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겐 을유세계문학전집 14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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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를 연극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라이겐>은 창녀와 군인 / 군인과 하녀 / 하녀와 젊은 주인 / 젊은 주인과 젊은 부인 / 젊은 부인과 남편 / 남편과 귀여운 아가씨 / 귀여운 아가씨와 시인 / 시인과 여배우 / 여배우와 백작 / 백작과 창녀 총 열 커플이 등장하는 희곡이다. 등장인물의 배열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듯 한 사람을 매개로 계속 관계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모두 성적(性的)으로 이어졌다.


‘라이겐’은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잡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을 말한다고 한다. 슈니츨러는 이 춤의 형식을 빌려 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창녀를 마지막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시킴으로써 ‘라이겐’의 원형적 구조를 완성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등장인물들이 아무런 도덕적 가책이나 양심의 거리낌 없이 배우자나 약혼자, 애인을 속이고 불륜을 저지른다. ‘젊은 부인과 남편’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 불륜이며 그 관계에는 어김없이 성행위가 등장한다.

이 작품이 세상에 선을 보인 게 1903년이라고 하니,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을까 싶다. 실제로 출간 당시 8개월 만에 1만 4천부가 팔렸는데 오스트리아와 독일 검열 당국은 곧 금서 목록에 올렸고, 공연 과정에서도 커다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창녀촌 연극’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상영 중인 극장 안으로 악취 폭탄이 투척 되기도 했단다(‘악취’ 폭탄이라고 하니 좀 귀엽기도 ㅋ). 퇴폐작가라는 오명까지 쓴 슈니츨러는 결국 ‘라이겐’ 공연을 스스로 영구히 금지했고, 이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한 1982년이 되어서야 다시 공연할 수 있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퇴폐적이기만 할까?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홍상수의 영화를 연극으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홍상수 영화가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 아래 감춰진 ‘성적인 욕망’을 통해 인간의 비속함, 저열함 등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말한다. 여자는 고고하고 순결하며 도도하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꾀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달이 나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여자는 넘어가고 곧 그들은 성관계를 맺는다. 그 뒤 서로의 태도는 너무나도 뻔뻔하게 바뀐다. 남자는 여자를 막 대하기 시작하고, 여자 역시 처음의 고결한(?)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주인공은 계속 바뀌지만,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사와 행동은 다를 바가 없다. 

슈니츨러의 작품은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병원 검사 기록에 가깝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인간 심리를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찰하듯 분석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을 비롯해 함께 들어 있는 또 다른 희곡인 <아나톨>, 단편 소설 <구스톨 소위>를 봐도 <라이겐>처럼 인간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것도 인간의 찌질한 면을 잘 꼬집어서 보여준다. 

외설적이고 퇴폐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상당히 야할(?) 것 같지만 사실 <라이겐>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성행위는 모두 “……”로 암시되고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묘사도 없고 단지 그냥 “…”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연극으로 무대 위에 올렸을 때는 어떠했을까 좀 궁금하기도 하다. 남녀가 껴안은 채 무대 위의 불이 꺼지려나? 그런데 이런 연극을 보고 ‘창녀촌 연극’이라며 난리가 났던 것을 보면 100년이 지난 지금 주변의 자극은 실로 엄청나게 발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긴 뭐 요즘 연극은 정말로 관객의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데 더 말해 무엇하리.




저 가운데 줄 .........................이 바로 문제(?)의 장면이다.

촛점이 맞지 않아 사진이 매우 흐리게 나왔는데 왠지 어울리는 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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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2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6년 리뷰에 땡투합니다.
그런데.. 별은 셋이로군요.. 흐음.....

잠자냥 2022-08-22 16:22   좋아요 0 | URL
이 시절에는 슈니츨러가 전반적으로 저랑 좀 맞지 않는 작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장님이 갖고 계신 그 책, <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도 그랬고요. 지금 읽으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요. 특히 구스톨 소위.... 기억에서 잊힌 구스톨아, 내가 다시 만나주랴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8-22 16:36   좋아요 1 | URL
곧 다시 만납시다, 저와 함께…..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 함민복 에세이
함민복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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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몇 해 전 설 연휴에 처음 읽었다. 그런데 요즘 또 다시 집어들게 된다. 아무래도 이 책은 설 연휴에 읽기 좋은 책이려나? 그 무렵 나는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를 읽으며 눈물을 하도 흘린 터라 가벼운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 좀 달래려 했다. 그런데 어이쿠, 이 책 역시 집어 들고 읽다가 훌쩍 훌쩍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이 한 살 더 먹고 눈물이 많아진 것도 아니고, 이 책이 눈물을 강요하는 책도 아닌데, 울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후드득 눈물은 떨어진다.


함민복의 시는 학교 다닐 때 이른바 ‘바이블’ 같았다. 다른 학교 국문학 전공자들에게도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함민복의 시집을 읽지 않았다면 바보 취급(?), 아니 진정한 문학도가 아닌(?) 취급을 받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선배들이 하도 폼을 잡고 함민복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바람에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하는 심정으로 그의 시집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꽤 쓴다, 소박하다, 진솔하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등등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시라든가, 한국 현대 문학, 순수 문학에서 멀어지면서 함민복의 이름도 간간히 들릴 뿐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함민복의 에세이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에 대한 이런저런 칭찬의 말들을 듣게 되었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읽어 봐야지 하는 ‘언젠가는 도서 리스트’에 올려 두었다.

