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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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이 책으로 인해 무척 즐거웠다. 고전이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가 싶은 그런 책이다. 서머싯 몸, 정말 얄밉게도 글 잘 쓴다. 모두 80장인 이 작품은 각 장이 단 몇 페이지로 이루어져 짧게 끝난다. 20분짜리 일일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다음 편이 너무 궁금해서 아, 한 회만 더, 한 회만 더 이렇게 계속 보게 되는 드라마 같다.

 

시작부터 상당하다. 여자와 남자가 밀회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군가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그들이 부부이고, 자신들의 집에 있는 거라면 이렇게 놀랄 일이 없다. 하녀나 하인 중 한 사람이겠지, 남자가 다독이자 여자가 말한다. 이 시간에 그들은 여기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월터일지도 모른다면서 공포에 질린다. 남자의 신발을 가리키고, 모자는 대체 어디에 뒀냐고 묻고, 남자는 불안한 마음으로 숨을 곳을 찾고……. 딱 봐도 불륜이다. 그런데 남편인 월터가 한낮에 갑자기 집에 온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시작 부분 단 몇 쪽에서 펼쳐진다.

 

여자의 이름은 키티, 남자는 찰스. 여자는 유부녀여도, 남자는 총각인가 싶은데, 그것도 아니다. 그 또한 아내가 있다. 전형적인 잘생기고 능글능글한, 자아도취적인 바람둥이 유형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남자, 뭐가 좋아서 반했을까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유형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렇다고 키티이 여자가 호감 가는 인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신분 상승 욕구와 허영 많은 엄마 때문에 그렇게 길들여져서 남자들 눈길을 즐기고, 돈 많고 잘생기고 집안 좋고 지위도 좋은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게 유일한 삶의 목표인, 자기의 엄마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그런 여자로 자랐다.

 

그런데 문제는 온갖 남자들의 구애를 즐기면서 아무나 상대할 수 없다고 뿌리치면서 도도하게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결혼할 나이가 꽉 차서, 아니 그마저도 자칫 지나가 버릴 거 같다. 이제는 구혼자들도 늙은 남자뿐이고 그마저도 드물다. 그런 중에 자기보다 못나고, 그래서 엄마에게 구박만 받아 온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될 것 같다. , 이걸 어쩌지! 초초하다. 엄마도 이제는 큰딸 키티를 냉대한다.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러던 중 알게 된 월터’- 이 남자는 키티에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한다. 얼마나 희미했는지 몇 번이나 춤을 춘 사이이지만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 같지만, 지루하고 따분하고 음울하다. 그런데 어느 날 월터가 그녀에게 청혼한다. 키티는 엄마의 냉대도, 구혼자 없이 나이 들어가는 처량한 처지도,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것도 견딜 수가 없던 차에, 월터의 청혼을 허락하고 만다. 그를 눈곱만치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비극은 여기서 시작한다. 세균학자인 월터는 예의도 바르고, 생긴 것도 딱히 크게 문제 삼을 것 없고, 남들 평판도 그만하면 괜찮다. 게다가 키티를 거의 숭배하듯이 사랑한다. 그런데, 키티는 그에게 전혀 애정을 느낄 수가 없다. 관심사도 서로 너무나 다르고, 이야기를 나눠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 세균학자인 월터를 따라 결혼 후 홍콩으로 오게 된 키티는 그곳에서 찰스를 만나고, 이 능글맞은 바람둥이와 사랑에 빠진다. 아니, 키티에게는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찰스에게는 그저 욕정 풀이 대상이었을 뿐인 그런 관계.

 

그런데, 키티와 찰스가 밀회를 즐긴 그 오후에 집안에서 문을 돌리던 소리의 주인은 하인이나 하녀가 아닌, 월터가 맞을까? 벌써 들킬 리가 있겠어? 이런 생각을 하던 나에게 서머싯 몸은 여지없이 찬물을 끼얹는다. 그 생각을 깨뜨려버린다. 그렇다. 그날 문을 열려다가 그냥 돌아간 사람, 한낮에 집에 돌아왔다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알게 된 사람은 월터였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 배신에 크게 고통받은 월터는 아내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찰스가 이혼하고 그녀와 결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함께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 오지로 떠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키티는 자신만만하다. 찰스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의 아내와 당장 이혼할 것이고 자신과 곧 결혼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찰스가 결코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능글맞고, 호색한에, 키티가 아니더라도 다른 그 어떤 여자와도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 남자라는 걸 뻔히 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오직 이 세상에 키티 뿐이다. 월터마저도 찰스가 그런 싸구려 인간임을 알기에 그런 제안을 쉽사리 한 것이다. 복수심에 가득차서 냉소 가득한 얼굴로. 실제로 키티가 모든 상황을 찰스에게 털어놓자, 이 능글남은 자신은 절대 이혼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 아니라며, 키티를 설득한다.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으로 가라고……. 그렇다. 자기만 살자는 거다.

