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거울을 보는 일은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이다. 단편 소설을 읽는 일은 때때로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여기서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사람이 아닌, 한 사회이리라. 어떤 사회의 단면을 보기 위해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참고하는 일은 가장 손쉬운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본 한 사회의 모습은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때로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품집인 <웃는 남자>, 그 안에 실린 단편 하나하나를 읽노라니, 거울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2000년대의 한국 그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또는 이미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는 심정.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살아낸, 살아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쉽지 않은 인생을 엿본다. 그런데 그 풍경은 하나같이 행복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인다. 평화롭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 하나씩은 잃어버렸고(‘웃는 남자’, ‘존엄의 탄생’, ‘최미진은 어디로’, ‘여름방학’, ‘개의 밤’ 등)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거나(‘웃는 남자’, ‘이혼’), 간직했었다고 느꼈던 것이 실은 순전히 자신만의 착각이었음을(‘평범해진 처제’)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모두 한없이 쓸쓸하고 초라하다.

<웃는 남자>에 실린 일곱 작품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 보이는 이들이 있는가? 그래서 어쩌면 ‘웃는 남자’라는 이 단편 모음집의 제목은 매우 역설적이다. 어쩌면 <웃는 남자>는 이토록 힘든 오늘날의 한국에서 인간으로서 살아남으려면 고통 속에서도 웃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읽은 김숨의 ‘이혼’부터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이혼을 앞둔 ‘민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읽어갈수록 답답하다. 가부장의 폭력으로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엄마와 그런 엄마를 대신해 이혼 서류까지 만들어왔던 민정은 이제 자신의 이혼을 앞두고 있다. 대물림 되는 ‘이혼’의 풍경 속에서 지금 이 땅의 수많은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을 가정폭력과 해체의 문제를 세밀하게 다룬다. 민정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이미 한 번 가정이 망가진 경험을 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정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삶의 풍경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 켜진 어느 한 집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조금 유쾌한 작품인가 싶은 기대로 읽어나간 김언수의 ‘존엄의 탄생’에서는 매우 익숙한 망원동 골목 풍경이 펼쳐진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캣맘,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백수나 마찬가지인 박진수, 그리고 그들 주변을 어슬렁대면서 진수의 신경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떠돌이 개. 진수는 어쩌면 이 사회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쓸모없는 잉여인간이며, 그 잉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왠지 떠돌이 개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개에게 발길질을 한다. 어떤 장면 장면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 뒷맛은 역시 쓰다.

이기호의 ‘최미진은 어디로’도 이와 비슷하다. 블랙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어 키득키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중고 책을 팔러 나온 사람과 자기 책을 형편없는 가격에 판매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일종의 호기심 때문에 직접 거래에 나선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과연 어떤 사연이 펼쳐질까, 싶었는데 그 끝은 조금 허무하고 마찬가지로 씁쓸하다. ‘존엄의 탄생’의 ‘진수’나 ‘최미진은 어디로’의 작가 ‘나’ 모두 어찌 보면 이 사회에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다. 경제적 가치로만 따진다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아마 가장 밑바닥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이들이기에 이 사회에서 얼마나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기 힘들었을지 이 짧은 단편을 보면서도 고스란히 그 괴로움이 전해온다. 그렇기에 ‘최미진은 어디로’의 ‘나’는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려고’(245쪽) 하다가 그런 자기 자신을 깨닫고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건 ‘나’가 작가라는 신분이기에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여느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욕 당할까봐 상대에게 먼저 모욕을 주는 행위를 오늘도 곳곳에서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지 않을까? 이렇듯, 이 두 작품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버린, 그 존엄을 잊어야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오히려 쉽사리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 사회의 풍경이 ‘웃프게’ 그려진다.

