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혁명적인 감정이다>를 읽을 때 자연스레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다. 지난해 읽은 <수치-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Disgrace: Global Reflections on Sexual Violence>(디플롯, 2023)이다. <수치>는 부제가 설명하듯이 인류가 저질러온 온갖 강간의 역사를 훑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수치Disgrace’란 누구의 수치인가? 물론 책을 읽기 전부터 제목의 <수치>는 이토록 유구한 역사 내내 강간을 저질러 온, 저지르고 있는, 그리고 저지를 인류의 민낯을 지적한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그런데 모두가,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까? 개중 누군가는 강간당한 피해자의 ‘수치’부터 떠올릴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뇌가 그렇게 작동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수치>에는 강간 피해자가 더 수치심을 느끼는 사례가 여럿 등장한다. 가문의 수치가 되어 명예살인을 당하는 여성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꼭 이렇게 다른 나라의 사례를 가져올 필요도 없다. 이 땅에서도 강간은 피해자의 수치로 환원된다. 그럴 만한 행동을 했기에 강간당했고, 피해자인데도 ‘수치스럽게’ 살아남았기에 더 수치스러운 존재가 된다. 사회에서도 피해자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그렇게 작동한다. 남성지배(사회)에 길들여진 남성들만 강간 피해자를 그런 존재로 내모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정 성별이 여성이면서도 여성 피해자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낙인찍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한번 생각해보자. 성폭력 피해자가 수치스러워해야 할 일인가 아니면 가해자가 수치스러워해야 할 일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범죄에서 가해자가 수치스러워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왜 실제 사회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피해자의 수치스러움을 강요하고, 그것이 내면화되기 때문에 강간은 은폐되고 <수치>에서 보듯이 결코 뿌리 뽑히지 않는-뽑을 수 없는 만국공통의 범죄가 되고 만다.
<수치심은 혁명적인 감정이다>는 이렇게 ‘피해자의 수치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는 수치심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수치심은 부정적 감정이다. 결코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수치심과 가까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끄러움이나 그와 비슷한 자괴감, 창피함, 모욕, 망신, 치욕 등도 모두 그렇다. 하나같이 빨리 털어버리거나 극복해야 할 감정으로 취급된다. 대부분은 가해자, 또는 힘 있는 자들의 감정이기보다는 피해자나 약자의 감정에 속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또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성폭력 피해자뿐만이 아니다. 부자라는 이들이 가난한 이를 멸시하며 손가락질 할 때 가난한 사람이 수치를 느끼는 것이 온당한가? 그런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인가? 덜 가진 사람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수치를 느껴야 함이 옳지 않은가? 노동자는? 장애인은? 성소수자는? 사회에서 곧잘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쉬운 사람이 수치를 느껴야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 수치를 느껴야하는 것이 옳은가? 저마다 자기 과시에 안달이 난 사회에서 염치를 알고 그 과시를 숨길 줄 아는 사람의 수치가 과연 부끄러운 감정일까?
프레데리크 그로는 수치심이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임을 지적한다. 부자의 교만함과 무례한 오만, 혐오를 담은 비웃음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형편없는 건 사실이야. 사람들이 나를 배려하지 않는 건 당연해.”(<수치심은 혁명적인 감정이다>, 62쪽) 타인의 멸시가 자기멸시로 바뀐 것이다. 자식들 앞에서 멸시당하는 계층에 속한다고 느끼고, 상사의 모욕을 견뎌야 하는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내면화되어 그래도 마땅한 감정(존재)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이 수치심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세 가지 태도에는 ‘멸시’와 ‘분노’, ‘극복할 수 없는 혐오’가 있다. 한마디로 ‘비참하고 비열하고 불결해지거나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런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다.’(88쪽)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수치심은 이렇게만 작동하지 않는다. 패륜이거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는 종종 수치도 모르는 자라거나 부끄러운 줄 알라거나, 창피한 줄 알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이럴 때 수치는 사회적이면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이때의 수치는 인간으로서 지녀 마땅한 하나의 윤리이다.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알고 있는 수치심의 긍정적인 면모이다. 실제로 수치심은 여러 면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수치심이 “정지시키고 한계 짓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그로가 지적하듯이 파렴치한 행동은 조심성의 부재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과시한다. 학위들, 인성, 성공, 사생활, 몸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때 수치심이 문득 고개를 들면 일단 정지, 이 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feat. 눈물셀카 보내놓고 수치스러워하는 은바오). 또한 인간은 “수치심 때문에 악을 행하는 걸, 불의를 저지르는 걸 멈출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아이도스(Aidos)라는 개념을 중심에 둔 그리스 윤리의 비밀(153쪽)이다.
