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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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작품을 좋아해도 헤밍웨이 그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작품만 알았을 때 더 좋은 작가에 속했다. 물론 이제 와서 인간 헤밍웨이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어쩌면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아니며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본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곁에 두고 오래 보더라도 때로는 그 사람의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글로 멀찍이서 만난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욱이 그는 동시대인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최근에 헤밍웨이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를 인간적으로 전보다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 이런 면이 있었으니까 그가 그런 소설들, 그러니까 <노인과 바다>라든지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같은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책 한 권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잘 알다시피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어찌나 기뻤던지, 나오자마자 주문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어떤 면에서는 헤밍웨이 글을 무척 좋아했다. 소설이 아닌 그가 언론인으로써 쓴 글들을 볼 수 있다는 데 어찌 서둘러 읽지 않았으랴.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단지 그의 글을 좋아할 뿐이라고 말해왔으면서도 사실은 인간 헤밍웨이의 어떤 면은 좋아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글은 단문으로 깔끔하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모두 한다. 그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그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얻은 아주 좋은 글쓰기 습관임을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그러니 그가 쓴 기사들은 더더욱 깔끔하면서도 정확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글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위트 넘치고, 소박한 문장에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 어떤 대상에는 한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은 절대로 질척거리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니, 하, 대단하다.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겉보기에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글은 매력이 그리 크지 않다. 문장만 미문이라고 그 글이 정녕 아름다울까? 거기에 제대로 된 생각이 담겨 있을 때 글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자 헤밍웨이가 쓴 글들이 바로 그랬다. 신변잡기나 당시 사회를 가볍게 다룬 기사 속에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보는 그의 통찰력은 빛난다. 헤밍웨이가 신참 기자 시절에 쓴 ‘시장님은 왜 경기를 안 보고 유권자들만 챙기나’라는 글에서는 복싱 경기장에 굳이 찾아와서 유권자 관리에만 힘쓰고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장을 풍자한다. 그런데 이 풍자는 저속하지 않다. 유쾌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글을 읽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시장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유력 정치가)의 판에 박힌, 진정성이 결여된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가식적인 정치인을 비꼬는 글을 시작으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불평등과 부조리함에 분노했으며 무엇보다 파시즘과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 경종을 울리는 글을 많이 썼다. 아마도 그가 20대에 해외 특파원 자격으로 유럽의 전쟁과 사회상을 보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그리스-터키전 등등 전쟁의 현장에 직접 머문 적이 많아서 그랬는지 그는 전쟁을 그 무엇보다 혐오했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찍은 전쟁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글과 사진은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프다. 전쟁미치광이들이 부디 이런 글과 사진을 보고 뭐라도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하긴 그런 사진이나 글을 보고 뭔가를 느낄 줄 아는 이들이라면 전쟁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파시즘을 경고한 글들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무솔리니에 대한 글이었다. 뒷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무솔리니가 일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을 때, 헤밍웨이는 기자로서 그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그 탁월한 통찰력으로 눈앞의 인물이 갈등을 끝낼 인물이 아니라 또 다른 전생을 불러올 수 있는 인물임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무솔리니가 얼마나 한심하고 허풍쟁이인지를 글로서 낱낱이 까발린다.


무솔리니는 유럽 최고의 허풍쟁이다. 무솔리니가 내일 아침에 당장 나를 끌어내 총살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허풍쟁이라고 부를 것이다. 총살하겠다는 것 자체가 허풍일 테니. (.....) 자신의 변변찮은 생각을 현학적인 단어로 치장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연구해보자. 일대일 결투를 선호하는 그의 성향을 분석해보자. 진짜 용감한 남자라면 굳이 일대일 결투에 나설 이유가 없다. 겁쟁이들이나 끊임없이 일대일 결투를 벌이며 자신이 용감하다고 믿으려 드는 것뿐이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와 흰색 각반도 살펴보라. 아무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서라고 해도 검은 셔츠에다 흰색 각반을 받쳐 입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다. (‘유럽 최대의 허풍쟁이, 무솔리니’, 112~113쪽)


무솔리니의 아들들은 공중에서 전투를 한다. 거기엔 머리 위에서 총을 겨누는 적군이 없다. 하지만 가난한 이탈리아의 아들들은 땅에서 싸우는 보병이다.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아들은 언제나 보병인 것처럼 말이다. 이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왜 그러한지 깨닫게 되기를. (‘아프리카에는 독수리가 난다’, 207쪽)



헤밍웨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 솔직하고도 사실적인 글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글로 풀어낼 줄 알아야 하는데 한평생을 바쳐도 둘 중 하나를 제대로 배울까 말까 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헤밍웨이는 인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낸 드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헤밍웨이의 기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주제는 ‘무엇이 공정한가’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의식이 없는 이들은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는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썼다. 그러므로 그가 쓴 글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읽는 이들이 여러 번 곱씹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맞서 진실을 고발하고자 했으며, 전쟁의 참상을  전함으로써 인간이 또다시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글을 썼다. 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서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또는 실제 삶에서) 매우 마초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찌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가 이러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도저히 싫어할 수만은 없어진다.


