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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수잔 손택 지음, 배정희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수전 손택의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은 매우 짧은 희곡이다. 짧은 희곡이라 금세 읽을 수 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재능 있는 여자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재능은 축복일까 아니면 독약일까? 이 책은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절망 속에 살다간 앨리스 제임스를 위하여’라는 손택의 서문에서는 셰익스피어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손택에 따르면 버지니아 울프가 이미 [자기만의 방]에서 이런 상상을 했다고 한다. 울프는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유디트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상상 속의 여성은 자신의 오빠처럼 위대한 희곡을 쓸 수 있는 내면의 자율성을 가졌을까?’ 손택은 이런 질문도 한다. 그녀는 아마도 유디트의 소질은 그저 소리 없이 묻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디트가 용기’를 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성은 쉽게 규정지어지고 대체적으로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한계 짓는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매력적이면서 아버지와 남자형제들, 남편에게 참을성 있고 나긋나긋하고 고분고분하며 예민하고 배려할 줄 아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이기심과 공격성, 자신에 대한 관심과 모순되는 것이므로 마찰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바로 이런 이기심과 공격성이야말로 위대한 창조성이 피어날 수 있는 필연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재능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여동생이 없었지만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서막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헨리 제임스’에게는 그러한 여동생이 있었다. 바로 이 희곡의 주인공인 ‘앨리스 제임스’가 그녀다. 헨리 제임스뿐만 아니라 앨리스 제임스의 또 다른 오빠인 ‘윌리엄 제임스’ 역시 철학자로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이런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찍이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문화적 교육적 환경에 노출된 ‘앨리스 제임스’- 그녀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던 19세기는 그녀의 그런 재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우울했고, 늘 자살충동에 시달렸으며 마흔네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병과 싸워야 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앨리스’로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손택의 이 희곡에서 앨리스가 누워있는 침대(정확히는 ‘매트리스’)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그것은 앨리스가 직면한 현실의 무게일 수도 있고, 앨리스에게 허용된 세상, 그러니까 영리하고 명민하지만 앨리스가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매트리스’만큼의 작은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어도 앨리스의 오빠(작품에서는‘해리’로 나온다)와 아버지는 그녀가 재능 있다는 것만큼은 인식은 하기 때문이다. 매트리스의 크기만큼? 그러나 그녀가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사회적인 진출로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재능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너는 너희 오빠들 다음으로 재능 있는 아이’라며 ‘남성 뒤에 서 있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철저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다.
이 희곡의 클라이맥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상한 차 모임’을 차용한 5장의 ‘차 모임’이 아닐까. 이 장면에서 손택은 두 명의 실존 인물과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초대해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는 재능 있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존 인물 중 한 명은 19세기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평론가인 ‘마가렛 풀러’이며 또 다른 한 명은 ‘에밀리 디킨슨’으로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1,775편의 시를 남긴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고작 10편 남짓한 시만 발표했을 뿐이고 죽은 뒤에야 그녀의 가치가 빛을 발휘한 ‘시대와 화합’하지 못했던 재능 있는 여성으로 앨리스와 같은 운명에 처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손택은 일평생 이 희곡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고 한다. ‘이 연극은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연극이며, 결론적으로 상상력에 대한 연극이다. 정신적 감옥의 현실, 상상력의 승리 말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라는 그녀의 서문 또한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9세기에 고작 할 수 있던 것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는 것뿐이었던 재능 많은 여성 앨리스, 1991년에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 또 다른 여성 손택, 그리고 앨리스의 시대에서 2세기가 훌쩍 지난 2008년을 살아가는 재능 있는 또 다른 여성들… 그녀들은 과연 충분할까? 단지 19세기에 비해 매트리스의 크기만 조금 커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