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오렌지만이 유일한 과일이라면서 아이에게 준다. 평소에는 물론 아이가 아플 때도 화가 날 때도 혼란스러울 때도 오렌지만이 정답이다. 또 어머니는 기독교만이, 예수님만이, 하느님 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아이에게 준다. 그 세상만을 허락한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아이는 오렌지와 기독교의 세례 속에 그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 유일한 것이라 믿고 자란다. 그러나 인간은 가둬두고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는 그러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는 학교에도 가야하고 그곳, 어머니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다른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제목은 당연한 명제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 소녀가 말하듯, 포도도 바나나도 있고 딸기 사과 배 복숭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일이 존재한다. 굳이 다른 종류의 과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감귤류에는 오렌지와 비슷한 귤도 있고 한라봉도 있고 천혜향도 레드향도 있고 금귤도 있고, 자몽, 라임, 레몬… 상큼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 여럿 존재한다. 저 당연한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제목은 어찌 보면 상상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 책은 사둔 지는 좀 오래되었는데 제목이 주는 느낌과 작가의 삶과 관련하여 예상 가능한 내용이라 읽기를 계속 미뤘던 것 같다.
지넷 윈터슨은 데뷔작인 이 책으로 신인상에 해당하는 휘트브레드상을 수상하고 이후 람다 문학상(Lambda Literary Award)도 받았는데, 람다문학상은 LGBTQ 작가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기리고자 람다 문학 재단(Lambda Literary)에서 해마다 수여하는 문학상으로 이른바 퀴어 문학계의 노벨문학상이라고도 불린다. 람다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이력을 알고서는 아, 이 사람 레즈비언이구나 싶었고 그러다 보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는 말은 곧 성정체성의 다양함을 뜻하려니 싶어서 어쩐지 예상 가능! 안 읽어도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솔직히 한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더 빨리 읽을 것을.
첫 페이지부터 반했다. 웃음이 키득키득 나왔다. 텔레비전으로 레슬링 보기를 즐기는 아버지와 레슬링을 보기보다는 하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설마 진짜 레슬링일까.....?)를 소개하는 장면부터 좀 웃겼는데 이윽고 이어지는 어머니 소개에서 이 작품이 평범한 퀴어 문학은 아니겠구나 싶어진다. 어머니의 세계는 오로지 친구 아니면 적으로 나뉜다. 선과 악, 옭고 그름이 너무나도 뚜렷한 어머니. 어머니의 적들은 (다양한 모습의) 사탄, 옆집, (여러 형태의) 섹스이다. 옆집이 왜 적이냐면, 옆집은 시도 때도 없이 기이한 신음소리를 내기 때문이다(레슬링을 시도 때도 없이 하는 듯). 어머니의 친구는 하느님, 우리 집 강아지, 샬럿 브론테 소설들, 그리고 ‘나’이다. ‘나’에는 괄호치고 이런 설명이 덧붙는다. “처음에는 그랬다”고.
이 문장으로 어머니와 나, 그러니까 ‘지넷’ 사이에 분열이 생길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는데, 어머니는 ‘적들의 세상을 상대로 벌이는 태그 매치에 끌어들이기 위해 나를 입양’한 것이다. 예수만큼 현명한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고, 동정녀 마리아가 되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고 ‘나’를 입양한 것이다.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기독교와 선교에 심취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지넷은 태어난 이후로 줄곧 세상은 교회가 확대된 형태이며 아주 단순한 원리로 움직인다고 여기며 자란다. 그러나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학교에 가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으면서 어느 순간 교회도 때로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히 사랑이 있다. 고양이 같은 회색 눈을 지닌 멜라니를 본 후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져버리는 이 소녀. 자기도 모르게 계속 생각하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무슨 말을 할까 머리를 굴려 봐도 막상 만나면 긴장한 탓에 어처구니없는 말말 떠들다가 급기야 두 소녀가 성경 공부를 빌미로 같이 밤을 보내던 날 이상야릇한 경험을 하고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는 지넷. 그런데 지넷과 멜라니가 사는 이 마을은 지넷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가 광신도적 기독교인이다. 좁은 마을에서 이 두 소녀의 지나친 친밀함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고 어머니를 비롯한 목사와 신도들은 두 소녀에게 악마가 쓰였다면서 퇴마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이요, 그 교리에 어긋난 삶을 사는 것은 사탄이라는 이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지넷은 과연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까?