 

찰스의 배신과 월터의 증오, 콜레라가 창궐하는 지역으로 끌고 가 자신을 죽이고야말겠다는 그 무시무시한 미움과 증오에 부르르 떨던 키티는 결국 월터를 따라서 중국 오지로 떠난다. 그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다. 사랑이나 욕망, 배신, 질투 이런 인간의 감정들이 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월터와 키티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아니 월터는 그런 중에도 여전히 키티를 사랑하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이 죽음의 마을에서 형식적인 부부로 함께 지낸다. 그 사이 키티는 수녀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봉사를 시작하고, 워딩턴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를 만나면서 서서히 변화한다. 허영기 많던 그 철없는 여인에서 조금씩 변모한다. 오직 죽음만이 넘치는 이 공간에서 인간의 세속적 욕망들은 그저 덧없어 보인다.

 

, 그러면 독자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 이렇게 변한 키티가 월터의 참된 면모, 그러니까 이타성과 신의, 지성과 감성 등 위대한 품성을 갖춘 그의 진면목을 깨달아서 두 사람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결말로 가는구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머싯 몸은 얼마나 잔인한지, 아니 얼마나 인간을 잘 아는지,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꿰뚫어본다. 마치 월터가 키티의 그 경박한 속성을 다 알고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듯이, 서머싯 몸 또한 인간은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고, 얼마나 얕고 천박하며 이기적이며, 또 비속한 존재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도.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지 않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 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 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인생의 베일> 96~97)


월터의 키티를 향한 이 호소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절절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키티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필 수 없으리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다. 사랑을 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사랑은 동정이나 연민아 아니니까. 그가 아무리 세균학자로, 의사로 능력이 뛰어나고,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생각하는 이타성 넘치는 인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훌륭하다는 칭송을 받고, 고결한 취미에, 똑똑한 지능을 갖추었더라도, 키티에게는 사랑을,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오히려 월터가 키티의 경박함과 매력적이지 않은 속성들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듯 키티 또한 잘생겼지만 그것 빼곤 딱히 볼 게 없는 찰스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는 고마움조차 모를 수도 있어요.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는데 나는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루함만 느낄 테니까요.”라고 말했듯이 키티는 월터가 자신을 사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함부로 대한다. , 인간이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베일>사랑은 있으나 진짜 사랑이라고 이를 만한 것은 없는 기묘한 소설이다. 월터는 죽어가는 순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듣기는 하지만 나도 알고, 이 책을 읽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한 인간, 그러니까 친구가 죽어갈 때 느낄 법한 연민이나 슬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마음이지 설레고 들뜨고, 안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그를 생각하면 한없이 행복해지는 그런 사랑이 결코 아님을. 월터 그 자신 또한 알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죽은 것은 개에 물린 사람이 아니고 개였다. 쓸쓸히 말한 것이리라.

 

키티는 영국을 떠나 홍콩에서 지낸 후, 다시 홍콩을 떠나 중국 오지로 가면서 서서히 변화했다. 그 사이 사랑도, 이별도, 죽음도 경험한다. 스스로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지! 서머싯 몸은 그런 인간의 얄팍한 속성을 또 얼마나 잘 아는지! 키티는 찰스와 재회하고 그토록 혐오스럽다던 그 인간과 또다시 놀아나고 만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한심한 여자야,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키티가 정말 구제불능이라고 느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혐오는 나만 느끼는 건 아니었나 보다. 키티 그녀도 찰스와 다시 육체관계를 맺고는 자기 자신을 혐오한다. 그래, 그래야 마땅하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저 욕정일 뿐. 그래, 콜레라가 창궐하는 오지에서, 서로 싸늘한 월터와 육체관계를 맺었을 리는 없고 그랬다면 그처럼 오래 참았으니 욕정에 들끓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해하자……. 그래도 아이고 이 여자야 싶어진다. 못마땅하다. 그럼에도 서머싯 몸이 인간을 얼마나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잘 파악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미성숙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는 감탄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마지막에 키티가 아버지와 함께 또 다른 나라로 떠나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진실로 홀로서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도 남는다. 부모, 특히 엄마로 인해 허영심 많은 여자, 그저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여자로 키워진 키티. 그녀가 자기 딸만큼은 자유롭고 자기 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거라는 결심을 할 정도로 성장했는데, 그 성장을 바탕으로 앞으로 살아갈 인생도 오롯이 혼자해쳐나가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 서머싯 몸도 불완전한 인간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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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6-1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 진짜 최고의 2류라니까요!
어찌 책마다 그렇게 맛있게 쓰는지....라고 열라 생각했다가, <어센든>까지 가면 글쎄 흑흑... 폭망입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06-11 14:43   좋아요 0 | URL
헉! <어센든> 최근에 열린책들에서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으로 나왔기에 한번 읽어보려고 했는데!!!