윤고은의 ‘평범해진 처제’에서는 젊은 세대의 사랑, 또는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그 어떤 애매한 관계’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페이스북, SNS, 자전거, 종주 기념 도장 등 오늘날 이 사회의 익숙한 풍경 속에 정기적으로 야동을 보고 리뷰를 쓰는 작가라는 조금은 재미난 설정이 등장한다. 가볍고도 능청스러운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 결말 또한 어쩐지 쓸쓸하다. 한때는, 연인 사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색했어도, 그럼에도 자신을 좋아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상의 진실이 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이의 씁쓸하고도 비루한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머쓱한, 오해와 오독이 빚어낸 관계의 풍경이 펼쳐진다.

황정은의 ‘웃는 남자’는 나머지 작품들이 가진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조금 더 진폭을 넓혀서 한국 현대 사회가 겪어왔던 굵직한 사건들을 과하지 않게 담아냈다. 연인을 잃어버린 d의 일상을 통해 서울 주변부 반지하방, 음악조차 마음대로 들을 수 없는 고시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세운상가 풍경이 펼쳐진다. d와 그가 만나는,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들 사연으로 한국전쟁, 산업화, 독재와 민주화 운동, 세월호 사건을 지나 이른바 ‘헬조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d는 세운상가의 ‘여소녀’로부터 우연히 구입한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잃어버렸던 생(生)의 의지를 조금씩 되찾는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81쪽)는 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d가 언젠가는 ‘웃을’ 수 있을까? 소음이 아닌 소리의 세상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그다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건 사실, 명예퇴직 이후 새로운 노년의 삶을 모색하는 ‘이병자’의 이야기를 그린 ‘여름방학’이나, 비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더욱 ‘속물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김’의 이야기를 담은 ‘개의 밤’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계의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풍경은 아닐까.

고백하건데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현대 문학을 잘 읽지 않았다. 대학 때까지는 한국 문학을 꽤 많이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더는 읽지 않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너무나도 생생한 그 풍경들이, 익히 봐온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들을 마주한다는 게 때로는 신물이 났던 것 같다. 좀 더 넓은 세상,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이 펼쳐지는 낯선 나라의 문학이 더 좋았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나’의 모습은 요즘 어떤지 거울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이런 ‘단편 모음집’은 꽤 유용하다. <웃는 남자>는 오늘날 한국 현실을 생생하게 거울에 비춰준다. 그것이 비록 ‘헬조선’- 환멸로부터 탈출 할 곳 없는 지옥도 같은 풍경일지라도 그것을 직시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어쩌면 소음이 아닌 소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런 가능성이라도 찾을 수 있다고 일곱 개의 단편은 저마다 아우성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산책에서 출간되는 시리즈 가운데 가장 아끼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제임스 설터(James Salter)’를 꼽을 것 같다. 최근 그의 단편 모음집 <아메리칸 급행열차 Dusk and Other Stories>가 출간되었다. 2010년 <어젯밤>을 시작으로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 텀을 두고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나온 <그때 그곳에서>, <사냥꾼들>은 사두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 <어젯밤>, <가벼운 나날>, <스포츠와 여가>, <올 댓 이즈> 는 모두 읽어봤다.


며칠 전 <아메리칸 급행열차> 출간 소식을 듣고는 탄식했다. 아니, 왜 하필이면 내가 1월 할당량 책을 모두 주문한 다음에 나왔는가!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두고는 2월에 사자,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결국 설터의 손짓에 굴복하고 말았다. 알라딘 굿즈고 뭐고 이것저것 따질 틈 없이 이 책을 주문해서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을 몇 권 읽어 본 결과 설터는, ‘장편’보다는 ‘단편’에 탁월하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실린 첫 번째 작품 ‘탕헤르 해변에서’를 읽노라니, 그래, 역시 설터는 단편이야!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어젯밤 Last Night>을 읽었을 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책꽂이에서 <어젯밤>을 오랜만에 꺼내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뒤표지에는 수잔 손택의 평이 실려 있다. ‘제임스 설터는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들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다.’- 소설가 하성란은 ‘제임스 설터는 너무 늦게 우리 독자에게 왔다. 왜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에 가려져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말한다. 정말 그렇다. 나는 이토록 강렬하면서도 완벽한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애초에 알라딘에서 소개 글을 읽다가 이 문장 하나에 그냥 꽂혔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젯밤>을 사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녀는 열다섯이었고 그는 매일 아침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타의 눈’, 42쪽)