마지막 장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를 통해 헤밍웨이가 청년에게 해준 말들을 읽다 보면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선생님 같은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어쩐지 늘그막의 수염이 덥수룩한 곰 같은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슬며시 웃음을 짓게 되기도 한다. 그가 그 청년에게 하는 말은 거의가 ‘진실’할 것이었다. ‘진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글을 쓸 것’ 헤밍웨이는 아마도 그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문학 작품은 물론 그의 이 짧은 저널들도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 :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가짜 글을 지어낼 수밖에 없어. 가짜로 지어낸 글을 몇 번 쓰다 보면 더 이상 양심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 양심을 제외하고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을 딱 하나만 더 꼽으라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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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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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산책을 즐기던 버지니아 울프의 짧은 글 6편. 처음엔 평범한가 싶었는데 토머스 칼라일의 집을 돌아보면서 칼라일 부부의 생활 현장을 ‘노동과 수고와 끝나지 않은 싸움의 현장’이라고 명명하는 부분에서부터 감탄했다. 일상처럼 이뤄지는 산책에서도 명민한 울프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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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플로야 을유세계문학전집 91
샬럿 대커 지음, 박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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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욕망에 충실하다. 주인공 빅토리아 또한 예외는 아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여성의 미덕은 ‘순결, 경건, 순종, 가정’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를 배경으로 ‘빅토리아’라는 자기 욕망에 완전 충실한 캐릭터를 창조한 샬럿 대커는 꽤 혁명적 작가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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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모잠비크 꼬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이는 아직 글을 몰라서 자신의 조그마한 손을 그려 보냈다. 그 자그마한 손그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흐뭇하면서도 묘한 감동에 차올랐다. 작년에 받아본 사진에서는 아기 티가 나는 정말 어린 꼬마였는데 어제 새로 받은 사진에서는 조금 자란, 소녀 티가 나기 시작한 어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 받은 사진은 냉장고에 붙여놨다. 모잠비크에 사는 내 딸. '만주아마오.' 잘 자라거라!

이영학 사건('어금니 아빠'라고 부르지만 나는 왠지 이 말을 쓰기 싫다)- 이 사건이 이 사회에 던져준(또는 줄) 폐해는 심각할 것 같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안그래도 척박한 이 땅의 기부문화를 단번에 꽁꽁 얼어붙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가 사람들의 선의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유용한 정황은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믿고 기부할 곳이 없다며 '기부' 자체에 회의를 품고 그런 모든 단체를 의심하는 형국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이영학 사건 이전에도 국내 기부 단체에서 모금한 돈을 유용했던 전례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기부한 돈이 다른 곳에 쓰일까 봐 기부 행위 자체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할까? 좀더 꼼꼼히 알아보고 현명하게 기부할 방법은 없을까?