내게는 좀 이상한(?) 독서습관이 있는데 번역된 외국 문학을 한참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작가들의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리 매끄럽다한들 그래도 번역한 느낌이 남아 있는 문장들만 계속 읽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 작가가 쓴 문장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마치 밖에서 사먹는 밥만 먹다 보면 집에서 해주는 밥이 무척 고파지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럴 때 한국 현대 문학을 집어 들면 참 좋겠지만, 역시 또 그렇게는 잘 안 된다. 그나마 문장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들의 에세이집을 읽는 정도로 그친다. 마침 그즈음이 그런 때였는지, 함민복의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를 더는 망설이지 않고 읽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요즘도 그런 시기인지 모르겠다.

책장을 펼치니 한국어와 씨름하고 살아온 시인의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콕콕 가슴에 와 닿는다. 밖에서 매일 음식을 사먹다가 오랜만에 집 밥을 먹을 때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책에서도 느껴진다. 따뜻하고, 정겹고, 그러면서도 사물이나 일상에 대한 남다른 시선은 여전하다. 강화도에서 개 한 마리를 키우며 조용하게 살고 있는 이 시인이 써내려간 에세이는 한편 한편이 시(詩)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놓치지 않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고, 뒤늦은 후회가 있고, 자연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 그러면서도 잘못된 세상에 대한 조용하지만 힘 있는 꾸짖음과 분노도 분명 존재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더없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박한 말투로 별 것 아닌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써내려갔는데 어느 순간 읽는 사람의 무릎을 탁 치게 한다. 이런 걸 보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어진다. 그의 모든 글을 읽다 보면 함민복은 천생 시인이구나, 시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감성을 지녔구나 싶다.


꾸밈도 없고, 과장도 없고, 괜스레 글에서 폼을 잡지도 않는다. 주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을 풀어 갈 뿐인데 그런 글이 주는 울림은 무척 크다. 가끔 그는 남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착안해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그 사람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미안해하는 마음도 역시나 감추지 못한다. 그가 쓴 글과 살고 있는 삶이 일치하는 순간을 이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글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번쯤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글이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꼭 글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따뜻하고 소박한 이야기 속에서 훈훈한 감동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물론 그 감동은 ‘그래도 삶은 역시 아름답다’라는 식의 근거 없는 희망을 주장하는 에세이, 그저 읽기 쉽게 써내려간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가득한 보통의 에세이들과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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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2-05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민복의 이런 에세이가 있군요. 담아갑니다.

잠자냥 2016-02-05 13:49   좋아요 1 | URL
네, 나온 지는 좀 됐는데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설 연휴 잘 보내시고요.
 
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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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버의 편지와 일기가 동시에......... @.@ 울면서 웃는다. 또 사야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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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편지
존 치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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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존 치버의 편지라니.. 반드시 사야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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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빗 열린책들 세계문학 169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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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루이스의 <배빗 : Babbitt>을 읽다 보면 익숙한 도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물이 떠오른다. 1920년대 미국의 중서부, 중년의 부동산 업자 ‘배빗(Babbitt)’이 살고 있는 (가상의 도시) ‘제니스’는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의 ‘위스테리아’와 닮았고 배빗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중산층의 표본이다. 배빗은 중산층으로서의 ‘표준화’된 삶을 가히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소녀와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과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배빗>의 주인공 ‘배빗’은 일반 명사가 되어 영어 사전에 올라 있다고 한다. ‘Babbitt’이란 ‘스스로 중산층인 체하는 저속한 실업가’ 혹은 ‘중산 계급의 교양 없는 속물’이라는 의미이다. 이름만으로 하나의 명사가 되어 사전에 오른 이 남자 ‘배빗’- 배빗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속물적이고 현실적이며, 표준화된 한 남자의 모습에 혐오감과 함께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그러나 이 혐오감과 짜증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로 그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그는 기계 장치들을 칭송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기계 장치는 그가 신봉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새롭고 복잡한 기계들- 금속 절단기, 2중 분사식 카뷰레티, 기관총, 산소 아세틸렌 용접기-을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아주 실용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풍길 수 있는 용어를 배웠고, 그것을 되풀이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기술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사람이라는 기분을 만끽했다. (91쪽)’

 ‘전국 규모의 대형 광고 회사들이 그의 대외적 생활 혹은 그의 개성을 결정했다. 이 표준적인 광고 제품들- 치약, 양말, 타이어, 카메라, 순간 온수기-은 그의 상징이자 그의 탁월함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었다. 처음에 이런 물건들은 그가 느끼는 즐거움과 열정과 지혜를 가리키는 기호였으나, 곧 신분의 대용품이 되었다. (123~124쪽)’


위와 같은 구절을 보면 1920년대 제니스에 사는 중년 남자가 아니라 2016년 이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복잡한 기계들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새롭게 나오는 전자 제품을 계속 업데이트해가며 그런 기계를 소유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스마트해진다고 착각하는 얼리어답터들, 광고에서 제시한 규격화된 삶을 고스란히 살면서 ‘나는 개성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수많은 현대의 속물들…. 어찌나 표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죽어서 가는 천국조차 ‘개별 정원이 딸린 고급 호텔’ 같으리라고(260쪽) 생각하는 빈약한 상상력의 소유자들. ‘배빗’은 거의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돈과 사회적 명예와 성공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표준적인 생각, 표준적인 종교, 표준화된 상품, 사회의 주류라고 여겨지는 생각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물론 때로 이런 삶에 ‘돈을 버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키우고, 이어 그 아이가 또다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엇일까?(341쪽)’ 라며 회의를 느끼고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결국은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두려워, 그 따돌림과 배척이 무서워 끝내는 포기하고 마는 이 남자. 이 남자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 이런 재수 없는 놈이 다 있나!’ 하며 욕을 하다가도 결국 그 욕하는 손가락이 나를, 또는 우리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배빗>은 바로 그런 속물들의 삶이 지나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씁쓸한 웃음은 그 끝이 아프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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