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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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결혼과 출산율이 번번이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다. 오늘 본 기사에서도 서울 출산율이 역대 최저를 찍었다고 한다. 부부도 아이를 낳지 않는데, 결혼조차 하지 않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이 둘은 관련 없을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죄악시하는 풍조 속에서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모든 점을 헤아려봤을 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결혼해봤자 자신의 삶에 득이 될 게 없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오직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말처럼 허무맹랑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결혼에는 많은 계산이, 돈이 오간다. 그래서 결혼도 비즈니스라고 하지 않던가. 비단 이런 풍조는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만은 아닌 것 같다. 저 19세기 사람 에밀 졸라가 살던 프랑스에서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졸라의 <결혼, 죽음>은 그 시대 결혼과 죽음에 얽힌 세태보고서와 같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으로 나눠 그들이 결혼하게 되는 과정과 결혼식 당일,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짤막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런데 매 이야기가 짧다고 그냥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 그런 광경을 그려내는 붓을 든 이가 누구인가, 에밀 졸라가 아닌가. 정말 졸라, 날카롭다.

귀족의 결혼을 보자. 막심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서 앞으로 외교 쪽 업무로 나아갈 궁리를 한다. 그의 고모인 뷔시에르 후작부인은 아주 발이 넓은 노년 마님으로, 막심의 미래 설계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다면 결혼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이야말로 한자리 해먹으려면 꼭 필요한 토대’라면서. 아,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고모는 마당발을 이용해서 적당한 후보를 찾아 막심의 눈앞에 들이댄다. 막심은 묻는다. “금발이지요?” 그의 질문에 고모는 말한다. “아니 갈색일걸, 사실 나도 정확히 모르겠구나.” 뭐 어쨌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확실한 것은 신붓감이 열아홉 살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집안도 좋고 지참금도 어마어마한데, 금발이든 흑발이든 빨강머리든 무슨 상관이랴! 결혼하기까지 그들은 딱 다섯 번 만난다. 그동안 막심이 신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통통한 편이고 피부가 하얗고, 음악을 좋아하고 남자 향수를 싫어하는 듯했으며 클레르라는 이름의 죽은 친구가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쯤이면 충분하다. 집안이 좋은데 뭐, 됐다. 마침내 그들은 결혼식을 올린다. 귀족이니까 주위 눈도 있으니 결혼식 때 불우 이웃 돕기 행사를 살짝 걸친다. 막심과 신부 앙리에트는 각자 천 프랑씩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다. 열네 달 뒤 둘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것은……. 당신에 상상에 맡기겠다(궁금하면 책을 펼쳐보라. 아마 당신의 상상이 100% 맞을 것이다. 그만큼 결혼은 지리멸렬한 비즈니스가 아닌가).

귀족의 결혼이 사람들 이목을 중시하면서 교묘하게 꾸민 일종의 비즈니스였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은 한결 적나라하다. 법조계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학교 교육을 받게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 학교 출신이 최근 수지맞는 결혼을 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장래를 걱정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충고한다. “결혼을 하려무나. 집에 여자가 들어오면 빛도 나고 활기도 생기는 법이란다. 부잣집 딸로다가. 아내도 가격이 있으니……. 그래, 데비녀 씨 댁 딸이 괜찮겠구나. 대수공업자 집안인데 지참금이 백만 프랑이라지. 아마, 네게 딱 맞는 비즈니스겠구나.” 오, 이 솔직한 아버지여. 아내도 가격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아버지여, 결혼이 비즈니스라고 당당히 말하는 아버지여. 그리하여 아들은 재산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한다. ‘결혼식은 마치 아주 엄청난 자본을 좌우하는 사업 체결에 참관이라도 한 듯’ 치러진다.

부르주아의 결혼이 이럴진대, 상인 계층의 결혼은 더 장사에 가까워진다. 그들의 결혼은 ‘돈’을 위주로 흘러가고, 결혼 후의 삶도 돈을 모으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부부는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돈으로 파리 서북쪽 조용한 구석에 스위스식 별장을 지어 생활하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오늘날 결혼하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도 거의 이러할 것이다. 아파트 한 칸, 노후에는 교외에 집 한 채 얻기를 바라면서 평생 돈벌이에 집착하는 삶……. 19세기 프랑스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졸라는 말한다. ‘이 상인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라도, 분명한 점은 돈을 토대로 잘 짜인 솔직한 동업자’라고. 그런데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 두 부부는 결혼한 후로도 늘 동침한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다들 포복절도하리라…….