꼬마요정 2020-06-11 15:05   좋아요 0 | URL
헉, 저 그저께 샀는데요...ㅠㅠ

Falstaff 2020-06-11 15:07   좋아요 1 | URL
몸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씀입죠. 그래도 이름 값이 있는데요.
작가 자신이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스파이 출신이잖아요. 그래도 세월이 많이 지나고, 헐리우드 스파이 물을 충분히 경험한 요새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 하여튼 그렇습니다. ^^;;

잠자냥 2020-06-11 15:3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는 그래도 한번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몸의 <과자와 맥주> 좀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음....

Falstaff 2020-06-11 15:52   좋아요 1 | URL
흑흑흑... 제가 읽은 <어센덴>도 그 출판사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재미가 덜했을까요? 신상웅이던가, 그 양반이 일본 태생이라 워낙 일본어에 능통해서요. ㅎㅎㅎ

다락방 2020-06-1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엄청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리뷰 읽어보니 다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ㅎㅎ
그리고 어센든..몰랐는데, 뭐라고요? 저도 한 번 검색해보겠습니다. ㅋㅋ

(잠시후) 검색했는데 이 책을 추천마법사가 다락방님께 추천한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6-12 10:48   좋아요 0 | URL
정말 또 오랜만에 재미난 책 읽었어요. 전 전자책으로 읽고도 왠지 종이책 사고 싶어지더라니까요. ㅋㅋㅋㅋ
어센든! 추천 마법사의 추천이 과연 잘 맞아떨어질지! 두둥 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0-06-13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독서모임에서 이 책 만나고
나서 영화로도 구해서 본 기억
이 나네요.

정말 재밌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모옴이라는 냥반이 정말 당대
로맨스를 그리는데 있어 대단한
실력가이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잠자냥 2020-06-14 08: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이참에 영화도 한번 버려고요. ㅎㅎ

coolcat329 2020-07-13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ㅋ 저도 그 문제의 장면에서 이 한심한 여자야...미쳤구나 미쳤어...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진짜 인간의 사는 모습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의 잔인한 모습이 독자는 또 좋잖아요 ㅎㅎ

잠자냥 2020-07-13 21:54   좋아요 0 | URL
그죠 그죠 그 장면 진짜 아하 이 여자를 어이할꼬 하다가도 그런 게 인간이지 싶고... 암튼 몸이 참 잘 썼어요. ㅎㅎ
 

어제 드디어 창비 우롱상자가 도착했다.


나의 정신적 자유와 글 쓸 자유를 위해 내 블로그 및 알라딘 서재를 읽지 않는 애인은 드디어 우롱상자 왔다는 소리에 진지한 얼굴로 창비에서 우롱차 보내 준 거냐고 물었다. ㅋㅋㅋㅋㅋㅋ 그동안 내가 리뷰 대회에서 석류즙/오디즙 이런 걸 받은 적도 있어서 또 그런 것인가 했다는.... ㅋㅋㅋㅋㅋ



상자는 일단 라면 박스보다는 매우 작다 (과대포장이라는 지적을 의식한 듯??)



열어보니 창비 굿즈가 위에 떡하니....(역시 상자는 빈틈없을 정도로 꽉 찬다. 과대포장 절대 아님 ㅋㅋ)



드디어 모시는군요. <주군의 여인>이여. 1, 2권 모두 600쪽 넘음. 1200쪽의 위엄...(각 권 17,000원)



상자만 오면 관심 폭발 고냥 2호 등장.



나도 빠질 수 없지.... =33 고냥 3호도 등장


이 아이들이 관심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노끈!!!
이때부터 개봉하다 말고 집사와 삼냥이들의 노끈 놀이 15분 간 이어짐.
(이날 창비 우롱상자에서 단연코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노끈이었다고....)



창비 굿즈. 에코백/수첩(4개)/메모지/연필/시요일 한 달 구독권 (폴스타프 님, 이제 받으셨지요? ㅋㅋㅋ)



책꽂이에 꽂아 보았당! 레헨따 1은 전자책으로 갖고 있음....(시공사 책 몇 권 다른 쪽으로 뺐음)



내가 갖고 있는 창비세계문학... 사실 몇 권은 읽고 팔았..... ;;
아, 그러고 보니 <주군의 여인>에 '창비드림' 도장 안 찍혀 있었다! 이것도 독자 불만 수용한 듯??


암튼 잘 보면 <죽음> 그러니까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내가 별 다섯 개 준 작품으로 소장 중(레헨따2 옆에 꽂혀 있다. 글씨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음).

그러나 <고뇌> 즉,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는 없음. 절대 갖고 싶지 않음...
이 작품은 중학교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사실 그때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 후로 괴테 작품은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편력시대> <이탈리아 여행기>까지 읽었지만....
다 별로였다. 난 괴테를 참 좋아하지 않는구나...


암튼 이렇게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창비우롱상자. 집단 지성... 아니고 의 힘. ㅋㅋㅋ



자, 이제 <주군의 여인>을 읽고 리뷰를 써야지. 그러나 언제 읽을지는 모름; 넘나 두꺼운 것.

