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리히터 마스터 5집 -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9번, 15번 '유품' & 18번 (2 for 1)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작곡,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 Decca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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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울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이런 상투적인 언어로 밖에 표현할 길 없는 틀림없는 명연주, 명반이다. 이 음반은 듣는 순간, 조용히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당신은 분명히 리히터의 이 연주로 슈베르트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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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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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은 좋은 책(혹은 글)이란 그 책이 읽는 이의 몸을 통과해 책을 읽고 난 후 읽은 이에게 생각이든 행동이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정희진의 책(글)은 언제나 내게 ‘참으로’ 좋은 ‘글’이자 ‘책’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 그러했듯 <정희진처럼 읽기> 또한 앎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알게 되었다는 것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도 그녀의 일관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한번쯤은 멈추고 왜? 하는 의문을 품어보아야 할 듯하다.

정희진이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은 ‘서구/백인/남성/이성애’ 중심 언어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세계관을 또 당연하게 수용한다. 그러기에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일은, 기존의 세계관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일이 된다.

나는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했고, 글을 쓰고 싶어 했고, 글과 관련된 일을 해왔으며 지금도 방향은 살짝 바뀌었지만 또 글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먹고사는 일관 상관없이 내 글을 쓰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어에 예민해야 함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예민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공해와도 같은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 한몫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예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상당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그토록 무감각했던 내 자신을 꽤나 반성했다. 그런데도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기억은 또 희미해진다. 인간이란 그토록 간사하다. 그렇게 또 다시 무뎌질 즈음 <정희전처럼 읽기>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축복과도 같으리라.

책 한쪽 한쪽 소중하게 읽었다. 그녀의 말과 글과 생각이 뼈 마디마디에 올올이 새겨지기를 바라면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존경심이 일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고 질투심이 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책을 제대로 잘 읽는구나, 이렇게 사유를 하는, 이토록 똑똑한 사람이라니!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며 사는 일에 크게 감사하는 적이 그다지 없는데,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그 사실에 무척 감사하게 된다.

책과 글을 읽기를 즐겨하고, 또 책과 글을 쓰며 살기를 원하는 삶에서 내게 이 책은 마치 경전과도 같으리라.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다. (97)

작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것, 인생의 전부다. (138)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하며 따라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연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학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 ‘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199)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책상에 여덟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첫째다. (....) 특히 지식인, 운동선수, 예술가는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혼자만의 노동, 자신과의 결투가 성공에 절대적이다. (209)

여성의 언어는 없으며, 여성주의자는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216)

우리 사회에서 여성학은 여성과 모든 타자를 종속적 범주로 만들려는 사회에 대한 비판 연구(feminist studies)라기 보다는 ‘여자(female)가 하는 공부’로 간주된다. (...) 양성 평등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지는 역사와 방법이다. (218)

인간의 매력은 말과 글을 따른다. 학력과 계층과 무관하게 10분만 말하는 태도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229)

은유의 대상이 되는 말(‘호수’, 성별, 지역....)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 운동이다. (230)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31)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 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251)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278)

나는 처음부터 아니 인생에서 한 번도 나를 ‘저명한 백인 남성’ 인류학자와 동일시한 적이 없다. 이를 테면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98)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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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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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본 광경이다. 한 공원에서 수십 명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세워두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찍고 또 찍고. 보아하니 출사를 나온 사진 동호회 사람들 같다. 인물 사진 연습을 하는 것인지, 여자(피사체)를 세워놓고 계속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델로 서 있는 여자의 기분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 사람은 사진 찍기에 응당한 금전적 대우(모델료)를 받고 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만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끔찍하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3자가 바라보기에 그 행위는 성적 행위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이 자세 저 자세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는 피사체와 그 피사체를 구석구석 훑는 카메라의 시선들- ‘카메라’라는 하나의 물질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사실 카메라는 바로 사진을 찍고 있던 남자들의 눈이다. 그녀는 카메라가 자신의 온몸을 훑는 것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을까?


아주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가장 큰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사람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보통 ‘측근들’이라거나 ‘친구’라는 폴더 안에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인의 사진을 ‘수집’(스크랩)해서 ‘공개(전시)’하고 있었다. 그 폴더 안에 담긴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상관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긁어다가 또 다른 타인들에게 보여주고(전시)있는 것이었다. 고인맥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이런 행위는 쉽게 이해가 간다.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고, 한눈에 보기에도 유니크한 타인의 인물 사진을 스크랩하고 전시함으로써 나 또한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을-


사람 수집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소’도 수집한다. 여행을 가면 그 장소를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기 보다 ‘사진’으로 찍어서 카메라 안에 가둬두기 바쁘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음을 누군가에게 ‘증명’하고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의 ‘추억’을 위해서도 열심히 찍어두어야 한다. 먼 훗날 그 사진을 열어보면 더욱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이 된다. 빛바래지는 사진과 함께 기억조차 사진과 함께 조작되는 것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스마트폰 카메라는 물론 디지털 카메라로 이리저리 찍어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리뿐만이 아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심지어 극장에서도(!) 카메라 셔터 불빛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반면 카메라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리에서 건물을 담고자 하는 낯선 타인의 사진에 내가 찬조 출연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을 일일이 피하기엔, 카메라가 ‘너무’ 많다.


