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하인학교’라는 제목 때문에라도 꽤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 그 발상부터가 무척 독특하다. 아니, 이 세상에 주인이 아닌 하인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어? 하는 생각. 게다가 주인공인 ‘야콥 폰 군텐’은 소위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자진해서 하인이 되고자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 가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자 하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정말 독특하다. ‘학교’에 들어간 소년의 이야기이니, 성장 소설인가 싶지만 성장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성장’이란 전혀 없다. 성장, 발전, 진보, 앞으로 나아감, 나아짐, 변화, 달라짐 이런 단어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야콥만 성장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 즉 이야기 자체의 어떤 변화도 전개도 없다. 스토리 자체가 멈춰있다. 때문에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게 뭐야?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 질 거야, 뭔가 색다른 변화가 있을 거야.’ 라고 믿고 넘겨보지만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야콥도 제자리, 이야기도 제자리. 야콥 주변인물,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아이들도 제자리다. 그래도 명색이 학교인데, 뭔가 배우지 않아?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이 학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저 인내하고 참는 법, 견디는 법을 배울 뿐이다(이것도 배움의 하나일까?).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하인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하인으로 취직되어 나갔을 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실감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며, 세상에 대한 어떤 의문도 제기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저 제한된 어떤 시스템 안에서 복종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 견디는 일만이 허락될 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살기 때문에 벤야멘타 학교의 아이들은 별다른 걱정과 근심거리가 없다. 밝고 천진난만하다. 단지 야콥, 야콥만이 계속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 또한 이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점점 의문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견디는 능력은 늘어나게 된다. 야콥은 그런 자신이 괴로워 의문하는 능력을 없애버리려 애를 쓰기까지 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그의 가장 커다란 목표이므로.

이런 성장 없는 인물, 변화 없는 인물, 전개가 없다시피 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성장’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닳고 닳도록 말하는 ‘발전’ ‘진보’ ‘변화’ ‘혁신’ ‘미래’ ‘나아감’ 이런 것들이 대체 뭔가 싶어진다. 꼭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발전해야 하고, 성장해야만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라도 야콥처럼 제자리걸음만 하더라도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뜨거움 정도만 간직하고 살 수 있다면 되지 않을까. 왜 세계는 끊임없이 발전, 진보, 성장을 외치는 것일까. 그래서 인생이, 세계가 과연 행복한가? 야콥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 어떤 것도 자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불모의 상태가 어쩌면 가장 영원한 행복의 상태는 아닐는지.


이 작품은 여러 번 읽어 보고 싶고. 발저의 다른 작품도 읽어 보고 싶은데….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이 작품 외에 청소년용 도서 <프리츠 콕의 작문시간>, 어린이용 도서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부인 듯하다.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쇼팽 노트 - 가장 순수한 음악 거장이 만난 거장 1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없이 순수한 음악 쇼팽- 쇼팽의 곡을 지드의 언어로 부드럽고도 우아하게 산책하듯 거닐면서 만난다. 지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쇼팽의 곡을 애정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거나 또는 재발견, 혹은 오해를 풀도록 이끌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지음, 정지윤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계속 큭큭큭큭. 키득키득 웃게 된다. 그러다가 끝내 어느 부분에서는 ‘푸하하하하’ 박장대소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 편의 개그 소설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냥 웃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이 담담한 소설 속에는 웃고 나면 한없이 찡한, 현실이 담겨 있다.


러시아 소설은 읽고 나면 마음에 남는 게 많지만 섣불리 집어들게 되지는 않는다. 러시아 소설하면 떠오르는 무겁고, 심각하고, 어두운 이미지- 그런 것들 때문에... 그러나 도블라또프의 작품 <여행가방>은 그런 러시아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큭큭큭큭-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체호프의 유머 코드가 담긴 단편을 읽을 때의 느낌과도 좀 비슷하다. 실제로 도블라또프는 ‘20세기의 체호프’라고 불린단다. 적어도 <여행가방>에서는 도블라또프가 체호프보다 더 웃기다.