사실 이 작품은 옆집의 주정뱅이 폴스타프 님 리뷰 읽고 궁금해진 책이다.

올해 안에는 읽고 리뷰 쓸게요. 창비여, 고마워요. ㅋㅋㅋ 

<주군의 여인> 마니아가 될 테얌!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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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1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주군의 여인 창비드림 찍혀있었는데요?! 흐음..

이 페이퍼로 인해 잠자냥 님의 책장 사진을 보게 되어 너무 좋네요. 이왕이면 전체샷도 올려주시지... 넘나 궁금한데 말입니다.....
그건그렇고 이제 잠자일보는 더이상 볼 수 없는건가요? (서운..)

잠자냥 2020-06-11 11:01   좋아요 0 | URL
학 정말요? 전 도장 안 찍혀있었어요. 이론이론....
그렇지만 읽고 나서 팔지는 않을 거 같아요. 할머니 되고 나서도 창비우롱상자를 추억하기 위해 간직하려고요. ㅋㅋㅋ

그나마 저 책장 사진은 알라딘 이웃들이 다른 사람 책장 구경하는 걸 좋아하시는 듯하여(저 또한 그렇고요) 다른 사진보다는 좀 크게 올렸어요. 제 책장은 온갖 잡동사니가 섞여 있는 터라 ㅋㅋㅋㅋ 나중에 정리되면 한 번 소개할게요.

잠자일보는... 음 또 뭔가 이런 재미난 일이 있으면 특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0-06-11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잘 된 일입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창비도 이렇게 변하게 만드는 독자, 소비자들의 힘. 크... 이걸 ‘연대‘라고 하셨나요, 특종에서? ㅋㅋㅋ
며칠간 참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잠자일보 특종에다가 여러 재미난 에피소드들.
정말 먼 훗날까지 기억할 즐거운 추억입니다.
<주군의 여인> 즐기세요. 제발 책하고 궁합이 맞으셔야 할 텐데요. ^^;;

잠자냥 2020-06-11 11:23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창비의 사전에 반성을 집어넣은 집단지랄 연대의 힘! ㅋㅋㅋㅋ
암튼 즐겁고 기분 좋은 추억이었어요. ㅎㅎ
<주군의 여인> 휘리릭 넘겨 보았는데 재미있을 거 같아요!

초란공 2020-06-1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여인>은 표지가 근사하네요. 저도 괜히 솔깃해지는 책이네요^^ 그나저나 이런 특종을 낚으시려면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셔야한다는 걸 알았어요^^ 책이 정말 많으시다는...

잠자냥 2020-06-11 12:40   좋아요 0 | URL
<여인> ㅎㅎ 상당히 흥미진진해 보이는 내용입니당!
다 읽으면 꼭 리뷰 남길게요. ㅎㅎ
저 책은 제가 갖고 있는 책의 극히 일부에요.. ㅠ_ㅠ
날마다 책이 쌓여서 참 처치곤란입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0-06-1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정신적 자유와 글 쓸 자유를 위해!!! 키햐! 잠자냥님 내 스타일! 저희 집 사람은 제가 리뷰대회 응시한 것도 모릅니다. 이전 죽음과 고뇌도, 빌레뜨도 다 제가 산 줄 ㅋㅋㅋㅋㅋㅋㅋㅋ 알라딘에서 그런 일이 있었대~ 라고 남이야기 하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냥이들 3호까지 있으시다니 대식구시네요. 저도 다락방님처럼 잠자냥님 책장샷 너무 좋아요. 역시나 역시~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제 책엔 도장이 찍혀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좋은 추억 선사해주신 알라딘 이웃분들께 감사드려요. 잠자일보는 격주 발행 안 되나요? ㅎㅎㅎㅎㅎ

Falstaff 2020-06-11 12:33   좋아요 0 | URL
커헉!
단발머리 님이..... 남성분이세요? ‘저희 집사람‘...이시라니.
하여튼 우롱상자의 미스테리는 끝이 없습니다. @@

아직 여성분이 남편더러 ‘집사람‘이라고는 안 하지요? 혹시 몰라서.... ^^;;;

단발머리 2020-06-11 12:36   좋아요 1 | URL
저에요. 그런 사람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희 집(에 저랑 같이 사는) 사람.... 이런 의미고요.
제 실명은 남자틱하다는 점도 알려드려요. 약국 가서 처방전 내밀면, 남편 분 약인가요? 그러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6-11 12:4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아니 정말 도장 찍혀있었어요?! 저만 안 찍혀있었나봐요. ㅎㅎㅎ
잠자일보는 내맘대로 발행입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6-11 12:4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 / 폴스타프 씨(42세, 남) ˝창비우롱사태에 세대격차 절감˝ ㅋㅋㅋㅋㅋㅋㅋ

초란공 2020-06-1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내지를 촛불에 비춰보면 ‘창비드림’이라는 글자가 등장하지 않을까하는.. 아니면 창비에서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들께는 도장을 찍지 않고 특별히 관심독자 명예의 전당 리스트에 기재되어 관리된다는 뜻일까요? ㅋㅋ

