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심리학 입문 - 오늘을 살아가는 무기, 용기의 심리학, 개정 증보판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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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저작물이 더 인기를 끌고 있는데 원저자의 원텍스트를 읽고 자기만의 해석을 해보는 건 어떨까. 아들러의 이론은 그리 어렵지도 않고 난해하지도 않아서 충분히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나친 긍정주의적, 낙관주의적 사고를 담고 있어서 자기계발서에서 너도나도 써먹기 좋은 이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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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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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술자리가 있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온 사람들은 먼저 술과 안주를 주문한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한 시간에 오지는 못한다. 이런저런 개인적 사정 때문에 늦게 오는 이가 한 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사람 생각을 한다.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따로 챙겨놓든가, 아니면 그가 와서 뒤늦게 왔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마련이다.


가족끼리의 밥상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바쁜 시대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일은 참 드물다. 언제나 늦게 오는 가족의 일원이 있기 마련이고 밥상을 차리는 이는 꼭 이렇게 뒤늦게 오는 가족을 위해 그 몫의 음식을 따로 챙겨둔다. 사람들은 이렇게 친구나 가족 등 가까운 이와의 관계에서는 뒤늦게 온 사람에 대한 배려를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당연한 듯한다. 게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혈연이나 친분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라면 어떨까? 내 몫을 남에게 선뜻 떼어 주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특히 자기 몫을 떼어 주어야 할 사람이 자기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늦게 왔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 일도 덜했다면? 그런 이에게 자기가 받은 몫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가질 것이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신약 ‘마태복음’ 제20장 제13~14절)라는 성경의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 존 러스킨이 말하는 ‘나중에 온 이 사람’이란 사회 경제적 약자를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렇게 ‘나중에 온 이 사람’이라는 성경의 한 구절로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러스킨이 이 글을 쓸 당시 영국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시기였지만 그와 함께 경제공황, 실업, 빈부격차 같은 폐단으로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러스킨은 이러한 때 주류 경제학을 ‘악마의 경제학’이라 비판하며 대안으로 인간의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의 영혼과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진짜 경제학이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162쪽) 러스킨은 ‘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부 는 전기와 비슷한 힘이어서, 그 자체의 불균형 또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적용된다.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1기니의 힘은 여러분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만약 이웃이 그 돈을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1기니는 여러분에게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1기니가 가진 힘의 정도는 그 돈에 대한 이웃사람의 필요나 욕망에 정확하게 좌우된다. 따라서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 두는 기술인 것이다.’ (86~87쪽)

러스킨에 따르자면 내가 많이 가질수록 세계의 어느 한 쪽에서 그만큼 자기 몫의 파이가 줄어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러스킨은 내 몫의 파이를 사회 경제적인 약자(나중에 오는 이)를 위해 나눠줄 수 있는 인간의 ‘애정’에 기초한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부를 많이 가진 사람, 고용주들이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노동자를 ‘자기 아들’ 대하듯이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면 이런 선량한 행위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달하고 있는 요즘 이 책을 읽자니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진다. 맞는 이야기이고, 좋은 이야기인데, 이게 정말 실제로 적용될 수 있을까?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당시에도 러스킨의 이 글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일반 경제학자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러스킨의 주장은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도 믿은, 한 이상주의자의 생각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해 버리기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척박하다.

러스킨의 주장대로 ‘부’란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면, 아무리 많이 가진들 그 ‘부’를 갖고 지배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숨막히는 경제시스템에서 지배할 이들이 결국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때문에 러스킨의 ‘생명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부(富)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잘 못되고 부자연스럽고 파괴적인 노동제도’때문에 ‘서투른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반값에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고’ ‘그런 노동자는 숙련된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숙련된 노동자가 서투른 노동자와 경쟁하느라 부당한 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강요하게 되어’(67쪽)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느니 자기 몫을 조금은 덜 챙기더라도 최대 다수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이상한 경제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유일한 경제학이고, 앞으로도 다른 경제학은 있을 수 없다,’(196쪽) 러스킨의 말대로 ‘이상한 경제학’이지만, 지금 지구는 이 이상한 경제학에 그 어느 때보다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중에 온 이'의 몫을 챙겨주는 행위는 그가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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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 모멘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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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육식의 단점, 혹은 육류산업의 폐해를 다룬 책은 꽤 많다. <육식의 종말>과 같은 책들은 언제부터인가 찾아보기가 쉬워졌다. 육식을 주제로 한 내용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방송 등 각종 미디어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육식주의자에 반대되는 개념인 채식주의자라는 말도 언제부터인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고.

