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이 있다. 벙어리 두 사람. 그 둘은 늘 함께였다. 두 사람은 매우 달랐다. 한 사람은 덩치가 크고 뚱뚱했으며 언제나 화려한 색의 옷을 아무렇게나 입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비해 마르고 키가 컸으며 항상 단정하고 차분한 옷차림이었다.
뚱뚱보의 이름은 ‘안토나풀로스’. 단정하고 마른 이의 이름은 ‘존 싱어’. 싱어와 안토나풀로스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마치 이 세상에 서로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싱어가 절대적으로 안토나풀로스에게 의지해 살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토나풀로스가 어느날 정신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을 때 싱어는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듯 했다. 그는 공허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없이 외롭고 슬펐다. 싱어는 이제 혼자 걸었고 집에 와서도 혼자였다. 안토나풀로스가 없는 집을 견디지 못하고 싱어는 소도시의 외곽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벙어리 싱어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감지한다. 싱어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로 들어준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듣고 또 듣는다. 아이, 어른, 남자, 여자, 흑인, 백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용히 웃어준다.
사람들은 그런 싱어를 이내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소녀 ‘믹’, 자본주의에 물든 미국 사회를 뜯어고쳐 보고 싶은 사회운동가 ‘제임스’,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온 흑인 의사 ‘코플랜드’ 박사 등등. 모두가 이 벙어리 싱어를 찾아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 받고자 한다.
싱어 같은 사람. 벙어리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나도 싱어를 찾아가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위로 받고 싶을까? 싱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혹은 어떤 고통이나 절망 외로움을 느끼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싱어에게 나만의 외로움, 고독, 슬픔, 고통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털어놓음으로써 ‘위로’ 받은 기분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을까?
조용히 항상 미소 지으며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의 속내는 과연 어떨까? 싱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싱어를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가난한 사람, 억압받고 차별 받는 흑인, 너무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회에 상처받기만하는 사회부적응자 등등. 모두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싱어를 찾아와 그들은 잠시나마 삶의 고통이라든지 외로움을 잊고 간다. 그들이 만들어낸 싱어의 이미지 속에 진짜 싱어는 과연 존재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싱어를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실 그 어떤 이미지도 싱어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담지는 못한다.
싱어는 자신과 똑같이 말 못하는 벙어리였던 안토나풀로스를 돌보고 그와 말이 아닌 ‘수화’를 나누며 ‘소통’했을 때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직 안토나풀로스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그에게는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 그 전부였다. 나머지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어딘가에서 찾기 마련이다. 음악가를 꿈꾸는 소녀 믹은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의 방을 만들어 놓았으며, 제임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회변혁을 하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자리한다. 코플랜드 박사는 흑인 운동에 대한 열정의 방. 이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방’들이 항상 꿈꿔온 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 또 다른 ‘마음의 방’을 찾아와 위로해주고 상처받고 좌절한 그 ‘마음의 방’을 보듬어 줄만한 존재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존 싱어가 그런 존재였다. 싱어에게는 그 두 개의 마음의 방을 모두 안토나풀로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안토나풀로스 외에는 그 누구도 싱어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안토나풀로스가 없는 싱어의 마음은 언제나 외로운 사냥꾼일 수밖에 없고 또 그런 싱어를 잃어버린 나머지 사람들은 또 다른 마음의 외로운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너를 보고 싶은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곧 다시 갈게. 그래야만 해.
너 없이 혼자 있을 수가 없어. 너는 나를 이해하니까. (267쪽)<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나 트루먼 카포티의 <풀잎하프> 혹은 남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여러 단편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몹시도 외롭고 슬프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이 몹시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때문에 이해받지 못한 마음은 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은 아닐까? 게다가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하던 한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은 ‘이해’이고 ‘이해 받음’은 곧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 기나긴 인생에서, 삶을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벙어리 정신병자로 보인 뚱뚱보 안토나풀로스. 그는 싱어에게 유일하게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말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아주 작은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함께 걷던 ‘안토나풀로스’와 ‘싱어’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