리 개발 시기(1853~1870)에 재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투기로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과정과 그 주변 인물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루공-마카르 총서>란 졸라가 루공 집안과 마카르 집안 후손들을 중심으로 제2제정기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20권짜리 소설 총서를 말하는데, ‘제2제정하의 한 가족의 자연적. 사회적 역사’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졸라는 그 무렵을 배경으로 하는 방대한 가족 서사를 그리려고 했다. 보통 <루공-마카르 총서>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비교되고는 하는데, 졸라는 이 방대한 작품을 통해서 민중, 상인, 부르주아, 상류사회라는 사회를 이루는 네 가지 기본 세계를 묘사하고자 했다. 

이 총서의 1권인 <루공 가(家)의 재산(La Fortune des Rougon> (1871)에서는 루공 집안과 마카르 집안의 기원이 밝혀진다. 19세기 끝 무렵, 경미한 정신병력을 지닌 아델라이드 푸크는 정원사 루공과 결혼하여 아들 피에르 루공을 얻었지만 남편과 사별한다. 그 후 그녀는 게으른 알코올 중독자인 밀렵꾼 마카르와 동거하면서 이들로부터 위르쉴 마카르와 앙투안 마카르를 낳는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바로 이 자식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1권을 통해 모계는 같지만(정신병력이 있고) 부계가 루공과 마카르로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에밀 졸라는 유전뿐만이 아니라 환경이나 교육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파고들고자 했다.

<쟁탈전>의 주인공 아리스티드는 피에르 루공의 셋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인 외젠 루공의 이야기는 이 총서의 6권에 속하는 <외젠 루공 각하(Son Excellence Eugène Rougon)>(1876)에서 그려지는데, 이 작품에서는 외젠이 거물 정치가가 되어서 정계에서 겪는 흥망성쇠를 그린다. <쟁탈전>에도 외젠(지만지 책에서는 ‘위젠’으로 표기)이 등장한다. 동생 아리스티드가 아내와 딸과 함께(아들 막심은 할머니에게 맡기고) 부푼 꿈을 안고 파리로 상경(!)하자 그에게 한자리 얻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 ‘한 자리’란 아리스티드의 예상과 크게 달라 고작 ‘시청 말단 공무원’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형에게 불만을 드러내자 위젠은 ‘그 자리는 분명히 좋은 자리’라며 식탁보가 차려질 때까지 자신을 믿고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로 이 자리가 형이 말한대로 아리스티드에게 엄청난 기회의 땅, 약속의 땅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아리스티드 본인은 물론, 위젠도 그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으리라. 시청 말단 자리에 있으면서 아리스티드는 도시 재개발에 관한 고급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얻은 정보를 갖고 본격적으로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다. ‘아리스티드 루공’이라는 애매모호하면서 실패자와도 같은 이름도 ‘사카르’라는, 돈 냄새가 풀풀 나는 이름으로 갈아치운다. 이 장면에서 ‘루공’ 가문의 유전적 기질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됐어, 찾았어, 사카르, 아리스티드 사카르! C가 둘 있는.... 그래! 이 이름에는 돈 냄새가 나. 동전 세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80쪽)


고급 정보를 빼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사카르에게는 행운도 따른다. 좋은 물건이 나와도 초기 투자자본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때, 그 앞에 ‘르네’라는 황금과도 같은 존재가 덜컥 주어지는 것이다. 유부남인데다가 볼품없는 집안 출신인 사카르가 재산은 물론 사회적 지위까지 두루 갖춘 공화파 법조인의 딸, 르네와 정상적으로 결혼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르네에게는 안타깝게도 치명적 결함이 있었으니,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던 중 하필이면 들판에서 어느 중년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임신을 한 것이다. 르네의 아버지는 집안 명예를 지키고자 딸을 죽이려고 하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르네의 고모와 사카르의 누이동생인 시도니(우리나라로 치면 마당발 방물장수라고나 할까)가 연결되어 르네와 사카르의 혼담이 오간다. 일이 잘 풀리려고 하는지 병약했던 사카르의 부인마저 때마침 세상을 뜬다. 마침내 르네는 엄청난 지참금과 상속 받을 땅까지 갖고는 사카르와 결혼한다. 사카르는 르네의 이 재산으로 투기를 하며, 파리에서 손꼽히는 엄청난 부자가 된다. 그렇게 자리를 잡자 사카르는 할머니에게 맡겨두었던 아들 ‘막심’을 불러오고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막심과 르네는 둘도 없는 유희 친구가 된다.

