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본 두 편의 영화는 공교롭게도 인간의 성적 욕망, 그중에서도 번식욕을 다루고 있었다. 꼭 그것이 주제라고는 볼 수 없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인간들은 그들의 성(性)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하나 같이 자식에 대한 욕심, 또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한 편은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1977), 또 다른 한 편은 최근 재개봉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1997)이다. <이어도>는 해녀들만 남은 섬에서 여자들이 아이를 갖기 위해 벌이는 사투가 그려지고, <우나기>에서는 성불능으로 의심되는 중년 남성(야쿠쇼 코지)이 바람피운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 남자는 감옥에서 8년 복역 후, 모범수로 가석방되어, 한적한 마을에 정착해 이발소를 운영하며 우나기(장어)를 키우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가 키우는 이 수컷 장어와 그의 좌절된 성적 욕망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이 인물의 복잡한 심리가 절묘하게 그려진다.
"천남석.....(의 고츄)은 내 거야!" 영화 <이어도>(1977) 한장면
영화 <우나기>(1997) 한장면
이 두 영화를 연달아 보고 있자니, 스크린 속 저들의 생식욕, 번식욕, 자손에 대한 열망, 자신을 닮은, 자기의 유전자를 포함한 자손을 남기는 일이 인간에게는 저토록 중요한 것일까 새삼 신기했다. 몇 주 전에 본 한국 영화 <장손>(2024)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흐르고 있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장손인 ‘성진’의 매형 ‘재호’에게 봉변이 일어나는 장면이 있다. 밥상머리에서 식구들끼리 싸움이 나는 바람에 뜨거운 국그릇이 하필 재호의 페니스 부분에 쏟아지는 것이다. 당사자야 아파 죽겠지만 다른 남자 가족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도리어 아내 ‘미화’를 비롯해 온 집안 여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가 난다. 페니스에 집착하는 가부장 문화를 풍자하고자 한 장면 같은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고추에 뜨거운 국물 좀 쏟아졌다고 여자들이 저토록 난리를 칠 일인가, 고추가 저렇게 좋은가 쓴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놈의 고츄......... 자식, 자식, 제 자식 갖는 일이 그토록 중요할까? 번식욕 제로에 가까운 나로서는 최근 본 영화들에서 생식욕에 시달리는 인간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인상이 찌푸려진다. 인간에게 섹스가 그저 쾌락과 사랑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쓰일 수는 없는 것인가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번식욕구랄까 생식욕이 거의 없는 까닭은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도 이 세상에 뭔가를 남길 수도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욕구가 더 커서일지도 모른다. 어느 책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작가들 중에는 자식을 낳기(종족 보존)보다 작품을 통해 그 욕구를 채우려는 욕망이 더 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작품이 자식을 대신한다는 논리였는데 나로서는 꽤 수긍이 갔다. 이 세상에 인간을 남겨두고 가는 것보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의 창작물-음악이든 그림이든 문학이든 그러니까 예술적 가치를 지닌 창작물을 남기고 가는 것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그 구절을 읽었을 때 크게 공감했다. 그러나 대개의 평범한 인간들은 그런 불멸의 창작물을 남길 수가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창작 행위에 열을 올려 번식에 충실한 것이리라.
인간의 번식욕과 창작 욕구를 이토록 구구절절 늘어놓는 까닭은 요 며칠 <필로우맨>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한 번 더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이야기, 불멸의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필로우맨>에는 자신이 쓴 이야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남자, ‘카투리안 카투리안’이 등장한다. 그는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느 전체주의 국가의 도살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그를 아주 뿌듯하게 만드는, 자신을 세상 그 누구와도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가 쓴 수백 편의 이야기들이다. 그는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를 사랑한다. 이 작품에는 전체 큰 스토리 외에 카투리안이 쓴 이야기들-엽편 소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런 이야기라면 창작자 자신이 자부심을 느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특히 이 희곡 제목인 <필로우맨>과 동명의 소설인 ‘필로우맨’이 그렇다). 카투리안은 자신이 빚어낸 이야기를 매우 아끼고, 그런 그가 가장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창조할 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야기들이 사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하고, 창작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어둠이 찾아온다. 갑자기 그를 경찰이 체포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영문을 모른 채 그는 취조실로 끌려가 두 형사에게 협박당한다. 형사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로 카투리안을 심문한다. 그가 창조한 이야기들이 담긴 상자에서 한두 편씩 소설을 꺼내 읽으며 그를 압박한다. 설상가상, 옆방에서는 고문을 당하는지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어쩐지 낯익다. 아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투리안의 형 ‘마이클’이 아닌가. 카투리안에 따르면 형은 아무 죄도 없다. 형은 지적장애가 있어 백치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데 왜 대체 형까지 끌려와서 이 두 형제는 형사들의 고문에 시달려야만 하는 걸까? 게다가 즉결 사형에 처해지기까지 이제 고작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절규하는 그에게 형사가 조금씩 그의 죄를 까발린다. 이럴 수가! 문제는 카투리안이 창작한 이야기들, 그 기괴한 이야기들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카투리안이 창조한 그 음산하고 기괴한 이야기들 중에는 형 마이클이 유독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필로우맨’도 그중 하나이다. 필로우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베게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삶이 힘들어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 어디선가 필로우맨이 나타난다. 필로우맨은 그 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어린 시절로 함께 돌아간다. 그러고 나서 필로우맨은 자신의 미래를 모르는 어린 그에게 말한다. 당신의 미래는 너무 어두워서, 당신은 고통을 겪다가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고. 그러니 그 고통을 겪지 않도록 내가 도와주겠노라고. 그렇게 필로우맨은 아이들에게 직접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어른들이 모두 사고라고 생각하는, 사고로 위장된 아이들의 죽음 뒤에는 그렇게 늘 필로우맨이 있다. 그러니까 필로우맨은 미래에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아이들이 미리 삶을 떠나도록 도와주는 존재인 셈이다.
백치나 다름없는 존재인데도 형 마이클은 왜 이 이야기를 좋아하고, 카투리안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는 아이들에게 죽는 방법을 알려주는 ‘필로우맨’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일까? 두 형제의 삶에 그 힌트가 있다. 권력을 이용해 이 두 형제를 괴롭히는 두 형사 ‘투폴스키’와 ‘아리엘’도 어쩌면 저 필로우맨의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아닐까? 그리고 이 <필로우맨>이라는 희곡을 읽으며 필로우맨 같은 존재가 실존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 같은 독자도 그러할 것이다.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야기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도 한다. 카투리안은 이렇게 창조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지키기 위해, 불멸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도박을 건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에 자신처럼 불행한 아이를 낳아, 그 불행을 대물림해주기보다는 이야기를 창조해 비록 자기는 죽더라도 불멸하는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