서민의 결혼은 돈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스물다섯 청년 발랑탕은 클레망스에게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것이 사랑인지 단순한 욕정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졸라가 보기에 결혼이란 돈, 아니면 욕정의 해소 그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자리에 사랑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랑이라는 포장이 있을 뿐. 이들의 결혼 후 삶은 비참하다. 가난한 살림에 아이 셋을 기르느라 클레망스의 금발은 누렇게 변하고 얼굴은 상한다. 발랑탕은 술에 절어 생활한다. 잦은 부부싸움과 울어대는 아이들, 남편의 구타 등등. 소란스럽고도 구차한 인생이 이어진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의 결혼을 쭉 읽어가다 보면 졸라의 시선이 점점 연민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위와 명예, 돈, 권력을 가진 이들을 묘사할 때는 냉소로 가득 차 있는데, 그래도 돈 없는 약자들의 삶을 그릴 때는 거기에 그나마 안타까움 같은 것이 깃든다. 이런 졸라의 시선은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에서 더 뚜렷해진다. ‘죽음’ 또한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농부로 나눠서 그려나간다. 귀족의 장례식장은 귀족의 결혼식처럼 허례허식으로 가득하다. 죽은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들 슬픔을 억지로 꾸며내고 있지만 그들 머릿속은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하다. 한 노인에게 죽은 고인을 추모하는 말이 들려온다. “마음씨가 고왔으며 관대로움과 선량함이…….” 그 말을 듣던 노인은 턱을 조금 움직이며 중얼댄다. “그래 나도 그런 존재를 하나 알았었지....”라고. 노인에게 그런 존재는 누구였을까. 죽은 고인이었을까? 궁금하면 책을 펼쳐 보라. 졸라는 냉소 속에서 때때로 이런 유머러스함을 발휘한다.

부르주아의 죽음도 모두 돈과 연관된다. 상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 두 계층을 바라보는 졸라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계층이 낮아질수록 연민과 안타까움이 커져간다. 이런 시선은 서민의 죽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모리소는 얼음 깨는 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이 추위 때문에 어린 아들이 심하게 병들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끔찍한 추위가 아들을 죽일 수 있다보니 얼음이 녹기를 바랐지만 그러면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일하러 갈 때는 허옇게 언 길을 보며 일거리가 있으니 안심’하지만 ‘드러누운 아이를 위해 태양이, 아니 미지근한 봄볕이라도 어서 나오기를 기원’하는 모순에 처한 것이다. ‘빈민에게는 온갖 종류의 날씨도 적’인 셈이다. 결국 얼음이 녹기 시작해 그는 해고당하고 만다. 일자리를 잃어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 볼 불을 밝힐 양초조차 살 수 없다. 얼음도 녹았으니 아이는 살아나야 할 텐데, 그 간절한 바람은 덧없기만 하다. 아이가 떠난 뒤에야 도착한 구호품. ‘빈민 구제소는 항상 기차가 떠나버려야 도착한다면서’ 허탈하게 웃는 모리소를 지켜보노라면 가난한 이들에게 던져지는 삶의 무게로 인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결혼’은 이른바 ‘적령기’가 있어서 대부분 주인공들이 젊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에 비해 ‘죽음’에서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의 나이가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에서는 한껏 냉소적이던 졸라가 ‘죽음’에서는 좀 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다. 삶 자체가 버텨나가기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에서 ‘서민의 죽음’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한편, 마지막 3장에 실린 ‘어떤 사랑’은 사랑, 결혼, 죽음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런 단편들을 쓸 수 있었기에 졸라는 그 장대한 루공 마카르 총서를 써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결혼, 죽음>은 졸라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단편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졸라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졸라 입문서, 또는 맛보기용으로 꽤 괜찮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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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Coldplay - Everyday Life
콜드플레이 (Coldplay) 노래 / Parlophone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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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발매 후 좋다는 평을 듣고, 너무 기대를 했나보다. 크리스 마틴 목소리는 여전히 보석 같고 그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몇몇 곡들은 꽤 좋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너무 욕심이 과한 느낌. 특히 넘치는 가스펠 송 어쩔... 이들의 1,2집을 사랑했던 팬들에겐 좀 많이 낯선 앨범. 제발 그때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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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11-2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콜드플레이 앨범 전체 안들은지 한참 오래 됐어요. 3집부터는 한두곡 정도만 좋고... 앨범 전체 완성도로서는 영~~~ 뭐 요즘 시대에 앨범을 완성해서 내준 것도 감사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들을 계획은 없다 ㅋㅋ)