나 또한 오래 전에 이런 고민을 하다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 본부를 둔, 비종교적인 어떤 단체를 선택했다. 게다가 직접 한 아이에게 후원을 하는 형식을 선택해 좀더 책임감을 갖고 꾸준히, 정기적으로 기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제3세계에 사는 여자 어린이를 중심으로 1:1 후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소녀에서 그 다음 또 다른 한 소녀. 이렇게 조금씩 넓혀나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내가 백수로 꽤 오랜 기간 지내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했을 때 정기적 후원이 조금 버거워졌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후원을 잠시 중단해도 되겠느냐며 문의를 했다.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다시, 꼭 다시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때 기분은 좀 처참했다. 그때 정기적으로 후원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영 착잡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수를 벗어나고 사정이 나아지면서 후원을 다시 시작하며 만난 인연이 바로 어제 편지를 받은 모잠비크 소녀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설명이 필요없어진 책. 아주 오래 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울었다. 감동적이라거나 슬퍼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한없는 무력감이 느껴져서 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다. 책을 덮고나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무력감만이 느껴졌다. 어떤 책에서 사회 구성원이 심하게 무력감을 느끼는 사회는 이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사회라고 했던 구절이 생각났다. 정말 어쩌면 이 지구는 우주상에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지 이미 오래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배고픔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게 대부분 저 멀리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어린이들이라는 것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가끔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을지도 모른다. "식품이 남아 돌아서, 썩어 버린다는데, 그걸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보내주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도 왜 저렇게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이런 생각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지금 세계의 절반 인구가 굶어죽는 현실, 그것도 어린이나 여성과 같이 약한 존재들이 더욱 그런 이 현실에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국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굶어죽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그들에게 굶어 죽는 아이들은 유엔에서나 신경 쓸 문제라고 치부된다.) 종족, 종교 갈등 등 권력을 잡기 위한 수많은 내전, 전쟁, 사막화를 불러일으키는 환경파괴 등 약한 사람들이 굶어죽게 만드는 원인은 결국 '강자'들이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데만 급급해서 그런 현실은 계속 외면한다. 더욱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조금 똑똑한 지도자가 나와 그들 나라의 자주권, 독립권을 외치며 개혁을 실시하려고 하면 미국이나 다국적 기업 등이 경제적 압박을 가하거나 암살 등을 통해 그런 씨앗 자체를 뿌리채 뽑아버린다. 계속해서 그러니 세계는 점점 몇몇 강대국의 손에 놀아나는, 그들의 배만 채우는 그런 구조가 고착화 된다. '신 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이 책을 읽을 무렵, 이미 한 아이를 후원하던 참이었다. Niger의 소녀였다. 굶어 죽는 아이들을 도울 길을 생각하다 그 방법을 실천하게 되면서 알게 된 첫 번째 아이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은 지역과 아이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역은 상관없이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체크했던 기억이 난다. 이 세상은 여자 아이들이 살아남기에 더(특히나 그런 지역에서는) 힘든 곳이니까. 그리하여 내가 처음으로 만난 아이가 그 아이였다. 그애의 편지와 사진이 배달되어 왔고 그 편지를 통해 그애가 사는 나라가 Niger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있는지 몰랐다. 나이지리아를 잘못 표기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런 나라가 있더라.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나라는 세계 최하위 빈국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세계 2위인 그런 나라였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CD 한 장, 책 한 권 또는 장난감 하나 한 달에 한 개 정도 덜 사는 돈이면 아프리카의 어떤 한 아이가 한 달 동안 먹고 배우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별 생각없이 돈을 보냈는데, 나에겐 그냥 책 한 권 안 사면 그만인 그 돈이 그 아이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또 마음 한구석이 싸해져 왔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상은 불공평할까? 이런 생각들.

내가 보낸 돈으로 학교를 갈 수도 있구나, 관념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아이들에게 배움은 어쩌면 정말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고픔 그 자체, 생존 그 자체와 싸우기. 그 하나만으로도 벅찬 삶이구나 싶고. 학교에서 배운다 한들 정말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정말 벅찬 그런 곳에서 '배운'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그런 회의감도 들고. 어떤 한 아이를 몇 년 동안 후원해서 학교를 보내기보다는 더 많은 아이들의 '배고픔' 자체를 해결해주는 게 더 좋은 일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은 참 쉽다. 지은이가 자기 아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문제' 자체가 골치 아픈 문제이긴 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 '문제'들을 직면할 수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계속 굶주려야만 하는지, 그리고 정말 희망은 없는 것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일찍이 정희진 선생님은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이라 했고, 이 책을 읽으면 갑갑한 현실에 나처럼 잠시 무기력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더욱이 이영학 사건으로 기부자체에 회의감을 갖는 '기부 포비아' 현상까지 일고 있는 요즈음,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기부 포비아'라는 말이 어쩌면 이 세계의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는 쉬운 변명은 아닐까,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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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학 사건 터지기 전에 결손아동을 위한 기부금으로 호의호식한 국내 단체가 적발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언젠가 이런 유사한 사건이 또 일어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기부단체들의 기부금 관리 방식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17-10-17 13:37   좋아요 0 | URL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정치인들이 과연 기부금 관리 방식 개선에 나설지 의문이지만 ㅎㅎ 제도적으로 투명한 관리를 제어하는 기능은 꼭 마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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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에세이집으로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머물던 몇 년 동안의 기록이 담겨있다. 헤밍웨이는 1921년부터 26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면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그는 젊지만 가난했고 미래는 어쨌든 불투명했다. 헤밍웨이는 자기 글에 대한 확신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이 훗날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던 파리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등 그가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경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물론 그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존과의 일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헤밍웨이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사진도 실려 있는데 이런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받은 것은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자기 자신을 다독였는지, 그리고 꾸준히 치열하게 글을 쓰며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헤밍웨이를 인간적으로 크게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한 태도만큼은 존경스럽다. 마음에 드는 글을 쓴 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맛있는 빵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상으로 주는 모습에서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헤밍웨이는 매일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 후에는 그 글에 대해 잊기 위해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었다. 쓰고 읽고 걷고 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사랑하고…. 파리에서 그가 보낸 시절을 요약한다면 이런 단어들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비록 항상 허기를 느낄 만큼 가난했지만 이 에세이 속에서 헤밍웨이와 그의 첫 아내 해들리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돈에 쪼들리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그런 삶.