도블라또프는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 작가다. 1972년부터 신문 기자로 일하며 산문을 쓰던 그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1978년 소련을 떠났다. 그때 그는 소련을 떠나며 가방에 짐을 싸는데, <여행가방>은 그 가방에 담겨 미국까지 따라온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다. 양말, 구두, 양복, 벨트, 잠바, 모자, 셔츠 등이다. 이 물건들과 관련한 추억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고, 단편마다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나는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도블라또프의 작품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 나는 벌써짐을 싸고 있었다. 다 싸 놓고 보니 가방 하나로도 충분했다. 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 아닌가. 그 서른여섯 해 가운데 18년 동안 돈벌이를 하며 살았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 물건을 사고는 했으니, 그렇게 사들인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달랑 여행 가방 하나다. 그것도 코딱지만한 가방으로. 아니, 내가 거지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지경이 돼 버렸을까?(9쪽)


머리말만 읽고 이렇게 한껏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단편인 ‘핀란드 산 양말’의 시작부분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큭큭큭 웃기 시작했다. 도블라또프, 이 사람- 살아있다면 왠지 만나서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심정까지 들었다. 누군가 남을 웃길 때, 웃기는 사람이 ‘이건 진짜 웃긴 이야기야’하며 폼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시종 웃어대면 듣는 사람은 그다지 웃기지 않다. 그런데 도블라또프는 웃지 않는다. 웃긴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담담한 어조. 때로는 심각하게,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무미건조한 문체다. 그래서 더 웃기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개그를 하는 개그맨이 더 큰 웃음을 주듯이.

 세상에는 정확한 학문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곧 정확하지 않는 학문들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그 정확하지 않은 학문들 가운데 일등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어문학이다. 그래서 나는 어문학부 학생이 되었다. (핀란드 산 양말, 16쪽)

 나는 내가 겪었던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만약 헤밍웨이의 말을 믿는다면 가난은 작가에게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학교이다. 가난은 사람을 명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헤밍웨이가 부자가 되자마자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페르낭 레제의 잠바, 139쪽)


앞서 언급했듯 도블라또프 작품의 매력은 그저 한번 웃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단편에는 공산주의 치하 러시아의 암담했던 현실, 그 현실 속에서 고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그 짧은 단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명민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나는 <여행가방> 이 한 권만으로도 도블라또프의 팬이 되었다. 그런데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 듯하다.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욱 많이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크게 박장대소했던 부분은 다음 장면이다. 도블라또프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 쓴 구절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집에서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들 나를 가만히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어릴 때 우리 집에 루이자 겐리호브나라고 하는 유모가 있었다. 그녀는 늘 체포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냈기 때문에 매사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한번은 루이자 겐리호브나가 나에게 반바지를 입혀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내 다리 두 개를 바지 한 가랑이에 다 넣어 버렸다. 결국 나는 그 모양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나는 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옷을 잘못 입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입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옷을 다시 입는 일은 지금도 싫어한다.
 그와 비슷한 일들이 내 기억 속에는 많이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쓸데없이 귀찮은 일만 피할 수 있다면야….(포플린 셔츠, 16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자기 자신의 완벽한 이상형으로 만드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상형'이라고 한다던가, '이상형'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일은 무척 드물 것이다. 때문에 조금은 혹은 많이 자신의 이상형에서 부족한 상대방을 이상형에 가깝게 만드는 일이 노력으로 가능할까?

예를 들어 어떤 한 인간의 외모가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는 완벽한 이상형에 가깝다고 하자. 그 또는 그녀는 그런 외모를 지닌 사람 A에게 우선 외모를 보고 반한다. 그러나 A의 외모 외에 다른 지점들은 그 또는 그녀에게 완벽하게 부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격이나 말투, 가치관, 옷차림, 생활 습관, 지식의 정도, 문화적 취향의 차이 등등 여러 면에서 외모가 주는 호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비례하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순히 외모만으로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외모가 완벽하게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 그 또는 그녀를 나의 취향에 맞게 완벽하게 ‘개조’ 혹은 ‘재교육’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아바타 캐릭터를 창조하고 키우듯이 말이다.