<어젯밤>에는 제임스 설터가 그 스스로 자신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작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단편 10개가 실려 있다. 그가 자신하듯 한 작품 한 작품 모두 대단하다. 나는 어떤 작품을 읽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읽는 일은 거의 없는데 설터의 작품은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그래서 놀랍다. 하나의 단편이 끝나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 읽고 싶어진다. 혹시 내가 놓친 부분, 또는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읽는다. 아니,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 여운이 몹시도 강렬하기에 나도 모르게 읽고 또 읽는다.

한편의 긴 시를 읽는 느낌이다. 화려한 문장을 자랑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레이먼드 카버처럼 단문 위주다. 별다른 꾸밈도 수식도 없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런데도 강렬하게 아름답다. 이 책의 옮긴이는 설터의 작품을 읽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번역을 하고 있었노라고 고백을 했다. 옮긴이의 이 고백에 진심으로 공감이 갔다. 번역본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설터가 쓴 원문 그대로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원래 문장은 어떨까 무척 궁금해진다.

10개의 단편 속 인물들은 모두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 삶이 어느 순간 비틀어진다.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순간, 어쩔 수 없이 예전의 삶과는 갑자기 달라지는 삶. 언제 그렇게 되었을까? 설터는 그 순간을 놀랍도록 포착한다. 설터의 작품 속 인물들은 욕망하고, 사랑하고, 배신하고, 유혹한다. 어그러진 인간관계의 파편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래서 읽고 있노라면 쓰다. 상실감, 공허함, 슬픔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런데 매우 아름답고 강렬하다. 삶과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돋보인다.

그 시절, <어젯밤>을 읽고 이런 작품을, 이런 작가를 지금에야 만나다니!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때 만난 게 차라리 다행스럽다. 설터의 작품은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후에 읽었을 때 더 다가오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10대에 만나고 20대에 그의 작품을 만났다면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그때 몰랐어’(‘방콕’, 163쪽) 이런 문장을 내가 10대, 20대에 봤어도 절절하게 공감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때문에 좀 더 나이 들어서 설터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또 어떨까 기대 되기도 한다.

어느덧 그때로부터 8년이 흘러 <아메리칸 급행열차>가 다시 내 머리맡에 놓여졌다. 이제 겨우 한 작품 읽었을 뿐이지만, 8년 전 제임스 설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강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쓰디 쓴 이야기들……. 평소 소설 읽기를 무척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제임스 설터 의 작품에서 한동안 빠져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어젯밤>도 <아메리칸 급행열차>도 쓰고 싶은 욕망을 활활 불러일으킬 것이다.


아내가 좋아할 물건을 찾아내기는 쉬웠다. 우린 취향이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취향이 다른 사람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난 항상 취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건 아마도 옷을 입는 방식이나 또는, 같은 이유로, 벗는 방식으로 전해지는데,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습되고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포기’, 99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18-01-1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설터, 완전 좋아요!! 잠자냥 님의 이렇게 황홀한 리뷰를 읽었으니 <아멘리칸 급행열차>를 빨리 만나야겠네요^^

잠자냥 2018-01-19 11:5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죠!! 저도 <어젯밤> 리뷰 다른 분들이 쓰신 것 읽어보다가 가장 첫 페이지에 있는 자목련 님의 리뷰를 좀 전에 읽고 그래, 그래, 맞아, 맞아.... ㅎㅎ 하고 왔답니다. ㅎㅎ <아메리카 급행열차> 급행으로 주문하셔서, 천천히~음미하며 읽으세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8-01-1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중의 작가란 표현이 명불허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표지는 정말 뚝심있네요.

잠자냥 2018-01-19 17:18   좋아요 0 | URL
표지는 모아놓고 보니 또 그럭저럭 통일감은 있네요. 하하하하. -_-;;; 즐겁게 읽으시길!
 
