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링컨 대통령이 아들을 잃은 뒤 무덤에 찾아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라는 소재만으로는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조금 뻔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진부한 소재를 특이한 형식을 통해 새롭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죽음으로 비롯된 한 가정의 슬픔을 살아남은 이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로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무려 40여 명에 이른다. 여기서 ‘바르도’란 ‘이승과 저승 사이’를 뜻하는 티베트 불교 용어로, 죽은 이들이 이승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기 전 머물러 있는 시공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왜 이들은 천국도 지옥(만일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도 아닌 이승과 저승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삶에 미련이 남아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중간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바르도’에 머물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몸이 다 나으면 언젠가 다시 가족에게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바르도’에 열한 살 소년 윌리 링컨이 나타난다. 소년의 등장에 망자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하고 죄 없는 어린 영혼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르도에 오래 있을수록 고통은 더 심해져만 간다. 아이들이라면 마땅히 바로 저세상으로 떠나야 하는데 윌리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윌리의 아버지인 링컨은 한밤중에 묘지에 나타나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아이를 보낼 생각이 없는 듯 숨죽여 흐느낀다. 이런 링컨을 보고 이곳 유령들은 감동받는다. 제 아무리 죽은 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도 다시 찾아와 시신을 만지고 끌어안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묘지를 떠난다. 윌리는 아버지의 약속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윌리는 차츰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를 보다 못한 죽은 영혼들은 어떻게 해서든 소년을 빨리 저세상으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윌리는 아버지를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합해 링컨의 발길을 돌리는 일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죽은 자들의 입을 통해 지난날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산 자들이 죽은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승에서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들- 그래서 외롭지 않았고, 헤매지 않았으며 변덕스럽지도 않았고, 저마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지혜로웠던 이들. 그들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고통받는다. 그들을 사랑했던 이들은 ‘침대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쌌고, 탁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바로 이런 기억, ‘사랑 받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은 우리를 기억하며 웃음을 지을’ 거라는 그 기억 때문에 죽은 이들은 바르도에서 잠시나마 마음이 밝아진다고 말한다. 링컨처럼 죽은 아들의 묘지를 찾아와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끼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때로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죽은 자들은 쉽사리 살아있던 세상을 놓지 못한다.

한편, 대통령 링컨도 또 다른 의미의 바르도에 머물고 있다.  이 냉혹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도 바르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틈도 없이, 남북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속출하면서, ‘희생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던 나라는 우유부단한 전쟁 관리자’인 링컨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대통령은 천치다. 허영심 많고, 허약하고, 철없고, 위선적이고, 사교성이 없는데다, 선출된 인물 가운데 가장 허약한 사람이다. 게다가 아주 열등한 유형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며, 위기를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비난이 연일 쏟아진다. 링컨은 거의 미쳤다 싶을 정도로 야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 윌리의 죽음도 그의 방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이쯤이면 어린 윌리 링컨이 머무는 곳이 진짜 바르도인지, 링컨 대통령이 숨 쉬는 이 세계,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연일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곳이 진짜 바르도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때문에 <바르도의 링컨>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바르도의 링컨>을 독창적인 작품으로 빚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나열하는 방식은 이 작품을 조금 읽어나가다 보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그 까닭은  오래전에 윌리엄 포크너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그와 비슷한 형태로 여러 화자를 등장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여러 화자는 단 한 번 등장하는 죽은 자 ‘애디’를 제외하고는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40여명의 죽은 이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바르도의 링컨>과 15여 명의 산 자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이 두 작품 은 모두 전형적인 소설 형식을 벗어나,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과 삶을 다룬다. 그리고 그 수많은 목소리들은 저마다 개성으로 넘치는데, 산 자나 죽은 자나 하나 같이 그들 나름의 애도를 드러내며 서서히 삶에서 멀어지거나, 반면에 생을 더 단단히 붙드는 방식으로 삶을 예찬한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죽어 누워 있’는 사람은 시골 아낙 ‘애디 번드런’이다. 그녀의 아들 캐시, 주얼, 달, 바더만, 그리고 딸인 듀이 델, 남편 앤스의 독백이 번갈아 이어진다. 때때로 그들의 이웃인 코라, 툴, 의사 피바디 등의 화자가 끼어들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이런 형식으로 애디의 죽음이 가져온 일상의 파문을 전하면서 삶과 죽음, 선과 악, 운명과 욕망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애디의 가족들은 참 이상하다. 이런 집구석이 다 있을까 싶다.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도 주얼과 달은 3달러 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 먼 곳으로 일하러 떠나고, 맏아들 캐시는 어머니의 관을 짜는 일에만 정신을 쏟을 뿐이다. 잡은 물고기에만 집착하는 게 막내는 어린 소년이라 그렇다 치자, 하나뿐인 딸은 죽어가는 엄마에게 부채질해 주며 옆에 서 있다가 누군가 엄마에게 말을 걸고 기분을 돋아주려 하면 무뚝뚝하게 중간에서 끊어 버리기 일쑤이다. 사실, 이 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는데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생명을 어떻게 낙태해야 할까 그 생각뿐이다. 그리고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둘째 아들 달은 사사건건 듀이 델을 비아냥거린다.

