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다.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헤어지자,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다 약속-참으로 기묘한 약속을 하고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이 여행이 끝나고, 이 여름이 끝나고 나면 너는 너대로의 삶을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렇기에 그 여행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어서는 더 안 되었다. 그저 눈이 부시게 투명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기다란 튜브 위에 누워 수영장 위를 둥실 떠다니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를 바라보면서 이게 마지막이지, 더는 저 사람하고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는 거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다독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우리 저거 한번 타볼까? 다른 곳이었다면, 다른 때였다면 절대로 시도해보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그 바다가 태평양이었기 때문에, 모험하듯이 제트스키에 몸을 실었다. 이 바다에 빠져버리면 죽는 것일까? 공포와 스릴, 알 수 없는 해방감 속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 신이 나서 웃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면 우리는 헤어진다. 더는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 나는 나로 돌아간다…
사강의 <어떤 미소>를 읽고 나니 문득 이십 대의 나, 그때 그 여름의 바닷가가 떠올랐다. 이십 대의 ‘도미니크’는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뤽과 사랑에 빠지고 그로부터 일주일간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이니 뭐 망설일 게 있을까 싶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뤽은 도미니크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40대의, 게다가 유부남이다. 심지어 도미니크가 사귀고 있는 베르트랑의 외삼촌이고 도미니크는 뤽의 아내인 프랑수아즈와도 안면을 튼 사이이다. 하필이면 프랑수아즈는 도미니크에게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풀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사이의 뤽이 도미니크에게 속삭인다, “우리” 둘이서만 함께 일주일간 여행을 가자고. 연인 사이를 비롯해 호감을 느끼는 두 존재가 어딘가로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어떤 새로운 곳을 너와 함께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 새로운 곳에서, 너를, 당신을 나의 눈으로 발견하고 싶다는, 그 기간 동안만큼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너를, 당신을 독점하고 싶다는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서로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자고 속삭이는 게 아닐까.
그런데 도미니크처럼 명백하게 위험한 제안-그러니까 일주일간 한 유부남의 애인, 정부(情婦)로서의 자리를 제안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이 스무 살의 어린 여대생에게 정신 차리라면서 훈계를 늘어놓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어른인 뤽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할 것이다. 유부남 주제에 어린 여자를 꾀어서 일주일간 실컷 즐기고 차버릴 심산이라니, 저런 썩을 놈이 다 있나 혀를 끌끌 찰 것이다. 도미니크, 제정신이야! 저 남자가 원하는 것은 너의 젊음, 너의 육체뿐이다 그러니까 거절해! 달아나! 도미니크도 안다. 이 제안의 위험성, 이 관계의 위태로움, 이 짧은 사랑의 덧없음, 그 후 남겨질 자신의 고통…. 아무리 일주일간 서로에게 충실하더라도 그 기간이 지나면 그는, 뤽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떠날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도미니크는 뤽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누구도, 그 자신도 열망을 막을 수가 없다. 모든 도덕적 비난과 현실적인 제한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보다도 더 크게 그를 사랑하니까, 원하니까.
칸의 어느 호텔에서의 일주일은 훌쩍 지나간다. 도미니크와 뤽은 함께 수영하고 바닷가를 거닐고 햇볕에 그을리고 위스키를 마시고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함께 잠든다. 키스를 하다 잠든 새벽 내내 키스를 하고 싶다. 잠들 때도 그가 옆에 있고 눈을 떴을 때도 그가 옆에 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열망과 욕망의 대상이 일주일, 168시간 가까이 온전히 내 소유인 셈이다. 내가 정말로 열망하는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해온다면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있을까.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다, 헤어질 것이다, 다시 만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해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쉽사리 하지 않는 뤽은 그 일주일이 지나간 후에는 일주일만 더 같이 있지 않을래? 망설이듯 입을 연다. 도미니크보다 연애 경험도 많고 사랑에 냉소적인 그이지만 그 자신조차도 이 사랑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이 주일간의 완벽한 둘만의 시간. 사랑으로 가득한 이 시간이 인생에서 존재했다면 이 사랑을 잃고 나서도 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그 기억만큼은 어떻게든 행복하게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권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로운 삶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대상, 그 사람과 보내는 며칠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선물과도 같은 시간일 것이다. 그러기에 도미니크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아무 일 없는 것보다는 더 행복했다가 더 불행해질 거”(p.82)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그 시간이 아무리 짧았다 한들, 한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여름 바다 위에서 웃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