여자들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우체국>처럼 ‘헨리 치나스키’가 주인공이고 <여자들>에서 그는 ‘우체국’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우체국>의 치나스키가 30대라면 <여자들>의 치나스키는 50을 훌쩍 넘었고, 작가로서 어느 정도 밥벌이를 하고 살 정도가 되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도 상당하고 시를 쓰는 치나스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낭독회를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치나스키는 집세도 내고 좋아하는 술도 마음껏 사마시면서 살 수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정말 야하다.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매 페이지마다 ‘섹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이쯤 되니 ‘섹스’라는 단어나 여자 및 남자 성기를 일컫는 그 단어가 ‘안녕’이라는 단어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부코스키의 <여자들>을 읽노라니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어떤 여자들은 정말 ‘작가’라면 환장을 못하는 것인가? <여자들>의 서문에 부코스키는 이 작품은 허구이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글쎄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냥 부코스키의 분신인 치나스키가 여자들을 만나고 그녀들과 끊임없이 사랑(???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섹스)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수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모두 치나스키를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몇 년 이상씩 거쳐 간다. 치나스키가 묘사하는 여자들은 조금씩 달라 보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똑같다. 바로 그녀들이 치나스키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여자들은 모두 치나스키 작품을 좋아하고, 치나스키 글에 반했고, 그래서 치나스키에게 편지를 쓰거나 집으로 찾아오거나 낭독회에 왔다가 치나스키에게 번호를 주고 자기 집을 알려준다.

대부분 치나스키가 ‘작가’라는 사실에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를(정확히는 ‘몸을) 던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의 글을 좋아한다.’ ‘당신 작품이 마음에 든다.’라더니 악수를 하듯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듯 섹스를 하고 치나스키 곁에 머물다 떠나간다. 치나스키는 부코스키와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렇게 치나스키(부코스키)를 거쳐 간 여자들 중에는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여자들도 있다.

어떤 여자들은 부코스키 책을 훔쳐가 경매에 올려놓기도 하고, 어떤 여자들은 부코스키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경매에 내놔 돈을 벌기도 했고, 어떤 여자는 부코스키 두상을 본떠서 여기저기 경매에 올려놔 돈을 벌기도 했고, 또 어떤 여자는 부코스키와의 관계를 글로 써 돈을 벌기도 했단다. 이런 걸 노리고(?) 접근한 여자들도 있을 테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여자들은 그렇게 ‘작가’라는 직업에 약한 것일까? 부코스키 뿐만이 아니라 조르주 심농을 보라. 그는 뭐 만 명 이상의 여자와 잠을 잤다지 않나? 심농이 만약 작가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많은 여자를 이른바 ‘낚을’ 수 있었을까?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여자들은 예술가에게 약한 것 같다. 록 스타에겐 여자들이 줄줄 따르지, 피카소 같은 화가에게도 여자가 많았지, 아! 홍상수 영화만 보더라도 ‘영화감독’이라니까 불나방처럼 몸을 던지는 여자들이 숱하게 나온다.

모든 여자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여자들은 ‘예술가’가 좋은 걸까? 아니면 그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의 한 부분이 되고 싶나?(실제로 부코스키 작품에 보면 몇몇 여자들은 ‘나중에 나와의 이런 이야기를 쓸 것이냐?’라거나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뭐 물론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면 그냥 ‘유명인’이 좋은 걸까? 명품을 좋아하는 심리처럼 사람도 일단 유명해야하고, 유명한 사람을 만나야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진심으로 치나스키(부코스키)를 좋아한 여자들도 많았겠지만 처음에는 그의 글 때문에 치나스키(부코스키)에게 반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이 꼭 그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거짓말로 꾸며댈 수 있는 것도 글이다(물론 부코스키의 글은 너무할 정도로 솔직하다). 글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글이 곧 사람’이 되고마는 그 사고의 과정이 여전히 궁금하다. 만일 부코스키가 계속 우체국에서 우편배달부'로만' 일했다면 이렇게까지 여자를 쉽게 얻을 수 있지는 않았을 텐데(물론 이 또한 나의 편견일 수 있다)…. 난 아무리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해도 그 글이 좋을 뿐이지, 글쓴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드물던데.... 부코스키의 '여자들'은 정말 신기하다.