애디의 남편인 앤스는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그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오직 돈 아낄 궁리뿐이다. 임종에 가까운 아내를 보기 위해 의사가 왕진 왔을 때도 그는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자기 자신은 이빨도 제대로 없는 처지라고 불평하면서 형편이 나아지면 의치를 해 넣고, 하느님이 주신 맛난 음식이나 마음껏 먹으려고 했다고 투덜거린다. 앤스의 이런 인색함은 이웃들은 물론 왕진을 온 의사조차 극히 잘 알고 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데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매우 불우하고 가망이 없는 경우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의사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이 앤스라면 더더욱, 이미 가망 없이 늦어졌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인 애디가 죽자 앤스는 말한다. “하느님의 뜻이지, 난 이제 새 이빨을 해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웃 코라는 애디가 죽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까지 생각한다. 코라의 남편인 툴도 “어디로 갔든지, 앤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축복이지.”하고 말한다. 그런데 죽은 애디의 장례는 제대로 치러지지도 못한다. 삼일 동안 관 속에 누워 있다가, 사흘 째 되는 날 3달러를 벌기 위해 일을 떠났던 달과 주얼이 돌아와 관을 마차에 싣는다. 이미 한참 늦은 셈인데도 이 기묘한 가족은 애디의 소원이었다면서 애디의 고향인 제퍼슨까지 40마일을 더 걸어가서 묻어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죽은 지 며칠이나 된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빨리 땅속에 묻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사 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사람이 다른 사람 고생시킬 일은 꼭 하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이 앤스는 완강하게 고집을 부린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애디의 관을 마차에 실고 40마일의 여정을 떠나는 가족들. 이들은 제퍼슨으로 가는 여정도 순탄하지는 않다. 강을 건너다 여울에 휩쓸려 마차가 물에 잠기고 관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다. 이때 캐시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다리를 크게 다친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앤스는 치료비가 아까워 부러진 다리를 고정한다는 명목으로 시멘트를 사다 바를 뿐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마차에다, 집에서 짜 만든 관, 그 위에 누워 있는 다리 부러진 남자,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아버지와 작은 소년’ 악취를 내뿜기 시작한 애디의 시체 등등 이 기묘한 일행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이 마을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모두 산산조각 나버리지 않을까 공포에 질려 바라본다. 마치 역병이 마을로 들어오기라도 한 듯 모두가 꺼린다. 차라리 빨리 묻어주면 좋을 텐데 40마일의 여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대체 왜?

이 작품에서는 단 한 번 등장하는 애디의 독백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다. 앤스가 그렇게 고집하는 40마일의 여정은 알고 보면 애디의 소심한(?) 복수임을 알게 된다. 황폐하기만 했던,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과 앤스에 대한 증오를 죽은 다음 그런 식으로 보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40마일의 여정을 지켜보면서 애디 또한 여전히 ‘바르도’에 머물러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시체가 담긴 관을 끌고 40마일을 걸어가는 내내 그녀는 진짜 안식을 찾지 못한 채 ‘바르도’를 떠돌겠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기묘하고 비정상적이며 하나같이 이기적이기만 한 앤스네 가족이, 애디의 시신을 이끌고 40마일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그들 나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기이한 애도 방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그들 나름의 서투른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싶어졌다.