이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머물던 예술가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도 주어진다. 비록 헤밍웨이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그들의 삶이라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다. 또한 헤밍웨이가 읽은 책과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나는 맨스필드 단편의 읽으면서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왜 그녀의 단편이 그토록 높게 평가받는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녀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을 읽으면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파리로 오기 전 토론토에서 나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대단히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실력을 갖춘 노련한 외과의처럼 간결하고 명쾌하게 글을 쓰는 체호프와 비교하면 그녀는 억지로 머리를 짜내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겉늙은 여류 작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는 알코올을 뺀 맥주와 같았기에 차라리 맹물을 마시는 편이 나았다. 반면에 체호프는 투명하다는 점만 빼면 물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 중에는 언론 기사문 같은 글도 더러 있었지만, 놀랄 만큼 뛰어난 작품도 여럿 있었다. (128쪽)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헤밍웨이가 기록한 피츠제럴드나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자면 이 부부는 상대하기 참 난감한 사람들 같다. 만약 내 주변에 피츠제럴드나 젤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친구로 곁에 두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고 칭얼대는 느낌이랄까.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함께 하면서 서로를 갉아먹은 이야기는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이 작품도 읽는 내내 지루했다.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극찬한 피츠제럴드 작품이라는데 어쩐지 우정 때문에 마지못해 치켜세워줬던 건 아닐까 싶기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헤밍웨이는 작가적으로 자기보다는 일찌감치 인정받고 성공해있던 피츠제럴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조금은 시기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 사람(헤밍웨이)은 상당히 마초적인 남자이고 한 사람(피츠제럴드)은 여성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니 이 두 사람이 친구로 함께 지내기란 애당초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이런 징징대는(?) 성격을 못 견뎌한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징징대는 모습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헤밍웨이 자신은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으나 ‘젤다의 고민’이라는 에피소드는 결정적으로 그런 의혹을 더욱 크게 한다.



자넨 내가 젤다 외에 다른 어떤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나.”
“아니, 난 몰랐는걸.”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닐세, 자넨 내게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네.”
“내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바로 그 문제야.”
“좋아, 뭔지는 모르지만 말해봐.”
“젤다는 내가 신체 구조상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서 그게 바로 그녀가 근본적으로 내게 불만을 느끼는 이유라고 하더군. 그녀는 그게 크기의 문제라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뒤로는 결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어서 난 진실을 꼭 알아야겠어.” (207쪽)


그렇다! ‘젤다의 고민’이란 바로 피츠제럴드의 성기가 작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때문에 고민이라며 헤밍웨이에게 상담을 해오고 헤밍웨이는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피츠제럴드의 ‘그것’을 직접 보고는 결코 작지 않다고 다독여준다. 그래도 불안해하는 피츠제럴드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들 크기는 다 그렇다며 안심시켜 주지만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못미더워하고 그런 그를 결국 루브르 박물관까지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 피츠제럴드를 안심시켜 주지만…. 결국 이 에피소드를 통해 헤밍웨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피츠제럴드의 그것은 작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가 평생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해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저 이 이야기도 한 번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글쎄….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남성스럽지 못한 면모(여자처럼 늘 징징대더니 알고 보니 ‘그것’도 작은 인간!)를 들춰냄으로써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쩐지 헤밍웨이도 참 치졸하게 느껴지고,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여과 없이 만천하에 공개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자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해들리와 파리에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냈어도 결국 다른 여자에게 빠져버리는 헤밍웨이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담담하고 고통스럽지만 무척이나 낭만적이게 그때의 일을 회고한다. 그러나 글쎄, 결국 아내를 곁에 두고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놀아난 이야기일 뿐이다(문제의 이 여자는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사람은 자기변명도 참 멋지게 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리는 아름답고 인간들은 찌질하달까? 그러나 결국 그 ‘파리’를 멋들어지고 생동감 있게 하는 요소 중에 이런 찌질한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으니 인생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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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그렇고 예술가들도 모여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카페에 모인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습니다. ^^

잠자냥 2017-10-16 14:05   좋아요 0 | URL
ㅎㅎ 어디 작가와 예술가만 그렇겠습니까. ㅎㅎ 인간이 모두 그렇지요. ㅎㅎㅎ

케이 2017-10-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가 남성성에 집착하고 여러번 언급한 것이야말로 그가 여자들에게 시원찮다는 증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헤밍웨이는 인간적으론 정말 정안가는 인물이예요..; 10년 전에 읽은거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밀란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헤밍웨이를 대놓고 비꼬는데, 그 부분 읽고 굉장히 통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잠자냥 2017-10-17 11:56   좋아요 1 | URL
ㅎㅎ 사냥이나 복싱 같은 스포츠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재미난 사람일 거 같아요. 그의 마초성 때문에 저도 헤밍웨이는 그닥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의외로 괜찮은 면을 발견했답니다. 그 이야기는 곧 다른 리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