언제나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낭독회를 했다고...ㅋㅋㅋㅋ Henry Charles Bukowski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8-01-1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돌아이 작가 찰스 부카우스키,
정말 못 말리는 작가였네요.

열책에서는 어케 표지를 색깔만 바꾸어서리
세 권을 날로 잡숫는지 대단한 신공이었습니다.

호밀빵도 사두기만 하고 못 읽고 있네요.
빨랑 읽어야겠습니다.

잠자냥 2018-01-17 17: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슈퍼돌아이‘에 웃었습니다. ㅋㅋㅋㅋㅋ 적절한 비유입니다. 호밀빵 재밌어요! ㅋㅋ 요즘 이책저책 읽느라 정신 없으신 것 같던데 ㅎㅎ 조만간 호밀빵도 추가요!!

Falstaff 2018-01-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코스키, 구라일 확률 90%에 만원 겁니다.
ㅋㅋㅋㅋ 저렇게 술 마시고 그리 많은 여자와 밤을 지냈지요. 그냥 잠만 잔 거예요!!!
그리고 심농의 최하 만 명의 여자와? 흐흐흐... 1/10 정도도 믿지 않습니다. 남자새끼들 그런 방면에 구라 때리는 거, 못말려요. ㅎㅎㅎ 만 명의 여자들과 단 하루 씩 자더라도 하루도 쉬지 않고, 부모님 제사도 안 모시고 꼬박 27년이 넘게 걸리는데요, 그렇게 해대다가는 제 명에 못 죽습니다. ㅋㅋㅋ
˝작가˝라는 타이틀에 매혹을 느끼고 그게 사랑인줄 오해하는 거 아닐까 합니다.
잘 생긴 남자에 홀랑 넘어가는 거나, 돈 많은 놈한테 넘어가는 거나 뭐 비스무리...

잠자냥 2018-01-18 18:00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 같은데 .... 그럼 역시 대단한 작가들이네요 ㅋㅋㅋㅋ 왕구라쟁이들 ㅋㅋㅋㅋㅋㅋㅋㅋ
 
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심심한 두부 맛의 책. 간장을 찾았지만 끝까지 찾을 수 없었다.... 사람과 공간, 공간과 추억, 그 기억에 관한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부터는 다이어리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12월 알라딘 굿즈 중 스누피 다이어리가 심히 눈에 밟히더라. 결국 그 다이어리 때문에 책을 샀다. 쓰지 않으려고 했던 다이어리면서도 빨강 파랑 모두 예뻐서 둘 다 갖겠다고 책을 최소 10만원은 넘게 샀다. 물론 한 권은 누군가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서재의 달인에 선정되는 바람에 다이어리가 또 생겼다. 그 다이어리도 곧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갈 예정이다.


내가 그토록 탐이 나서 결국 갖고 만 빨간 다이어리에는 아직 이렇다 할, 어떤 글자가 적히지 않았다. 1월에 태어난 친구의 생일,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Nothing But Thieves의 내한 공연 정도가 메모되었을 뿐이다. 아주 오래 전,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던 시절에는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새해 계획’ 같은 걸 쓰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이어리에 이런 것, 그러니까 ‘새해 계획’ 또는 ‘결심’ 따위를 쓰지 않는다. 그런 결심 같은 걸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적지도 않는 것이다. 문득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새해 결심이나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아, 그래도 올해는 ‘책을 굿즈 때문에 사지 않는다.’는 결심을 했으니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 들어 버린 것은 아니려나.