나 또한 이런 정보를 통해 육식의 폐단을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아서 그냥 고기 먹기를 포기하고는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Why We Love Dogs, Eat Pigs, and Wear Cows: An Introduction to Carnism>는 육식주의를 파헤친 책이다. 육식주의에 대한 수많은 책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이 정말 왜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저런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우리의 가족 혹은 친구 같지만 돼지와 소는 그렇지 않다. 애완동물이 아니다. 먹기 위해 기르는 동물이다.”라고. 그러나 이 지구상에 먹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생명이 대체 얼마나 될까? 저자는 ‘사람들은 흔히 개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인간과 감정 교류를 하는 친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돼지와 소도 그에 못지않게 영리하고 감정을 지닌 동물이며 새끼 돼지나 소는 개 못지않게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어떤 동물에 대해 떠올릴 때 사람들은 ‘스키마’에 의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심리적 틀을 이른다). 가령 동물은 포식동물과 그 먹이가 되는 동물, 유해동물, 애완동물, 또는 식용동물 따위로 분류된다.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그것의 관계- 사냥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15쪽)’

육식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돼지, 소, 닭 등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돼지와 닭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고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결코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런데 사람들은 들판을 뛰어다니던 돼지와 소, 혹은 닭에게서 ’고기‘가 나왔다는 것을 잘 연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걸 연결 지어 생각하면 불편해지기 때문에 스스로 외면하거나 외면하게끔 육류산업에서 철저하게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연결고리, 혹은 육류산업군에 의해 방해되어 철저히 감춰진 그 연결고리를 다시 찾으라고, 찾아야만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물론, 그 인간들에게 잡아먹히는 동물들, 그리고 그런 동물을 키워내기 위해 몸살을 앓는 지구까지 공멸한다고) 주장한다. 육식주의는 굉장히 폭력적이지만 가부장제처럼 이미 이 사회에서 주류 이데올로기로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며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를 강조한다.    

내가 이 책을 꽤 괜찮게 읽은 이유는 이 책이 단지 ‘육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만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들이 사실은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어보면 아,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의 예문에 육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대신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이데올로기- 예를 들면 가부장제, 이성애, 인종주의 등의 단어를 입력해보라. 그 이데올로기들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육류에 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지만 그 모두는 내가 ‘정당화의 3N’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즉, 육류를 먹는 일은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것이다. 3N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에서부터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에 이르는 모든 착취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돼 왔다. 한 이데올로기가 전성기에 있을 때는 이런 신화들이 면밀하게 검토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시스템이 마침내 붕괴하면 그 3N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미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면서 내세운 이유를 생각해 보라. 남성만 투표를 하는 것은 ‘선조들이 정해 놓은 일’이며, 여자들이 투표를 하게 되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고, ‘재앙과 파멸이 온 나라를 덮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132쪽)


육식이 결코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러서 결국 ‘먹는다’는 일의 끔찍함, 혹은 폭력적인 면을 생각해보면 당장 육식을 끊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면서 육식주의자를 포기하고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참 쉬운 길은 아니다. 회사를 다닌다면 더 그렇다. 사람들과 함께 먹는(먹어야만 하는) 점심 식사와 회식자리에서 메뉴를 살펴보면 더 갑갑해진다. 나는 언젠가 고기 좀 멀리했다고 채식주의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육식주의에서 벗어나기를 거듭 강조한다. “동물들이 앞으로도 계속 고통받고 죽어 가리라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게 ‘나’ 때문은 아니도록 해야 한다.”(197쪽)며. 그게 ‘나’ 때문은 아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먼저 고기를 찾아먹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할 때마다 내 마음을 심하게 뒤흔드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치킨!! ㅠ_ㅠ 치킨을 어떻게 끊어;; 치킨과 맥주를! 닭을 한 번 애완용으로 길러볼까…. ㅠ_ㅠ
 

우리는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생활방식이 보편적 가치를 반영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또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38쪽)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 한 예가 가부장제다…. 육식주의도 마찬가지다. (39쪽)