그때부터 사카르-르네-막심 이 셋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오직 돈벌이에만 관심 있는 사카르와 사카르의 ‘트로피 아내’ 역할을 충실히 하며 권태와 허무 속에 오직 돈 쓰고 노는 일에만 관심 있는 르네, 아버지와 다름없이 천박한데다가 오직 유희만이 관심사인 막심- ‘아버지와 양모와 의붓아들은 마치 그들 각각 혼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했고, 독신처럼 편하게’ 산다. ‘그 누구도 가구 딸린 호텔방을 같이 나눠 쓰고 있는 이 세 명의 동료들 보다 스스럼없이 그 방에서 악과 사랑을 다 큰 장난꾸러기들처럼 떠들썩하게 즐기지 못’한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인정’한다. 각자 완전히 독립적으로 살’면서 ‘가족이라는 생각은 이익을 똑같은 몫으로 나누는 일종의 합자회사로 대치’된다. ‘각자 자기 몫의 즐거움을 끌어냈고, 원하는 대로 자기 몫을 챙기는 데에 암암리에 동의’한 생활을 영위한다.(184쪽)

<쟁탈전>은 이렇게 돈에 미친 사나이 사카르와 르네, 막심 세 인물의 기묘한 관계 및 그들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 시절 파리 상류층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 배금주의와 육체적 욕망을 세밀하고도 흥미진진하게 그려나간다. 졸라는 그 무렵 사회를 ‘한 무리의 사냥개와 같다’고도 비유했는데, 그의 그런 생각은 <쟁탈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졸라가 보기에 그 시절은 ‘개들이 짖는 소리, 채찍질 소리,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빛으로 가득 찬 숲 속 한구석에서 뜨거운 쟁탈전이 벌어지던 때’였으며 ‘무너져 내리는 지역들과 6개월 만에 쌓아올린 재산들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고삐 풀린 욕망들은 파렴치한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도시는 수백만의 돈과 여자들이 벌이는 한판의 방탕한 놀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위에서부터 내려온 악은 개울을 따라 흘렀고, 수반으로, 정원의 분수로 올라갔다가 다시 지붕 위에서 가늘게 내려와 옷을 적셨다.’ ‘격렬한 욕망과 즉각적으로 만족된 본능이 도시를 부수고 더럽힌 후 거리에 던져 놓은 모든 것들이, 도시의 쓰레기들이, 잠든 도시 가운데로, 센 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한낮의 숨찬 탐색보다도 열에 들떠 잠자고 있을 때의 파리에서 황금과 육체에 미친 도시의 황금빛 쾌락의 악몽과 정신이상이 더 잘 느껴졌다.’ (199~200쪽)

<쟁탈전>은 이렇게 벨에포크 시대 파리를 배경으로 인간들의 질주하는 욕망을 그려 나가는데, 그 대상은 비단 상류층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작품 끝 무렵에 르네의 충실한 하녀 셀레스트와 사카르의 충직한 시종 밥티스트의 비밀 아닌 비밀(?)이 밝혀지는데 이 충직한 이들의 비밀을 알고 나면 인간이란 존재는 지위고하나 신분,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아닌가 싶어진다. 이 총서의 모든 시리즈를 읽으면서 루공 집안과 마카르 집안의 자식들이 어떤 삶을 살며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지켜보는 일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왠지 우리나라에서 총서 20권이 다 완간될 것 같지는 않고, 현재까지 나온 것만 추려본다면 아래와 같다(절판 제외). 훑어보면 루공 집안 이야기보다는 마르트 집안 이야기가 좀 더 많은 듯하다. <쟁탈전>을 읽은 다음에 <돈>을 읽으면 좀 더 생생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7권 <목로주점(L'Assommoir)>(1877) : 앙투안 마카르의 딸 제르베즈가 세탁부로 성공하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파리의 노동자 삶을 그림.















9권 <나나(Nana)>(1880) : <목로주점>에 나오는 제르베즈의 딸 나나가 고급 창부가 되어 방탕한 생활을 누리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림.















11권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Au Bonheur des Dames)>(1883) : 옥타브 무레(피에르 루공의 막내딸 마르트의 아들)가 운영하고 있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 도시 상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을 그림.















13권 <제르미날(Germinal)>(1885) : <목로주점>에 등장한 제르베즈의 아들 에티엔 랑티에는 탄광 노동자가 되어 파업을 주도한다.















16권 <꿈(Le Rêve)>(1888) : 피에르 루공의 외손녀로 어릴 때 버림받은 소녀 앙젤리크 루공은 성당에 딸린 자수 가게에서 양육된다.