잠자냥 2020-06-11 13: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그럴까요? ㅋㅋ 오늘 집에 가면 한번 불빛에 비춰보겠습니다. ㅋㅋㅋㅋ
 
[전자책]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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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결혼과 로맨스를 위해 필요한 여자였을 뿐인 키티. 그녀가 한 인간으로 홀로서기까지의 성장담.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 찰스와 또 그랬어야만 하는지..... 몹시 못마땅하지만, 인간의 그런 모순과 나약함까지 꿰뚫어 보는 서머싯 몸의 통찰력에는 그저 감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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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이야기》 이 단편 모음집에서 케이트 쇼팽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이디스 워튼 <다른 두 사람>은 이미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은 작품이다. 그밖에도 루이자 메이 올컷이나, 제인 오스틴, 윌라 캐더, 샬럿 퍼킨스 길먼,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 등의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다른 작품들로 만나본 작가들이다. 그래서 처음 이 단편집을 봤을 때, 꼭 사서 읽어야할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좋은 작가의, 괜찮은 작품들이 있을지 몰라. 그런 작가와 작품을 발굴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읽어볼까 싶은 마음. 다행히 그 예상은 기분 좋게 적중했다.

첫 두 편은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올컷의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는 올컷이 ‘말동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어느 집의 하녀 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작은 아씨들>의 ‘조’처럼 독립적이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애를 쓰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 여성은 바로 올컷 자신이다. 하녀 일을 하겠다고 나선 딸을 말리면서 루이자의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네 자존심이 너무 세지 않니”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루이자는 “저는 빈둥거리면서 얹혀살기에 자존심이 너무 센 거예요. 차라리 바닥을 닦고 빨래를 하겠어요.” 답한다. 이런 부분이 속시원하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누이의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다가온 ‘요세푸스 목사’가 루이자가 정작 찾아가자 누이의 말동무는커녕 그 자신이 루이자를 자기 하녀처럼 부리며 온갖 일을 시키는 장면이다. 그렇게 위선적이면서도 말은 얼마나 교묘히 잘하는지 역겨울 정도인데, 거기에  루이자는 당당히 응수한다.

두 번째 작품인 <세 자매>는 제인 오스틴 특유의 결혼과 로맨스에 대한 신랄한 냉소가 넘친다. 나는 제인 오스틴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많이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소리를 하기는 뭐하지만,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성의 로맨스와 결혼 이야기에는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로맨스나 결혼 아니면 쓸 이야기가 없는가? 하는 반감이 들어 잘 읽게 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 장편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세 자매 중 누구하고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돈만’ 많은 남자의 구애를 두고 세 자매가 고민에 빠지는 내용이 그려진다. 그중 이 결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첫째 메리로, 그녀는 이 결혼으로 자신이 원하는 부와 지위를 얻으리라 기대하지만, 결혼 상대인 남자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다. 그런 메리를 보며 “그 사람이 메리 언니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하겠지만, 그 사람 돈과 가문과 저택과 마차는 행복하게 해줄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막내의 시선이 꽤 신랄하다. 읽다 보면 오직 돈과 지위, 명예 등 ‘사랑’이 아닌 ‘필요’ 때문에 이루어지는 결혼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씁쓸한 생각이 절로 든다.

이렇게 별 감흥 없이 읽어나가다가, 앗! 바로 이거야, 하는 작품을 발견했는데,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가 바로 그렇다. 이 단편을 읽고 작가의 다른 국내 번역작을 찾아봤는데 이렇다 할 작품을 발견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평생 서른 권이 넘는 단편집과 소설을 출간했고, 소설 속 여성 인물들에게 독립성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려고 노력했다는 작가, 심지어 1926년에는 여성 최초로 미국문화예술아카데미에서 5년에 한 번 그 시기에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가에게 주는 메달을 받았다는 작가. 그런데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너무나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뉴잉글랜드의 수녀>에는 루이자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잘 가꾸어진 집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어느 날, 하루가 저물 때 쯤 그녀의 집에 조 다겟이 찾아온다. 보아하니 둘은 연인 사이인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어색한 공기가 감돈다. 연인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다정한 대화나 포옹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색한 상태에서 몇 마디 나누다가 다겟이 탁자 위에 놓인 루이자의 책과 잡지를 뒤적이며 살펴본다. 그러다가 다겟은 그걸 아무렇게나 내려놓는다. 바로 그때 루이자는 어색하지만 단호하게 책과 잡지가 원래 놓였던 순서, 그러니까 다겟이 오기 전, 자신이 정갈하게 의도를 갖고 배치해놓았던 순서대로 돌려놓는다. 다겟은 머쓱해져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어떤 책이 위에 있는지가 중요해?” 그러자 루이자는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답한다. “항상 이렇게 놓거든.”