가는 길 내내 저마다 자신의 고민과 상념에 빠지고 갖고 싶은 물건, 먹고 싶은 음식에 집착하는 자식들과 남편- 그래서 마누라를 묻기 위한 삽조차 빌려 쓰는 인색한이지만 그들은 결국 40마일을 터덜터덜 가는 내내 애디와 함께한다. 부패로 악취가 나기 시작하는데도 쉽게 땅에 묻지 못하고 망자의 약속을 지켜주겠다는 일념 아래 고집을 피운다. 죽은 애디의 진심이 자기 삶을 황폐하게 만든 앤스에 대한 보복이었을지언정,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고집 부리는 이 어리석고 못나고 이기적인 인간 앤스는 자기 나름의 애도 방식 고집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이 작품 마지막에 보여주는 앤스의 충격적인(!) 그 행태 또한 살아남은 이들의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삶’,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족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은 이를 그렇게 보내고 욕망에 충실한 삶은 이어진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53쪽)

우리를 불러, ‘저 바깥’은 전과 다름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켜줬거든요. 즉 먹고, 사랑하고, 싸우고, 낳고, 마시고, 투덜거리고, 모든 것이 여전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바르도의 링컨>, 324쪽)


그러므로 위와 같은 구절들은 이 두 작품의 공통된 생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을 나름대로 애도하고 떠나보내지만, 때때로 기억으로 그들을 다시 불러와 이기적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지언정, 그럼으로써 죽은 이들을 안심시켜 준다는 것.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40마일의 여정과 그 지리멸렬한 여행의 끝은 삶과 죽음의 이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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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11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쌓입니다, 잠자냥님.
잠자냥 님의 글, 참 좋아요.

잠자냥 2019-03-11 17:18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돌아다니면 읽고 싶은 책이 쌓이고 또 쌓이죠? ㅎㅎ
다락방 님 감사합니다~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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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나보코프의 독창적인 세계! 이 놀라운 언어 천재는 소설에서도 가히 혁명적인 방법을 통해 독서의 즐거움을 한층 배가시킨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야 할 책.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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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섬 기담 / 인간 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5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단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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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그로테스크한 욕망을 낱낱이 까발려 보여주는 두 편의 작품. 공포란 에로티시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일까? 너무나도 흥미진진해서 단번에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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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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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한 여인을 묻으러 가는 40마일의, 결코 짧지 않은 여정. 그 안에서 아들들과 딸, 그리고 남편이 각자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기묘하게 펼쳐진다. 죽은자는 말이 없고 산자는 그렇게 각자 살아가는 인생. 친숙하지는 않지만 꼭 읽어야 할 작가,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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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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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이었던가, 순천 할머니들의 서울 전시회를 놓쳐서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반가웠다. 이 책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 이건 꼭 사야해!’하고 생각했다. 나는 에세이집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하는데, 이 책은 바로 구입했다. 몇 년 전 서울 전시회 소식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무엇이 그렇게 내 마음을 끌었을까? 글과 그림을 배우고 그 글과 그림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무척 쉽고 일상적인 일일 테지만 누군가는 평생을 간절히 바라고 꿈꿔왔을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현실에 가로막혀 그 바람을 이루기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일 때, 여든과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드디어 할머니들은 그 꿈을 이뤘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는 바로 그러한 꿈의 열매다.

이 책에 담긴 글과 그림은 얼핏 보면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의 그림일기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정말이지 인생 그 자체이다. 산전수전도 모자라 공중전까지 겪은 이들의 굴곡진 인생이다.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어린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아도, 그 안에 담긴 절절한 사연 때문에 탄식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미소 짓기도 하다가 끝내 눈물 흘리게 된다.

할머니들의 사연은 어찌 보면 예상 가능하다. 그 세대 어른들이 살아왔을 법한 그런 삶이 짧은 글 안에서 꾸밈없이 그려진다. 딸이라고 구박받고, 딸이라서 배우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일찍부터 집안을 돕고 동생들 건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얼굴도 모르던 사람과 선을 보고 집에서 쫓겨나듯이 결혼하고, 결혼 뒤에는 가혹한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다. 애들한테 흰쌀밥 먹였다고 시아버지가 밥상을 던지고 딸을 많이 낳았다고 구박받는 등등 무서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로도 모자라 시누이는 또 시누이대로 못살게 군다. 남편이라도 따스하게 대해주면 좋을 텐데 이 책 속에 그려진 남편들은 대개가 술주정에, 바람에, 폭력에 난봉꾼들이 따로 없다. 그런 이와 살면서 이제는 딸을 낳았다고 구박받고,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엄마 마음도 몰라준 채, 차별받고 자랐다면서 볼멘소리를 한다. 할머니들 인생 참 가엽고 안쓰럽다.