여기, 바로 그런 사람이 있다. 남자의 이름은 ‘가와이 조지’. 남자는 어느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는 소녀를 우연히 보게 된다. 소녀의 나이는 열 다섯. 이 남자는 스물 여덟이다. 남자는 ‘나오미’라 불리는 소녀를 보자마자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두어 달 정도 소녀를 만나면서 소녀와 가까워 진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이 소녀를 ‘키워서’ 괜찮은 여자가 된다면 아내로 맞이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남자는 소녀에게 지금부터라도 괜찮다면 자신과 함께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카페 여급으로 별다른 희망 없이 살아가느니 남자와 함께 살아가며 이런 저런 경험을 해볼 생각에 소녀는 선뜻 승낙을 한다. 남자 또한 소녀가 어떻게 자랄까 내심 기대되고 호기심으로 가득하게 된다.

한편 소녀의 삶에 별다른 기대도 간섭도 없던 소녀의 가족들은 조지의 제안을 쉽게 수락한다. 그때부터 열 다섯 소녀와 스물 여덟 남자의 동거는 시작된다. 그들은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 집을 얻어 그들의 ‘동화 속의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조지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나오미는 평소 배우고 싶다던 영어와 음악을 익히러 일주일에 몇 번씩 외출을 한다.

그렇게 소녀의 성장 과정을 지켜 보며 남자는 황홀해 한다. 점점 자신의 관능을 자극하는 소녀의 성장 자체가 경이로움이다. 과연 이 남자는 그의 바람대로 소녀가 어른이 되면 그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쩐지 이 소녀, 보통이 아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주변에 몹시도 많은 남자들이 그녀 곁에 머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조지’만 모를 뿐 책을 읽는 사람들은 ‘조지’또한 ‘나오미’에게 그런 남자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은 소설 도입부부터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문에 조지와 나오미가 부부로 맺어졌음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러나 부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으며 ‘부부’라고 불리는 이 관계가 그래서 정말, 행복할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물론 조지와 나오미는 행복할지 모르겠으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런 관계 속에서 얼마나 행복할지 의문이 든다. 물론 그렇기에 <미친 사랑>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오미에게는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항상 그녀 주변을 맴돈다. 나오미는 그런 그들을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이용한다. 대표적으로 이용당하는 사람이 이 작품의 화자인 ‘가와이 조지’임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알고도 남으리라. 그녀 입장이라면 ‘조지’같은 남자를 이용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 다른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과 즐기는 것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남자, ‘조지’는 그런 그녀의 부정함, 부도덕함 혹은 뻔뻔스러움을 알면서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기엔 그녀의 아름다움에 심각하게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사랑’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혹 단순히 미(美)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아닐까?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조지’의 입을 통해 여자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밀도 있게 그려 낸다.

사랑에 있어서 믿음이랄까, 신의.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상대방을 배신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관계를 섣불리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조지’ 이 남자의 마음이 말이다. 자신을 이미 예전에 배신한 사람을,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토록 기만하고 배신을 일삼는 여자를 단지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났는데도 그 관계를 계속 붙잡고 유지해야만 할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육체라도 갖겠다는 무모한 집착이 아닐까? 그 상대가 ‘너무나 아름답기’때문에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조지의 모습이 점점 마조히스트적으로 변해 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의 ‘조지’,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제베린’ 이 두 남자는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상대방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랑에 빠진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그러기에 이런 작품들이 수십 년이 흘러도 계속해서 읽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이 눈 먼 사랑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쇼팽 : 전주곡, 연습곡, 소나타 2번 (2 for 1)
쇼팽 (Frederic Chopin) 작곡, 소콜로브 (Grigory Sokolov) 연주 / NAIVE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피아노 소나타 2번! 진심으로 듣기를 멈출 수가 없다! 소콜로프 때문에 쇼팽 곡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