아, 난 이 장면을 보고, 루이자와 다겟의 미묘한 사이, 그리고 루이자이 성격까지 단번에 파악했다. 루이자는 무엇보다 자기만의 공간, 자기가 세워놓은 일상의 가지런한 질서와 규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사랑(?)하는 이가 오더라도 자기 공간에서 자신의 물건을 아무렇게나 만지고 그 배열 순서를 망치는 행동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허락은 하더라도 원래 모습 그대로 돌려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것이다. 조 다겟은 루이자의 집을 나서면서 ‘자신이 마치 도자기 가게에서 나온 악의라곤 전혀 없던 순진한 곰처럼’ 느낀다. 반면 루이자는 ‘오랫동안 시달린 친절한 도자기 가게 주인이 곰이 나간 후 느꼈을 법한 기분’을 느낀다. 그가 나가자마자 양탄자에 묻은 흙을 ‘그럴 줄 알았다’면서 털어내기 바쁘다.

조 다겟은 일주일에 두 번 루이자를 찾아왔고, ‘섬세하게 꾸며진 그녀의 예쁜 방에 앉을 때마다 레이스로 만들어진 울타리’에 갇힌 기분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투박한 손과 발이 혹시나 요정의 거미줄에 걸릴까 봐 움직이기 두려웠고, 루이자 역시 똑같은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절을 읽고, 루이자를 탓할 수도 있으리라. 연인 사이라면서 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그런 시간을 즐기면서도 어떻게 연인이 자신의 방을 어질러놓고, 물건을 헤집어 놓는 일에 신경 쓰느라 서로에게 몰두하지 못할 수 있을까?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이렇게 생각하리라. 실제로 두 사람 사이는 미묘하다. 그들은 한 달 안에 결혼할 예정이다. 한때는 서로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쎄.... 약혼 기간이 무려 15년이나 이어졌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무려 15년 전이다. 15년 중 14년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편지도 주고받지 못했다. 그 긴 세월 내내 다겟은 호주에 있었다. 한몫 잡는다고 호주로 떠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인내하며 자신을 기다린 여자와 결혼하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루이자의 어머니와 오빠가 죽었고,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15년 동안 이어진 약혼, 14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연인 아닌, 연인, 그리고 홀로 남겨져 그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사는 조용하고 정갈한 삶에 익숙해진 여인. 그런 여인 앞에 어느 날 옛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만 남은 약혼자가 돌아온 것이다. 조 다겟이 돌아왔을 때 루이자가 받은 첫 느낌은 곤혹스러움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4년도 아닌 14년이다. 서로 얼굴을 보기는커녕 편지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이 긴 세월 동안 사랑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속임수며 기만이 아닐까. 심지어 루이자는 이제 행복한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녀의 지난 세월, 특히 최근 7년간의 삶은 잔잔한 행복으로 그득했고, 그녀는 연인이 곁에 없다고 단 한 번도 불안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뉴잉글랜드의 수녀>, 111쪽). 그런데 갑자기 결혼해서 남자의 집으로 옮겨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루이자는 혼자 사는 집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에 예술에 가까운 열정을 느꼈다. 그녀는 보석처럼 빛날 때까지 광을 낸 창틀을 보면 진정한 승리감으로 두근거렸고, 말끔한 서랍장 속에 청결히 개켜진 채로 라벤더와 전동싸리와 완벽한 순수의 향을 풍기는 옷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것들을 지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녀의 뇌리에 어떤 이미지가 스쳤는데, 너무 놀란 그녀는 거의 천박하다고 여기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것은 투박한 남편의 물건이 끝없이 널려 있는 광경, 섬세한 조화 속에 거친 남자의 물건이 끼어들며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먼지와 혼돈이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 113~114쪽)


루이자는 이 고요한 혼자만의 삶을 뒤로하고 조 다겟과 결혼해 그의 공간으로 옮겨가게 될까? 사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그렇고, 전개되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독자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결말로 나아가기까지 뜻밖의 사건이 일정 역할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루이자가 다겟과 결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기만의 독립적인 삶을 계속 꾸려나갔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고요와 평온한 협소함 자체가 그녀의 타고난 권리’가 되고 ‘하루하루가 똑같으며 이렇게 매끈하고 무결하고 순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치는 기분. 그래서 ‘수도원에서 해방된 수녀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헤아리는 루이자. 그 결말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때문에 이 작품의 제목인 <뉴잉글랜드의 수녀>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그렸기에 ‘뉴잉글랜드의 수녀’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아니 애초부터 그러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수도원에서 해방된 수녀’와 같은 기쁨을 느낀다는 점에서 무척 역설적인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누런 벽지>로 유명한 샬럿 퍼킨스 길먼의 <변심>도 짧지만 강렬하다. 역시! 하고 감탄하게 된다. 크게 놀라운 내용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완벽해 보이는 부부. 그들의 집에 젊고 아름다운 하녀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예상 가능한 전개. 알고 보니 남편이 하녀를 겁탈해서 임신하게 만들고 뭐 그런 내용이 펼쳐진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과 하녀의 관계를 알게 되는 장면이 매우 기발하고 절묘하며 스릴(?) 넘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편과 하녀 게르타의 관계를 알게 된 매로너 부인의 태도에, 더불어 그토록 오래 전에 ‘이런’ 작품을 쓴 작가에게 감탄하게 된다.

