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공교롭게도 매우 상반되는 두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하나는 찰스 부코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이며 다른 하나는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이다.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오에 겐자부로 쪽인데 더 빨리 읽어치운 것은 부코스키 에세이다. 부코스키 에세이는 그만큼 읽어가기 수월하다. 이웃집에 사는 삐딱이 노인이 사람들 사는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듯한 태도랄까.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속하겠지만 어쩐지 읽다 보면 속이 후련하다. 그래서 이 작가 책이 그렇게 사람들한테 많은 사랑을 받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이다. 사람들은 찰스 부코스키의 이른바 ‘안티 히어로’적인 모습에 열광하며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이 사는 모습, 삶의 태도는 그가 작품에서 말하는 바와 정반대로 부와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완전히 속물적인 모습이 아닌가? 아,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사 읽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아닐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의 삶은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찰스 부코스키 같은 사람이 해주는 입담을 들으면서 대리만족이라도 느끼려는 것일까? 나 또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는 참 바르다. 올곧은 소리로 가득하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며 느끼는 작가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담겨 있지만 큰 기둥은 환경을 생각하는 삶, 평화를 생각하는 삶, 차별이나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삶에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자기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사회적 책임을 끊임없이 상기해 준다.
그와 달리 부코스키의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는 작가 자신이 평생 ‘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누군가에게 바르게 살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부코스키가 타인에게 그렇게 설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인간다움을 잃고 오로지 돈과 명예 권력 등을 쫓으며 사는 인생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개인의 인간성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유로운 인간, 제대로 생각하며 사는 인간으로서의 삶이랄까. 난 이렇게 살 테니까, 나더러 너희들처럼 속물적으로 살라고 하지마! 그리고 너희들도 머리가 있다면 좀 생각해봐, 이런 느낌이다.
물론 난 두 작가의 생각에 모두 공감하고 두 에세이 모두 나름 좋았다. 다만 찰스 부코스키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 작가의 매력(부코스키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우체국> <여자들> <팩토텀>을 읽었을 때는 그 주인공 ‘헨리 차나스키’의 아웃사이더 기질에 공감은 하면서도 마초적인 모습은 조금 불편했다. 그래서 크게 좋아할만한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에세이집을 읽으니 찰스 부코스키라는 작가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오로지 글쓰기를 좋아했고, 글쓰기로 구원받았으며 명성이 따른 뒤에도 그 명성을 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경계하며 거기서 멀리 떨어진 채 술, 여자, 경마, 글쓰기로 이뤄진 삶을 보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으며 밤은 술과 컴퓨터(글쓰기)를 위해 비워두었다. 문단이라든지, 비평가라든지 작가라든지 이런 집단과 어울리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하던 작가.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 작은 성공에 우쭐하고 문단이나 평론가 집단이 부추겨주니 진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결국 그들과 돈 앞에 설설 기면서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문학 권력자입네 행세하면서 스스로 ‘아웃사이더’ 운운하는 한국의 치졸한 몇몇 작가들이 떠올라서 실소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었을 때와도 조금 비슷한 느낌인데, 찰스 부코스키 에세이 쪽이 좀 더 편안하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느낌이다. 마루야마 겐지, 찰스 부코스키, 오에 겐자부로 모두 그들이 에세이를 통해 하는 말들은 진실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곧 에세이에 쓴 그 삶 그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런 작가들을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