저자는 말한다. “도덕적 추락이란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것”이라고. “이 자만은 한계 없는 그늘의 세계를 연다. 허영심, 착각, 말과 행동 사이의, 원칙과 행동 사이의 괴리” 등. 그러나 “수치심은 행동하겠다고 떠벌리기보다는 행동하게 만든다. 수치심은 실제로 공정하고 공손하고 진지해지게 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지치도록 애쓰기보다는.”(158쪽). 나는 그로의 수치심에 대한 이 정의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수치심보다 더 내밀한 감정은 없다. 그리고 그 내밀함은 “타인들의 존재가 종횡무진 누비며 흔적을 남긴 내밀함”(67쪽)일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대중 앞에서만 수치심을 느낄 줄 아는 존재일까? 그로가 사르트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듯이 나 또한 그렇다. 수치심은 자기 내면 안에서 스스로 작동하는 눈이다. 보이지 않는 자기 감시의 눈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나를 깨어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것은 “도덕적 의식”이며 칸트가 말했듯이 이 눈은 “나를 관찰하고, 나를 위협하고, 나를 제압하는 판관”과(70~71쪽) 같다. 또 플라톤이 말했듯이 수치심은 “함께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만들고, 지혜를 요악하고, 용기를” 줄 수도 있다(160쪽). 때문에 인간이라면 자가 정서로서의 아이도스를 갖출 필요가 있다. 즉 “나는 나 자신과 윤리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정기적 훈련으로 내 안에 그것을 기르고, 반복된 정신적 경험으로 양분”(166쪽)을 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마땅히 수치를 알아야 할 자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이다. 부자들은 염치가 없고 어느 곳에서나 약자를 향한 혐오와 조롱이 판을 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일수록 혐오할 권리를 당당히 외친다. 권력과 부의 분배체계, 학교나 법원 같은 공공기관, 때로는 심지어 “지배자”의 거만한 눈길을 옹호하는 가상의 “학문”(인종, 성, 계층 간의 불평등에 대한 학문)이 부추기는 열등의식 조작(200쪽) 등으로 약자들이 도리어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은 수치가 ‘개인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시기, 지리적 장소, 무수히 많은 권력의 제도적 체제에 깊이 뿌리박힌 사회적 감정’이기에 ‘젠더와 인종, 민족성, 종교, 성적 지향, 연령, 세대를 포함하여 다양한 교차적 자아들을 통해 굴절된’, 그리하여 수치는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식민주의,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하여 지배의 관계들을 통해 심어지기 때문에 불균등하게 분배된’ 것이라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소수화된 집단 속에서는 유독 강한 감정’(<수치>, 64~65쪽)으로 자리 잡는다는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약자들은 이렇게 수치를 내면화한 채 씁쓸함을 껴안고 침묵하고 살아야 하는가? 프레데리크 그로는 수치심에는 앞서 말했듯이 분노의 감정도 수반됨을 잊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수치심의 뿌리를 ‘투모스thumos(심장, 마음)’에 두었는데, 이것은 감정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인 방식으로 뜨거운 열정,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 실존의 연료이다. 투모스에 뿌리를 둔 수치심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분노의 자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의 분노는 “우리를 향한 또는 우리 가족을 향한 공개적 멸시, 부당한 멸시를 마주하고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241쪽)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프리모 레비의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자 “세상을 향한 수치심”이다. 또한 이것은 더 나아가 세상의 권력을 지닌 “지배자”들의 명령에 불복종할 힘이기도 하다. “수치심을 가쳐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라는 분노 말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이 성적 학대를 겪는다는 사실이 수치”라는, “다른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 계급, 카스트, 종교, 나이, 세대, 신체 유형,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성적 위해를 별것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수치”라는 “성적 피해를 당했다고 알리는 사람들을 믿어주지 않기 일쑤인 법 집행자들이 수치”라는, “권력을 휘둘러 성적 피해를 입히는 권력자들이 수치”(<수치>, 23~24쪽)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으로만 생각했던 수치심의 혁명적인 면모를 이 책은 뜨겁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