17권 <인간짐승(La Bête humaine)>(1890) : 제르베즈의 아들 자크 랑티에는 기관사로서 치정관계에 얽힌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18권 <돈(L'Argent)>(1891) : <쟁탈전>의 주인공 사카르가 다시 등장한다. 그는 수상쩍은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만 사기 혐의로 궁지에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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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탈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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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그 유명한 ‘루공-마카르 총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중 하나. 루공 집안이 어떤 특색을 지녔는지 잘 드러난다. 파리 재개발로 인한 졸부의 등극, 끝모를 탐욕, 퇴폐와 향락, 그로 말미암은 권태로움 등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한편의 잘 짜여진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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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O.S.T
퀸 (Queen)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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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앨범을 거의 다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앨범을 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후반부의 라이브 에이드 실황 녹음 부분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앨범의 압권! 여전히 심장을 뜨겁게 울리는 음악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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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11-11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다못해 유투브로 라이브 동영상만 봐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요. ㅠㅠ

잠자냥 2018-11-11 15:0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요즘 이 영화때문에 곳곳에서 퀸 동영상이 보이는데 정말 볼 때마다 소름이!! ㅎㅎ

카알벨루치 2018-11-11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함 들어보고 싶네요 퀸퀸퀸~어떻게 그런 음을 낼 수 있을까 들을때마다 감탄 경탄!!!

잠자냥 2018-11-11 15:03   좋아요 1 | URL
네! 이 영화도 꼭 한번 보세요!

희선 2018-11-13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아주 오랜만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봤는데, 그게 끝난 뒤였던가 그전이었던가 영화 광고가 나왔어요 그거 보고 저런 영화를 만들었구나 했는데 <음악캠프>에서 그 이야기 조금 듣기도 했어요 그저께는 퀸 노래만 틀어줬어요 2부에서... 거의 흘려 들었지만... 퀸은 프레디 머큐리 말고도 다들 곡을 만들고 노래도 곧잘 했다고 하더군요 퀸 이름은 알아도 그렇게 잘 모릅니다


희선

잠자냥 2018-11-13 09:51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솔직히 퀸은 프레디 머큐리의 밴드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더라고요. 다른 멤버들도 확실히 재능이 뛰어났고, 그 멤버들이 함께 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톡톡한 그런 밴드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퀸 노래 다시 잘 듣고 있는데, 그들이 이 곡을 만든 뒤로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참 명곡이네요.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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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읽은 이 책을 이제 다시 읽는다. 나도 모르게 미소 짓다가 어느 순간 눈물이 흐른다. 읽고 또 읽을 수록 새로운 면이 발견되는 보물 같은 책. 옮긴이가 황현산 선생이라 더 그렇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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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리스의 단편집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과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 <오랜 죽음의 운명>을 함께 읽고 있다.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은 올해 초에 출간되었고, 진 리스의 단편집은 얼마 전에 나왔다. 둘 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두 권 모두 꽤 묵직하고(800쪽이 넘는 포터의 단편집이 더 두껍다), 작품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읽고 난 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 두 편씩만 읽다 보니 올해 초에 샀음에도 포터의 단편집을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진 리스와 캐서린 앤 포터 두 작가의 공통점이 보인다. ‘고통받는 여성들, 언제나 타자인, 어쩌면 영원히 약자일 이들의 이야기’랄까. 그리고 이 고통의 근원은 캐서린 앤 포터와 진 리스, 그녀들의 삶이 순조롭지는 못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진 리스의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에 실린 단편의 면면을 보자. 이 책의 첫 작품 「환상」에는 금욕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5층에 자리한 작은 원룸에서 7년째 살고 있는 브루스 양은 초상화를 그리며 이따금 살롱에서 전시도 한다. 이따금 그림이 팔리기도 한다. 몽파르나스에서 그 정도 성취는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한없이 지루해 보인다. 고지식한 그녀의 차림새처럼 생활 또한 고지식하고 견고하다. 그런 그녀에게도 남다른 취미가 있다. 그녀를 겉으로만 아는 이들이 알면 깜짝 놀랄 만한 취미. 사실 그녀는 화려하고도 눈부신 온갖 드레스 및 화장품, 향수 등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그저 수집 용도이다. 장롱 안 깊숙이 꽁꽁 숨겨두고 그녀 혼자 즐길 뿐이다. 그녀는 왜 드레스를 입지도 못하고, 화려하게 화장을 하지도 않는 것일까? 자기만의 환상의 세계를 왜 ‘장롱’속에 깊이 가둬둔 것일까? 이 화려한 옷을 살 수는 있지만 용기 있게 입을 수는 없는, 영국 여자 브루스 양. 자신이 꿈꾸는 화려하고 여성적인 삶은 장롱 속에 가둔 채, 그녀는 어쩌면 사회에서 바라는 어떤 지적이고 금욕적인 여성 이미지에 자기 자신을 가둔 것은 아닐까?