처음에 매로너 부인은 남편과 하녀의 관계를 알고는 분노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이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하녀는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는가! 매로너 부인은 불쾌함과 분노에 휩싸여 울며 애원하는 하녀 게르타에게 차갑게 말한다. “방으로 가서 짐을 싸.”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 후 혼자서 차분히 생각에 잠긴 매로너 부인은 곧 자신의 태도를 후회한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 28년 동안 받은 훈련, 학생으로서 그리고 강사로서 대학에서 보낸 시간과 그녀 스스로 이루어 낸 독립적인 성장 덕분에 그녀의 정신은 게르타의 정신과는 전혀 다르게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있었다. 한 여자는 아내였다. 사랑이 넘치고 신뢰했으며 다정했다. 다른 한 명은 하녀였다. 사랑이 넘치고 신뢰했으며 다정했다. 어린 소녀였다. 낯선 나라에 홀로 와서 이 집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친절도 고마워하는 이 아이는 어떤 훈련도 교육도 받지 못했고 어린애 같았다. 물론 그녀는 유혹을 뿌리쳤어야 했다. 하지만 매로너 부인은 신뢰하는 사람이 우정의 가면을 쓰고 유혹할 때 그것을 알아보기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정도로 현명했다. 잡화점의 점원이었다면 게르타가 잘 뿌리쳤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는 매로너 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여러 명을 뿌리쳤다. 하지만 존중해야 할 사람을 그녀가 어떻게 비난했겠는가? 복종해야 할 사람을 그녀가 어떻게 거부했겠는가? (<변심>, 155쪽)


그러니까 매로너 부인은 남편과 하녀의 관계의 본질을 꿰뚫어본 것이다. 하녀에게 네가 내 남편을 꼬셨지! 나쁜 년! 운운하며 집을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주인의 얼굴을 하고서 하녀를 유혹해 자기 욕망을 채운 남편의 비열함을 알아차린다. 그 비열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이런 짓을 그녀가 사는 집의 지붕 아래에서 저질렀다. 그러고 나서도 떳떳하게 젊은 여자를 사랑한다고 밝힌 다음,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그저 순수하고 단순하게 마음이 아팠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달랐다. 남편은 본인의 쾌락을 위해 게르타의 행복들, 그러니까 ‘깨끗하고 젊은 아름다움, 행복한 삶의 희망, 결혼과 모성, 명예로운 독립’ 등등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매로너 부인은 남편의 피해자임이 명백한 게르타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위로 새로운 감정이 밀려오며 말 그대로 그녀를 벌떡 일어나게 한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곧추세우며 걸었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지은 죄야.” 그녀가 말했다. “이것은 여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모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아기에게 저지른 죄야.”(<변심>, 157쪽)


매로너 부인은 게르타의 방으로 돌아가 그저 울고만 있는 이 어린 소녀를 위로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는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비밀로 남겨둔다. 아무튼 꽤 통쾌한 결말이다. 게다가 100여 년 전에 남성의 그루밍 성폭력 범죄를 꿰뚫어 보고 힘없는 어린 소녀에 대한 연민과 연대, 그로써 비열한 범죄자인 남편을 단죄하는, 그리고 그런 응징을 위해서는 여성이 깨어있어야 함을, 통찰력 있게 써내려간 샬럿 퍼킨스 길먼에게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이렇게 여성 간의 연대를 강조한 작품으로 이 책에 실린 유일한 희곡인 수전 글래스펠 <사소한 것들> 또한 빛난다. 이 작품에는 남편을 살해한 것이 틀림없는 여성을 섣불리 단죄하기보다는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먼저 이해하려는 ‘피터스 부인’과 ‘해일 부인’이 등장한다. 이들과 대비되는 인물인 보안관과 검사 등은 자기들만의 객관적이라는 관점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부인들이 주목하는 ‘사소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며 그녀들의 그런 태도를 비웃기 바쁘다. 그러나 사실 그 ‘사소한 것들’ 안에는 존 라이트의 아내가 왜 남편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주 중요한 단서들이 담겨 있다. “우리는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도-종류가 다를 뿐이지 다 똑같아요. 나라면 그녀에게 병이 다 깨졌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터지지 않았다고 말해요. 전부 말짱하다고요.”라는 해일 부인의 말은 그래서 여성의 이해심과 직관, 연민, 배려가 오롯이 담긴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을 읽고 수전 글레스펠의 작품을 더 찾아보고, 그이의 희곡 <앨리슨의 집>을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것은 당연한 순서랄까.