이런 카메라들은 좀 더 낯선 것 이국적인 것, 사람들이 잘 찍지 않는 풍경을 담아냄으로써 타인과 나의 남다른 시선을 뽐내보고자 좀 더 다른 풍경 속으로 잠입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서양인들이 담아내는 동양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카메라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중간계급 이상의 사람들이 담아내는 도시 빈민가 사람들의 모습 등등-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 서울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출사를 간다고 하고, 서울의 뒷골목, 달동네, 빈민가를 향한다. 카메라로 그들의 삶을 담는다(아니 훔쳐낸다). 그리고 만족해한다. ‘잘 찍은 사진 한 장’ ‘예술처럼 보이는 멋진 사진 한 장’에 도시 뒷골목, 달동네 사람들의 삶은 쉽게 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이미 찍힌 사진으로 빈민가 사람들의 삶을 봄으로써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삶의 고통이 희석되는 것이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사진들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온다. 현실이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한번은 희석된 가짜 현실- 때문에 그 고통을 같이 나누기보다는 한번 봄으로써 소비해 버리고 마는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만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이, ‘카메라’가 갖는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사진은 역사를 생략해버린다'거나 '사진 때문에 이 세계는 벽 없는 미술관 또는 백화점이 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통해 손택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현실을 구매하거나 구경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한다. '사진의 미학적 경향(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켜 버린다. 카메라는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라는 손택의 지적은 우리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혹은 그렇게 멀리서 찾아 볼 필요도 없이 서울 뒷골목의) 빈민가 꼬마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나의 카메라에 담는 것이 과연 온당한 태도인가 생각해보게끔 한다.


사진은 실제를 기록한다는, 그래서 조작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심어준다. 하지만 '의도되지' 않은 사진이 과연 존재할까? 프레임 안에 어떤 모습을 담고자 할 때 이미 카메라를 든 사람의 의도는 ‘렌즈’를 통해 투영된다. 이런 모습은 담고 싶고, 저런 모습은 삭제해 버리고 싶고. 이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싶고, 혹은 그 반대로 존경할만한 인물처럼 보이게 찍고 싶고 등등. 사진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확보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반전 의식을 고취시켰던 베트남 전쟁의 참사 사진은 훌륭한 기록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지만 한국 전쟁의 기록 사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 전쟁은 ‘공산주의’와 ‘정의’의 싸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진은 있는 그대로 찍힌 것이기 때문에 진실할 것이라고 믿는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이미 사진은 렌즈를 통해 한번 희석된 ‘가짜’ 진실이다.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1993)’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아프리카의 참상을 알린 보도 사진으로 전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을 불러오기도 했다. 실제로 카터는 퓰리처상 수상 후 3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Kevin Carter, '수단의 굶주린 소녀'. 1993


카터의 이 사진이 과연 윤리적으로 온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994년에는 이 사진 한 장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러한 사진이 넘치고 넘치는 요즘에도 과연 그러할까?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굶주린 아이들 사진은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찍혀서 전 세계에서 소비된다. 우리는 이런 사진을 보면서 그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아닌 현실, 이국적이면서도 아련한 하나의 ‘이미지’로 무심하게 소비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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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 위대한 작가들은 어떻게 삶의 혼돈을 정리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붙잡았을까?
바바라 애버크롬비 지음, 박아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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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새로 나온 듯하다. 책상 앞에 두고 글이 막히거나 슬럼프에 빠지거나 용기를 잃어버렸을 때 펼쳐 읽으면 무척 큰 힘이 된다. 글쓰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 아니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어떤 페이지를 열어보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쟁이들의 성경이라고까지 하면 너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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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막 펭귄클래식 124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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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따뜻하고 쓰디쓴 커피 한 잔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이런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책 한 권을 들고 방구석 침대에 누워서 단 번에 읽어내려 간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도 없으리라.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 : Le Desert de l'amour (1925)>은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랑의 사막>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한 여자. 영화로든 문학작품으로든 이런 소재의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부자(父子)라는 말만으로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구체적인 작품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 또한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쉰두 살의 쿠레주 박사와 열일곱의 레몽 쿠레주는 부자지간으로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같은 인물임은 서로 알지 못한다. 이 두 남자의 뜨거운 욕망의 시선을 받는 여자는 스물일곱의 마리아 크로스. 안타깝게도(?) 그녀는 어떤 유부남의 정부(情婦)이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될까.