진 리스의 단편은 이렇게 당시 사회의 시선이나 제도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여성들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 담담함 때문에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진 리스의 이야기 속 여자들은 대부분 의상 모델, 코러스 걸, 매춘부, 배우 등 주로 여성성을 상품화한 직업군에 속한다. 그렇지 않은 여자들이더라도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런 지위를 차지했더라도 남편 또는 애인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한순간에 몰락하기도 한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단편들은 진 리스의 자전적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빈」의 ‘프랜시스’(진 리스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가 특히 그렇다. 프랜시스는 현재 남편 ‘피에르’ 덕분에 삶은 공허할지언정 경제적으로는 꽤 넉넉하게 살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피에르가 불미한 일에 연루되면서 그녀의 삶 또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다. 프랜시스는 말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남자들이 망친 것이다. 늘 내 정신을 업신여기고 몸에만 온통 신경을 썼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분별한 잔인함과 어리석음으로 나를 망쳐 놓았다.’

진 리스는 영연방 도미니카에서 웨일즈 태생 아버지와 백인 크리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자신은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그때부터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아버지의 죽음 뒤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가난함과 궁핍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질적으로 의지했던 연인과 이별한 뒤에는 더욱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삶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그녀의 초기 단편에는 주로 여성들이 사회에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희생자나 피해자로 그려진다. 그녀들은 대부분 사회 통념에 갇혀 가난과 멸시를 견디며 척박하게 살아간다. 그런 고되고 팍팍한 삶이 자조와 환멸, 자기 연민이 가득한 냉소적인 언어로 묘사된다. 그런데 문득, 이 단편집 속 여성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거의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 <오랜 죽음의 운명> 속 여성들의 삶 또한 비슷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진 리스가 주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면, 포터의 작품 속 인물들은 폭력적인 남성들로 말미암아 삶이 부서진 여성들이 많다.「마리아 콘셉시온」이나「그 나무」,「정오의 와인」같은 작품에는 남편의 정서적, 육체적 학대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꽃 피는 유다 나무」와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적 신념이나 질서로부터 배신당하는 여인의 삶이 그려지고, 때로는 숨 막힐 정도로 여성 억압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여성 참정권 운동에 투신하는 삶이 그려지기도 한다(「오랜 죽음의 운명」). 그러나 포터의 작품은 사회적 약자를 단지 여성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식민 지배 아래 착취당한 인디오나, 공동체로부터 외면 받는 장애인, 남부의 가혹한 노예제 아래 착취당하는 흑인의 삶 등 좀 더 폭넓은 타자의 삶을 다룬다.

이러한 소재와 주제 또한 캐서린 앤 포터, 그녀 삶에서 고스란히 비롯된다. 포터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남부 사회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고,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남부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8년여에 걸쳐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한다. 남편의 폭력으로 뼈가 부러지고 아이까지 유산했을 정도이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결국 당시로서는 어려웠을 이혼을 감행하고, ‘캐서린 앤 포터’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바탕으로 빚어낸 글들이라 그토록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물론 진 리스도 마찬가지이다. 두 여성 모두 고통이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다고나 할까.

두 작가 중 내가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쪽은 포터의 글이다. 그녀의 단편 속 여성들이 한결 강인하고 독립적인 느낌이랄까. 물론 초기 작품에 비해 진 리스의 단편 속 여성들도 중반 이후부터는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재즈라고 하라지」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것, ‘노래’만큼은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물론 그마저도 쉬워보이지는 않지만……. 진 리스의 단편집이 후반부로 갈수록 또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되기도 하고, 포터의 단편집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과 <오랜 죽음의 운명>이 주로 다루는 대상은 여성, 사회적 약자 등으로 비슷하지만 그 이야기 방식은 사뭇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단편집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삶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서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 현실이 몹시 씁쓸하다. 차라리 이들의 작품을 읽고 ‘아니, 예전에는 여자들이 이렇게 혹독하게 살았단 말이야?’ 상상 불가능했으면 좋겠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남편이나 연인으로부터 맞거나 죽임 당한다. 그리고 진 리스, 캐서린 앤 포터과 같은 작가들마저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바탕으로 작품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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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1-09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과 달라졌다고 해도 여성의 삶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군요 여성은 여전히 여성이니까요 힘없고 남의 눈을 마음 써야 하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지 마음을 쓰는 건 사람이기에 그렇겠지만, 세상은 여성한테 더 엄한 잣대를 대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건 여성 스스로도 그렇지 않을지... 여성이 먼저 이런저런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잠자냥 2018-11-09 10:03   좋아요 1 | URL
네, 희선 님 말씀에 구구절절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