어떤 면에서, 채식주의가 육식주의보다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은 당연하다. 주류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들은 알아보기가 더 쉬우니까. 그러나 육식주의보다 채식주의에 먼저 이름이 붙은 데는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므로. (40쪽)

어느 수준에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다. 식육 생산이 깔끔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사업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오는 줄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 수가 많다. 이처럼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는 의식을 못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게 바로 폭력적 이데올로기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이 같은 현상은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95~96쪽)

대규모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희생자 아니면 가해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주디스 허먼은 모든 방관자는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으며, 도덕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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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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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루해서 고전은 못 읽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에는 몇 번쯤 ‘뭐야? 이거 왜 이래? 계속 읽어야 하나?’ 싶은 순간이 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험버트’의 끊임없는 수다와 말장난을 기억하리라.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명백히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

주인공 ‘게르만’은 어떤 면에서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 보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말장난을 늘어놓고 언어유희를 즐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읽는 이는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롤리타>에서의 험버트(아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의 수다가 그리 싫지 않았던(혹은 참을 만했던) 사람이라면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이 펼쳐놓는 이야기에도 큰 거부감은 들지 않을 것이다.

‘험버트’와 닮은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한 편의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소개한 문구 중에 ‘폭로해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미스터리 플롯’이라는 구절이 있던데, 정말 그렇다. 만약 이 작품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와 상관있는 그 어떤 내용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의 서두는 정도는 괜찮지만, 중반 이후는 절대로! 스포일러를 모두 피해야 한다. 그나마 어떤 작품인지 잠깐 소개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색다르다고 해야 할까?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던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 그는 어느 날 출장 중에 교외를 거닐다 풀밭에 잠들어 있던 한 부랑자를 보고 흠칫 놀란다. 부랑자 펠릭스- 그는 게르만과 놀랍도록 완벽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의 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신과 이토록 닮은, ‘분신’ 펠릭스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게르만의 머릿속에는 놀라운 생각이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작품을 읽으며 두 번쯤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험버트’를 쏙 빼닮은 ‘게르만’의 수다와 자아도취적인 태도 때문에….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놀랍도록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게르만의 수다가 단순한 ‘수다’가 아니었구나 싶어 감탄했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은 그 흔치 않은 작품에 속한다. 참 매혹적인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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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며..... 어떤 출판사 버전으로 읽어볼까 고민하다가....

(민음사 버전은 번역이 엄청 이상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음)....


응? 열린책들 버전 보고 식겁했다. 응??????

이 책의 어디가 틀렸을까요? 너무 쉬운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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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4-0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정말 미치는군요.

잠자냥 2016-04-06 11:46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이 가끔 이렇게 책등(만은 아니겠지만 특히 책등 ㅋㅋ)에서 실수를 많이 하더군요. 디자이너가 그냥 다른 책에서 따다쓰기 한 것 같은데... ㅋㅋ 교정 보는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암튼 이 사진을 열린책들에 보내기는 했었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몇 쇄를 찍을 책은 아닐 거 같아서 다시 수정해서 내놨을지 모르겠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국 도서관에 있는 이 책은 아마 다 저럴 확률이 높겠지요.... 음.

Falstaff 2016-04-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열린책들. 그 출판사 좋아하시는 분 생각보다 엄청 많더라고요.
이 귀신 나오는 헨리 제임스보다 더한 세계문학 시리즈가 있으니, 진정 안타깝게 내가 무지 좋아하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입니다. 그거 읽다보면 심장병 도지고 뇌경색 바로 직전까지 갈 정도로 무지막지한 교정 교열의 야만을 저지르고 맙니다. 껍데기는 지극히 정상이지만 속 내용이 그렇습니다.
<서부전선....> 이후로는 다른 출판사하고 겹치면 절대 열린책들 번역은 구입하지 않게 됐습죠. ㅜㅜ

잠자냥 2016-04-06 13:37   좋아요 0 | URL
네, 그 쓰신 글 봤습니다. ㅎㅎ 아주 오래 전에 읽고 다시 읽고 싶어서 하마터면 그 책 살뻔 했는데 안 사길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ㅎㅎ 열린책들은 저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지 않는 시리즈(E.M. 포스터 전집이나 예전 줄리언 반스 책, 볼라뇨 시리즈, 매그레 시리즈 등등)가 아니면 잘 안사게 되더군요.

2017-12-07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3-17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헉! 입니다.

잠자냥 2023-03-17 23: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