조라 닐 허스턴의 <땀>도 강렬하다. 백인들의 세탁물을 빨래해주며 근근이 살아가는 딜리아. 그런데 그녀의 남편 사이크는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바람까지 피우고, 게다가 걸핏하면 딜리아를 두들겨 팬다. 15년 전만 해도 딜리아가 자길 떠날까 봐 벌벌 떨었던 인간이 이제는 아내를 향해 온갖 욕설과 구타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웃에서도 혀를 끌끌 차며 그를 보고는 “곰한테 내장을 내줄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말한다. 딜리아는 뼈 빠지게 일하면서 ‘뜬눈으로 누워서 그들의 지난 결혼생활에 널려 있는 파편들을 응시’한다. ‘멀쩡한 건 하나도 없었다. 꽃 같은 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새어 나온 짭짤한 물에 오래 전에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땀, 그녀의 피. 그녀는 결혼에 사랑을 가져왔지만 그는 성욕만을 가져왔다.’(<땀>, 195쪽). 딜리아는 이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 과정이 강렬하게 그려진다.


“인간이 올곧지 않으면 세상 어느 법도 그 사람을 올곧게 만들 수 없어. 아내를 사탕수수처럼 취급하는 놈들이 세상에 숱하다고. 처음에는 영글게 즙이 꽉 차서 달콤하지. 하지만 쥐어짜고 짓이기고, 비틀어서 단물을 쏙 빼먹어. 성이 찰 때까지 빨아먹은 다음에 사탕수수 껍질처럼 그냥 내버리는 거야. 그러는 동안 그놈들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혐오해. 그래도 그놈들은 한 방울도 안 남을 때까지 계속 쥐어짜. 그러고 나서 사탕수수 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여자가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싫어하는 거야.” (<땀>, 198쪽)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런 작가와 작품들을 새로 발견한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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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08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잠자냥 님이 극찬하신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네요. 샬롯 퍼킨스 길먼과 메리 월킨스 프리먼의 작품이요. 너무너무 읽어보고 싶어요. 땀은 제목만으로도 뭔가 훅- 오네요.

저도 언젠가 얘기하려고 했는데 제인 오스틴을 딱히 좋아하지 않거든요. 너무나 유명한 작품<오만과 편견>도 저는 딱히 좋지를 않았고요. <엠마>도 별로였어요. 엠마는 읽다가 엠마 성격 마음에 안들어서 대차게 깠던 기억도 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죄다 제인 오스틴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잠자냥 님도 당연히(!)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너무 반가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름 제인 오스틴 작품을 여러권 읽긴 했네요. 설득, 오만과 편견, 엠마, 노생거 사원까지. 많이 읽었다. ㅎㅎㅎㅎ 제인 오스틴이 쓴 소설보다는 제인 오스틴에 관련된 것들이 더 재미있었어요. <비커밍 제인>이나 <제인 오스틴 북클럽>이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라거나. 후훗. 이런 재미있는 작품들이 만들어진걸 보면 제인 오스틴이 정말 큰 사람이긴 했는가봐요.

이번달 월급날에는 오늘 리뷰쓰신 이 책을 사야겠어요. 후훗. 책 사는 날들의 연속이네요. 하핫. 언제나 그랬듯이..



잠자냥 2020-06-08 15:09   좋아요 0 | URL
와 그래도 제인 오스틴 작품 많이 읽으셨네요. 전 그렇게 많이 읽을 생각조차 들지 않더라고요. 제가 사실 빅토리아시대 여성 작가들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로맨스와 결혼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작품.... 정말 따분하고 재미없............ 남녀가 핑퐁하는 그런 거 노관심.... 사랑하든가 말든가 노관심..... -_-;; 그 시절을 다룬 영화, 특히 제인 오스틴 작품을 영화로 만든 그런 영화들도 지루해서 미쳐버릴 거 같은;;; 그냥 생각만 해도 그 대사들이 막 오그라들어요;;; 휴........ 정신 차려! 사랑과 결혼이 전부냐 싶어서;;; -_-;; 암튼 다락방 님 반가워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08 15:15   좋아요 1 | URL
이렇게나 인기 많은 제인 오스틴인데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걸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권 읽었지만 전 제인 오스틴은 아닌걸로..... 그렇지만 새로 나온 민음사의 맨스필드 파크를 읽어보고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음..써놓고 보니 읽어보고 싶다기 보다는 사고 싶은 거네요? 민음사 책장에 깔맞춤하기 위함인가...

정말 반가워요 잠자냥 님. 엉엉 ㅠㅠ 문학 좋아하면서 제인 오스틴을 안좋아하다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20-06-14 1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4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5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5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4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3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7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7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녀들의 이야기 - 영미 여성 작가 단편 모음집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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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가, 통쾌해졌다가 여성들의 연대에 뭉클해지는 빼어난 단편들. 몇몇 작가의 발견. 살짝 번역 문장 이상한 부분이 보이고 글자 빠진 부분도 보이지만 —.— 실린 작품들이 좋아서 별 다섯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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