이 작품은 페이지 페이지마다(아니 문장 문장마다?) 사랑이라든지 욕망, 인간의 고통과 갈등, 번민에 대한 탁월한 시선에 놀라 감탄했다. <사랑의 사막>에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다른 남자의 정부를 사랑하는 늙은 유부남도 아니고, 연상의 여자를 욕망하는 열일곱 소년도 아니고, 그런 이들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 스물일곱 여자도 아닌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쿠레주 박사가, 때로는 레몽이, 또 때로는 마리아 그녀가 되어 있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작품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만들 의도를 가진 적이 없다 해도, 우리 운명을 가로질렀다가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모든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우리 속에 만들어낸다. (68쪽)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이 구절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 쿠레주 부자가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 마리아는 그들에 의해 빚어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둘이 사랑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무척이나 모순된다. 아버지 쿠레주에게 마리아는 성녀 그 자체다. 순결하고 고귀하며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존재. 반면 아들 레몽에게 마리아 그녀는 정열에 가득한, 때로는 음탕하기 그지없는 여자. 한 여자에게서 어떻게 그들은 이토록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마리아가 생각하는 그 두 남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마리아에게 쿠레주는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자와 같은 인물로 고결하고 품위 있는 존재다. 너무나 고결해서 지루하기까지한 사람이랄까. 또한 마리아에게 소년 레몽은 젊고 순수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은 물론 자신의 타락한 영혼까지 어쩐지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 그런 존재다. 자신이 혹시 유혹이라도 한다면 그 순수한 존재를 망칠 것만 같아, 죄를 지을 듯하여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그저 가슴으로만 애태우는 존재. 하지만 마리아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그 두 남자의 실체 또한 그러할까?

늙은 쿠레주나 젊은 쿠레주가 ‘마리아’의 실체 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 혹은 이미지를 사랑한 것처럼 마리아 역시 두 부자의 진정한 면모를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비단 마리아와 쿠레주 두 부자뿐만이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욕망’하지만 그 실체를 직시하는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매혹시키는 이미지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지만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임을 깨닫지 못(126쪽)‘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인간들이 모두 그러하지 않을까?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랑했던 대상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뒤늦게 깨달은 후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경험은 누구나 다 있었으리라.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이해시킬 수도, 혹은 보여줄 수도 없으며 자기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그저 자신이 가진 환상 혹은 이미지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진짜 그 대상을 알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타인과 자기의 진정한 소통이란 애초에 아무리 사랑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의 사막>은 보여준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환상일 뿐이라는, 그렇기에 거기에는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사막’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막’이 아닌, 결코 마르지 않는 샘, 우물과 같은 그런 사랑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욕망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그 욕망을 충족해야만 한다. 사랑에서 욕망의 채움이란 곧 함께 있는 것,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두 육체의 결합. 만지고 쓰다듬고 느끼고 등등이리라. 이런 궁극적인 욕망이 채워진다면 그 다음은? 계속해서 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지속될까? 그러나 인간의 간사한 마음은 욕망한 것을 소유하게 되면 어느덧 그 가치를 잊기 마련이다. ‘더 이상 욕망도 없이 지겨운 습관만이(189쪽)’ 남을 뿐이다. 결국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는 대상만이 지속적으로 목마른,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상태를 지속하게 한다. 때문에 결국 인간의 사랑이란 모리아크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들 사이에는, 어떤 사랑도 채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할지도(169쪽)’ 모르며 그렇기에 처음부터 완전하게 실현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상태의 계속됨만이 아닐까.

<사랑의 사막>을 읽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쿠레주 박사처럼 자신의 지나간 사랑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그 사람의 실체를 사랑했기 보다는 환상, 내가 만들어낸 허상을 사랑했던 적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했다던 그 존재들은 과연 내 실체를 사랑했을까? 아니, 내 실체를 알기는 했을까? 그들이 ‘빚은’ 혹은 ‘발견한(아니면 발견했다고 착각한)’ 나란 사람의 이미지는 과연 어떤 것들일까? 마리아를 사랑하는 자기를 보며 쿠레주 박사는 자신이 항상 동일한 사랑의 방식, 즉 사랑하는 대상에 가닿지 못하는 사랑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그의 사랑을 대하는 기본 태도이다. 마리아를 통해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레몽 또한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아마도 일생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지으리라.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랑의 사막>은 두 남자와 한 여인의 사랑이라는 어쩌면 한없이 진부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이토록 읽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꼭 사랑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자기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문까지 던진다. 인간이란 어쩌면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섬에 고립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각자 그 섬에 닿으려고 아무리 노력하지만 결국 닿지 못하는... 섬과 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이 존재하는.... 그럼에도 그 사막을 건너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들... 쿠레주 부자(父子)와 마리아 크로스. 그리고 현재의 당신과 나. 모두가 그렇다.

“사랑에 빠지면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면 난 화가 나요.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지요. 오늘은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변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내게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언젠가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 될 거니까. 사랑하는 것은 끔찍하게도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요.”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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