그런데, 도무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인생에서도 할머니들은 참고, 견디고, 때로는 그 안에서 소소한 기쁨도 발견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이 삶의 무게를 견디고 보듬어 안는 그 마음들을 엿보노라면 자못 숙연해진다. 선본지 3일 만에 결혼한 어느 할머니의 사연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할머니의 시댁은 너무나 가난했다. 시어머니가 잠잘 방이 없어서 하루는 형님 방에서 하루는 할머니의 신혼 방에서 잤다.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도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시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자면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생각하면 짠하다.’……. 치매 앓는 시어머니를  자식들이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해서 4년 넘게 홀로 시어머니 병수발을 한 할머니도 있다. 이 할머니는 그런 시어머니가 가여워서 ‘어버이날이 되면 시어머니가 불쌍해서 꽃을 사다 달아 주면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질게 구박받으며 살아왔으면서도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할머니들 앞에 그저 마음이 먹먹해진다.

어떤 사연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열한 살 때 피난길에서 동생이 죽은 할머니는, 죽은 동생을 어디다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업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도 죽은 동생을 잊을 수 없다는 그 짤막한 일기에는 더없이 큰 아픔이 담겨 있어 어떤 말도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죽은 동생을 업고 하루 종일 다니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이렇게 일흔, 여든을 지나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글을 배워 그때 그 일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또 어떤 심정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렵다.

할머니들도 ‘딸’이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일기 곳곳에서 보인다.



큰집에는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큰어머니 몰래 사람을 얻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나중에 큰어머니가 알고 그 여자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 엄마는 얼른 치맛자락을 펴서 내 눈을 가리고 못 보게 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힘들 때마다 엄마를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우리 엄마’, 16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서 느끼는 감동은 글과 그림을 배우고 익혀서 자신을 표현하고, 그래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 모습을 볼 때 가장 크다. 글을 몰라 평생 죄지은 것처럼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떨며 살았던 할머니들은 글씨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그전까지는 몰랐던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은행에 가는 일도 더는 두렵지 않고, 계약서도 이제는 직접 쓴다. 핸드폰으로 자식들과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며 소통한다. 무엇보다도 글과 그림으로 자기 안에 있었던 상처를 치유한다.

아버지, 그 많던 재산을 술과 여자, 노름으로 다 없애고 가난뱅이가 된 아버지,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다. 학교도 안 보내 주고 술 먹고 노름하고 여자를 집까지 데려와 엄마랑 셋이 함께 잠을 자고 밥상까지 차려 바치게 했던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신 뒤 그런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는 어느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엄마 산소에 갈 때도 아버지 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글을 배우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드디어 처음으로 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렸다. 글과 그림이 주는 치유의 힘은 이렇게도 크다. 게다가 할머니들은 글을 배우고 가족들한테 칭찬을 들으니까 ‘보약 먹은 것처럼 힘이’ 난다고 말한다. 글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청소나무 때는 아궁이처럼 열심히 가르쳐’ 주신다고도 말한다. 이런 살아있는 표현력에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엿한 작가와 화가가 된 할머니들은 글과 그림을 배움으로써 여든, 아흔의 나이에도 또 다른 꿈을 꾼다. ‘앞으로 내 꿈은 글을 많이 배워 우리 동네 이장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할머니들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책을 읽노라니 괴팍하기만 하던 우리 할머니 생각도 난다. 할머니도 글을 모르셨는데, 내가 글을 깨우칠 무렵, 그 괴팍하고 성마른 노친네가 아주 부끄러운 얼굴로 ‘이게 무슨 글자냐’ 묻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딸이라고 구박하고, 엄마를 구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던, 내게는 악마 같기만 했던 할머니인데도 그때만큼은 글자를 아는 아이 앞에서 얌전한 양이 되었다. 할머니 때문에 글을 모른다는 건 이렇게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할머니도 그때 글을 배우셨다면 성마른 성미가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엄마를 덜 괴롭히지 않았을까…….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신 분이 아니니, 내가 글을 가르쳐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진 시집살이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 때문에 괴롭게 살았던 엄마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엄마는 나보다 더 크게 공감하다가 책을 다 읽을 무렵엔 활짝 웃으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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