잠자냥 2019-11-29 10: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전 이 밴드 1,2집을 워낙 좋아해서, 늘 기대를 하기는 해요. 3집까지는 앨범 사고 그래그래... 아직까진 괜찮아 하다가.... 4집 <Viva la Vida.....> 여기서는 앨범 사고 조금 후회하다가... 그래, 그래도 들어줄만해 했다가... 5집 <Mylo Xyloto> 이건 앨범 사고 정말 후회했어요. 갖다 버리고 싶... ㅋㅋ 그 뒤로 6집, 7집은 앨범 사지도 않았고, 그나마 옛정으로 음원 받아서 심드렁하게 들어보기는 했거든요. 근데 이번 앨범은 싱글 발매 이후 워낙 좋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기대하고 오랜만에 덥석! 샀는데.... 하... 이제 기대를 접기로........ (이 앨범에서도 5번 트랙 ‘Daddy‘는 꽤 좋아요. 싱글로 밀었던 ‘Arabesque‘보다 전 이 노래가 더 좋더군요. 아마 1,2집 풍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노래는 좋아할 것 같아요.), 암튼 콜플이여... 뮤즈처럼.... 안녕...... ㅎㅎ

그러고 보면 새 앨범 낼 때마다 여전히 거의 만점에 가까운 평을 듣고 있는 라디오 헤드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케이 2019-11-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콜드플레이 1집-2집은 앨범 수록곡 전곡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콜드플레이가 유명해진 3집부터 급격히 정말 급격히 팬으로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앨범 분위기가 바뀌어서 밴드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어요.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도 옛정으로 가긴 했지만요. 말씀하신 곡은 1-2집 팬으로서 꼭꼭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전 라디오헤드도 3집까지가 좋았고 그 뒤 앨범은 Amnesiac 까지만 사고 안샀는데요. Burn the Witch 를 듣고 대단하다 생각은 했어요. 아직까지(?) 이런 독창적인 곡을 만들 수 있다니 싶어서요.

근데 음... 뭐든 젊어 만들어야 좋은걸까요. 예술만큼은 늙어도 젊은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거 아닐까 생각했는데 소설도 음악도 영화도 젊은 사람이 만든 게 확실히 더 나은 것 같단 생각에 늙어가는 1인으로서 가끔 슬픕니다. ㅜ_ㅜ (갑자기 딴 얘기)

P.S 뮤즈.......... 아아... ㅜㅜㅜㅜ 그들 역시 3집까진 괜찮았는데.

잠자냥 2019-11-29 10:44   좋아요 0 | URL
콜드플레이 공연장 갔었군요! 저도 갔었는데. ㅎㅎ 예매 전쟁이었는데 티켓 예매 신공 발휘! ㅎㅎ 콜플 1,2집은 여전히 좋아요. ㅎㅎ 그래서 어제 ‘daddy‘ 들을 때는 오랜만에 옛 음악 듣던 기분도 들더라고요.

라디오헤드 앨범은 2,3집이 역시 명작이죠. ㅎㅎ 그런데 내놓는 앨범마다 여전히 좋아요. 톰요크 솔로 앨범도 그렇고. 암튼 창작 능력은 무르익는 것보다는 오히려 불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기는 하죠. 특히 음악, 그중에서도 록밴드는 대부분 1,2집이 그들 최고 앨범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하하하하. 뮤즈여.......... 뮤즈여..... -_-;;;
 
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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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졸라! 그의 루공 마카르 총서 단편 버전이라고나 할까. 계층별 결혼과 죽음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다. 이 짧은 단편들에서도 인간의 위선과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촌철살인 문장에서는 웃음도 터진다. 사랑과 결혼, 죽음을 모두 아우른 마지막 작품 ‘어떤 사랑’이 특히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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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28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ㅋㅋ 저 이것도 꼭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 넣어뒀는데 잠자냥 님이 역시나 벌써!! 게다가 별다섯이라니 몹시 좋네요ㅠ

잠자냥 2019-11-28 09:48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별 다섯까지는 아니었는데.... 읽어갈수록 좋아서 결국 ㅋㅋㅋ 졸라의 장편들에 비하면 정말~~~ 금방 읽어요.

ninja63 2019-11-2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읽을때는 요즘 젊은세대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 생각했지만.읽어내려갈수록 세대를 초월해서 살아가는 인간상은 정말 똑같구나 느꼈어요.그런현상을 작가의 감정을 배제한채 객관적으로 써내려간것이 오히려 가슴 먹먹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잠자냥 2019-11-28 12:53   좋아요 0 | URL
네 요즘 한국 사회의 결혼&죽음의 풍경과도 거의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는 결혼식 때 사회에 기부금을 내는 모습이 좀 신선했습니다(그것도 계층에 따라 다른 금액을! ㅎㅎ).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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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가 아닐까? 공항에는 설렘이 있다. 만남이 있고 이별도 있다. 그러나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의 얼굴에는 그 무엇보다 설렘이 가득하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삐 움직이는 걸음에도, 검색대 통과를 기다리느라 길게 늘어선 줄에도, 특별히 살 게 없어도 괜히 둘러보는 면세점에서도 많은 이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일까? 가까운 곳이든 아주 먼 곳이든 그들은 곧 낯선 세계에 도착하리라.