2018년 1월도 어느덧 보름이 지나갔다. 그런데 나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변화 없이 살아가고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새해라는 구분이 참 우습기도 하다. 시간은 연속으로 흐르는데 그걸 마치 선을 긋듯, 나누어서 여기서부터는 새해야, 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편리 아닌가.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가정을, 조직을, 사회를 리셋해서 다그쳐야 하는 계기가 필요한 건 아닐까. 그러니 모두가 ‘새해’라는 실체 없는 기준을 마련하고 ‘새해 결심’ ‘새해 계획’ ‘올해 목표’ 등을 세우고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여전히 게으름을 피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는 문득 이런 구절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불쌍한 인류를 괴롭혀온 개인적, 사회적 재앙을 줄줄이 몰고 다니는 환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각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러한 정신적 이상상태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에 거룩한 후광을 씌웠다.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9쪽)


 고대 로마시대의 노예상인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교육을 후원했습니다. 노예라는 인간상품 가운데 상대적으로 더 똑똑한 부류에게 의학, 철학, 그리스 문학, 음악, 과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을 받은 노예는 시장가치가 올라갔습니다. 요리 전문가가 된 노예는 의사, 철학자, 문학가가 된 노예보다 값이 더 비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인문학 분야의 교수에게 지급하는 보수보다 부유한 자본가가 자신의 수석 요리사에게 지급하는 보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수가 학술원 회원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노예상인들과 달리 오늘날의 자본가들은 오로지 지적 능력의 자격을 갖추려는 의도에서만 교육의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합니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164쪽)


예전에 읽었던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마찬가지로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1930년대에 쓰인 저자의 에세이들을 묶어 놓은 것이라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러셀이 살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끊임없이 회유하게 된다.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현대 사회의 획일성/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유/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등의 에세이들로 묶여져 있다. 전체 에세이들은 각각의 주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큰 줄기는 결국, 인간이 ‘일’이라는 ‘강제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원래 갖고 있던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함을 촉구한다.

적당한 정도의 노동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야하며, 부(富)가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나눠 쓸 수 있고- 그래서 많이 남는 여가 시간에는 ‘책을 쓰고’, ‘철학을 하고’,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되게 다듬고’, ‘예술적인 창작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잃어버린 인간 본성을 찾아야 한다고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이다.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 선전하는 일을 담당하는 계층의 태도는 세계의 지배 계층들이 소위 ‘정직한 무산자’들에게 늘 설교해 온 것과 거의 똑같다. 근면하라, 절주하라,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일하려는 의욕을 가져라. 심지어는 당국에 순종하라는 것까지.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맹목적으로 부지런하지는 않은가? 과연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 근면함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부지런함은 개인의 미덕이자 사회의 미덕이기에 모두가 자발적으로 따른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처해있다. 오히려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보면서 게으르다고 질책하고 비난한다. 이 사회는 대체 뭘 위한 성장인지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피곤하다. 모두가 돈벌이에 조금만 덜 부지런하고 좀 더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덜 각박해지지 않을까.

새해 결심, 계획 목표 따위가 적히지 않은 다이어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런 거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없을수록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게으름 피우는 자의 변명이 결코, 아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1-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획 목표를 많이 적어두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이 느껴져요. 괜히 내가 목표대로 잘하고 있는지 걱정하기도 하고... 작심삼일이 될까 봐 스스로를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죠. 이것도 나름 스트레스가 되더군요. ^^;;

잠자냥 2018-01-16 12: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ㅎㅎ 자기가 자기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죠. ㅎㅎㅎ 뚜렷한 목표가 많으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틀림없이 부정적인 면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케이 2018-01-17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래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계획 같은 건 안세우고 열심히 하루하루 살다보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되었네요 . ㅎㅎㅎ
계획을 안세워서 그런걸까요?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아서 여전히 계획 같은 건 안세우지만요.
(북플 디자인이 깔끔해져서 보기 좋습니다!)

잠자냥 2018-01-17 16:56   좋아요 0 | URL
ㅎㅎ 뭐 꼭 뭔가가 되어야만 잘 사는 인생인가요! ㅎㅎ 저도 회사원일뿐입니다! ㅎㅎㅎ
(디자인은 저도 보기 좋네요. ㅋㅋㅋㅋ)