지넷 윈터슨은 실제로 열여섯 나이에 양부모에게 정체성을 들켜 가출한다. 그 후 아이스크림 장사, 장례식 보조, 트럭 운전사, 정신병원 도우미 등 온갖 막일을 하며 돈을 모아 생계를 꾸려 나갈 뿐만 아니라 밤에는 공부해서 스물한 살에 옥스퍼드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꿋꿋하고 영특했구나 싶은데 실제로 이 작품에서도 그런 꿋꿋함과 영특함, 재기발랄함이 엿보여 읽는 내내 즐겁다.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고작 성정체성 때문에 사탄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어머니로부터도 “넌 내 딸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면 그 상처가 어마어마했을 텐데, 이 작품은 결코 어둡지 않다. 오렌지 빛깔처럼 밝고 화사하며 상큼하다. 중간 중간 진짜 빵 터지는 구절도 많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들-
우리 골목에는 자신이 돼지와 결혼했다고 말하는 여자가 살았다. 내가 그녀에게 왜 돼지와 결혼했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기 전에는 돼지인지 아닌지 절대 알 수 없단다.”
바로 그거다.
내가 꿈에서 발견한 것을 그 여자는 삶에서 발견한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돼지와 결혼한 것이다.
(....)
나는 혼란스러웠다. 모두들 항상 당신은 당신에게 딱인 남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돼지에게 시집간 여자와 내 꿈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날 오후 나는 도서관에 갔다. 커플들을 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멀리 돌아서 갔다. 커플들은 고통스러운 것 같은 희한한 소리를 냈다. 여자 아이들은 항상 벽에 밀쳐져 있었다. (124~125쪽)
세상에는 여자들이 있다. 세상에는 남자들이 있다. 그리고 야수, 즉 짐승들이 있다. 짐승과 결혼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키스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 걸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들이 계속 짐승과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짐승을 식별하는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배급제도 같은 것을 실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네 전체가 짐승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왜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사실은 짐승인 거예요?” (127쪽)
그러나 단지 이런 위트 넘치는 문장들로 가볍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종교적으로 억압받고 세뇌당하다시피 해서 학교에서는 별종에 괴짜 취급을 받고, 여자이면서도 다른 여자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을 품었기에 죄인 취급을 받고 그 사랑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이 어린 소녀가 어찌 웃음만으로 버틸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넷은 꿋꿋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사랑했던 신과 교회를 버릴 수도 없다. 신과 교회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신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신은 자신을 배반하지 않았음을 안다. 믿는다. 단지 그 신을 모시는 하인들이 신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서 배신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존재가 일단 창조되면 ‘창조물은 창조주로부터 분리되고,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입회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먹을 사람이 없어도 케이크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진실임을 믿는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 해도, 단지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줄도 안다.
‘담장은 보호하고 동시에 제한한다. 무너지는 것도 담장의 본질’이라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당신이 자신의 트럼펫을 불 줄 알게 된 결과’(190쪽)라고 생각할 만큼 자란 지넷은 어느 순간 어머니가 쥐어주는 오렌지를, 사랑했던 멜라니가 주는 오렌지를 거부한다. 포도도 바나나도 과일이라고, 오렌지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게다가 참 재미나게도 이 좁은, 폐쇄적인 마을 안에서도 알고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도, 바나나, 복숭아, 딸기였던가? 지넷의 어머니조차 한라봉이었을 수도 있음을 이 작품은 암시한다. 어머니의 옛 애인들이 담겨 있던 사진첩 속 맨 밑에 고양이를 안고 있던 그 예쁜 여자는 누구일까? 진짜로 어머니의 남자 친구였던 에디의 여동생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머니도, 지넷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 해도. 단지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트럼펫을 불 줄 알게 된 소녀로 자란 지넷은 분명 ‘나를 파괴할, 그리고 나에 의해 파괴될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날 사랑할 사나운 사람을 원한다.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고 영원하며 또 평생 나의 편일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그리고 나에 의해 파괴될 사람을 원한다. 세상엔 수많은 형태의 사랑과 애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함께 지내기도 한다. 이름을 주는 것은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는 본질과 관련된 것이며 힘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나운 밤에 누가 당신을 집으로 부르겠는가? 당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뿐이다. 낭만적 사랑은 싸구려 소설로 희석되어 수천 권 수만 권의 책으로 팔린다. 어딘가에서는 낭만적 사랑이 여전히 원서와 같은 석판에 적혀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바다라도 건너고 뙤약볕 아래에서의 고생도 마다 않고 내가 가진 전부를 줄 것이다. 그러나 남자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파괴자가 되려고만 하지 결코 파괴되지는 않으려 하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낭만적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리고 난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