많은 이들이 여행을,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행위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로는 낯섦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클 것이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행위는 권태를 불러일으킨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어딘가 늘 한곳에만 머무르면 일상이 지리멸렬해진다. 그럴 때 인간은 떠난다. 물론, 인파가 몰리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극히 꺼려해 여행을 싫어하는 이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디론가 이동했다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일터로 출퇴근 했거나 학교에 가거나 산책을 다녀오거나 등등. 몇날 며칠 방안에만 콕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한다. 공기의 순환, 그 이동을 통해 신선한 기운을 만난다. 이 또한 하나의 이동이고 움직임이다.

인간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흔히 ‘머무르는 상태’를 뜻하는 ‘안주한다’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는 쓰지 않는다. 현실에 안주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삶은 정체되었고, 더는 발전하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움직여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나고, 받아들여서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 <방랑자들>에는 그런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려진다. 떠나고 돌아오고 여행지에서 길을 잃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 이 책은 여행자들을 위한 성경과도 같다. 아니 21세기의 베데커 여행서라고나 할까?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작품을 통해 모든 움직이는 것들, 어딘가로 향하고, 무엇인가를 향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라도 이동하는 존재들, ‘방랑자들’의 삶을 찬양한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이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고 말한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391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왜 ‘방랑’을 ‘떠남’을 ‘이동’을 ‘여행’을 찬양할까? <방랑자들>에서는 죽어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 유리병 속에 방부처리된 육체도 등장한다. 육체가 죽으면 우리는 종종 ‘영혼’은 어딘가에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그러나 실체가 모호한 이 대상은 당혹스럽다. 이 작품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육체를 다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왕’(397쪽)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인간은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것, 심지어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는 정지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꼼짝도 하지 않는 것,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든 것을 지배’(389쪽)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392쪽).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면 그곳은 일상이 되어 매력은 점차 빛이 바랜다. 모든 ‘집과 대로, 공원, 정원 그리고 도로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스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동함으로써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새롭고 깨끗하고 순수하다고, 어떤 면에서는 불멸이라고까지 느끼게 된다’(460쪽) 이런 이동을 끊임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여행의 가장 최상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590쪽)고 말하게 되는 그런 단계. 그래서 다시 사람들은 방랑길에 오를 것이다. 죽음을 벗어나 새로 태어나기를 꿈꾸며. 그렇게 영원한 삶을 꿈꾸며……. <방랑자>들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 변화를 꿈꾸는 인간의 삶을 예찬한다. 떠났다 돌아올 때 그는 조금은 새로 태어나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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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2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여행자들을 위한 성경과도 같다니, 안읽어볼 수가 없겠네요.
주말에도 김포공항 갔다가 ‘아, 나는 공항이 진짜 너무 좋아 ㅠㅠ‘ 했는데, 저는 공항이 좋아서 여행이 좋은건지 여행이 좋아서 공항이 좋은건지 모르겠어요. 공항이 ‘왜‘좋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공항에 취직하고 싶어요 ㅠㅠ 그러나 일터가 되면 싫어질까요?

잠자냥 2019-11-27 09:3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작가 자전적 이야기도 섞여 있는데, 작가가 여행을 꽤 좋아하는 사람 같아요. 공항 같은 곳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책입니다. ㅎㅎ 물론 어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기도 해서 앞에서부터 읽으면 좋겠지만.... 음 아무 쪽이나 읽다 보면, 왠지 여행지에서 지도 보며 목적지 찾아가는 그런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해요. ㅎㅎ

공항 좋죠? 저도 공항 좋아해요. ㅋㅋㅋㅋ 인천 공항 가면 이미 거기 진입한 순간부터 여행지 온 것처럼 막 설레고 ㅋㅋㅋㅋㅋ 김포 공항도 요즘 리뉴얼 많이 해서 더 설레고 ㅋㅋㅋㅋㅋ 근데 전 공항에 취직하고 싶진 않아요. 일터 노노 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소중한 공항은 남겨둘래요.
 
[전자책] 속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6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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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권은 범인이 뜻밖의 인물이라 어거지로 끼워넣은 감이 조금 있다. 살짝 김빠지는 느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해미시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는가?!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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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너무 좋아요~~~ 완성도는 좀 들쑥날쑥해도 캐릭터에 대한 애정으로 끝까지 보게 될 것 같은 시리즈..과연 해미시는 언제쯤 반려를 맞이할런지 궁금하네요 ㅎㅎ 치과의사의 죽음까지는 여전히 외로운 우리 해미시..그건 그 나름대로 행복해 보이지만요^^;

잠자냥 2019-12-13 09:21   좋아요 0 | URL
네, 편안하게 읽기 좋은 추리소설 같습니다. 해미시와 프리실라 관계도 계속 궁금하고, 해미시가 과연 야망을 품을 것인지 아닌지도 그렇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